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山詩文集(다산시문집) 東史綱目(동사강목) 勉菴集(면암집) 扶桑錄(부상록) 宣祖實錄(선조실록) 星湖僿說(성호사설)
五洲衍文長箋散稿(오주연문장전산고) 阮堂集(완당집)
淸脾錄(청비록) 海東繹史(해동역사) 海槎日記(해사일기) 海游錄(해유록) 和國志(화국지)
목포대학박물관. 1989. 全南의 寺刹 1. 466pp.
목포대학교박물관․영암군청. 1997. 영암 용암사지 지표조사 보고. 98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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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형균. 2011. 호남지역 고려 목탑지 연구. 호서고고학 vol.25. pp.6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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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부록
가. 왕인박사 관련자료
왕인
왕인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375-384년)때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 에서 탄생하였습니다. 8세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시어 유학과 경전을 수 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습니다. 이무렵 백제는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태였으며 17대 아신왕은 지금의 일본인 왜와 수교를 맺고 태자전지를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왜왕 응신은 백제의 태자전지가 도왜한지 7년만에 백제의 태 자를 다시 고국으로 돌려 보내면서 훌륭한 학자를 청하였습니다.
백제 17대 아신왕때에 왕인은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 본으로 간 것으로 구전되어오고 있습니다. 당시 왕인은 32세 이었으며, 상대포는 국제 무역항으 로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갈때에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전해오고 있 습니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 일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사회의 정치 경제와 문화 예술을 꽃피웠습니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大阪)부 히라카타(枚方)시에 있으며, 1938년 5월 오사카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는 왕인박사 유적지를 정화하여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양력 4월 초에 왕인박사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사서에 나오는 왕인의 기록
『古事記』
“백제국의 임금인 照古王(근초고왕)이 암수 말 1필 씩을 阿知吉師에게 딸려 바쳤다.(이 阿知 吉師라는 자는 阿直史氏 등의 시조이다) 또 백제왕이 큰 칼(橫刀)과 큰 거울(大鏡)을 바쳤다. 그 리고 천황은 ‘백제국에 만약 賢人이 있으면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명을 받아 사람을
보내왔는데 이름이 和邇吉師1)였다. 또 論語 10권과 千字文 1권, 모두 11권을 이 사람에게 딸 려 바쳤다.(이 和邇吉師라는 자는 文首氏 등의 시조이다)”
『日本書紀』
① “응신천황 15년(284) 가을 8월 정묘(6일) 백제왕이 阿直岐를 파견해 좋은말 2필을 바쳤 다. 그것을 輕坂上의 마굿간에서 기르게 하고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 말을 기른 곳을 廐坂이라고 한다. 아직기가 또한 능히 경서를 읽었으므로 태자 菟道雉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천황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더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는가?’라고 묻자
‘王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실로 빼어납니다.’라고 아직기가 답하였다. 그래서 上毛野君의 선조 인 荒田別과 巫別을 백제에 보내 왕인을 데리고 오게 하였다. 아직기는 阿直史氏의 시조이다.”
②“16년 봄 2월에 왕인이 왔다. 이에 태자 菟道雉郞子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여러 典籍을 왕인으로부터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이라는 자는 書首씨 등의 시조이 다.”
『續日本記』
① “응신천황이 上毛野씨의 먼 선조인 荒田別에게 명해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 학식이 있는 자를 찾아오도록 하였다. 백제의 國主 貴須王이 공송하게 사신의 뜻을 받들어 宗族 가운데 손자 인 辰孫王(일명 智宗王이라고 한다)을 뽑아 사신에 수행해 입조시켰다. 천황이 이것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대접하고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비로소 서적이 전해지고 儒風이 크게 일 어나고 文敎가 흥한것은 실로 여기에 있었다.”
② “漢 高帝의 후예를 鸞이라고 하는데, 란의 후손인 王狗가 백제로 옮겨 살았다. 백제 久素 王 때에 일본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文人을 선발해 보내라고 하니 구소왕이 구의 손자인 王仁을 바쳤다. 이것이 文과 武生 씨의 선조가 되었다.”
왕인에 대해 일본사서에는 王仁, 또는 和邇吉師라고 칭하고, 지위 내지 신분에 대해서는 吉 師, 博士, 文人 등으로 기술하였다. 또 왕인이 도일할 때의 왕은 일본에서는 응신천황으로 동일 하지만, 백제의 왕은 조고왕, 귀수왕, 구소왕으로 사료에 따라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속일본기』 에서 왕인을 漢高祖의 후손이라고 최초로 기술하였는데, 그러한 주장의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西文씨의 후손인 文忌寸最弟가 자신의 조상인 왕인의 출자에 대해
1) 『日本書紀』에는 ‘王仁’으로 표기하고 있다.
