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문화는 단순히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나 가치관, 사유체계 등을 규정하는 협의적 개념과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매개하는 유․무형의 광의적 개념으로서 국가간 협력이나 공동체를 구성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가간 통합이나 공동체를 구성 함에 있어서 문화적 요인은 부차적인 접근방법이 아니라 필수적인 접근방 법으로서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과 논의들은 이미 유럽 국가들의 공동체 구성과 통합과정에서 경험적으로 검증된 바 있 으며, 동북아 공동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특히 유산으로서의 문화공동체와 프로젝트로서의 문화공동체와 관련된 양 지역간 경험적 비교는 앞으로 동북아 공동체가 나 아갈 바를 제시해 줄 것이다.
현실적으로 <표 Ⅴ-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종교 와 장원, 민족국가의 형성 등 내적 교류작용과 국가간 경쟁, 십자군전쟁 등 외적 타자성의 인식을 통하여 서서히 공통의 문화와 표준을 형성해 나갈 무렵, 동북아는 중국 중심의 정치․문화적 질서와 편제 속에서 비교적 오 랜 기간 동안 느슨한 상호 작용과 교류관계를 형성하여 왔다. 근대화과정 속에서 유럽 국가들은 상호 교류와 대외 진출, 그리고 식민지 침략이라는 공통의 경험을 통해 하나의 중심적 사고와 공동운명체로서의 인식을 자각 하게 되었으나, 동북아 국가들의 경우 약화되는 중국의 영향력과 외세 침 입에 기인하여 보다 탈중국적이며 독자적인 지역 편제와 민족국가 만들기 에 치중하여 왔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는 서로 비슷한 규모의 국가들 사이 에서 상호 견제와 균형, 경쟁과 협력을 통해 공동의 가치관과 사고체계를 형성하였던 반면, 동북아의 역사와 문화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중심 이 되어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치열한 도전과 대립이 존재하여 왔다. 역 사와 문화유산으로서의 동북아 공동체가 유럽의 그것과 비교하여 차이점 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이것은 결국 보다 분산적이
며 파편화된 동북아 지역질서와 문화유산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표 Ⅴ-1> 유럽과 동북아의 문화공동체 비교
유럽 동북아
유산으로 서의 문화공동체
빈번한 상호 교류와 경쟁, 긴밀 한 연대성 확립
근대화과정의 공유: 견제와 균형 을 통한 경쟁과 협력
중심부와 주변부의 구심력 작용
중국 중심의 편제와 느슨한 연 대성 확립
근대화과정의 분산: 문화적 탈 중국화를 통한 도전과 대립 중심부와 주변부의 원심력 작용
프로젝트 로서의 문화공동체
경제정치통합의 가시화와 함께 문화통합을 위한 노력 병행 과거 문화유산의 현실적 계승과 통합적 발전 추진
프로젝트 추진의 체계적통합적 운영 노력
문화 교육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실천과 협력
경제 정치통합의 부진과 문화 통합을 위한 노력 미진 과거 문화유산에 따른 프로젝트 추진의 한계성 노정
프로젝트 추진의 갈등과 이견, 분산적 노력
문화교육 프로젝트 추진을 위한 공동의 논의 미약
사실상 과거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유산에 입각하여 보다 공고한 통합의 길을 걷고 있는 유럽 공동체의 현황과 새로운 단계적 접근과 협력을 시작 하고자 하는 동북아 공동체 사이에는 많은 이질적 차이점과 지역․국가에 따른 특수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흔히 유럽의 신화와 역사적 전통, 문화 유산 등은 견제와 균형 속에서 경쟁과 협력을 중심으로 하나의 유럽을 포 괄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 근대화과정 속에서 빈번한 교류와 협력의 경 험은 유럽적 정체성을 인식케 하여 오늘날 유럽통합의 디딤돌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반면 동북아의 한국, 중국, 일본 등은 과 거 역사 속에서 지역적 대국인 중국 중심의 위계질서와 문화적 변이를 경 험함으로써 오히려 탈중심적 저항과 이탈을 형성케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 적 문화와 유산은 결과적으로 서구 열강과의 접변과 근대화과정 속에서 탈 중국적 사고의 흐름에 기초하여 근대민족국가의 수립을 향한 흐름을 창출 해냈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 유산으로서의 동북아는 중국 중심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며, 동북아문화공동체를 향한 노력이 자칫 중국 중심적 문화질 서의 복구처럼 비추어질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동북아 문 화유산의 총량에 있어서 중국이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고 할지라도, 그 유산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이 주도하는 동북아문화 공동체는 프로젝트로서의 문화공동체로서 차별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프로젝트로서의 통합과정 또한 유럽과 동북아 사이의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당초 유럽의 지 역통합 역시 그 출발과정에서는 경제통합과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는 방향 으로 통합과정이 진행되었으나, 점진적으로 통합이 진행됨에 따라 유럽적 연대감과 정체성을 형성하여 항구적인 통합을 이룩하기 위한 문화적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기능적 통합이나 구조적 결합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통합의 안정성을 이룩하기 위해 유럽의 사회․문화적 동질성과 공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다 양한 프로그램의 추진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유럽통합의 미래 를 이끌어나갈 후속 세대들에 대한 공동체 교육을 실시하는 수준까지 이르 게 되었다. 반면 동북아의 경우 아직 공동체 형성의 초기과정에서 통합의
정치․경제적 실익을 강조하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문화공
동체 수립의 필요성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나 실행이 빈약한 실정이다. 유 럽의 공동체 형성과정이 정치․경제적 통합 노력과 더불어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적 접근방법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동북아 공동체의 논 의에서는 아직도 정치․경제 중심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단순히 협의적 차원 에서의 문화 교류만이 논의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이러한 차이점은 유럽과 동북아가 경험한 과거의 역사․문화와 지정학적 상황이 차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상 호 경쟁과 교류를 통해 공통의 역사를 공유하여 온 유럽의 역사와 압도적 우위에 있던 중국을 중심으로 위계적 질서를 유지하였던 동북아의 역사는 서로 상이한 문화적 전통과 유산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상호 동
질성과 연대감에 기초한 공동체 형성의 필요성 또한 각 지역과 국가들마다 서로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역사 적 궤적과 문화적 유산과 틀을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동북아 국가들 의 근대화과정 속에서 추진되었으며, 이것은 현대사의 진행과정에서도 국 가간 협력과 통합보다는 갈등과 대립관계를 양산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 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동북아의 공동체 형성은 유럽의 그것과 비교하여 시 공간적으로, 그리고 정치․경제적으로 보다 어려운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공동체가 갖는 과거 유산과 프로젝트로서의 당위성이 유럽 공동체의 그것과 비교하여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 역사와 문화유산에 기인하여 유럽의 동질성과 정체성이 강화되고 공 동체 구성과 통합의 길이 앞당겨졌다면, 동북아 지역에 있어서도 과거 분 산화된 역사와 문화유산을 뛰어 넘는 동북아 공동의 문화적 동질성과 정체 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보다 강력하게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현실 적으로 유럽의 공동체 형성과정이 정치․경제 등 기능적 통합으로부터 보 다 영구적인 통합을 추진하기 위하여 프로젝트로서의 문화적 교류와 협력 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은 공동체 구성을 위한 문화적 요 인의 중요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단계에서 동북아 지역의 정치․경제적 협력과 통합이 여러 가지 상황적 요인에 기인하여 현 실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교 류와 협력을 보다 확대․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