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마거릿 생어는 미국의 저명한 산아제한 운동가로서 1922년 일본과 중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였다. 생어의 산아제한 담론은 사회주의ㆍ성과학ㆍ모성주의ㆍ신맬서스주의ㆍ우생학과 복잡하 게 얽혀있었는데, 그녀가 일본과 중국을 방문했던 시점은 우생학 및 록펠러재단을 비롯한 자본가 그룹과의 연대를 꾀하던 시점이었다. 생 어의 일본 방문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이루어 졌지만, ‘大正의 黑船’사태라고 불릴 정도로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109) 메이 지 이후 일본은 부국강병을 위한 인구증강 정책을 실시하며 낙태죄 처 벌을 강화하고 산파를 통한 생식통제를 강화하였는데, 이는 인구 증가 로 인한 식량부족 문제를 야기하며 1918년 쌀 소동으로 격화되었다.

쌀 소동은 일본에서 맬서스주의가 활발하게 논의될 수 있는 계기를 제 공했으며, 생어의 산아제한 담론은 일본의 인구과잉과 식량부족이라는

108) 일본의 경우 우생학적 계획은 1940년 「國民優生法」과 1948년 「優生保護法

」의 제정으로 현실화되었다(후지메 유키 지음, 앞의 책, pp.323-360). 중국의 경우는 1945년 國民政府의 「民族保育政策綱領案」의 제정으로 우생학적 생식 통제가 이루어졌다(兪蓮實, 「20世紀40年代國民政府的生育政策」, 江南社會歷 史評論 5, 2013), pp.202-227).

109) 石井幸夫, 앞의 논문, p.71.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 줄 하나의 방책으로 환영을 받았다.

중국의 경우는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과 군벌할거로 인한 잦 은 전쟁 속에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빈곤’의 문제를 해결 해줄 방책으로 맬서스주의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므로 마거릿 생어는 중국 방문시 맬서스주의자로 불리며, 산아제한도 경제적 모순의 해결 책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마거릿 생어가 일본 방문시 산아제한 의 여성해방론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중국에서는 우생학적 측면을 강 조하면서 산아제한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결국 일본과 중국에 서 산아제한 담론의 수용은 인구문제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성’문제 를 공론화 시키는 데도 일정한 작용을 하였지만, ‘자발적 모성’과 ‘우 생학’을 중심으로 모성의 사회적 역할과 민족개량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지적 토론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생어의 방문을 계기로 일본과 중국의 산아제한 운동도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 日本産兒調節硏究會ㆍ오사카 産兒 調節聯合會ㆍ産兒制限普及會 등의 단체가 만들어지고,

小家族ㆍ産

兒調節評論과 같은 잡지도 창간되었다. 1920년대 산아제한 단체들은 산아제한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 획득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 으나, 활동 기간은 대체로 5년 이내로 매우 짧았다. 1929년 이후 일본 은 쇼와 공황의 여파 속에서 국가적으로 산아제한에 대한 관심이 고조 되면서, 산아제한 운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30년대 설립된 日本産兒制限協會ㆍ日本産兒調節聯盟ㆍ無産者産兒制限同盟과 같은 단 체들은 피임 기술의 보급을 도모하는 한편, 국가적 산아제한 정책의 추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산아 제한과 같은 ‘수’적 통제보다는 대외침략을 통한 ‘이민’으로 인구문제 의 해결책을 전환하면서 산아제한 운동도 위축되어간다. 더욱이 1937 년 중ㆍ일전쟁 이후

「國民優生法」이 제정되어 낙태와 피임이 전면적으

로 금지되면서 산아제한 단체와 산아제한 상담소의 활동도 중지되었 다.

일본 산아제한 운동은 낙태법 개정운동과 긴밀히 연계되었으며, 노

동자의 생활개선을 위한 사회주의 운동과도 결부되어 있었다. 산아제 한은 엄밀한 의미에서 낙태를 허용하지 않지만 시바하라 우라코와 마 지마 간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산아제한 상담소에서 비공식적 중절수술 을 상당수 행하였다. 또한 아베 이소오는 1932년 7월

堕胎法改正期成

聯盟을 결성하여, 낙태를 합법화하기 위한 청원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 다. 물론 산아제한 운동에서 낙태를 허용하는 것을 둘러싸고 이시모토 시즈에가 격렬하게 반대하며 노선갈등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낙태는 피임의 보완책으로 인정되었다. 일본의 산아제한 운동은 야마모토 센 지ㆍ아베 이소오와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맬서스주의적이고 자산 계급 위주의 산아제한 운동을 반대하면서, 노동운동 차원에서 산아제 한을 법적으로 제도화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물론 당시 노동운동 단체들이 산아제한을 ‘개인적인 편의상의 문제’라고 치부하며 무산계 급 해방운동에서 배제시키려 하였지만, 산아제한은 무산자의 건강문제 와 경제문제의 해결책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에 서 오사카 産兒調節聯合會ㆍ産兒制限普及會ㆍ無産者産兒制限同盟과 같 은 사회주의적 산아제한 단체가 많이 만들어 진 것은 그만큼 산아제한 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가 긴밀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중국의 산아제한 운동은 마거릿 생어의 방문을 계기로 조직화되고 대중화되었다. 1920년대에는

