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상업적 환경에서 기업가와의 경계 짓기
4.2. 비밀주의와 특허로부터 데이터 공개와 논문 출판을
벤터는 상업적인 환경에서 흔히 맞닥뜨릴 수 있는 데이터 공개 제한, 특 허 문제, 논문 출판 연기 등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는 ‘기업가’의 횡포에 맞선, “살아남기 위한 투쟁(battle for survival)”, “상업적인 환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투쟁”으로 이러한 상황을 그려내면서 순수 과학자로서의 가치와 연구에 대한 자치권을 지켜내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벤터, 2009:
255). 그는 다른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공유주의’의 가치가 반드 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Lam, 2010).
앞 절에서 설명했듯 TIGR는 벤터의 개인 연구소였지만 HGS의 자금을 지원 받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유전체 염기 서열에 대한 분석 결과를 넘겨 주어야 했다. HGS는 이를 통해 특허를 출원하거나 신약 개발 등의 상업적 인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벤터는 TIGR를 “독립 비영리 연구소”라고 주 장했지만 TIGR와 HGS는 사실 연구소/회사의 운영뿐 아니라 돈과 지적 재 산권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묶여 있는 관계였다. 따라서 TIGR가 EST를 사 용하여 유전자를 발견하고, 논문에 데이터를 공개하기 전에 HGS가 얼마나 독점권을 가지느냐가 큰 문제가 되었다. HGS는 2년간 데이터에 대한 배타 적인 권리를 행사하고 싶어한 반면, 벤터는 국립보건원에서 정한 기준이 6 개월이라며 맞섰다. 결국 HGS가 6개월간 치료제로 만들 가능성이 있는 유 전자를 고르고, 고른 유전자에 대해서는 발표 시기를 6개월 더 늦출 수 있 으며, 특히 인슐린이나 EPO(erythropoietin)와 같이 생명공학의 대형 히트 상품이 될 만한 유전자가 있다면 HGS에서 제품을 제대로 개발할 수 있도 록 18개월을 더 주는 방안으로 합의하게 되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 분의 유전자는 TIGR에서 원할 때 자유롭게 공개할 수 있는 것이었다(벤터,
2009: 248-249).
그러나 HGS는 벤터의 뜻대로 TIGR에서 발견한 유전자를 모든 생명공학 회사와 제약 회사에 제공할 생각이 없었다. HGS는 비밀 협상을 통해 TIGR 가 발견하는 유전자 전부를 대상으로 한 선제 접근 정보권을 다시 거대 제 약 기업인 스미스클라인 비첨(SmithKline Beecham)사에게 팔아 넘겼다. 1 억 2500만 달러의 대형 독점 계약이었다. 이 때문에 데이터 공개를 두고 벤 터와 HGS/스미스 클라인 비첨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벤터, 2009:
255).
이제 스미스클라인 비첨과 HGS는 TIGR가 데이터를 공개할까봐 더욱 전전 긍긍했다. 우리의 … 발견이 쏟아질 때마다 긴장감은 높아만 갔다. 나는 인간 유전자 가운데 절반에 대해 18개월의 논문 발표 유예 기간을 준만큼 이번에 는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판단 착오였다. 염기서열을 찔끔찔끔 공개했다면 그들은 오히려 안심했을 것이다. 논문 한 편에 유전자 수천 개를 담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그들에게 악몽과 같았다. 우리 팀이 계속 EST 데이터를 분석하고 생물학과 의학에 적용하자 스미스클라인 비첨은 새 로운 협상안을 제시했다. 우리가 데이터를 발표하게 내버려 두면서도 경쟁사 가 그 데이터에 접근하지는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데이터를 논 문의 형태로 널리 공개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연구의 더 큰 목적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벤터, 2009: 271) (강조: 인용자)
이처럼 벤터는 연구 결과를 논문의 형태로 출판하여 모든 과학자들에게 공유하는 것이 연구의 가장 큰 목적이자 과학적인 가치의 핵심이라고 생각 하고 이를 지켜내는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냈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과학의 상징인 공유주의의 가치를 침해하고 위협하는 ‘기업가’와 이러한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여 과학적인 자치권을 보호하는 ‘과학자’의 구 도를 통해 경계 짓기를 시도한 것이다. 벤터는 계속해서 자신의 목표는 “연 구 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이며 HGS와 스미스클라인 비첨이 “다시는
데이터 발표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벤터, 2009: 274, 304).
“기업가 대 과학자의 구도”는 벤터가 HGS와의 사이가 악화되어 TIGR를 떠나 다른 기업인 퍼킨 엘머와 손을 잡고 셀레라 지노믹스를 새로 설립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려졌다. 퍼킨 엘머의 경영진에 맞서 인간 유전체 프로 젝트의 데이터를 공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학자로서의 모습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벤터의 모습은 “인류를 위한 위대한 공헌(something great for humanity)”으로 표현되었다.
화이트가 물었다. “게놈 해독과 내가 돈 버는 게 무슨 상관이지?” 나는 거기 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 역할은 염기서열 분석을 완료하고 데이터를 발표하는 일이라고도 말했다. 그러자 HGS의 악몽을 되 살리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당신이 내 돈으로 인간 게놈을 해독하고 그 걸 공짜로 나누어주겠다면, 돈을 만들 계획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소?”(벤 터, 2009: 344) (강조: 인용자)
[화이트]는 데이터를 발표하고 염기서열을 일반에 공개한다는 절대적 조건을 받아들였으면서도 틈만 나면 딴소리를 하려 들었다. 그는 유전체학의 낡은 사업 전략인 비밀과 특허를 여전히 추종했다(벤터, 2009: 375).
