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대가 되면 수령 고소가 이미 풍습이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다.
원종이 아뢰기를, “부민이 고소하는 것은 실로 각박한 풍습입니다. 조 종조에서는 고소할 수 없게 하였는데, 세조께서 특별히 허용하셨습니다.
이에 관노비들이 수령을 고발하여 범법 수령은 손발을 둘 데가 없습니 다. 무릇 수령이 불법을 저지르면 대간이 들어서 탄핵하고, 관찰사가 들 어서 貶黜하여야지 백성으로 하여금 고소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금하지 않으면 장차 폐단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엄중하 게 징벌하소서. 지금 연안부 앞에는 나무가 많은데 배를 허옇게 내놓은 늙은이들이 나무 아래 모여서 수령의 일을 논의하고서는 문득 상경하여 고소합니다. 김해에도 또한 이런 풍습이 있으니 그런 조짐을 조장하여서 는 안 됩니다.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입법하게 하소서.” 하였다.87)
領事 朴元宗(1467~1510)은 부민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이 ‘풍습 이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이로 인해 수령이 손발을 둘 데가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말을 통해 당시 부민고소에 대한 조정의 생각 87) 중종실록 권8, 4년 3월 21일(癸丑). “元宗曰, 部民告訴, 此實薄風。
祖宗朝使不得告訴, 世祖特許之。於是官奴輩, 告其守令, 所犯守令, 無所措 手足。大抵守令有不法, 則臺諫聞而彈駁, 觀察使聞而貶黜, 不必令民告訴 也。今若不禁, 則弊將不救。請痛懲。今延安府前, 多有樹木, 皤腹老夫, 多 聚樹下, 論議守令事, 輒上京告訴。金海亦有此風, 其漸不可長。當問大臣 立法。”
을 알 수가 있는데, 우선 세조대에 이것을 허용하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조대 비법적인 조치로서 일시적으로 고소를 허용한 이후 그 조치를 거두었고, 또한 예종대 세조의 정책 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다시 부민고소 금지의 조처가 취해졌음에 도88) 여전히 수령 고소는 지속적으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법을 세워야 한다는 제안에서 당시 조정에서 인식하고 있는 이 법 의 존재감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수령의 불법은 부민들의 고소가 아닌 대간과 관찰사의 탄핵과 폄출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령 고소가 지속되면서 수령-관찰사로 이어지는 지방통치체계와의 충돌되는 현상은 이 당 시 큰 고민거리이기도 하였다. 1515년(중종 10) 2월 황해도 관찰사 와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된 朴召榮과 金璫이 拜辭할 때의 발언은 이러한 고민을 잘 보여준다.
황해도 관찰사 朴召榮, 전라도 관찰사 金璫이 拜辭하니 임금이 인견하 여 이르기를, “다른 일은 다 말할 것이 없지만 민생의 안락과 근심은 수 령에게 달렸고 수령의 黜陟은 감사에게 달려 있으니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김당이 아뢰기를, “임금님의 교지가 지당합니다. 신이 출 척의 소임을 받았으니 감히 진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백성들의 고 소가 분분하고 한 때의 비방과 칭찬이 한결같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출 척의 마땅함을 잃을까 심히 두렵습니다.”하였다.89)
88) 예종실록 권3, 1년 2월 5일(庚寅) “詳定所啓, 守令遞任, 用六期, 如 堂上官及未挈家沿邊守令, 用三期。且部民告訢關係宗社及非法殺人, 自己 訴冤外, 吏典、隷僕, 告其官員者, 品官、吏民, 告其監司、守令者, 竝勿聽 理, 論以杖一百徒三年。品官、吏民黜鄕, 陰嗾他人告官者, 罪亦如之。從 之。”
실제로 대간들이 잇달아 고소당한 수령을 罷黜해야 한다고 탄핵 했으나 그 수령이 관찰사의 포폄에서 으뜸을 받은 경우도 있었 다.90) 수령 고소가 만연하면서 고소 내용과 포폄에 차이가 나고, 이 는 결과적으로 관찰사의 포폄이 타당성을 잃는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었다.
