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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8❳ 사임당의 성장기 주요 가족사건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10년) 음력 10월 29일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서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사임당이 태어난 강 릉은 강원도 명주 지방에 있었던 삼한시대의 부족국가 예국의 수도로 오랜 역사를 통하여 빛나는 문화와 전통이 전해 내려오는 고장이다. 산수와 자연이 그림처럼 아 름답고 인심이 순후하며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문향의 고장이기도 하다.

사임당의 성장기에서 강릉의 자연환경과 그녀를 둘러싼 가정환경은 중요한 구성요 소이다. 사임당이 태어난 강릉의 북평촌은 집 뒤로 야트막한 산들이 휘돌아 감싸고 앞으로는 경포천이 흐르는 곳이다.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는 아직 고려시대의 생활 풍속이 남아있던 시대였던 까닭에 여성이 혼인 후에도 친정살이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사임당의 가계는 외조모 최씨, 어머니 이씨 그리고 사임당까지 3대가 친정살이를 하였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사임당은 학문이 깊은 외조부 이사온과 아버지 신명화의 사랑을 받으며

2)위의 내용은 손인수(1983). 신사임당의 생애와 교훈 오시림의(1993). 신사임당

유정은(2016).사임당평전

이은상(1994a).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이은상(1994b).사임당과 율곡

임해리(2016).사임당(2016

정옥자(2016).사임당전의 문헌들을 종합하여 재구성하였음.

깊은 학문적 소양을 쌓았고, 외조모 최씨와 어머니 이씨로부터는 올바른 부덕과 현 모로서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었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1476∼1522)는 평산 신씨로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18세 손이며, 영월군수를 지낸 신숙권의 아들로 자는 계흠, 호는 송정이다. 신명화 는 한양 출신으로 천성이 순박하고 강직하여, 어려서부터 성현들의 글을 읽고 선악 을 구별하여 스스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징계하는 지표로 삼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같이 수학한 동료들 사이에서도 지조가 굳은 인물로 평판이 자자하였다. 벼슬에는 일체 뜻이 없어 41세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다가 사임당이 13세 되던 해에 비로소 진사에 올랐으나, 진사에 오른 후에도 벼슬길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신명화는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이며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 신에게도 엄격한 인물이었다. 이와 같이 지조가 있으며 뜻이 곧은 성품을 지닌 신 명화의 성향은 딸인 사임당에게 그러한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고 딸의 성품에도 많 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머니 이씨 부인(1480~1569)의 본관은 용인이며 생원 이 사온의 무남독녀이다. 이사온이 당시 강릉사람으로 참판을 지낸 최웅현의 딸 최씨 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이씨 부인이다. 최웅현은 강릉의 12향현 중의 한 사람으로 중앙 정계의 관직을 고루 거치며 학문과 경륜을 펼친 대학자였다.

이러한 집안에서 무남독녀로 자라 사랑을 받으며 학문을 익힌 이씨 부인은 성품 이 천성적으로 깨끗하고 행동은 침착하였다. 율곡은 어린 시절 외조모인 이씨 부인 의 품에서 자랐으므로 그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씨의 성품이 온화 하고 유순하며 마음가짐이 순수하고 차분했다고 외조모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이씨 부인은 효행이 지극하였다. 어려서 외가인 강릉에서 살았으나 신명화와 혼인 한 후에는 서울로 가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친정어머니 최씨가 병환을 앓게 되자 모친을 간병하기 위해 강릉으로 돌아와 친정어머니를 극진하게 돌보아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한 효녀였다. 이씨 부인은 남편에 대한 정성 또한 극진하였다.

친정어머니 최씨 상을 당하여 남편 신명화가 장모의 상을 지내기 위해 강릉으로 내려오던 도중 심한 병환으로 앓아눕게 되자 이씨 부인이 달려가 정성으로 간병하 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이에 이씨 부인은 외증조부 최치운의 묘 앞에 제단을 쌓고 향을 피워 7일 동안 밤낮으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자신의 왼손 중지 두 마디를 잘라 피를 내어 간절히 기도한 정성 덕인 듯 며칠 후 남편 신명화는 사경을 헤매던 병석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율곡 이이는, 외조모인 이씨 부인이 사대부로 태어났으 면 국가의 큰 인물이 되었을 분이라며 마음으로 존경하고 받들었다 한다.

