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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새로운 페미니즘의 가능성

2.2.1. La Fronde 식 페미니즘의 한계

먼저 La Fronde식 페미니즘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성성을 충분

77) 햇수로만 보자면 1897년부터 1905년까지 8년 동안 발간되었으나, 1897년에 12월 부터 발간되었고 1903년 8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월간지로 변경되었다는 점에서 La Fronde가 일간지 형식으로 발간된 것은 5년 9개월 정도이다.

히 활용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 외에 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할 만한 요소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한계로 La Fronde가 은연 중 내포하고 있던 부르주아적 페미니즘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그림 2-3]

[그림 2-4]

[그림 2-3]은 La Fronde와 잦은 교류가 있었던 클레망틴-엘렌 뒤포 (Clémentine-Hélène DUFAU)라는 페미니스트 여성 화가가 1898년에 그 린 La Fronde 홍보 포스터다.78) 그림 속의 ‘프롱되즈’는 중상류층 이상 의 모습으로, 그녀가 이끄는 주변 여성들은 서민층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는 분명한 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 La

Fronde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 개선 및 노동조합 결성을 지지하

는 기사를 자주 다루면서 서민층 여성들의 삶에 있어 현실적으로 필요한 변화에 대해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그림 속의 ‘프롱되즈’가 주위 여성을 이끄는 모습은 동료 여성과 연대하여 보다 나은 미래로 함 께 나아가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우월한 조건 속의 아름다운 부르주아 여 성이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여성들을 계도하는 리더의 모습을 하고 있어 보인다. [그림 2-4]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이 그림은 La Fronde의 편집진 사무실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을 만큼79) 이 그림이 La Fronde 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는 데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면, La Fronde식의 페미니즘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서 먼저 혜안을 갖게 된 부유한 부르주아 여성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불운한 낮 은 계층의 여성을 계몽하여 인도해야 한다는 시혜적인 사고방식을 바탕 으로 하는 부르주아적 페미니즘인 것이다. 일례로 창간부터 시작해서 La

Fronde와 오랫동안 함께 해온 대표 필진 마리아 포뇽은 그녀에게 향했

던 “부르주아적 수단과 오로지 부르주아적 목적 추구와 함께 하는 막연 한 인도주의(une humanisme vague, poursuit avec des moyens bourgeois des buts uniquement bourgeois)”라며 더 이상 여성 노동자들 을 들먹이지 말라는 비판에 대해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 키기 위해 필요한 여가시간이 없지 않느냐(Les ouvrières n’ont hélas pas les loisirs nécessaires pour défendre leurs droits !)”고 반문하며

“여성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들이 용감하게 이 임무를 도맡을 경우에만 그

78) R. E. Iskin, ‘Popularising New Women in Belle Epoque Advertising Posters’, in D. Holmes, C. Tarr, A ‘Belle Epoque’? Women in French society and culture 1890-1914, Berghahn Books, 2006, pp.98 참고.

79) A. Metz & F. Rochefort, op cit., pp. 32 참고.

들의 권리, 특히 경제적 권리를 획득할 수 있을 것(Les ouvrières ne pourront conquérir leurs droits, notamment économiques, que si les bourgeoises se mettent vaillamment à la besogne !)”이라고 받아치기까 지 했는데80) 이러한 그녀의 반응은 La Fronde가 은연 중 이와 같은 시 혜적인 부르주아 페미니즘의 사고방식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 례라고 할 수 있겠다.

2.2.2. ‘ La Fronde 식 신여성’상과 대중의 거부감

두 번째 한계는 La Fronde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과 관련된 것으 로, 두터운 지지층 구축의 실패를 들 수 있다. La Fronde는 그 고유의 이중적 이미지 연출로 인해 어느 한 집단에서조차 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였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La Fronde는 페미니스트 진영을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삼는 데 에 실패했다. 마들렌 펠르티에와 같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뒤랑식의 모호한 페미니즘을 극도로 혐오했다. 사교계 여성 내지 ‘salonnière’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강하게 풍겼던 뒤랑에 대한 거부감과 그녀의 부유한 부 르주아적 취향, 그리고 그녀가 여성의 참정권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 던 것 등이 주요 이유였다.81)

