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北宋 災異說과 黨爭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3

Membagikan "北宋 災異說과 黨爭"

Copied!
27
0
0

Teks penuh

(1)

北宋 災異說과 黨爭

-王安石‘天變不足畏說’에 대한 再考-

洪 承 兌 (慶熙大)

Ⅰ. 머리말

Ⅱ. 天變不足畏說의 발생 경과와 政

Ⅲ. 災異說의 양면성과 정치적 왜곡

Ⅳ. 春秋“斷爛朝報”와 春秋

災異說

Ⅴ. 맺음말

Ⅰ. 머리말

宋代 이전부터 天災地變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닌 인간사의 길흉 화복이나 통치자의 정치적 성패와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홍수, 가뭄,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나 원인불명의 천문 이변현상이 인간의 도 덕적 정치적 행위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古代의 전통적 관념이다.

주지하다시피, 漢代 董仲舒에 의해 정치학설로 성립한 災異說(天人 感應說)은 고대의 과학문명이 절정에 이른 宋代에도 여전히 그 영향력 을 발휘했다. 유교적 통치이념에 입각해 文治主義를 표방한 宋朝의 정 치에서 災異說은 북송 중후기 黨爭의 중심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北宋 개혁가 王安石(1021-1086)의 變法 실행시기, 당쟁의 격화 와 개혁 실패에는 災異說이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宋 神宗의

(2)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王安石의 변법이 추진되었던 시기, 司馬光 (1019-1086)을 비롯한 반대파들은 천재지변과 천문 이변현상이 王安 石의 개혁조치와 관계있다는 災異說을 근거로 맹렬한 정치공세를 펼쳤 다.

이른바 '三不足說'(天變不足畏, 祖宗不足法, 人言不足恤) 가운데, “天 變이 【반드시】두려워할 만한 것은 못된다(天變不足畏)”라는 왕안석 의 주장은 전통적 災異說과 반대파들의 정치적 입장과도 충돌하는 것 이었다. 왕안석의 주장에 대해 그 진위여부를 놓고 지금까지도 학계의 상이한 해석이 존재한다.1)

본고는 왕안석 '삼부족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단서를 통 한 논증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먼저, ‘天變不足畏’의 해석과 관련 하여, 필자는 이와 유사한 ‘三傳不足信’이라는 王安石의 말에 주목하였 다. “春秋三傳(左氏ㆍ公羊ㆍ穀梁)은 【무조건】믿을 만 한 것은 못 된다.”2) 왕안석이 韓求仁에게 답장으로 보낸 서신(「答韓求仁書」)에 기 록된 말이다. 語句의 유사성을 넘어, 春秋三傳에 대한 그의 인식과 평가는 “天變不足畏”說의 진위와 정치적 맥락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 서가 될 수 있다. 春秋는 孔子가 편수한 儒家經典이자 편년체 史書

1) 대륙의 대표적인 宋史 학자인 鄧廣銘은 “비록 王安石이 宋 神宗에게 직접적 으로 ‘三不足說’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왕안석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설사 왕안석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司馬光이 이러한 진보적 혁신적 발언을 지어낼 수도 없었다.”고 보았다. ‘三不 足說’은 왕안석 변법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北宋政治改革家王 安石(2000). 漆俠도 王安石變法(2001)에서 동일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臺 灣의 林天尉는 ‘삼부족설’은 司馬光이 策問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고 왕안석과 그의 변법을 철폐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지 왕안석이 직접 한 발언은 아니 라고 보았다.爲王安石辯誣二事(1986). 2000년 이후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삼부족’설에 대한 몇 가지의 추가적 관점이 제기되었다. 즉 왕안석의 이러 한 발언은 反변법파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소문’이며, 소문에 근 거한 의심으로부터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王安石은 전통적인 天人感應說과 災異說에 대해 일부분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면적 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王宇 「王安石“天變不足畏”新論」(2002), 王榮科 「王安石提出“三不足”之說質疑」(2000).

2) 王安石, 臨川文集 卷74, 「答韓求仁書」: “此經比他經尤難, 蓋三傳不足信也”.