產兒制限研究會ㆍ中華節育研究社ㆍ生產

限制診查所 등의 단체가 결성되고, 산아제한을 전문적으로 선전하는

現代婦女 잡지가 만들어졌다. 이들 단체들은 산아제한의 이론적 연구 와 언론매체를 통한 대중적 계몽에 치중하였으나, 대부분 1년 만에 해 체되었다. 이후 1930년대 北平婦嬰保健會와 上海節育研究社 두 단체 를 중심으로 피임 의료의 보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人口副刊

과 같은 전문적인 매체도 만들어졌다. 그 결과 1935년 中華醫學會에 서 산아제한을 공공위생의 주요 업무로 인정하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피임 서비스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1937년 중ㆍ일 전쟁이 본 격화되면서 인적자원과 피임 도구의 부족으로 산아제한 단체와 진료소 들이 활동을 중단하고, 산아제한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중국 산아제한 운동의 특징은 일본과 달리 피임과 낙태를 엄격히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1930년대 대표적 산아제한 단체인 北平婦嬰保 健會는 ‘산아제한=피임=과학적=인도적’에 반대되는 ‘낙태=야만적=비인 도적’이라는 담론 질서를 확립하여 피임과 낙태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중국의 산아제한 단체들은 낙태를 행하는 야만적ㆍ비위생적 ‘산파’에 대항하여, 과학적이고 인도적인 피임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아제 한 진료소의 이미지를 차별화 시키며, 자신들의 활동에 정당성과 권위 를 부여하였다. 또한 중국에서는 일본의 아베 이소오를 비롯하여 사회 주의적 산아제한에 관한 글들이 많이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주의적 산아제한 운동이 발전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의 사회주의적 여 성해방 운동이 성숙하지 않았던 것과도 연관이 있지만, 중국의 사회주 의자들이 근본적으로 빈곤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분배문제에서 찾고 산 아제한을 노동자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는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다 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산아제한 단체들이 하층민에 대 한 계몽이나 무상 피임 의료 서비스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했다는 점에 서, 중산계급 중심의 사회운동이라는 계급성은 탈피했다고 볼 수 있 다.

중국과 일본의 산아제한에 대한 논의는 ‘자발적 모성’과 ‘우생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생어의 산아제한 담론의 핵심이기도 한 ‘자발적 모성’은 과도한 출산으로 부터 모체를 보호하고 여성의 경제적 진출을 통한 사회적 지위 향상이라는 목표 이외에도, 여성의 ‘성애’의 긍정과

‘성적 자기결정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의 경우 ‘자발적 모성’을 여성을 ‘생식의 기계’로부터 해방시켜 건강한 ‘모 성’을 통해 질적으로 우수한 ‘종’을 확보해야 한다는 제한적 의미로 해 석하였다. 결국 ‘자발적 모성’은 산아제한을 통해 획득된 건강과 여유 를 우수한 자녀를 낳아 훌륭하게 교육하는데 투자해야 한다는 국가주 의적 모성주의를 훈육시키는 규율로 작용하였다. 또한 ‘자발적 모성’은 우생학에 근거해 ‘종의 어머니’로서 우수한 자녀를 낳는 여성의 사회

적ㆍ민족적 역할을 강조했기 때문에, 생산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하층 여성과 유전적 결함을 가진 여성,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난 여성은 생 식에서 배제시키는 이중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자발적 모성은 중산계급 여성의 계급적 이익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발적 모성은 민족의 어머니다운 여성의 창출이라는 근대적 모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며, 여성의 생식을 국가의 이익 과 자산계급의 계급의 이익에 종속시켰다. 이 속에서 페미니즘이 지향 했던 전통적 젠더 질서의 전복과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전재로 한 근대적 섹슈얼리티의 창출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우생학은 일본과 중국의 산아제한 운동에서 중요한 담론 전략이었 다. 중ㆍ일 양국에서 산아제한은 우생학과 결부되어 일종의 ‘종족개량’

이라는 민족주주의적 목표를 지향하였는데, 이는 개인의 생식의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기 보다는 국가의 생식통제와 인구관리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우생학은 국가의 생식통제에 대한

‘과학’적 기준을 제공하기 보다는 개인의 출산통제에 대한 ‘자발성’과 사회적 ‘책임’을 이끌어 내는 수사 전략으로 활용되었다. 즉 우생학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혹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개인의 생식과 양육에 대한 책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국가의 생식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 하였다. 그 결과 개인의 생식은 근대적 국가 건설에 종속되어, 국민국 가의 근대적 가족의 재편과 ‘부모성’의 창출이라는 기획에 포섭되어버 리는 역사적 현상이 발생하였다.

<參考文獻目錄>

<국문>

김미란, 「1920년대 초 중국 부녀잡지(婦女雜誌)의 산아제한담론 분석: 서구 인 구담론의 ‘문명론’적 수용방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중심으로」 (중국현대문 학 72, 2015)

김정화, 「노동계급 여성에게 “출산 조절”의 권력을!: 마거릿 생어의 여성 반란자

에 나타난 성적 급진주의 (역사와 경계 92, 2014)

박민호, 「1920년대 초 부녀잡지(婦女雜誌)에 나타난 중국의 여성 담론과 사회

Dokumen terka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