그는 자신의 레퍼토리를 자꾸만 끄집어냈다. “인간 게놈 염기서열을 공짜로 나누어주면서 어떻게 셀레라가 돈을 벌 수 있다는 건지 다시 한 번 설명해보 게.”(벤터, 2009: 376)
나는 나 자신과 우리 팀의 정직성을 지켜내기 위해 싸웠다. 인간 게놈을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벤터, 2009: 379). (강조: 인용자) 하지만 주가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자 화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셀레
라를 팔아 치우거나 간판을 내리겠다며 위협했다. … 인류를 위해 위대한 공헌을 하기로 다짐한 일은 까마득한 옛일처럼 여겨졌다(벤터, 2009: 385).
(강조: 인용자)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에서 유전체 염기 서열에 대한 “데이터 공개”는 매 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1996년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많은 연구 자들은 버뮤다에 모여 “버뮤다 원칙”이라는 안건에 합의했다. 이 안건은 염 기 서열 분석 결과를 즉시, 무료로 공개하는 공유주의의 원칙을 지키자는 것이었다.22) 버뮤다 원칙은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유산으로서 인간 유전체 에 대해 같은 비전을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벤터는 이미 TIGR의 소속으로 기업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이 원칙에 찬성했다. 그의 ‘공유주 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은 수사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닌 듯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시 상업적인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염기 서열을
“즉시 공개”하지는 않았으며, 공공 컨소시엄 연구자들은 벤터의 이러한 행 동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공공 컨소시엄 연구자들의 데이터는 즉시 모두에 게 공개가 되어 벤터 또한 이용할 수 있었지만 벤터 연구진의 데이터는 공 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직성과 데이터 공개에 대한 약속을 지켜내기 위 해 경영진들과 맞서 싸웠으며 인류를 위해 공헌하기 위해 연구했다는 구도 와 수사를 거듭 강조한 것은 이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의식하고 이에 대 해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자 했던 것이기도 했다.
데이터 공개에 대한 갈등의 중심에는 결국 유전자 염기서열의 특허 가능 성이라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생명공학 기업들은 염기 서열에 대한 특허를 초기에 취득하여 해당 특허를 독점하고 이에 대한 라이센스나 판매를 통해 단기간에 상업적인 이윤을 내는 전략을 취해왔다(Pisano,
22) 버뮤다 회의에서 과학자들이 합의한 내용은 1)1kb 이상의 염기 합성 결과를 (이상적으로 는 매일) 자동 공개할 것, 2) 주석이 달린 완성된 염기 서열을 즉시 제출할 것, 3) 모든 염기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공공 도메인에서는 사회에 대한 이익을 극대화하 기 위해 연구자와 개발자 모두를 위해 사용하도록 할 것 이었다(설스턴·페리, 2004: 218).
2006). HGS와 셀레라의 경영진 또한 마찬가지로 염기 서열에 대한 특허를 통해 수익을 얻고자 했다. 특허 출원에 대한 이들의 계획은 데이터 공개를 제한하고 논문 출판을 연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벤터와 계 속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벤터는 특허에 대해서도 기업가와 과학자, 혹은 특허 변호사와 과학자의 구도를 유지하며 자신은 특허를 원하지도, 상 업적 이익을 우선시하지도 않았다고 변호하며, 데이터 공개를 제한한 것은 기업가와 특허 변호사들이었다는 점을 드러내는데 주력했다.
벤터가 얽힌 가장 큰 특허 문제는 EST에 관한 것이었다.23) EST는 그가 국립보건원에 있을 때 개발한 것이었는데, 1991년 국립보건원의 기술이전국 책임자였던 리드 애들러(Reid Adler)는 벤터의 EST에 특허를 출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임스 왓슨을 비롯한 공공 컨소시엄 연구자들은 EST의 특허 출원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역시 공공 컨소시엄 연구자 중 한 명이었 던 존 설스턴도 특허란 발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발명이라 고 할 수 있으려면 세 가지 요건, 즉 새로운 것, 쓸모 있는 것, 쉽게 알아서 는 안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EST는 이 세 조건 중 어느 하 나에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애들러는 EST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면 서 EST에 대한 전적인 권리뿐만 아니라 EST가 포함되어 있는 유전자 전 부와 그 유전자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에 대해서도 권리를 주장했는데, 설 스턴은 이를 두고 “정신 나간 짓”이라고 표현했다(설스턴·페리, 2004: 136).
설스턴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들이 EST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특허 출 원에 반대했고, 국립보건원에서 추진한 이 일은 “벤터 특허”가 되어 벤터는 그의 표현대로 "연구 상업화의 상징이자 희생양이자 악당이 되어버렸다"(벤 터, 2009: 209).
그러나 벤터는 EST에 대한 특허를 추진한 것은 자신이 아닌 국립보건원 이었고, 자신은 EST에 대한 특허 출원을 계속해서 반대했다는 점을 언급했 으며 이를 거듭 강조하기까지 했다.
23) EST에 대한 설명은 각주 12를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