(3)

이다. 만약 왕안석이 춘추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춘추 좌씨, 춘추공양, 춘추곡량 三傳의 결함을 비판한 것이라면, '天變 不足畏說'에 대한 동일한 맥락적 접근 역시 가능하다. 다시 말해, 전통 적 재이설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특정한 자연현상이 어떤 정치행 위의 결과로부터 발생한다는 자의적 해석을 두고 비판했다는 논리적 추론이다. 더욱이 변법을 둘러싸고 당쟁이 격화되었던 시기에 이 발언 은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

둘째, 王安石은 또 다른 논란에 휩싸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春秋

斷爛朝報說’이다. “春秋는 낡고 진부한 公文書”라는 발언이 실제로 그의 입으로부터 나왔는지의 여부는 학계에서 여전히 상반된 해석을 내놓고 있다.3) 만약 春秋경전 자체를 이처럼 폄훼한 것이 사실이라 면, 이는 사실상 儒家思想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아니면 이 역시 반대파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허위사실 혹은 왜곡인가? 필자는 ‘天變不足畏’와 ‘春秋斷爛朝報說’이 근본적으로 동 일한 논리적 맥락에서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기존 연구의 논거들을 종합하고, 다시 공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재이설의 정치적 함의와 왕안석을 둘러싼 두 가지 쟁점을 사상적 맥락 에서 분석하도록 하겠다.

Ⅱ. “天變不足畏”說의 발생 경과와 政爭

3) 王書華는 「王安石詆春秋爲“斷爛朝報”之考辨」(2005)에서 왕안석이 다른 유 가경전에 비해 유독 춘추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 춘 추를 學官에서 폐지하고, 과거제 개혁조치에서도 제외시킨 역사적 사실을 근 거로 이 발언은 왕안석이 직접 한 말이라고 보았다. 楊新勛은 「王安石春秋

“斷爛朝報”說辨正」(2004)에서 “왕안석은 실제로 이러한 발언을 했지만, 이는 儒家의 대표적 경전인 춘추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 송대 經學의 특징을 반영한 ‘尊經貶傳’思潮의 영향으로 三傳을 비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의 관련 연구논문으로는 이원석의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을 중심으로」(奎章閣 30, 2007)가 있다.

(4)

변법시행 원년인 熙寧2년(1069) 御史中丞 呂誨(1014-1071)는 參知 政事 王安石을 탄핵하는 상소문에서 “臣이 왕안석의 행적을 자세히 살 펴보면, 진실로 원대한 정책이 없으며, 오직 바꾸는 것에만 힘쓰고, 사 람들에게 이상한 것들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요즘 천재지변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민심이 조화롭지 못합니다. 맑고 사심이 없어야 하며, 혼탁해서는 안 됩니다. 왕안석이 오랫동안 朝廷에 거처한다면, 반드시 安靜의 이치가 없어질 것입니다”4)라고 주장하였다. 같은 해 10월 宰 相에서 물러난 富弼(1004-1086)은 神宗에게 왕안석이 많은 소인배들 을 등용시키고 있어 하늘이 질책의 벌을 내리고 있다며, 도처에서 地 震과 災異가 발생한 것은 왕안석의 변법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翰林學士 范鎭(1007—1088)은 “자연재해 현상은 모두 백성의 勞苦를 상징하는 것으로, 폐하께서 하늘의 變異를 살펴 靑苗法의 시행을 폐지 하소서!”5)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變法은 반대했던 사상가 程顥 (1032—1085)도 「諫新法疏」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天時가 순조 롭지 못하니, 地震이 해마다 끊이지 않고, 사방 人心이 날로 요동치고 있사오니, 이는 모두 마땅히 폐하께서 天象을 우러러 살피셔야 하며, 아래로는 人事를 굽어 살피셔야 합니다.”6) 程顥 역시 반대파들의 목소 리에 사실상 동참한 셈이다. 이렇게 변법의 시행 초기부터 왕안석은 災異說에 근거한 정치적 공세에 직면하였다. 그렇다면 王安石 본인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으며, ‘天變不足畏說’은 어떻게 등장했는가?

熙寧3년(1070) 翰林院에서 策問 시험을 실시하려 했는데, 당시 翰

4) 呂誨, 宋文鑑 卷60, 「論王安石疏」: “臣究安石之蹟, 固無遠略, 唯務改作, 立異 於人. ……方今天災屢見, 人情未和, 惟在澄淸, 不宜撓濁. 如安石久居廟堂, 必無 安靜之理.”

5) 歷代名臣奏議ㆍ范鎭疏 卷266, 「理財門」: “乃者天雨土, 地生毛, 天鳴, 地震, 皆民勞之象也. 惟陛下觀天之變, 罷靑苗之擧.”

