이에 당시 내각장관으로서 정국을 책임졌던 양정화의 역할은 후임자 선출을 둘러싼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누구보다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황제. 더욱이 '兄終弟及'을 적용하는 모순적 논리에 더해, 시조인 정덕이 아닌 가정화가 장지황제의 후계자를 계승한다는 양정화파의 '考孝宗' 논리도 있었다. 주로 흥헌황제의 외아들.
양정화 일파의 정치적 성격
그러나 친문에서는 양정화 내각을 지지했거나 지지했던 사람들을 지방관으로 전보시키는 등 강력히 대응하였다.32) 이후.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닙니다. 양정화 내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가족제도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점차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 원년 12월 가정제가 흥헌왕후의 능을 흥헌왕릉으로 이장하자고 주장하자 다시 불이 붙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양정화의 '考孝宗說'파를 공개적이고 이론적으로 반박한 장진사(巡檢 房濬)와 가문제 입장을 지지한 巡檢 房濬, 그리고 정방사장霍韜이다. 대부분이 하급 공무원 출신이라는 점이다. 구정권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 결과 기존 양정화 내각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 특히 정양 교체 시기의 정치세력은 쇠퇴하였다.
楊廷和의 사직과 興獻王의 立廟 문제 (가정3년~4년)
결국 가문은 흥헌왕의 종묘를 버리지 않고 따로 세우는 것으로 수정되었으나56) 여전히 그들의 반대와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다.席書의 중심기관인 흥헌왕의 후원 등 왕실의 의례에 관한 분쟁을 확인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58) 그 결과 가문은 흥헌왕의 참호와 참호를 종식시킴으로써 흥헌왕이 즉위하고 3년여에 걸쳐 황제의 뜻이 이루어졌다. 이에 정지제는 서원의 인사를 개편하여 계악과 장총을 한림원학사로, 방헌부를 侍讀학사로 임명하여 조수로 배치하였다. 하려는 가족제도의 의도를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해 예부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는데,72) 가지제제는 직접 사당 옆에 서서 아침저녁으로 직접 참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의례단체의 대표인 예부상세를 비롯해 군정수석인 광세, 6관 사이의 관, 13문인 조상 등 100여 명이 의례 이후부터 이렇게 주장했다. 이미 완료되었으므로 가족 의식을 변경하고 제공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73) 결국 이 논의는 흥헌제가 의회를 위한 별도의 거처를 마련하여 사당으로 봉헌하되 이를 '세장'이라 부르자는 가제안이 채택되는 것으로 끝났다.
대례의 관련 처벌자 처리와 인적 개편(가정5년~7년)
이로써 즉위 직후부터 제기됐던 제사에 관한 모든 논란은 제사 의도대로 일단락됐다. 대부분이 거세되고 새로운 세력으로 대체되면서 가족제도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현재의. 당시 가문제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의례파가 제기한 흥헌왕의 사상은 유교적 전통에 기초한 정통론과 종법체계, 그리고 ''조상'에 대한 논리적 해석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였다. 제도”와 홍우제의 선조의 진술이다. 제안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考興獻王』을 고수하는 가문제도와 의례집단의 주장은 대황제와 소황제를 구별하는 정통 씨족법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인간의 정서를 중시하며 효도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혈통을 인정하는 논리이다. 이는 과도기와 '가부장적 통치' 기간에 양정화 등 관료들이 추구한 의례적 정통성을 준수하여 홍치연시대 내각제를 복원하려는 현실적 정치지향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가지제제는 내각을 비롯한 의례파와 그 지원, 특히 한림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즉위 초기의 대례논란이 종식되었고, 이후 흥헌왕 왕계의 확립과 왕계의 독립을 통해 사실상 단절되었던 가계를 선진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는 명분에 기초한 의례질서와 그에 따른 조정의 운영체계, 그리고 정치적 정당성, 황제 중심의 관료제, 법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90). 90) 황훈성은 가문 9년에 추진된 유교개혁을 군주와 귀족의 갈등으로 규정하였고, 문화와 이념적으로는 군주중심의 '정부'와 권력주의였다. 귀족의. '타오'.
맺음말
결국 정·애 교체기 양정화·대상이 주도했던 기존 정치세력은 가문 3년에 대부분 사퇴했다. 이에 따르면 가문 3년 2월 양정화의 사직과 다음 장수들의 사임으로 '考孝宗說'의 지지기반이 구심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흥헌왕 3, 4년에는 왕실의례에 관한 논란이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양정화 내각을 중심으로 한 대례론적 논쟁은 양정화 내각의 사퇴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교의 왕실정치를 이상화하는 재직자와 비관료를 포함한 양반층의 정치 이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嘉靖时期“大礼”研究动态的再审视及出现的一些问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