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새로운 페미니즘의 가능성
3.1.3. 페미니스트 ‘신여성’의 재해석
지금까지 살펴 본 소재인 여성의 교육 및 직업 활동은 ‘신여성’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 운동’에서도 중요하게 논의되었던 부분이다.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짐으로써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고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기사 분석을 통해서 Femina에서 이 두 가지 영역을 다룰 때 이것들이 근본적으로 여성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 및 발전을 가 져올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다만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는 ‘신여성’들이 당시 일반 대중에게 거부감이나 편견 없이 보다 수 월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이미지를 연출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Femina속의 ‘신여성’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여 성, 아름다움을 꾸준히 가꾸는 여성과 같이 보수적인 여성관을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Femina식 신여성’을 보다 희망적이고 발 전적인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부분 역시 분 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Femina식 신여성’상에 대한 보다 명확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 이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권리 신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경우, 특히 당시 적극적 인 페미니즘 운동을 펼친 활동가들이 강하게 주장했던 여성의 투표권 쟁 취나 여성 노동조합 결성 등에 관해서 Femina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 으며,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주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간호에서 Femina는 자신들이 페미니스트 잡지가 아니라 고 명확하게 선언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Femina가 페미니즘 이 슈를 다루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Femina가 이러한 주제
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야 말로 이 잡지의 성격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데 핵심적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Femina는 당대 유명한 여성 페미니스트 활동가에 대한 기 사를 실을 때 앞서 3.1.1.과 3.1.2.에서 살펴보았던 바와 유사한 이미지 연 출법을 활용하고 있다. 해당 여성 인물이 펼치는 적극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을 하지 않고 그녀의 다른 업적을 주로 조명 한다거나, 언급한다 하더라도 다른 이미지 묘사와 함께 소개하는 양상을 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02년 2월 1일자 ‘Silhouette de femmes’ 코너에서는 모드 곤(Maud GONNE)라는 아일랜드 출신 여배우 를 소개한다.137)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뮤즈이기도 했던 그녀는 아일 랜드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여성의 투표권 획득을 외친 (suffragette) 페미니스트이기도 하였다.138) Femina는 이런 배경의 그녀 가 이번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독립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파리를 방문 했다며 그녀의 활발한 정치 활동에 대해 밝히고 있으며, ‘전투적 정치 (politique militante)’, ‘혁명가(révolutionnaire)’ 등의 직설적인 표현을 써 서 그녀가 적극적인 여성 활동가임을 밝힌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묘사 에서는 “굴곡 있고 유연한(onduleuse, flexible)”, “어린아이 같으며 노래 하는 것 같은 목소리(la voix enfantine et chantante)”, “나긋나긋한 세라 핌(séraphin mièvre)”, “온화하고 꿈꾸는 뮤즈(muse tendre, rêveuse)”,
“미소 가득한 재치(humour souriante)” 등의 표현이 동원된다.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위험한 활동까지 감수하는 그녀의 용기는 유 행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예술가적 안목으로 적절히 변형시키는 확고한 취향으로 연결된다.139) 이러한 묘사들은 대중이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 는 이미지, 즉 사회를 향해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어느 정도 희
137) “Miss Maud Gonne”, Femina, 1902/02/01 138) Wikipedia english, 검색어: Maud Gonne
https://en.wikipedia.org/wiki/Maud_Gonne
139) “De même qu’elle a le courage de ses opinions jusqu`à l’activité périlleuse, elle a le courage de ses goûts en toilette. Elle ne suit pas la mode : elle la côtoie, avec la fantaisie d’une artiste (...)”
“Miss Maud Gonne”, Femina, 1902/02/01
석시킬 수 있는 완충적 효과를 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Femina는 그녀가 벌였던 페미니스트 활동보다는 아일랜드 독립 운동에
더 초점을 맞춰 소개하고 있다. 특히 어린 시절 지주였던 아버지의 영토 에서 힘겹게 살던 가난한 농민들을 보며 조국과 자국민을 위해 헌신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켈트족과 골족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우리 아일랜드 사람에게 프랑스는 우리의 또 다른 조국이다”라고 이야기한 것 등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면서 그녀의 전투적인 정치 활동에 프랑스 독자 들이 좀 더 공감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해당 여성 인물의 페미니스트 활동 외에 다른 업적을 강조하고 강경한 페미니스트적 이미지를 완화시킬 수 있는 다른 이미지를 덧씌워 제시하는 것은 다른 기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02년 3월 1일자
‘Silhouette de femmes’ 코너에서는 2월 6일 사망한 여성 학자 클레망스 로와예를 기리며 그녀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140) 인류학, 철학, 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학술 활동을 벌여왔던 그녀는 La
Fronde를 위해 뒤랑과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페미니스트였으며, 결혼 제
도에 반대하여 자유로운 동거(union libre)를 선택했던 인물이다.141) 이러 한 그녀의 죽음을 알리면서 Femina는 그녀가 학문적으로도 당대 중요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현대 페미니즘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임 을 밝히고 있다.142) 그러나 Femina는 이러한 설명에 뒤에 “모든 여성이 그녀의 견해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모든 여성은 그녀에 대해 자랑스러 워 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특히 기사에서 그녀의 업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주로 그녀가 영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면서 공부했던 것, 그 결과 그 녀가 프랑스 최초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의 불역판을 낼 수 있었 다는 것, 꾸준한 연구 활동을 통해 남성 학자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레지 옹 도뇌르까지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이처럼 그녀의 학술 활
140) “Mme Clémence Royer”, Femina, 1902/03/01 141) Wikipédia français, 검색어: Clémence Royer
https://fr.wikipedia.org/wiki/Cl%C3%A9mence_Royer
142) “(...) elle a tenu une grande place dans l’histoire intellectuelle de ce siècle, et le «féminisme» moderne la revendique comme un de ses chefs.”