6) 程顥, 二程遺書 卷39, 「再論新法乞責降疏」: “天時未順, 地震連年, 四方人心 日益搖動, 此皆陛下所當仰測天象, 俯察人事者也.”

(5)

林學士였던 司馬光은 이를 주관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출제하려 했다.

요즘 어떤 논자가 말하길: ‘天地와 사람은 서로 전혀 관계하지 않으니, 가뭄이든 지진이든 모두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현상(常數)일뿐, 두려 워서 기피하기에는 부족하다. 祖宗의 법도가 다 반드시 완전하다고 볼 수 없으므로 개혁할 수 있다면 개혁해야지 그대로 고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의미라는 것이 옛날과 지금이 다른 것이 마땅하다면, 詩, 書

에서 진술한 것들을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인가? 聖人의 말씀이 깊고 精 微하며 高遠하여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면, 先儒들의 이 해가 혹시 그 宗旨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변론을 듣고자 한다.7)

司馬光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말한“어떤 논자”는 간접적 으로 王安石을 지칭한 것이며, 策問의 형식을 통해서 그의 ‘三不足說’

을 비판하고 있었다. 이 인용문은 시간상 왕안석의 ‘삼부족설’을 가장 처음으로 언급한 것으로, 왕안석 자신이 직접 이 말을 했는지 여부는 확정할 수 없다. ‘삼부족설’이 왕안석 자신이 아닌, 반대파인 사마광으 로부터 등장한 점 때문에 그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또 宋史에 는 왕안석이 “災異는 天數이니, 人事의 득실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 장한 기록이 있지만, 이 역시도 「富弼傳」에 기재된 내용이다.8)

司馬光이 ‘어떤 논자’라는 간접적 표현으로 策問 시험출제에서 의도 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策問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해 본다면, 관리임용시험 중 시사문제를 통해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과 성향을 묻는 일종의 논술고사에 해당한 다고 말할 수 있다. 응시자들이 策問을 통과하면 관직의 등급이 결정 되고, 이들은 향후 朝廷의 重臣으로 성장하는 동시에 朋黨이라는 정치

7) 楊仲良, 續通鑑長編紀事本末 卷59 「王安石事跡」(上): “今之論者或曰: ‘天地 與人, 了不相關. 薄食ㆍ震搖, 皆有常數, 不足忌. 祖宗之法, 未必盡善, 可革則革, 不足循守. ……意者古今異宜, 詩書陳蹟不可盡信耶? 將聖人之言, 深微高遠, 非常 人所能知, 先儒之解或未得其旨耶? 愿聞所以辨之.”

8) 宋史 「富弼傳」: “災異皆天數, 非關人事得失.”

(6)

세력을 이루게 된다. 이런 점에서 책문은 사마광에게 향후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고, 朝廷의 정치적 여론을 확대ㆍ생산 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사마광이‘어떤 논자’라는 간접적 표현을 사용한 것은 출제의 특수성과 객관성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특정 인물을 지칭함으로써 자신의 주관적 정치의도가 드러남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측 면이 있다. 출제문제를 최종적으로 검토ㆍ승인하는 사람은 바로 皇帝 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試題를 본 神宗은 출제를 승인하지 않았다.

송 신종에게 왕안석을 직ㆍ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일은 곧 그를 지지한 황제를 비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더구나 신종은 이미 災異說을 이용 해 왕안석과 그의 정책을 비난하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받아보았고, 맥락상 이 試題에서 말한‘어떤 논자’가 왕안석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출제를 승인하지 않았다. 사마광은 자신이 출제한 이 문제를 황제가 최종 확인ㆍ승인하는 절차를 분명하게 인지했을 것이며, 출제를 허락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했을 것이다. 비록 실제로 출제되지는 않 았지만, 사마광의 ‘전략’은 신종이 가지고 있었던 변법에 대한 일관된 지지를 흔들어 놓는 데 기여했다.

