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3. 중국
가. 개혁·개방 정책의 추진배경
중국에서 경제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이전, 시기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경제체제는 기본적으로 중앙계획 경제체제와 광범위한 행정적 분권화가 공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 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건설하기 위해서 추진한 작업은 국영경제 로의 전환과 국가재정의 전국적인 통일이었으며, 상공업의 전민소유 제로의 전환과 농촌의 집단화를 통한 농·공·상에서의 사회주의 개조, 그리고 계획체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경제관리체제의 구축이었다.
그 결과 중국에는 강력한 명령경제체제가 구축되었으나 지역마다 여 건의 차이가 크고 교통·통신의 미발달, 중앙계획 추진에 필요한 통계 및 행정체계의 미비 등의 이유로 인하여 행정적 분권화가 자연스럽게 허용되었다.
이와 함께 자력갱생이라는 구호 아래 지방차원의 자원분배체계가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난 점도 지방의 자율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중국은 대약진 기간(1958~60년)동안 경제관리에 관한 권한을 대폭적으로 지방단위에 이양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지방 에 독자적인 공업체계를 수립한다는 목표로 추진된 지방정부로의 분 권화 작업을 통하여 성·시·자치구는 몇 가지 중요한 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것은 중앙 부처 소속 기업에 대한 관리, 주요 상품의 계획·
관리, 기본 건설 프로젝트의 심사 및 인준, 노동관리, 상업기관 및 은 행에 대한 관리, 재정과 세무 등에 대한 권한들이었다.34) 그 결과 지 34) 보다 자세한 내용은 김춘송, 「중국식 경제개혁」 (서울: 민지사, 1992),
방의 자주권이 확대되고 지방의 행정·관리 능력이 증대되는 효과가 있 었으나 지방간의 비교우위가 무시되고, 지방마다 규모의 경제를 갖지 못한 소규모 중복투자가 남발되는 부작용도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국제적인 고립에 대비한 군사전략적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내륙공업화정책’은 일반적인 공업입지 조건들을 무시함에 따
라 투자의 효율성을 크게 저하시켰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개혁 이전 중국의 경제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공업화를 달성하였다. 1952년부터 1978년까지 연평균 7%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보였으며, 특히 공업생산 부문은 13%에 달하는 증가율을 기록하여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52년 20%에 불 과했던 것이 1978년에는 50%를 육박하는 수준까지 증가한 것이다. 공업화부문에서 보여준 이러한 성과는 중국정부의 중공업 우선정책에 서 비롯되었다. 이 기간 중 농·공업 총생산에서 중공업이 차지한 비중
은 1952년 15.3%에서 1978년 41.3%로 증가하였으며, 공업생산에
서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35.5%에서 56.3%로 증가한 점이 이 를 뒷받침하고 있다.35)
<표 2-4> 개혁 이전 중국경제의 연평균 성장률 추이
(단위: %)
연도 사회총생산 농·공업 총생산 국민소득
1952~59년 16.7 14.7 12.2
1960~69년 3.6 3.9 2.9
1970~78년 9.5 10.9 7.6
출처: 「中國統計年鑒 1987」, pp. 36~38, 43~45, 50~52, 윤원호 역, 「중국 공업화의 경제전략」 (도서출판 해남, 1998). p. 77에서 재인용.
pp. 27~29 참조.
35) 「中國統計年鑒 1987」, p. 55, p. 57, 윤원호 역, 「중국 공업화의 경제전 략」 (도서출판 해남, 1998), p. 89에서 재인용.
그러나 1978년 노동인구의 구성에 있어서 85.5%가 농업부문에 종사하고 있는 데 반하여 생산에 있어서 농업부문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29.7%에 불과한 점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중공업부문에
대한 집중투자는 공업부문의 발전에 비해 농업부문이 낙후성을 면치 못하는 이중적인 경제구조를 초래하게 되었다.36) 다만 농촌부문에도 집단농장체제 하에서 대규모 인력동원 등을 통한 기반시설 확충 노력 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각 지방의 자력갱생 차원에서 추진해 온 농촌공업 육성 작업으로 농촌의 공업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한 점 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점들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이후 농촌 부문의 개혁작업을 통한 경제성장의 기반 구축 작업이 성공한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제개혁 이전 중국은 대약진운동(1958~60년)과 문화대혁 명(1965~75년)이라는 두 번의 인재(人災)로 생산시설이 파괴되었으 며 계획경제체제 자체가 지닌 구조적 문제로 인해 경제발전은 한계를 보이게 되었다. 특히 거시경제의 관리와 기업의 경영에 있어서의 효 율성 결여, 노동생산성의 낙후, 생산기술발전의 저하 등은 중국 경제 발전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노동력의 중앙관리에서 비롯된 3
철현상(三鐵現象)37)은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주범으로 지적되었
36) 또한 경공업을 경시한 결과로 경공업 상품시장이 매우 위축됨에 따라 서 국민들의 일상생활의 기본수요조차 만족시키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 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에너지와 교통운수부문의 생산활동이 지 속적으로 축소됨에 따라서 1970년대 후반 들어 공장의 가동률은 심각 하게 저하되었고 수송수요의 상당부분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에 있었 다.