다음으로 뒤랑 스스로가 선택했던 전략 중 ‘salonnière’적 이미지 연출 은 대중이 뒤랑을 전문적인 언론인이 아닌 문란한 사교계의 여성이라고 평가절하 하는데 일조했다. 이미 19세기 중후반 프랑스에서는 언론이 타 락할 대로 타락했다는 언론의 위기설이 사회적으로 제기되고 있었다.82) 발자크(H. de Balzac)는 소설 『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dues』에서 연극 극장으로부터 뒷돈을 받고 여배우들과의 밀회를 제공받으며 특정 공연에 호의적인 기사를 써주고, 개인적 원한으로 사교계 인사를 비방하

80) E. Coquart, op cit., pp. 91 참고.

81) M. L. Robert, op cit., 2장, M. Allison, op cit., pp. 38-43 참고.

82) M. L. Roberts, op cit., pp. 78 참고.

는 기사를 싣는 타락한 19세기 언론인의 모습을 이미 적나라하게 폭로한 바 있다. 이처럼 언론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연극배 우 출신의 여성이 사교계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운영하는 신 문은 대중의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다음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먼저 La Fronde 가 발행 내내 겪었던 만성적인 적자에도 불구하고 이 신문을 6년 동안 운영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그녀의 부자 남성 후견인(이 자 연인, 이 중 에드몽 드 로칠드Edmond De Rothschild 남작 등이 거론 되었다고 한다)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 고 있었다.83) 또한 [그림 2-5]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대중들의 인식을 어 느 정도 미뤄 짐작할 수 있어 보인다. 이 그림은 당시의 여러 신문들(La Presse, Le Temps, Le Petit Bleu, L’Eclaire 등)을 여성으로 의인화하 여 표현한 것으로 이 때 여성들은 Le Temps지를 상징하는 여성을 제외 하고는 속옷 차림과 같은 선정적인 옷차림을 한 여성 배우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 시리즈에 La Fronde 역시 포함되어 있는데, 이 그림 중 중간 중의 맨 오른쪽 여성은 La Fronde를 상징하는 여성으로 가슴을 훤히 드러내면서 그 위에 연미복을 걸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La Paix지는 La Fronde에 대해 “생라자르의 Le Moniteur84)지”라고 평가하기까지 했었다.85) 19세기 초반부터 생라자르 병원(겸 감옥)은 파리 시 당국이 매춘부들에게 정기 검진을 받도록 지정 한 병원이었으며 법을 어긴 매춘부들은 이곳에 구금되었다는 점을 볼 때86) 이러한 평가는 당시에 La Fronde를 매춘부와 연결시켜 조롱하던 남성들이 존재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밖에 여성이 기자로 활동하는 것 역시 La Fronde에 대한 대중의

83) E. Coquart, op cit., pp. 111 참고.

84) Le Moniteur(1789-1901): 의회, 국내 및 국외 정치, 행정, 문학, 과학과 예술 이 렇게 5가지 보도국으로 구성되어 발행되던 일간지. 최초 발행 약 한 달 후 1799 년 12월부터 1869년까지 공화국 및 제2제정의 공식 신문 역할을 맡았다.

검색어: Le Moniteur universel

https://fr.wikipedia.org/wiki/Le_Moniteur_universel 85) E. Coquart, op cit., pp. 109 참고.

86) J. F. McMillan, France and women 1789-1914, Routledge, 2000, pp. 107 참고.