神宗은 사실의 진위여부와 관련해, 실제로 그러한 발언이 왕안석의 입으로부터 나왔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왕안석에게 직접 확인한 바 있다. 續通鑑長編紀事本末 卷59, 「王安石事跡」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대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神宗이 말하길 “‘三不足’說이 있다는데 들어본 적이 있소?” 王安石이 대답하길“듣지 못했습니다.” 신종이 말하길 “근래 朝廷에서 ‘天變은 두려 워할 만 것이 못되고, 사람들의 議論은 일일이 돌보기에는 부족하며, 祖 宗의 법도는 무조건 고수하기는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어제 學士院 試官이 策問에서 이 세 가지를 직접 출제했소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이치란 말이요? 朝廷에서도 왜 이러한 말이 자꾸 나오는 것이요? 이미 짐이 다른 문제를 출제하라 명했소.”

왕안석이 말하길 “폐하께서 친히 여러 정사를 굽어 살피심에 그 어떤

(7)

향락이나 황망한 행동도 없으셨습니다. 매사 오직 백성이 상할까 걱정하 셨을 뿐이니, 이것이 바로 ‘천변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사 람들의 말(의견)을 묻고 받아들이실 적에, 말의 많고 적음만으로 이를 받 아들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람들의 말을 돌보지 않는 것이 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의론은 진실로 모두 돌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진실로 義理에 부합한다면 그 말을 어찌 돌보지 않겠습니까?

……‘祖宗의 法은 무조건 고수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은 진실로 마땅한 이치입니다. 仁宗께서 40년간 재위하실 때에도 수차례의 修勅이 있었습 니다. 법도가 한 번 정해져서 자손들이 마땅히 대대로 이를 지켜나가야 한다면, 祖宗의 법은 무슨 연유로 그 동안 여러 번 바뀌었겠습니까?”9)

司馬光의 책문 시제를 거부한 神宗이 바로 그 다음날 王安石을 부 른 것은 ‘三不足說’의 주인공이 왕안석이라는 짐작을 확인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三不足說’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왕안석의 대답은 이 說 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임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위에 서 인용한 두 번째 단락의 기사에 따르면, 왕안석은 이 說의 내용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실상 동의를 표현하고 있다. 왕안석은 왜 ‘삼부족설’을 들어 본적 없다고 대답한 후, 오히려 자신의 적극적 해석을 통해 이 ‘삼부족설’을 옹호했는가? 직접적 대답 을 피해야 할 상황적 이유는 무엇일까? 후술하겠지만, 이 문제는 ‘삼 부족설’ 중 ‘천변부족외설’과 反변법파의 재이설이 정치적 사상적으로 복잡하고 첨예하게 얽힌 대립 관계로부터 접근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서는 王安石과 神宗, 그리고 災異說의 정치적 추이를 계속해서 살펴보 도록 하겠다.

熙寧 7년(1074) 變法을 둘러싼 政爭은 더욱 격화되었고, 神宗은

“오랜 가뭄으로 근심이 용안에 드러났고, 輔臣이 나와 알현할 적마다

9) 楊仲良, 續通鑑長編紀事本末 卷59, 「王安石事跡」: “上問‘聞有三不足之說否?’

安石曰‘不聞’. 上曰 ‘今朝廷以爲天變不足畏, 人言不足恤, 祖宗之法不足守.’ 昨學 士院進試官職策, 專指此三事. 此是何理? 朝廷亦何嘗有此? 已令別作策問矣. 安 石曰‘陛下躬親庶政, 無流蓮之樂, 荒亡之行, 每事唯恐傷民, 此卽是畏天變. 陛下詢 納人言, 無小大唯言之從, 豈是不恤言? 然人言固有不足恤者. 苟當於義理, 則人言 何足恤? ……至於祖宗之法不足守, 則固當如此. 且仁宗在位四十年, 凡數次修勅;

若法一定, 子孫當世世守之, 則祖宗何故屢自改變?”

(8)

탄식하여 실로 비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保甲과 方田 등의 사업을 모두 폐지하려 했다.”10) 개혁실행의 최대 위기에 직면한 왕안석은 神 宗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진언한 바 있다.

홍수와 가뭄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현상(常數)으로 堯와 湯과 같은 聖君들이라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폐하 즉위 이래, 여러 해의 풍작이 있 었습니다. 지금 가뭄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마땅히 더욱 人事로써 주관하 여 천재지변에 대응할 수 있으니, 이는 폐하께서 근심하실 정도는 아닙니 다.11)

전통적 災異說에 대한 왕안석의 비판적 관점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 났고, ‘三不足說’ 중 ‘天變不足畏’ 발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여부와 관 계없이, 왕안석 자신의 주장이 되어갔다. 자연재해의 발생이 자신의 변법시행 때문이라는 주장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제 는 자신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神宗의 태도에 이미 변화가 생겼다는 점 이고, 이는 변법을 실행할 큰 동력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왕안석의 위로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神宗은 “이 어찌 작은 緣故 이겠는가? 朕이 요즘 이처럼 두려워 걱정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 주관 해야할 일(人事)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기 때문이오.”12)라고 대답했 다. 이는 변법 시행과정에서 노출된 문제들에 대한 신종의 실망이자, 변법에 대한 신종의 지지가 크게 약화되었음을 의미했다.

