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선덕왕(632~647)의 말기부터 왕권과 진골귀족 간 에 정쟁이 일고 정치세력 판도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선덕왕. 년 에 상대등 비담이 여왕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 14 (645)
는데 이를 김춘추와 김유신이 진압합니다 그런데 김춘추는, . 바로 진평왕계가 폐위시켰던 진지왕의 손자였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군주 김유신과 연합세력을 이루고 있었습니 다 이로써 권력을 잡은 김춘추세력은 선덕왕이 죽자 진덕왕. 을 옹립하여 다시 선덕왕의 사촌이며 진평왕의 조카인 승만 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진덕왕 때(647~654) 신라의 실권은 사실상 김유 신과 연합한 김춘추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 덕왕이 죽자 김유신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김춘추가 즉위함 으로써 무열왕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옛날 왕권에서. 퇴출된 진지왕계의 손자가 왕위에 오른 사건이며 동시에, 찰제리종으로서 진평왕계인 성골의 단절을 의미하는 사건입 니다 그리고 왕족이었지만 왕권에서 배제된 김춘추와 가야. 계 진골로 신라 진골귀족에게 소외된 김유신 연합세력의 새
그리고 무열왕(654~661)의 시대는 역동적인 동북아 국 제관계 속에서 통일전쟁이 본격화된 시기였습니다 고구려. 와 백제의 협공으로 위태로웠던 신라가 몸부림친 결과 당까 지 포함된 국제전으로 발전된 전쟁에서 결국 무열왕, 7년 에는 백제가 멸망하였으며 고구려를 향한 나당연합군
(660) ,
의 공세가 지속되었습니다 이후 문무왕 년. 8 (668)에는 고구 려까지 멸망하고 곧바로 당을 격퇴하기 위한 나당전쟁이 일, 어나는 등 무열왕 이후 시대는 동북아 국제정세 전체가 바, 뀌는 격변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대내외적 변화 속에서 무열왕은 진골귀족을 억압 하고 집사부를 설치하는 등 왕권 중심의 정치개혁을 단행했 습니다 이로써 진골귀족과의 협력의 원리를 통하여 운영되. 던 신라는 국왕의 의지만으로 영도되는 왕권 전제화의 과, 정을 거칩니다 또한 백제의 멸망과 함께 고구려의 멸망. , 당까지 축출하면서 삼국시대의 신라가 아닌 통일된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이후로 우리민족은 단일한 역사와 문. 화를 공유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강력한 무열왕계 전제왕권, 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 신라본기 문무왕 상 조에는 다음과 기
[ ] 6 6 ( )
사가 보이고 있습니다.
문무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법민으로 태종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문명왕후로 김유신의 누이입니다 그 어머니의 언. 니가 꿈에 서형산 서악 꼭대기에 앉아 오줌을 누었더니 온( ) 나라 안에 가득 찼습니다 그러고 동생에게 이야기하니 동. , 생이 꿈을 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단치마로 꿈. 값을 치루고 꿈을 샀다고 합니다.
며칠 뒤 김유신이 춘추공 김춘추 과 축국 공차기 를 하다( ) ( ) 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끊어뜨렸습니다 유신이 제 집이. “ 가까우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 하고 집으로 데려갔습니” 다 그리고 술상을 차려놓고 보희를 불러 옷고름을 꿰매도. 록 했으나 무슨 일인지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꿰, , 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수수한 단장과 산뜻한 옷. 차림 빛나는 어여쁨이 눈부셨습니다 이에 춘추가 혼인을, .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 니 그가 무열왕을 이어 문무왕이 된 법민입니다.
삼국유사 권 기이 태종춘추공 조에도 비슷한 내용
[ ] 1 2
의 기사가 전하고 있습니다.
김유신의 누이 보희가 어느날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서울에 가득 찼습니다 동생 문희에게 이야기하니. , 문희가 꿈을 사겠다 하고 비단치마로 꿈을 샀습니다 열흘. 뒤 김유신이 춘추공과 자기 집 앞에서 축국을 하다 춘추공 옷끈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 보희에게 꿰매드리라 하니 사소한 일로 어찌 귀공자를 가, 까이 하겠냐며 사양했습니다 문희에게 시켰더니 춘추공이. 그 뜻을 알고 그녀와 관계하여 이후 자주 왕래하게 되었습 니다 유신은 누이가 임신하자 꾸짖으며 네가 부모에게 고. “ 하지도 않고 아이를 뱄으니 온 나라에 알리고 태워 죽이겠, 노라 하였습니다” .
그리고 하루는 선덕왕이 남산 가는 날을 기다려 뜰에 장 작을 쌓고 불을 질렀습니다 왕이 무슨 연기냐 하니. , “유신 이 누이를 태워 죽이려 합니다 하였습니다 까닭을 물으니” . ,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그게 누
“ ” . “
구 짓이냐 하니 왕 앞의 춘추공 안색이 크게 변하였습니” , 다 왕은 모두 네 짓이니 가서 구하라 명하니 공은 말을. “ ” ,
통치이념
신라는 무열왕(654~661) 이후 전혀 다른 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제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상처를 치, 유하면서 화합하는 한편 민족의 정신과 국력을 하나로 모으 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또한 진지왕의 손자였던 김. 춘추 신라 진골에게 소외된 김유신의 연합세력이 세운 무, 열왕 왕권은 기존의 진골귀족들 압도하면서 강건한 왕권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열왕계 중대왕권의 통치. 이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불교의 화엄사상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화엄철학은 불교의 연기론 원인이 결과. ( 가 되고 그 결과가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가 되는 을 통) 하여 세상의 모든 현상과 이치를 설명한 심층적이고 이론적 인 철학으로 불경 연구로 진리에 도달하려는 교학불교의, 정수라고도 한답니다 그 화엄의 원리는 일즉다. ‘ (一卽多)’
다즉일 의 체계였는데 즉 하나는 모든 것으로 펼
‘ (多卽一)’ ,
쳐지고 모든 것은 하나로 모인다고 하는 화엄철학의 원리를 통치이념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한편 중대에는 불교사상이 아닌 유학이 지배이념이 되었 을 것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완성한. 신문왕의 만파식적 설화에는 음악으로 세상을 통치한다는 유학의 예악사상이 표현되고 신문왕의 국학의 설치라든가, 원성왕의 독서삼품과와 같은 제도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 내면의 심오한 이론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사회, 사상과 정치제도로만 쓰이던 남송 이전의 유학이 인간의, 내면과 심성을 지배해 오던 불교를 대신하는 절대 이념체계 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점도 있습니다.
어쨌든 법흥왕 때 불교를 수용하면서 고대국가를 건설하 고 진흥왕 이후 전륜성왕의 이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 끌고 진평왕 때 찰제리종으로 왕권의 신성화를 강조하던, 신라가 중대왕권 때에는 통치이념이 없었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력한 전제왕권 건설의 이념적 배. 경이라든지 하나의 통치 권력으로 단합된 국가를 지향하는, 사상으로서 새 시대를 이끌어갈 강력한 통치이념이 필요했, 을 일입니다 그것을 밝히는 일은 우리역사와 정신세계를. 복원하는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