한편, 16세기에는 국역체제가 문란해지면서 그것에 힘입은 지방 세력들이 더욱 강성해지고 있었다.91) 당시 지방 품관세력들의 위세 는 수령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순정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남원의 품관들이 强悍하여 마을 내 才人과 白丁이 본래 2천여 명이었는데 모두 품관에게 순종하게 되어 한 품관이 30∼40명씩 거느려 자기 집 울타리 안에 살도록 하는데도 아전 이 독촉하여 빼내 오지도 못하고, 수령이 만약 推尋하면 반드시 中傷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관노비 부리기를 자기 父祖의 노비 부리듯이 하고 나약한 수령은 더러 立案을 만들어 주기도 하여 관아에서는 부릴 사람이 없게 됨에 이르렀습니다. 그 폐단이 이미 오래되어 수령 또한 금 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품관은 마땅히 수령으로 하여금 조 사하여 다스리도록 하되 아주 심한 자는 큰 죄로 다스려야 이와 같은 폐 단이 거의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하였다.92)
89) 중종실록 권21, 10년 2월 19일(丁未). “黃海道觀察使朴召榮、全羅 道觀察使金璫拜辭, 上引見, 語之曰, 他事不須盡言, 民生休戚, 係于守令, 守令黜陟, 在于監司, 可不愼歟, 璫對曰, 上敎當矣。臣受黜陟之任, 敢不盡 力爲之, 然百姓之告訴紛紜, 一時之毁譽不一, 深恐以此, 而失黜陟之當 矣。”
90) 중종실록 권4, 2년 12월 25일(甲午).
91) 16세기 국역체제의 해체와 사족층의 성장에 대해서는 김성우, 앞의 책 참고.
당시 남원 지역에서는 품관들이 강성하여 아전뿐만 아니라 수령 또한 그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남원의 토호 품관은 향촌 에 살며 사나운 것이 매우 심하기 때문에 三害라고 불릴 정도였는 데, 이에 관찰사가 강명한 수령을 택하여 그 이웃들을 추문해보아도 두려워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93) 지방 세력이 강성한 것은 남원 지역에만 국한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음은 다음과 같은 중종의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품관의 作弊는 유독 남원만이 아니라 下三道 도 반드시 모두 그러할 것이니 일일이 규찰할 수가 없다.” 하였다.94)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전라도 인심의 완악함이 경상도보다 심하다는 것은 본디 말해온 바이지만, 지금은 경상도 또한 다를 것이 없다. 두 도 만 그러할 뿐 아니라 다른 도도 그러하니, 이것은 교화가 아래에 퍼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95)
92) 중종실록 권17, 7년 11월 4일(甲戌). “順汀曰, 臣聞南原品官强悍, 府內才、白丁本二千餘人, 皆爲品官所使。一品官率三四十人, 而使居於其 家圍內, 衙前未得督出, 守令若推尋, 則必中毒。且役使官奴婢, 如父祖奴 婢。懦弱守令, 或成給立案, 至於官無可使之人。其爲弊已久, 守令亦不能 禁戢。如此品官, 當令推察, 已甚者治以大罪, 則庶幾無如此之弊矣。”
93) 중종실록 권21, 10년 4월 20일(丁未). “臺諫啓前事, 又曰, 南原有土 豪品官金世基、黃愷、金楹者居鄕, 强悍特甚, 故一時稱爲三害。觀察使金 世弼擇定剛明守令, 使推問三切隣, 其切隣亦皆畏怯, 莫敢發言, 請令義禁 府, 拿來推問, 以治其罪。”
94) 중종실록 권17, 7년 11월 4일(甲戌). “上曰, 品官作弊, 非獨南原, 下 三道必皆然矣, 不可一一糾察。”
95) 중종실록 권31, 12년 윤12월 4일(乙亥). “上曰, 全羅道人心之頑惡, 素稱甚於慶尙道, 今則慶尙道亦無異矣。非徒兩道爲然, 他道亦然, 此由敎 化之未盡孚於下也。”
비슷한 시기 강원도 관찰사의 장계에서도 강릉의 품관 세력이 강 성하여 떼 지어 살면서 완악하고 거만하여 관원을 멸시하는 자가 자못 많다는 지적이 나왔다.96) 그리고 경상도 지역에서도 토호 가 운데 제어되지 않은 자들이 있어 昌寧, 靈山 등지에는 관청에 전세 조차도 바치지 않는 토호들이 문제시되었다.97) 또한 인동지역에서 생원 윤탕우 등이 떼를 지어 군현을 두루 돌아다니며 횡행하는데 수령들이 자신들을 비방할까 두려워하여 그들의 요구에 응해 준 사 례도 있었다.98)