熙寧 8년(1075) 10월, 彗星의 출현이 관측되었다. 자연재해뿐만 아 니라 日蝕 月蝕 彗星 같은 천문현상도 ‘하늘의 견책(天譴)’으로 해석되 었다. 송대 이전부터 이 天譴은 군주에게 내리는 ‘질책’으로, 이때 황 제는 보통 正殿을 잠시 떠나고, 常膳을 줄이며, 直言을 수용하는 조치 를 취했다. 하늘이 황제에게 내리는 일종의 ‘근신’조치인 셈이다. 宋

10) 續資治通鑑長編 卷269, 熙寧8年10月戊戌條: “上以久旱 , 憂見容色, 每輔臣 進見, 未嘗不嘆息懇惻, 欲盡罷保甲方田等事.”

11)같은 책: “水旱常數, 堯湯所不免. 陛下卽位以來, 累年豊稔; 今旱暵雖逢, 但當益 修人事以應天災, 不足貽聖慮耳.”

12)같은 책: “此豈細故? 朕今所以恐懼如此者, 正爲人事有所未修也.”

(9)

神宗도 혜성이 출현한 후, 朝廷 중신들에게 이런 내용의 조서를 내렸 다. “근래 들어 災異가 수차례 나타나 산사태와 지진, 그리고 가뭄이 서로 끊이지 않으니 그 天變이 너무도 크도다. 짐이 미천하고 몽매하 니, 감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들은 마땅히 조정의 신 하들을 이끌어 짐의 과실에 대해 直言하도록 하고, 政事가 백성들과 잘 맞지 않는 부분을 고쳐 바로 잡을 수 있게 해 주시오”13) 神宗의 이 詔書는 사실상 변법의 철폐 선언과 다름없었다. 이듬해인 1076년 왕안석은 宰相의 직책을 사임하고 중앙 정계를 떠났으며, 그의 개혁정 책들은 차례로 폐지되었다.

Ⅲ. 災異說의 양면성과 정치적 왜곡

여기서 北宋 王安石의 變法 시행시기에 발생했던 자연재해가 실제 로 다른 시기에 비해 그 발생횟수와 피해 정도가 어떠했는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鄧雲特 中國救荒史의 통계에 의하면, 兩宋 시기 각 종 자연재해의 발생횟수는 唐代와 비슷하지만 그 강도와 피해 범위는 더 높고 넓었다고 분석하였다.14)

13)같은 책: “比年以來, 災異數見, 山崩地震, 旱暵相仍, 變尤大者. 自惟淺昧, 敢不 懼焉.……卿等宜率在廷之臣, 直言朕躬過失, 改修政事之未協於民者.”

14) 鄧雲特, 中國救荒史 (上海書店, 1984), p.85.

類型

年代 水災 旱災 蝗災 地震 疫疾 風/雹/霜災

960-999 157 74 16 6 2 35

1000-1039 66 46 15 14 2 151

1040-1079 29 30 8 12 4 14

1080-1119 32 32 9 14 2 20

1120-1159 19 41 8 11 7 15

1160-1199 90 81 24 8 14 26

1200-1239 42 53 18 12 7 12

(10)