사임당의 지혜로움과 부덕은 이런 어머니 이씨 부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 모습 을 곁에서 보고 자라며 마음에 새긴 덕분이 아닌가 싶다. 사임당의 일생을 살펴보 면 아버지로부터 선비로서의 학식과 강직한 기질을, 어머니로부터는 따뜻하고 자애 로운 성품을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이씨 부인 외에 외 조부 이사온, 외조모 최씨도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있는 인물들로서 사임당

의 유년기에 좋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사임당은 나면서부터 출중하였다. 수려한 용모와 비단결 같은 성품을 갖추었으며 총기가 뛰어나 바느질과 자수, 글과 글씨, 학문과 그림에 이르기까지 부족함이 없었 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기록에 관해서는 따로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7세 때부터 스승의 가르침 없이 그림을 시작했다고 전하여 진다. 당시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 의 「몽유도원도」와 「적벽도」 등의 산수화를 교과서 삼아 그림공부에 열중했다 한다. 사임당은 붓놀림이 남달랐으며 특히 포도와 풀벌레를 그리는데 절묘한 솜씨 를 보였다.

조선 초기 산수화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안견은 세종대왕 당시 가장 뛰어 난 화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에도 그를 따르는 화가들이 많아 조선후기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안견의 화풍이 당시 산수화의 교과서 격이었으므로 그의 그림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신명화가 재능을 타고난 어린 딸을 위해 머나 먼 서울과 강릉 땅을 오고 가며 그림을 구해다 주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사임당이 나고 자란 오죽헌은 집안이 넓고 쾌적하여 갖가지 푸성귀가 자라고 앞 뜰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뒤뜰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었다. 사임당은 꽃을 좋아하여 꽃밭에서 살다시피 하며 꽃과 곤충 들을 관찰하며 즐겼다. 관찰한 사물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그리기를 즐겼는데, 흔하게 보이는 잡초 등 사임당의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던 생명들이었다.

사임당의 어릴 적 이름은 인선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 않다. 사임당은 어린 나이에 자신이 나아갈 바를 세우고 스스로 사임당이라고 호를 지었다. 여자에게는 이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던 조선 시대에 어린 여자아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 을 정해 뜻을 세우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조선시대 에 여성들은 덕망이 특출하거나 학문 또는 예술이 뛰어난 경우에만 당호를 가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고 심지어 왕비나 빈 조차도 이름이 없이 성으로만 불렸다. 그러한 시대에 어린 소녀가 스스로 자신의 당호를 지었다는 것은 사임당의 당찬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다 하겠다.

사임당이 스스로 지은 당호를 보면 자신의 인생 목표를 어디에 두고 삶을 바라보 았는지 엿볼 수 있다. 율곡의 「선비행장」에는 사임당의 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사임(師任)에서 사는 본받는다는 뜻이며, 임은 고대 중국 문왕의 어머니 태임 을 뜻하는 것이니, 이는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아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은 현명하고 엄격하며 지혜로움과 의로움, 자애로움을 갖춘 여성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태임은 동양에서 최초로 태교를 행한 인물이라 고 전해진다. 그런데,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으려 했다고 해서 사임당 이 마치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은 것처럼 해석하는 경우가 적 지 않았다. 하지만 태임은 훌륭한 어머니이기 이전에 군자의 풍모를 두루 갖춘 인 간상이었다. 사임당이 지향하고자 했던 것도 태임의 어머니로서의 모습보다는 군자

로서의 풍모였다. 사임당은 군자의 풍모를 갖춘 태임처럼 살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사임당 자신이 평생 군자의 덕목을 실천하면서 자녀들을 교육했던 것을 통해 짐작 할 수 있다.

열아홉 살에 이원수공과 혼인하기 전까지 사임당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외조부 와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경서를 읽고 학문을 닦으며, 그림을 그리는 등 예 술적 활동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당시 강릉 땅에서 유명한 화가인 안견의 그림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종이와 물감을 조달 하기에는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사임당을 위한 집안 어른들의 그 와 같은 아낌없는 뒷받침으로 사임당은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 던 것이다.

이은상(1994)은「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에서 “외조부 이사온의 학문과 어머니 이씨의 덕행, 아버지 신명화의 엄격한 훈계 밑에서 여자의 갖추어야 할 근본 교양 과 자품을 길러 장차 현부인이 될 기초를 마련했던 것을 더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가정교육이 차지하는 비 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면에서 사임당은 동 시대의 다른 여성들에 비해 남다른 혜택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총명함과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사람은 환경 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다. 만약 사임당이 가난하고 배움이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당장의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능 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인가는 장담할 수 없다. 선천적 능력도 중요하지 만 자라나는 환경과 교육의 방향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은 좌우된다. 사임당은 외조 부로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은 어머니 이씨 부인, 강직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꼿꼿한 선비인 아버지 신명화의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사임당의 어린 시절을 에워쌌던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지금 우리가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사임당이라는 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가능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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