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공동체라는 개념은 어떠한 시공간적 차원에서 형성된 것일까?
앙리 르페브르는 수학적․물리학적 공간 개념과는 달리 역사적으로 형성 되는 ‘사회적 공간’의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인식론적 차원의 공간 과 사회적 차원의 공간, 철학자들의 공간과 인민의 공간을 구별하였다. 이 처럼 르페브르가 물리학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을 구별하였다면, 엘리아스 는 물리적 시간과 사회적 시간을 구별하기도 하였다.19 시간의 자연적 흐 름은 동서고금을 통해 동일하였지만, 시간에 대한 개념, 각각의 시간 개념 에 입각하여 시간을 재기 위해서 마련된 척도, 그와 같은 척도에 대한 사회 적 약속으로서의 제도는 상이했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7일을 주 기로 한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따라 출․퇴근을 하고 있는 것은 고대 바빌 로니아로부터 유래되어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창 세기의 시간 개념에 의해 확립된 것이며, 유럽적 표준의 확산과정에서 자 리를 잡은 것일 뿐이다.20
유럽문화공동체라는 개념의 형성과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 다. 하나는 유럽 내의 개인, 장원, 도시, 연맹, 국가 등이 상호 연관성을 빚 어내며 안으로부터 유럽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유럽 외적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유럽의 외적 경계선이 분명해지고, 타자성 (otherness)에 대한 인식을 통해 유럽이라는 시공간이 확정되는 과정이다.
그 동안 많은 유럽학자들은 첫 번째 측면에 주목하여 유럽의 시공간적 개 념을 분석해 왔다. 따라서 유럽 외적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유럽이라 는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미흡했다.
유럽문화공동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타자성에 대한 인식은
19Henri Lefebvre, “Production de l'espace,” N. Elias ed., Time: An Essay (London: Blackwell, 1992), p. 8;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서울: 푸 른숲, 1997), pp. 73-75 재인용.
20주 7일제 확립에 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김현일, “시간과 서양문명,” 역사비 평 봄호 (2000), pp. 156-157 참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첫째, 이베리아 반도 방면에서는 수백 년 에 걸친 레콩퀴스타(reconquista: 재수복)를 통해 이루어진 이슬람 문명과 의 조우가 유럽의 외적 경계선을 확정하고, 유럽적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둘째, 지중해 방면에서 벌어진 십자군 전쟁 (Crusade)을 통해 유럽은 하나의 종교적 표준에 따른 단합을 과시할 수 있었고, 유럽이라는 지역적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십자군 전쟁을 통 해 유럽인들은 보다 선진적 타자(otherness)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었고, 타자에 대한 정복을 통해 자기(selfness)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자 군 전쟁을 통해 교황은 전기독교세계를 통합하는 상징으로 떠올랐지만, 점 차 그 권위가 실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십자군운동이란 교회에 의해 고무된 중세적인 식민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십자군과 후일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퀴스타, 나아가서 콜럼버스를 선봉으로 하는 아메리 카의 콩퀴스타도르는 모두 하나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셋째, 이슬람 문명 과의 대결 속에서 파생된 대서양으로의 진출은 유럽적 정체성 확립에 결정 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서양으로의 팽창은 유럽 내적인 정체성의 확립과정 과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지중해가 도시들의 바다 였다면, 대서양은 국가에 적합한 바다였다. 대서양을 항해하기 위한 프로 젝트는 도시적 수준 보다는 국가적 수준에 적합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프 로젝트가 다시 국가를 만들었다.
찰스 틸리의 말과 같이 “도시가 자본을 담는 그릇으로서 자본의 배분장 소로 봉사”21하였다면, 국가는 여러 개의 도시들을 담아낸 그릇이었다. 유 럽에서 광대한 대서양을 배경으로 벌어진 치열한 경주는 이들 도시들에 의 해 뒷받침되었고, 몇몇 도시들 간의 연대를 강화시켜 주었다. 대서양 세계 의 팽창하는 외연과 함께 심화되는 내포의 상징처럼 대서양에 조우한 각각 의 국가들 내부에서는 새로운 도시들이 만발하였다. 각국이 대서양을 지배 하고 또 대서양을 배경으로 번창시킨 문화는 이들 도시들에 잘 응축되었
21찰스 틸리, 이향순 옮김, 국민국가의 형성과 계보: 강압, 자본과 유럽국가의 발 전 (서울: 학문과 사상사, 1994), p. 83.
다. 대서양의 역사는 각기 바다를 개척했다고 자부하는 항구도시들이 새로 운 국가적 표준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의 역사였다. 유럽의 국가가 이들의 배후에 있기도 했지만, 역으로 유럽의 국가적 표준이 이 항구도시들이 주 도하는 대서양 개척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다. 지역적 표준들이 국가적 표준으로 통합되는 과정이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에 따르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유럽적 세계경제’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었다.22 당시 제노바 와 포르투갈 간의 특수한 관계는 지중해적 중심이 대서양 중심으로 옮겨지 는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한때 베네치아와 지 중해의 헤게모니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제노바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더불어 동지중해의 주요한 전진기지를 상실하고, 서지중해 지역으 로 세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대서양의 새로운 중심기지로 떠오를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던 포르투갈과의 새로운 후원 및 협력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포르투갈이 팽창하는 대서양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 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노바인들의 후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울러 선진적 지식과 유리한 지정학적 조건들을 주체적으로 통합하여 대서양을 향한 원심력의 토대를 마련한 포르투갈 왕실의 구심력이 중요한 역할을 수 행했다. 포르투갈 왕실 소유의 사그레스 궁전에는 각지의 우수한 조선기 사, 항해기술자, 세공업자, 탐험가, 지리학자, 천문학자 등이 모여들어 연 구, 조사, 항해 등에 관한 지식을 나누었다. 어부와 선원, 토목기사와 탐험 가, 지리학자와 수학자, 천문학자와 세공업자 등이 숙식을 함께 하며 한 장 소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을 벌이게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장 확실하 게 지식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이었다.23 이와 같은 두뇌들의 집결과 아울러 사그레스 궁전에는 각종 기행기와 지리서적, 각국의 지도와 항해 관련 서 적들이 모두 수집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도서관이기도 했다. 사그레스 궁
22이매뉴얼 월러스틴, 나종일 외 옮김, 근대세계체제 I: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서울: 까치, 1999), p. 33.
