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의지가 정념을 제어할 수 있는지에 따라 영혼의 힘을 세 가지로 구분한 바 있다. 영혼의 힘에 비추어볼 때 데카르트는, 비록 정 념이 영혼의 수동적 기능임에는 틀림없다 할지라도, 영혼 그 자체를 대 표하는 기능은 영혼의 능동적 기능―의지―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와 동 시에 데카르트는 영혼 안에서의 능동과 수동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고 말하고 있다. 즉, 데카르트는 한편으로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
―능동으로서의 영혼, 의지―과, 또 한편으로 몸과 결합되어 존재하는 영혼―수동으로서의 영혼, 정념―을 구분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 에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몸은 영혼에 비하 여 열등한 것’(PS, 139항 ; AT, Ⅺ, 432)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영혼은 비록 몸과 결합되어 있지만 몸보다 그 우위에 있는 것임을 데카르트는 분명히 하고 있다. 이때 ‘몸이 영혼에 비하여 열등하다’는 것은 몸이 영 혼보다 수준이 낮거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결정하고 다스리는 것은 몸이 아닌 영혼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혼―의지―이 몸 의 영향을 받는 영혼―정념―을 제어하고 다스려야한다고 언급하고 있 다. 이제 이러한 데카르트의 견해를 바탕으로 의지가 정념을 제어한다는 것의 의미와 그 구체적 양상에 대해 고찰해보겠다.
데카르트의 「정념론」은 정념을 그 주제로 하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데카르트는 「정념론」의 곳곳에서 정념과 함
께 의지를 언급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데카르트가 「정념론」에서 다루고자 한 것은 몸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정념과 몸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의 의지 사이의 관계인 셈이다.
필자는 이전 학자들이 왜 정념들을 모두 육욕이나 분노에 연관시키려 했 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찬탄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두려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여러 정념들 각각을 자신 안에 귀속시키는 능력, 그리고 정념의 자극에 의하여 그 자신을 행위로 표 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S, 68항 ; AT, Ⅺ, 379).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는, 영혼은 ‘여러 정념들 각각을 자신 안에 귀속시키는 능력’ 그리고 ‘정념의 자극에 의하여 그 자신을 표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즉, 정념은 영혼의 의 지와는 상관없이 몸에 의해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혼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발휘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 혼의 능력은 앞에서 언급한 영혼의 힘과 다른 것이 아니다. 나아가 영 혼은 무작정 정념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정념의 자극으로 인하여 그 자신을 바깥의 행위로 표출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영 혼은 몸을 매개로 발휘된 정념을 정념답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정념에 의존하여 그 자신을 외부의 행위로 표출하는 힘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며, 영혼은 정념을 받아들이고 또한 그 자신을 외부 로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영혼은 힘 또는 능력과 다 른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영혼의 능동성을 ‘의지’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의지는 힘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서 몸의 지 배를 받는 또 다른 힘인 정념을 제어하면서 그와 동시에 그 자신의 힘 을 정념의 힘에 의존하여 바깥으로 표출해낸다. 영혼이 정념을 정념답게 만든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념은 영혼의 제어를 받을 때 비로
소 정념다운 정념이 될 수 있다. 정념이 영혼의 수동성이라는 것은 이 러한 이유에서이다. 애당초 정념은 영혼을 받아들임으로서 성립가능하다 는 점에서 정념은 또한 수용성을 특징으로 한다. 영혼과 정념의 관련을 설명할 때에 데카르트가 쓰고 있는 ‘passivity’는 ‘수동성’과 함께 ‘수용 성’을 동시에 뜻하지만, 정념은 영혼으로 인하여 성립하며, 또 영혼으로 인하여 그 진정한 모습을 띠게 된다는 점에서 수용성이라는 번역이 더 적합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정념은 영혼의 힘을 고스란히 자신의 힘으 로 삼을 때 마음의 거센 동요가 사라진 평정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
자유의지는 우리를 우리 자신의 주인으로 만들어준다. 또한 신이 우리에 게 주신 바로 그 권리[자유의지]를 게으름으로 인해 절대 잃지 않는다면, 우 리는 그 자유의지에 힘입어 다소간 신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PS, 68항 ; AT, Ⅺ, 379).