“Mme Clémence Royer”, Femina, 1902/03/01
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녀가 펼쳤던 페미니스트 활동은 언급되지 않았을 뿐더러 이 기사를 통틀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를 언급한 것 역시 기사 도입부분에 딱 한 번에 불과하다. 이러한 연출 및 서술 전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건데, 이는 그녀의 페미니스트적 견해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그녀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세계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것을 높이 평가하여 자랑스러운 여성상으로 만 들기 위한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어 보인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La
Fronde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알린 방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
다. La Fronde는 1902년 2월 7일자 신문 1면에 “La Mort de Clémence Royer”라는 기사를 실으면서 그 제목을 다른 소제목보다도 큰 글씨로 표기하여 그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그림 3-5] 참고) 그림 기사의 내용을 보면 La Fronde의 필진들이 장례식 때까지 그녀의 시신 을 지킬 것이며, 장례식부터 향후 그녀의 유작 출판까지 관리할 위원회 에 편집장인 뒤랑이 참여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그녀 개 인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녀의 학문적 업적만을 객관적으로 제시 하고자 했던 Femina의 기사와는 그 어조가 상당히 다르며, 오히려 La
Fronde야 말로 학자이자 페미니스트였던 그녀의 정통성을 물려받을 수
있는 집단임을 알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3-5]
이처럼 적극적인 페미니스트 활동가 여성 개인을 다루는 경우, 2 가지 방향에서 이미지 연출이 시도되고 있다. 먼저 해당 여성 인물의 강경한 페미니스트 활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거나 이에 대한 서술을 최소화하면서 이와 관련 없는 다른 훌륭한 업적을 제시함으로써 이 인물 에 대한 이미지를 온화하게 바꾸고자 했다. 두 번째로는 적극적 페미니 스트 활동가들이 주목했던 부분, 특히 여성 노동자 연대 문제와 여성의 투표권 문제 등에 관해서 Femina는 이 이슈들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깰 수 있는 방향으로의 이미지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
먼저 여성 노동자의 연대 내지 노동조합의 경우, 여성 조합원들이 자 신들의 권리만을 요구하는 전투적인 연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한 건설적인 협동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Une journée dans un atelier de Femmes en Amérique”143) 기사에서는 이곳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연대가 물론 1차적으로는 보다 나은 작업 환경, 근무 시간 외 충분한 휴식 및 여가 활동 영위 가능 등 여성 노동자 자신들의 노동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한 것임을 인정한 다. 그러나 기사에서 좀 더 방점을 찍고 있는 부분은 이들 여성 노동자 들의 연대가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진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빈민가 주민들이나 같이 자신들보다 더 불우한 이웃과 어린이들을 돕는 자선 활동과 같은 긍정적인 범사회적 연대로 확대, 발전되었다고 덧붙인다. 물론 공장의 여성 노동자를 ‘신여성’이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여성의 연대를 곧바로 ‘바 블뢰’ 또는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의 연 대로 떠올리는 프랑스의 대중이 갖고 있는 여성 연대에 대한 부정적 편 견을 바꾸고자 노력한 기사로 읽을 수 있어 보인다. 다시 말해, 우울하고 억세다는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대중의 편견과는 달리 이들 여성 노동자 들을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숙소(cottages simples et élégants)”에서 지 내는 깔끔한 여성(les girls vêtues de robes blanches de cette irréprochable propreté qui est le luxe de l’Amérique)으로 탈바꿈시킴과 동시에 이 기사는 여성의 연대가 반드시 그녀들만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
143) “Une Journée dans un atelier de Femmes en Amérique”, Femina, 1905/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