40년을 분기로 계산한 위의 통계[표]에 따르면, 왕안석의 변법 시행 시기(1069-1076)에 발생한 각종 자연재해의 횟수가 다른 시기보다 많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왕안석이 進士에 급제하여 관리로 임용되었 던 慶曆 2년(1042)부터 변법이 완전히 폐지된 1079년까지로 시기를 확장한다고 하더라고 결과는 같다. 宋代 자연재해 중 가장 빈번하고 그 피해가 가장 컸던 것은 홍수와 가뭄이었고, 북송 개국 초기와 남송 孝宗 때의 발생 횟수가 왕안석의 정치활동 시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당연히 재해발생의 횟수가 그 피해규모와 정도를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컨대 地震의 경우에는 발생 횟수보다 그 강도에 따라 피해 의 정도와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정치활동 시기가 아닌, 다른 시기의 대표적인 자연재해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淳化元年(990) 1월부터 4월까지 지속된 가뭄으로 河南, 鳳翔, 大名, 京兆府, 許州, 滄州, 單州, 汝州. 乾州, 鄭州, 同州 등의 지역에 큰 피해 를 가져왔으며, 수개월간 지속된 재해로 우물, 샘, 작은 하천까지 말라 서 식수는 물론이고 농작물 수확에도 막대한 차질을 빚어 백성들은 절 망상태에 이르렀다. 밤낮으로 나무열매나 풀뿌리를 캐어 연명하려는 자가 대부분이었다고 전하고 있다.15) 宋史ㆍ眞宗紀와 續資治通鑑長 編의 기록에 의하면 大中祥符 원년(1008년)부터 乾興 원년(1022년) 까지 水災 火災 旱災 地震 暴雨 등의 각종 자연재해가 매해 지속되어 이로 인한 민생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또 仁宗 嘉祐 元年(1056) 5월부터 6월까지 한 달간 집중되었던 폭우로 河北 일대의 관사와 가옥 수 만 채가 붕괴되었다.16)

15) 續資治通鑑長編 卷252: “北盡塞表, 東被海淮, 南逾江淮, 西及邛蜀, 自去歲 秋冬, 絶少雨雪, 井泉澗往往涸竭, 二麥無收, 民已絶望. 孟夏過半, 秋種未入, 中 戶以下, 大抵乏食, 采木實草根以延朝夕.”

1240-1279 30 25 10 5 2 10

총계 465 382 108 82 40 142

백분율 38% 31% 9% 7% 3% 12%

[표] 출처 : 康弘 「宋代災害與荒政述論」(1994)

(11)

中國地震目錄(1983)의 통계에 의하면, 宋代에 6도 이상의 强震은 대략 20여 차례가 발생했다. 이 가운데 피해가 가장 컸던 사례를 살펴 보면, 仁宗 景祐 4年(1038) 12월 忻州 代州 幷州 지역에 강도 10도의 대지진 발생, 성곽과 가옥들이 초토화되고 그 사망자수도 3만2천3백 여 명에 달했고, 가축도 5만여 마리나 죽었다. 徽宗 宣和 7년 (1125) 7월 甘肅 熙和路에서는 9도의 지진이 발생, 蘭州지역의 피해가 가장 컸는데, 수백만 가구와 창고가 함몰되었다고 한다. 王安石의 변법시행 시기 발생했던 대표적 재해는 熙寧 7년(1074) 河北과 陝西일대 旱災 의 경우이지만, 이 보다 훨씬 큰 피해를 가져온 재해는 다른 어떤 시 기에도 발생했었다.

따라서 어떤 자연재해 현상이 인간의 특정한 행위로부터 발생한다 거나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학설은 오늘날 과학의 관점에서 본 다면 어불성설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 인 간의 과도한 인위적 개발과 정책 때문에 환경이 파괴되어 자연재해 현 상이 더욱 빈번하고 심각해진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모든 자 연재해와 천문 이변현상들의 직접적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인들의 관념과 그들의 정치활동에 이 災異說이 깊이 관 여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이 학설을 전적으로 ‘迷信’의 산물 이자 전근대적 사고방식으로 단정하는 것은 災異說의 중요한 정치적 사상적 작용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災異’의 개념과 이것이 현실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 지 고찰해야 할 것이다.

천지만물에는 정상적이지 않은 변화가 있는데, 이를 ‘異’라고 부른다.

작은 것은 ‘災’라고 부르는데, 災는 항상 먼저 찾아오고, 異는 그 뒤를 따 라 온다. 災라는 것은 하늘의 견책이며, 異는 하늘의 위협이다. (하늘이) 견책했는데도 (군주가)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위엄으로 두렵게 만든다.

詩經에서 하늘의 위엄으로 두렵게 한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

16) 宋會要輯稿 「職官」44之2: “懷官私廬舍數萬區. ……是歲, 諸路江河決灠, 河 北尤深甚.”

