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미국과 태국: 적대적 관계의 청산과 협력
1) 태국의 원조의 필요성
그렇다면 앞에서 설명한 인도네시아의 동맹전략 형성 과정과 태 국의 사례는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태국이 인도네시아가 직면했던 것과 비슷했던 조건은 무엇이었으며 그러한 비슷한 조건 속에서 인도네 시아와 차이를 보였던 상황은 무엇이며 태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어떤 다 른 선택을 한 것인가?
먼저 앞에서 인도네시아의 경제 상황을 다룬 것과 마찬가지로 태국 역시 인도네시아와 비슷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동안 독립국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던 태국의 경제상황은 막 독 립을 쟁취한 인도네시아 보다는 안정적인 상태였다. 당시 태국의 경제상 황을 점검한 그리핀 보고서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태국은 전 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57) 그러 나 이러한 상대적 안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태국의 경제 상황은 외국의 원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47년 쿠데타 당시 태 국은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주요 수출 품목이었던 쌀이 품귀현상을 빚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패전국이었던 태국은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경제 간섭 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46년 1월에 영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태 국은 쌀 생산과 수출에서 영국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국 은 전쟁 배상금으로 150만 톤의 쌀을 태국 주변의 말레이시아 등의 식 민국가에게 무상으로 공급하라고 요구했고 설상가상 쌀 수입업자들이 엄 격한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쌀을 외국에 밀수출함으로써 쌀 품귀현
157) Hayes, 1971, p. 227.
상이 초래되었다. 이에 따라 1947년 9월에는 쌀을 구하지 못한 수백 명 의 철도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는 등의 사회적 소요가 발생하기 시작한 다.158) 이밖에도 주석과 고무를 비롯한 주요 수출품의 생산은 세계 대전 이전의 생산상태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1940년에 24,000톤에 이르 렀던 주석 생산은 1947년에 5,500톤으로 급감했고 남부 지방의 채광 산업도 전전의 상태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159)
그리고 태국 경제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경제제재와 수출 통제로 인한 주요 수출품들의 수출이 이루 어지지 못하고 밀수가 횡횡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부족한 옷과 의약품, 기계 등의 국민 생활과 산업 재건에 필 수적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자본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부족한 외화 를 보충하기 위해 태국 정부는 1946년 보유하고 있던 금을 달러로 바꾸 고 화폐를 절하하려는 시도를 하나 오히려 정부의 금융 정책의 불안감만 을 조성하게 된다. 그리고 소비재 부족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설 립했던 식량생산기구(Food Drive Organization)은 부패한 소매 업자들 이 식량을 대량 구매해 높은 가격에 파는 행위를 벌이면서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고 만다.160) 결국 <표4-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쟁 직후인 1946년과 1947년, 태국의 생계비 지수는 급상승하고 바트(baht)의 구매 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158) 김홍구,『태국군과 정치』(서울: 전예원, 1996), p. 97.
159) Virginia Thompson, "Government Instability in Siam," Far Eastern Survey, Vol.
17, No. 16 (Aug 1948), p. 186.
160) Thompson, 1948, p. 187.
연 도 생계비지수 1바트 당 구매력
1939 102.60 97.47
1940 112.60 88.73
1941 132.90 75.24
1942 176.99 56.50
1943 221.92 45.06
1944 466.89 21.42
1945 904.66 11.05
1946 1071.57 9.33
1947 1247.11 8.02
<표4-1> 1938-1947 태국의 생계비 지수
출처: 김홍구, 1996, p. 96.
전반적인 경제적 위기와 함께 외국의 원조의 필요성은 무엇보다 도 군부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즉, 인도네시아가 국민 생활 안정과 전반 적인 경제적 성장을 위한 지원을 주로 필요로 했던 것에 반해 태국의 경 우는 권력 집단 내 군부라는 특정 세력이 경제적 원조에 대한 요구가 컸 다. 태국 군부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연합군의 요구에 따라 강제예편을 당했고 퇴역한 군인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 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큰 불만을 제기하게 된다.161) 실제로 문민정부였 던 프리디 행정부는 군부 내의 불만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미국의 군사지원과 군사훈련 프로그램의 시행을 요구하게 된다. 1947년 피분의 쿠데타 직전에도 프리디 행정부는 외무장관인 아타킷 (Atthakit Phanomyong)을 미국으로 파견해 당시 국무 장관이었던 조지 마셜 (George Marshall)에게 군대를 재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와 원조를 요청한다.162) 피분 역시 쿠데타 직후인 1947년 12월, 사절을 보내 태국 군대에 대한 재무장과 훈련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다.163)
군부의 파벌적 이익의 필요이외에도 미국의 군사원조에 대한 필
161) 김홍구, 1996, pp. 132~133.
162) Daniel Fineman, A Special Relationship: The United States and Military Government in Thailand, 1947-1958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7), p. 30.
163) Fineman, 1997, p. 70.
요성은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었다. 미국의 군 사적 원조에 대한 필요성은 집권세력인 피분과 그 반대 세력인 프리디의 자유타이운동 세력이 동시에 공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동 안 자유타이 군대에게 지속적으로 미국제 무기를 공급해왔고 군대에 대 한 훈련과 병참을 제공해 왔다. 태국 군부 역시 전통적으로 군사적 지원 을 받아왔던 영국의 지원이 제한되는 시점에서 미국의 군사 원조에 대한 의존이 심해졌다. 태국 군부로서도 안보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원조가 필 요했는데 영국의 영향력과 힘이 쇠퇴한 시점에서 실질적인 원조를 제공 할 수 있는 상대는 미국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164)
즉, 태국에게 있어 미국의 원조는 경제적 성장과 최대 세력으로 부상한 군부의 파벌적 이익, 그리고 안보적 요인에 의해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