앞 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에게서 부여받은 의지는 처음부터 인간 에게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정도껏 그것을 실현하기 위 해 노력을 기울일 때 힘을 발휘한다. 이 점에서 의지는 인간이 그 스스 로의 주인이 되어 그 힘을 갖추려고 할 때 비로소 발휘된다고 볼 수 있 다. 의지는 그 의미상 자유의지인 셈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의지로 인해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며 게으름으로 의지를 잃지 않 는다면 신에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나 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그 방향은 바로 신으로의 방향이 라는 것을 뜻한다. 즉, 데카르트는 몸과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의 의지로 인해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삶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으며, 나아가 신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몸과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의 의지는 항상 정념을 동반한다는 점 또한 언급하고 있다.
순수하게 영혼의 단독 작용에 의해 발휘되는 지적인 기쁨과 정념으로서
의 기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 영혼이 몸에 결합해 있는 동안에는 이 지 적인 기쁨은 정념으로서의 기쁨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PS, 91항 ; AT, Ⅺ, 397).
기쁨에는 ‘지적인 기쁨’과 ‘정념으로서의 기쁨’이 있다. ‘지적인 기쁨’은 몸과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에 의해서 발휘되며 ‘정념으로서의 기쁨’은 몸과 결합되어 존재하는 영혼에 의해 발휘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기 쁨은 항상 동시에 존재한다고 데카르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 시에 데카르트는 ‘지적인 기쁨’과 ‘정념으로서의 기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앞 절의 「정념론」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언급 하였지만 데카르트는 영혼의 힘을 ‘단호하고 확고한 판단’(PS, 48항 ; AT, Ⅺ, 367)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단호 하고 확고한 판단’은 의지가 정념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 영혼의 힘인 셈이며 그것은 의지와 정념을 구분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다. 즉,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영혼의 ‘단호하고 확고한 판단’을 대 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영혼이 그러한 판단을 얼마나 따르는지에 따라 영혼의 강함과 약함이 결정된다고 보며 나아가 영혼의 그 판단은
‘진리의 인식’에 근거할 때 의미가 있다고 언급한다(PS, 49항 ; AT, Ⅺ, 368).
우리가 경험과 이성을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고,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분간해내 며, 어떤 것으로도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기 위함이 그것이다(PS, 138항 ; AT, Ⅺ, 431).
데카르트는 경험과 이성의 필요성을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더 정확히는 ‘단호하고 확고한 판단’―과 관련시킨다. 다시 말하여 ‘단호하 고 확고한 판단’은 우리가 경험과 이성을 사용할 때에 가능한 것인 셈 이다. 데카르트가 「정념론」 제 1부의 마지막에 ‘부지런히 훈련하고 지도
하면 모든 정념에 대해 절대적 지배력을 얻을 수 있다’(PS, 50항 ; AT,
Ⅺ, 370)고 언급한 것 역시 ‘단호하고 확고한 판단’을 바탕으로 정념을 지배하는 것은 경험과 이성을 구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악덕은 무지에서 온다’(PS, 160항 ; AT, Ⅺ, 452)는 데카 르트의 말은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악덕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이 뒤범벅된 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과도하게 표출되는 것을 가 리킨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단호하고 확고한 판단’은 정념을 ‘과도하게 치우지지 않은’ 상태로 이끈다. 이것은 곧 정념의 이상적인 상태는 ‘중 용’이라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단호하고 확고한 판단’에 의 하여 정념이 그 이상적인 상태라 할 수 있는 중용에 이를 수 있다고 말 하는 셈이다.
예컨대 기뻐하는 마음의 경우에, 마땅히 기뻐해야 할 때에 기뻐하는 것 과 그렇지 않을 때에 기뻐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옳게’ 기뻐하는 표준이 무엇인가에 의하여 결정된다(박종덕, 2010, p. 52).
위 인용문의 ‘마땅히 기뻐해야 할 때에 기뻐하는 것’은 바로 정념이
‘단호하고 확고한 판단’에 의해 제어된 상태를 말한다. 그리하여 영혼이 기뻐해야 할 때에 기뻐하고, 슬퍼해야 할 때에 슬퍼하는 것은 ‘무지’의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며, ‘옳게’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도록 하는 ‘단호하 고 확고한 판단’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 ‘단호하 고 확고한 판단’의 경험적 대응물은 지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 데 카르트는 지식에 의하여 정념이 중용의 상태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참된 지식에 의해 추구되는 것인 한, 욕망은 결코 나쁜 것이 될 수 없 다. 욕망이 과도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오로지 참된 지식에 의해 제어될 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