편견을 더욱 강화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뒤랑은 직접 현장 에서 보고 들으며 취재를 하는 리포터를 강조하며 여성 역시 남성과 똑 같이 정확하고 자세한 취재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세브린은 사무실 안에서 글만 쓰는 “Journalisme assis”와 직접 발로 뛰며 생생하 게 현장을 취재하는 “Journalisme debout, courant, alerte, s’assouplissant à l’actualité”를 구분할 만큼 La Fronde는 리포터 취재 를 상당히 강조했었다.87) 그러나 이 리포터라는 직업 역시 기본적으로 가정 밖으로 나가야 하는 직업이다. 이 역시 자연이 여성에게 부여한 역 할, 즉 집안 살림을 관장하며 남편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미모를 가꾸 고 남편의 혈육이자 공화국의 시민으로 자라날 아이들을 보살피는 역할 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직업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1898년 3월 15일자 La Plume지에서 앙리 네르(Henri NER)가 세브린과 ‘프롱되즈 (frondeuse)’를 ‘남성혐오(misandrie)’ 집단이자 ‘아마존의 여성들 (amazones)’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던 것은88) 뒤랑의 이미지 연출에도 불 구하고 남성들의 눈에는 여전히 La Fronde의 구성원들이 여성성을 잃 고 전투적인 행동을 일삼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 인 사례이다. 이밖에 여성 리포터라는 직업 자체가 남성 언론인의 조롱 거리가 되기도 했는데, 1897년 12월 15일 L’Écho de Paris지에서는 La

Fronde의 리포터에 대해 비아냥거리면서 여성 리포터가 거리에 나가서

취재를 하는 목적을 몰래 연인을 만나거나 결혼 상대를 물색하기 위한 핑계거리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89)

이처럼 당시 프랑스 사회의 그 어느 집단도 뒤랑이 La Fronde를 통 해 제시했던 ‘신여성’상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프랑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La Fronde식 신여성’상이 내포하고 있던 그 이중성 내 지 모호함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뒤랑과 La Fronde는

“사회주의자들에게서는 너무 부르주아적이라고, 부르주아들에게서는 너

87) Roberts, op cit., pp. 88 참고.

88) P. Izquierdo, ‘Des ’ouvrages de dame’ à la ”littérature féminine“: Réception masculine des écrits féminins à la Belle Époque’, Femmes et livres, L’Harmattan, 2007, pp. 222 참조.

89) Ibid., pp. 89 참고.

무 혁명적이라고, 파리 사람들에게서는 너무 진지하다고, 그리고 지방 사 람들에게서는 너무 파리지앵스럽다고”90) 평가되었다. 대중 전반에게 거 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기에는 충돌하는 이미지가 한꺼번에 혼재되어 있었 으며, 이를 잘 다듬어 대중에게 내놓는 전략이 부재했던 것이다.

[그림 2-5]

90) La Fronde, 1903/10/01

3. ‘ Femina 식 신여성’의 이미지 형성과 각인

우리는 지금까지 Femina 등장 이전 프랑스 사회 내에 존재했던 ‘신여 성’상의 변천 과정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를 요약하자면, ‘초기 영미 권식 신여성’상이 프랑스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북유럽식 신여성’에 대한 프랑스인들만의 독특한 해석과 당시 프랑스 주류 남성들의 반(反)페미니 스트적 성향과 결합하면서 ‘초기 프랑스식 신여성’(신여성 = 페미니스트

= ‘바 블뢰’라는 인식)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초기 프랑스식 신여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La Fronde식 신여성’이 등장했다. 이 때 ‘La Fronde식 신여성’의 이미지는 대중들이 가지는 편견, 즉 ‘신여성’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 모 두를 잃고 거리로 나가 여성의 권리만을 외치는 강경한 페미니즘 활동가 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여성성, 아름다움, 이것이 갖는 유혹의 힘(le pouvoir de la séduction)을 강조한 여성이었다. 페미니스트도 충분히 아 름다울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이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활용 하여 페미니스트 자신과 자신의 주장을 대중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전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교육 확대, 여성의 노동권 보호 및 노동 환경 개선 등 여느 페미니스트와 같이 남성 주류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강경한 주장을 매일같이 쏟아냄과 동시에 여성성을 강조했던

‘La Fronde식 신여성’은 그것이 동시에 담아내고 있는 이미지의 간극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주류 사회와 페미니스트 집단 양쪽 모두로부터 비난 을 받고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큰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La Fronde는 결국 폐간되게 된다.

한편으로 La Fronde와 비슷한 시기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 3년 뒤(1901년) 발간되기 시작한 여성지에서도 19세기 말엽부터 형성되었던

‘초기 프랑스식 신여성’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유형의 신여성상을 제 시하고 있었으며, 이 잡지가 바로 Femina이다. 흥미로운 점은 La Fronde와 주요 필진이 상당수 겹치며(La Fronde에 활발히 기고한 세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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