23Peter Coulmas, Les citoyens du monde: Histoire du cosmopolitisme (Paris: Albin Michel, 1995), p. 191.
전에 자료가 집중됨에 따라 자연히 이들 자료들을 열람하고 싶어 하는 전 문가들이 세계 도처에서 모여들게 되었고, 이들 전문가들이 나누었던 대화 와 연구는 다시 기록으로 남겨져 사그레스 궁전에 보관되었다. 1450년 경 대서양의 리스본은 지중해의 베네치아와 같이 유럽 팽창의 중심지로 떠올 랐다. 이 당시 리스본의 인구는 이미 4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리스본을 중심으로 한 포르투갈의 대외팽창에 있어서 두뇌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바로 사그레스 궁전이었다.
사그레스 궁전에서부터 시작된 포르투갈의 정복사업은 비록 많은 시 행착오도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것을 가져다주었다. 포 르투갈 왕실의 사관이었던 고메스 아네스 데 주라라(Gomes Eannes de Zurara)는 “지리적 지식의 한계선이었던 카나리아 열도와 보쟈도르 곶 너 머에 어떠한 땅이 있는 지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열망했다”고 적고 있다.24 새로운 지식의 수집과 축적은 동양이 아닌 서양이 세계사의 중심으로 떠오 를 수 있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이었다. 새로운 지리적 정보의 축적은 그것이 지리상의 정복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식이 서양에 대한 동양 의 지식을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동양에 앞서 서양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왜소성을 깨달았다는 점이었다.
15세기 이전과 이후에 대서양을 흐르던 물리적 시간에는 변화가 없었지 만, 대략적으로 1492년을 기점으로 대서양을 흐르는 사회적 시간은 많은 질적 변화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아메라카 문명의 시간적 개념이 유럽인 들의 시간적 개념으로 흡수되면서 하나의 대서양적 시간 개념이 탄생했던 것이 중요했다. 콜럼버스와 코르테스는 바로 이러한 정복을 대표하는 인물 이었다. 콜럼버스에 의해 대서양이 유럽인들의 존재-의식적 차원의 공간 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코르테스는 대서양세계를 유럽적 표준으로 통합시 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24John Thornton, Africa and Africans in the Making of the Atlantic World, 1400-180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 15.
에스파냐의 발흥과 함께 지중해 유럽을 대신하는 대서양 유럽이 등장했 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스파냐에 맞선 네덜란드의 독립은 북대서양의 역사 에 있어서 새로운 강국이 떠오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에 스파냐로 대표되는 카톨릭적 표준에 맞선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적 표준의 등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공간적으로는 런던, 암스테르담, 스트라스 부르, 그리고 제네바를 연결하고, 계층적으로는 도시의 상공인들을 엮는 국제적 네트워크가 새로운 유럽적 표준으로 부상하는 것을 뒷받침했다.25
에스파냐가 무적함대로 대표되는 군사적 표준과 카톨릭으로 대표되는 이념적 표준으로 유럽적 질서를 세웠다면,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이념적 표준과 함께 암스테르담은행이라는 금융적 표준을 세웠다.
리스본이 부상하던 1450년부터 암스테르담은 이미 대서양 무역의 중심도 시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에스파냐의 지배 하에 있었다. 암스테 르담이 에스파냐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하나의 역사적 수레바퀴 에 비유한다면, 그 반대편에는 네덜란드의 건국과정이라는 또 다른 수레바 퀴가 돌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은 에스파냐적 표준에 대한 대안적인 유럽적 표준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적 표준이 생성되고 있 었다.26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의 독립이 에스파냐제국은 물론 주변 국들로부터 인정받게 됨으로써, 네덜란드 문제를 국내문제로 취급하고자 했던 에스파냐제국과 네덜란드 문제를 이미 국제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다른 유럽국가들 간의 인식적 괴리가 공식적으로 해소될 수 있었다. 베스 트팔렌조약이 세운 시대적 표준은 “한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의 종 교를 따른다”(cujus regio ejus religio)는 아우그스부르그 평화조약(1555
년)의 정신을 더욱 확대 발전시킨 것이었다. 아우그스부르크 평화조약이
루터파와 카톨릭 간의 관계만을 염두에 둔 표준이었다면, 베스트팔렌 조약
25Wayne te Brake, Shaping History: Ordinary People in European Politics, 1500-1700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n Press, 1998), p. 67.
26암스테르담이 대서양 경제의 중심도시로 부상한 시기를 1450년 경으로 보는 견 해에 관해서는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I , p. 25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