(12)

이다.17)

天人感應論을 주장한 漢代 董仲舒는 春秋繁露에서 災와 異를 구 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災와 異는 시간상 先後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자연계의 일상적 운행으로부터 벗어난 비정상적 현상이 다. 그런데, 이 현상은 君主에 대한 하늘(天)의 견책이자 위협이다. 동 중서의 이 학설은 儒家의 天人관계론을 정치적으로 변화시킨 일종의 정치학설이다. 정치학설로서의 가장 두드러진 목적은 강력한 황제권력 을 정당화시키는 동시에 황제 스스로 이 학설에 의해 권력행사의 신중 함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황권을 견제하고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天)뿐이기 때문이다. 즉 천재지변은 군주 정치에 대한 하늘의 경 고이며, 군주로 하여금 자신의 통치행위에 대해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 하게 한다는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다. “왕 노릇하는 자는 하늘의 뜻 [天意]을 받들어 政事에 임한다.”18)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 있다.

그렇다면, 북송시기 재해가 발생했을 때, 황제와 조정에서 취한 정 치적 조치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지 살펴보자. 재해발생 후, 실시 되는 정치적 조치는 현실적인 재해복구와 민생 구제정책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앙에서 피해지역 주민들에게 식량과 의복 등의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것 외에도 조세와 형벌을 감면하는 등의 조치 가 대표적이다. 이런 조치들의 구체적 사례들은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 하지 않겠다. 본고에서 다루는 문제의 핵심은 이 재이설이 북송시기 어떻게 현실정치에 반영 혹은 왜곡되었는지를 중심으로 논술하도록 하 겠다.

災異說에서 陰陽五行의 논리를 君臣 관계의 관계에 적용하여 군주 는 陽, 신하는 陰으로 규정한다. 日蝕 현상의 경우, 陰이 陽을 침범하

17) 董仲舒, 春秋繁露 卷8, 「必仁且知」: “天地之物, 有不常之變者, 謂之異. 小 者謂之災. 災常先至, 而異乃隨之. 災者, 天之譴也. 異者, 天之威也. 譴之而不知, 乃畏之以威. 詩云:畏天之威. 殆此謂也.”

18) 董仲舒, 春秋繁露ㆍ序: “王者承天意以從事”

(13)

는 현상으로 해석하여 군주의 지위와 권력이 신하에 의해 침해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현실정치에서 자신의 당파와 친인척을 등용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宋 太宗 太平興國 6년 9월에 日蝕 현상이 관측된 후, 中書舍人 郭贄 등을 考校에 임명했으 며, 趙普를 司徒로, 石熙載를 樞密使로 임명한 바 있다.19) 또 雍熙 3 년에 일식의 출현 후 御使中丞 辛仲甫를 參知政事로 임명한 사례도 있 다.20)

宋 眞宗 때 玉淸昭應宮의 화재 발생 후, 황제는 스스로 이를 자신의 죄로 여기는 詔書를 내린 바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罪己詔”의 사례 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한 神宗 熙寧 8년의 혜성 출현 후, 신종이 내 린 조서도 이와 같다. 황제는 적어도 형식상으로나마 재이의 발생을 자신의 과오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罪己 詔’가 현실적으로 황제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라 기보다는 그저 의례적인 절차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정 치적 명분이나 자연재해에 따른 정국과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상징적’

조치로 이용되었다. 또 하나의 방식은 황제가 直言을 적극적으로 수용 하는 정치적 태도이다. 비판적 직언의 발언 수위와 강도가 지나칠 정 도라고 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인데(直言極諫), 이는 이전 시대보다 宋朝의 文治主義에서 훨씬 더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唐鑑과 帝學

을 저술한 북송 문인 范祖禹(1041-1098)가 哲宗에게 올린 상소문 「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논하다(論畏天)」에서 “군주가 작은 災異 현상을 보고도 경계하지 않으면, 큰 災異가 올 것”21)이라고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재이설이 정치적으로 공인되지 않으 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 脫脫, 宋史 卷4, 「本紀」: “因日食, 置京朝官差譴院, 初令中書舍人郭贄等考 校, 以趙普爲司徒, 石熙載爲樞密使”

20) 脫脫, 宋史 卷5, 「本紀」: “日有食之, 甲辰, 以御使中丞辛仲甫爲參知政事.”

21) 宋朝名臣奏議 卷44, 范祖禹 「上哲宗論畏天」: “人君者見小異而不儆戒, 則大 異將至矣.”