부록
중국 한 고조의 후예라고 칭하면서 환무천황으로부터 宿禰라는 성을 받았다. 文氏의 유래를 언 급하는 가운데 왕인이 나오는데, 그의 가계에 대해 한 고조의 후예라고 밝힌 것은 처음이다. 이 러한 기술은 『속일본기』의 편찬자 내지 당시 일본인의 의식의 변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요컨 대 일본에 문화를 전수해 준 대상을 백제인에서 중국인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식의 발로이다.
이러한 인식은 에도시대 마쓰시다 겐린(松下見林)의 異稱日本傳 에도 계승되고 있다.2)
일본에서의 왕인의 위상
첫째, 최초로 漢字를 전래하고 그것을 응용해 일본글자의 원형인 가나(假名)를 만들어 준 인 물이다.
둘째, 和歌의 창시자로 인식되었다. 平安時代인 905년 키노 쓰라유키 (紀貫之) 등이 편찬한 古今和歌集 서문에서는 한자를 이용해 가나를 만든 왕인의 공적에 대해 평가하는 한편으로 왕인박사가 지은 難波津歌를 소개하면서 일본 和歌의 창시자(‘歌父’)라고 평가하였다.
셋째, 논어와 천자문을 비롯해 많은 유교경전와 전적을 전래하였고, 그것을 태자를 비롯한 지배계층들에게 가르쳐 주어 유교문화를 전수 한 학문의 스승이라는 인식이다.
넷째, 왕실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왕인에 대한 존숭의 인식은 민간에게도 보급되어 추모와 신 앙의 대상으로 받들어졌다.3)
조선시대 왕인에 대한 기록4)
『宣祖實錄』
“應神帝 때에 이르러 백제국에 博士를 구하여 經史를 전수하니 귀천 없이 중국문자를 익혔으 며, 불경 및 유교와 諸代百家의 글이 차례로 잇달아 들어오니, 사람들이 유교에 五常이 있고, 불교에 五戒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날로 묻고 달로 배워서 드디어 문명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5)
국교를 재개하기 위한 교섭과정에서 겐소가 고대에 양국이 우호적으로 교류한 사실을 소개하 면서 역사적 유래를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백제를 통한 문물전수 사실을 소개할 뿐
2) 하우봉, 2015,『조선시대 왕인에 대한 인식의 전개와 그 의미』, 「전북사학」47, pp.79~81 3) 하우봉, 2015,『조선시대 왕인에 대한 인식의 전개와 그 의미』, 「전북사학」47, pp.81~82
4) 하우봉, 2015,『조선시대 왕인에 대한 인식의 전개와 그 의미』, 「전북사학」47, pp.84~101을 인용함 5) 『선조실록』 권171 선조 37년 2월 23일 갑진
王仁, 阿直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星湖僿說』
“응신천황 때에 비로소 의복의 제도를 정하였다. 백제에서 서적을 가져왔고, 또 태자가 오고,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왔으니 곧 晉武帝太康 10년(289) 기유때이다.6)
『東史綱目』
“이 해에 백제가 왜국에 서적을 보냈다. 왜는 처음에 문헌이 없다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백제 를 통해 중국문자를 얻었다. 또 의복제도가 없었는데 백제가 재봉하는 여공을 보냄으로써 비로 소 복색이 있게 되었다. (중략) 海東記에 倭皇 응신 15년에 백제가 서적을 보냈다고 하였다.”7)
실학파 역사학자인 안정복은 자신의 필생의 저서인 『東史綱目』 에서 백제의 문물전수 사실 을 기술하였다. 이 기사를 쓰면서 안정복은 ‘倭史’를 참고하였음을 밝혔는데, 아마도 일본서기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해동제국기』 에서 인용한 사실도 밝혔다.
남용익의 『扶桑錄』
1655년 을미통신사행의 종사관으로 수행한 南龍翼이 남긴 사행록이다.
“응신황 : 이름은 譽田이고, 仲哀皇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神功皇后이 다. 원년은 경인년 (260)으로 병신년에 고구려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고, 계묘년에 백제가 재봉하는 여공을 보내 니 의복이 이때부터 있게 되었다. 갑진년에 백제가 또 경전과 여러 박사들을 보냈으며, 을사년 에 백제가 王子 王仁을 보냈다. 재위한 기간은 41년이고 수는 111세이다.”8)
이 기사는 우리나라에서 王仁이란 이름이 명시된 최초의 기록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신유한의 『海游錄』
1719년 기해통신사행의 제술관으로 수행한 申維翰이 남긴 사행록으로 수려한 문장과 풍부한 내용으로 유명하다.
6) 『星湖僿說』 권18 經史門 「日本史」.
7) 『東史綱目』 권2 상 신라 미추왕 23년, 고구려 서천왕 15년, 백제 고이왕 51년.
8) 『扶桑錄』 聞見別錄 倭皇代序 人皇 應神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