세조 말에 혁파된 재지 세력들의 기구인 유향소가 성종대 부활된 이후 연산군의 학정이 계속되면서 유향소는 수탈기구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고, 이를 통한 권세가의 지방 사회에 대한 수탈은 구조적으 로 이루어졌다. 경재소와 유향소에 의해 지방이 침탈되는 형세는 중 종반정 후에도 개선되지 않았고, 향촌 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중종대에도 이어졌다. 유향소 혁파 운동이나 향약 보급운동 또한 지방 세력들에 의해 어지러워지는 지방 사회 질서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99)
96) 중종실록 권21, 9년 10월 6일(乙未). “江陵府使金彦平病死。本府, 道內巨邑, 而近來非唯疲弊, 品官强盛, 群居邑內, 頑慢蔑官者頗多, 須擇有 威重, 鎭俗、興廢者, 差遣爲當。”
97) 중종실록 권21, 9년 12월 19일(丁未). “大司憲宋千喜曰, 臣前爲慶尙 道監司時, 土豪、品官之最强者, 推覈而徙邊矣。其後孫仲暾語臣曰, 土豪, 尙有未及制者, 昌寧、靈山等處, 有數三土豪, 至於田稅, 亦不納官云。耕食 國土, 而至於不稅, 頑惡孰甚, 固宜推懲。”
98) 중종실록 권36, 14년 6월 13일(乙亥). “前者有如此橫行出入者, 法司 察之。 其時指目曰桴生員、傳遞生員。[前者生員尹湯佑等, 結伴作群, 周 歷郡縣, 守令畏其非毁, 迎勞甚款, 所求靡不應, 時人謂之桴生員, 以其群聚 橫行, 比之桴筏謂之。 傳遞生員, 以其騎駄僕從各邑傳遞而送之也。]”
토호 품관들뿐만 아니라 향리들 또한 매우 완악하고 횡포를 부리 는 경우도 있었다.
전라도 관찰사 金璫이 書狀을 올리기를, “지난 윤 4월 20일에 靈光郡 의 아전들이 本邑의 수령을 謀背하여 관아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일절 금지하여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서로 의논하여 아래 吏卒들을 유인해 이름을 쓰게 하고 이에 그것을 도모한 우두머리의 집에 차례로 돌아가 며 연회를 열고, 기녀를 불러다 놀면서 4, 5일이 되도록 출근하지 않은 채 그 고을을 배반하니 변고가 매우 큽니다. … 이 고을은 민심과 풍속 의 완악함이 더욱 심하고 아전들의 횡포가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으 니 새로 임명하는 수령은 위엄과 명망이 있고, 밝고 바른 사람을 골라서 보내소서.” 하였다.100)
당시 지방의 토호 품관들과 향리들의 세력은 강했고, 그 세력을 바탕으로 지방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수령으로 제어되 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징벌하고 제어하는 것은 조정의 큰 고민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1524년(중종 19) 전염병의 확산으로 평안 도가 황폐해지자 入居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고,101) 죄를 지은 사 99) 이태진, 앞의 책, 306~313쪽.
100) 중종실록 권22, 10년 6월 12일(丁卯). “全羅道觀察使金璫書狀曰, 去閏四月二十日, 靈光郡人吏等, 謀背本邑, 官衙仕進人等, 一切禁止, 使不 得入, 自相立議, 其下吏卒, 誑誘援引, 署姓名, 乃於首謀人等家, 輪次設辦, 招妓宴會, 至四五日不仕, 以叛其邑, 變故甚大。 … 此郡民心風俗, 頑惡尤 甚, 人吏暴橫, 其來有漸, 新除授守令, 請擇差有威望明正人。”
101) 入居는 사변과 같은 의미인데, 자기의 영역을 ‘전제’로 하여 ‘들어가 살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이는 ‘入居’라는 구체 개념은 정 당한 영유권에 대한 당위 의식이 현실의 지배의식과 아직 충돌하고 있 던 초기 단계의 언어표현이라고 보는 연구도 있다. 김지수, 2005 「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