37) 3철현상은 鐵飯碗(철밥그릇), 鐵椅子(철의자), 鐵工資(철임금)를 말한다.
鐵飯碗은 평생직장을 보장하는 종신고용제도를 의미하며, 鐵椅子는 공 산당 실력자의 인맥으로 구성된 간부채용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鐵 工資는 노동의 양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지급하는 고정임금제를 의미한 다. 그 결과 중국 노동자의 근로 의욕이 감퇴되어 생산성은 아주 낮았
다. 결국 중국의 지도부는 이러한 계획경제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문 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 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강력한 대안으로 대두된 것이 농촌을 중 심으로 한 경제개혁과 경제특구를 통한 대외개방정책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도입은 총체적 위기상황 속에서 밑으로부터의 개혁 요구로 비롯된 중·동유럽국가들이나 구 소련의 그것과는 구별된 다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률 저하, 높은 인플레이션, 정부부채와 외 채의 급증 등과 같이 경제가 위기상황에 이른 것도 아니었고 공산당 의 권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상황도 아니었다. 다만 경제적 여건 의 악화가 모택동 사망 이후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사인방이 축출되고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주의적 지도층이 등장하게 되는 정치적 변화와 결합하여 위로부터의 체제개혁이 추진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38) 즉 실사구시 사상에 바탕을 둔 통치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등 소평이 공산당의 지도노선인 계획경제체제를 부정하고 자본주의 요소 를 도입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강력한 리더십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등소 평은 당 지도부로 하여금 모택동의 지도노선과 계획경제체제에 따른 폐해와 낙후된 중국의 실상을 정확히 인식하고 개혁에 동참하도록 설 득하는데 전력을 기울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1970년대 후반에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의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고, 동구권은 이미 개 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제3의 물결’인 정보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 는 등 국제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이처럼 급하게 흐르고 있는 세계 조류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장경제와의 접촉이 불가피하다는
던 것이다.
38) 한국비교경제학회 편, 「비교경제체제론」 (서울: 박영사, 1997), pp. 57 4~575.
점도 중국의 개혁·개방을 재촉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 도입에 따른 일반국민들의 사상과 관념 상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먼저 개혁이론을 정립하는 데 주력하였다. 등소 평은 복권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1977년 7월의 중국공산당 제10기 3 중전회가 열리기 전인 4월에 당중앙에 보내는 서한을 통하여 모택동 사상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함으로써 모택 동 사상의 재해석을 요구하였다. 이어 1978년 12월에 개최된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는 ① 인민들의 ‘사상해방’을 제창하였고, ② “생 산력의 발전에 적합하지 않는 모든 관리방식, 활동방식, 사상방식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③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법규를 강화해 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④ 중국의 문호개방을 선언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 여 중국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하자고 결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39) 그러나 개혁파들의 급진적인 체제개혁운동이 확산되면서 내 부의 보수파 반발이 고조되자 등소평은 1979년 3월에 개최된 당의 이론사업 원칙연구회에서 행한 “4개 기본원칙을 견지하자”는 연설을 통해서 개혁·개방과 사회주의의 견지라는 원칙을 동시에 표방하게 된 다. ‘4개 원칙’은 ① 사회주의 견지, ② 무산계급 독재 견지, ③ 공산 당의 영도 견지, ④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 견지 등이다. 이 때부터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1개 중심(경제발전과 현대 화)’과 ‘2개 기본점(개혁·개방과 4개 원칙의 견지)’으로 정의되기 시작 하였다.40)
결국 ‘중국적 사회주의’로 표현되는 등소평의 정책은 경제발전 우선
중시라는 대 전제하에서 이를 위하여 적극적인 개혁·개방정책을 추구
39) 서재진 외, 「사회주의체제 개혁·개방 사례 비교연구」, pp. 368~71.
40) 위의 책, pp. 37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