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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도의 대북협상에 대한 반응

은 1998년 12월 7일 페리 조정관과의 면담에서 대북 포용정책이 유 일한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하며, 북한의 핵·미사일 포기와 미·북, 일·북 수교를 통한 체제보장 등의 포괄적 협상안을 제시하였다. 임동 원 당시 외교안보수석은 한반도 주변 4국을 방문하며 포괄적 협상방 안에 대한 주변국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측의 적극적 설득에 의해 1999년 4월 24~25일 하와이에서 개최된 한국·미 국·일본 고위정책협의회에서 3국은 우선 북한에 대해 핵과 미사일 개 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북한이 이에 호응하면 정치·경제적 대가를 제공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대북 압박을 가 한다는 한국측이 제시한 포괄적 협상방안에 합의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5월 5일 CNN과의 회견을 통해 남북한 적 대관계 해소, 미국과 일본의 대북관계 정상화, 북한의 변화와 개방 을 위한 여건 조성, 한반도에서의 대량살상무기 제거 및 군비통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구상을 밝혔다.40)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구상은 핵·미 사일 문제만으로는 풀 수 없는 남북관계, 북한체제의 변화 가능성, 한반도 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원하는 민족적 의지 등을 고려하여 한 국이 주도적으로 남북관계의 구조적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임동원 당시 외교안보수석은 페리 조정관과 지속적 인 접촉을 갖고 이와 같은 김대중 대통령의 구상을 적극 설득하였다.

한국측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결과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대북 포 괄적 협상방안과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방안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대북정책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1999년 9월 15일 클린턴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하였다.

40) 신상진 외,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주변국 협력유도방안」 (서울: 통일 연구원, 1999), pp. 22~26 참조.

페리보고서 작성을 계기로 북한과 미국을 설득하는 데 자신감을 갖게 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월 신년사를 통해 남북경제공동체 형성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3월 9일 북한 당국이 요청해 오면 농업구 조 개선 지원을 비롯하여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협력할 용의가 있 다는 내용의 베를린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대북접촉을 적극 추진하였다.41) 대북지원 확대를 약 속하며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한국 정부의 시도는 핵·미사일 문제 의 우선적 해결을 원하는 미국주도의 한·미·일 공조체제 틀 안에 안 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사실 남북정상회담은 미국 의 주도하에 추진되어온 대북 협상구도를 남북대화가 미·북대화보다 선행하는 구도로 전환시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북·미관계 개선과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두 개의 축이 조화·병행되어 야 한다는 것이 제네바 합의와 관련된 클린턴 행정부의 기본노선이었 다. 미 국무부는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는다면 북·미관계도 결국 한계 에 봉착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 기본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동년 4월 10일 남북정상회담 개최 계획을 발표하자 미국측은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가 등한시될 가능성을 우려 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셔먼(Wendy Sherman) 미 국무부 자문관의 서울 방문을 통하여 그 동안 한·미·일 3국이 협의해 온 현안문제들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적절히 논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즉, 한 국측이 남북정상회담에서 핵·미사일 문제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15일 평양 41)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남북간 물밑접촉에 관한 논의는 최원기·

정창현 「남북정상회담 600일」, pp. 154~180 참조.

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한의 연합제 안과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의 공통성 인정,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교류·협력 활성화, 남북 당국간 대화 개최 등의 내용을 담은 6·15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남북정상회담 직후 클린턴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이 기대 이상으 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며 남북한 긴장완화를 적극 지지한다는 의 사를 표명하였다. 미 국무부는 동년 6월 19일 클린턴 대통령이 발표 (1999. 9. 17)하였던 대북 경제제재 완화조치 내용을 연방관보 (Federal Register)에 게재함으로써 완화조치를 공식 발효시켰다. 또 한 북한을 불량국가로 부르지 않고 ‘우려 대상국’(state of concern)으 로 바꿔 부름으로써 북한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 다. 이와 같이 미국은 남북정상회담이 과거 남북회담과 달리 긍정적 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평가하였지만 북한의 실질적 태도 변화 는 속단할 수 없다는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42)

미국은 또한 남북정상이 합의한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의 의미 에 대해 경계하는 인상을 내비쳤다. 이는 북한측이 주장해 온 미군철 수를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43) 이에 한국은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 결이란 한반도 문제를 남북한이 당사자가 되어 해결한다는 것을 의 미한다고 설명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주한미군은 동북아에서 안보균형자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철수할 수 없다고 설명했음을 강조하였다.44)

42) Steven Mufson, “U.S. Lauds Korean Talks, Says More Work Ahead,” The Washington Post, June 16, 2000; Stephen Bosworth 주 한 미국대사 인터뷰 내용, 「월간 조선」 (2000. 8), pp. 110~116, 참조.

43) Doug Struck, “Two Koreas Sign Conciliatory Accord,” The Washington Post, June 15, 2000.

44) 6·25 50주년 기념 김대중 대통령 연설문 내용, www.cwd.go.kr; 「한겨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한국은 대북정책에 관한 한·미·일 공조체제 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남북관계 개선이 미국·일본의 대북관계 개 선과 조화·병행하여 추진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한국의 이러한 노력 은 미국측의 대북 협상력 약화에 대한 우려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경계심을 많이 해소시켰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주도의 대북협상에 긍 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북한이 주한미군 주 둔을 용인하는 태도를 보이며 미사일 협상에도 타협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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