(14)

요컨대, 재이설은 그 자체로 ‘理想’과 ‘歪曲’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 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理想’에서 본다면, 최고 권력자인 군주가 조화 로운 자연 질서의 궤도에서 벗어난 ‘災異’현상을 통해 자신의 도덕성 과 통치행위를 성찰하고 경계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또한 비록 근 본적 한계점(군주전제)은 있지만, 군주에 대한 비판과 독단적 권력행사 에 대한 견제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ㆍ사상적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재이설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과 주관적 의도에 따라 왜 곡된 해석을 허용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당쟁의 격화와 정치적 농단 의 상황에서는 政敵을 축출하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을 내포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王安石의 ‘天變不足畏說’도 바로 이러한 재이설 의 양면성으로부터 재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王安石는 嘉祐 8년(1063)을 전후로 洪範傳을 저술한 바 있는데, 이 저서의 내용으로부터 災異에 대한 그의 근본적 입장을 파악할 수 있다.

(a) 하늘은 진실로 군주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표상이니, 저것으로써 이것의 실질을 증험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한 일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 들이 災異를 말하는 것은 잘못이겠는가? 대답하겠다. “군주는 天地와 相 補하여 만물을 올바로 다스리는 자이다. 천지만물이 그 常道를 벗어나면, 두려워해 스스로를 닦고 반성하는 것은 또한 마땅하다.”

(b) 지금 혹자는 하늘의 變異가 있는 것은 반드시 내가 이런 죄를 지 음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라고 한다. 혹자는 ‘災異가 저대로 天事일뿐 이니,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人事을 알아서 닦을 뿐이라고도 말한다. 대개 前者의 說로 말미암으면 막혀 두렵고, 後者의 說을 말미암 으면 고루하고 위태롭다. 막히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으며 고루하지도 않 고 위태롭지도 않는 자도 하늘의 변이를 자신의 두려움으로 삼지만, 천지 에 어떤 변이가 나타나는 것이 반드시 내가 어떤 일을 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천하의 바른 이치로 나의 못을 고찰할 뿐이 다.”22)

22) 王安石, 臨川先生文集 (上海古籍書店, 1984) 卷56, 「議論」: “天者固人君所 當法象也, 則質諸彼以驗此, 固其宜也. 然則世之言災異者, 非乎? 曰: 人君固輔相 天地理以萬物者也, 天地萬物不得其常, 則恐懼修省, 固亦其宜也. 今或以爲天有是

(15)

첫 번째 인용문(a)에 따르면, 災異에 대한 王安石의 기본 관점은 전 통적인 儒家思想의 天人관계론에 근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 급한 災異說의 理想的 作用을 매우 긍정하고 있다. “자연계(天地萬物) 의 정상적 질서(常道)에 벗어난 현상에 대해 인간 스스로 자신을 경계 하고 성찰하는 것”은 孔孟의 憂患意識을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왕안 석은 재이설에 대한 세인들의 잘못된 해석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구 체적인 내용은 인용문(b)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 번째 오해는 특정 한 재이현상의 발생이 인간의 어떤 구체적인 악행과 죄에 대한 징계라 고 여기는 것이며, 둘째는 災異가 단지 자연계의 현상일 뿐, 인간의 행위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는 재이설의 이상적 작용은 긍정했지만, 특정한 재해나 이변현상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정 치적 도덕적 행위로부터 발생한다는 해석을 경계했고, 동시에 이 양자 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해석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이로부터 볼 때, 적어도 왕안석이 재이설을 전적으로 부정했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재이설의 본래적 의미를 강조했다. 인용문(b)의 밑줄 친 부분은 재이 설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리한 최종 변론과 같다. “天變不足畏” 즉,

“천변은 (인간이) 무조건 두려워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은 “천변이 두렵지 않다(天變不畏)”말과 같지 않다. 이 주장이 왕안석의 입에서 나 온 것이든 그의 政敵이 만들어 낸 것이든, 재이설에 대한 왕안석의 기 본 입장과 해석은 시종일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안석이 사망한 이후, 이 발언은 급속하게 기정사실화되었고, 그에 대한 정치 적 학술적 평가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王安石과 그의 災異觀에 대한 南宋 朱熹(1130-1200)의 평론은 매 우 의미심장하다.

變, 必由我有是罪以致之; 或以爲災異自天事耳, 何豫於我, 我知修人事而已. 蓋由 前之說, 則蔽而葸; 由後之說, 則固而怠. 不蔽不葸, 不固不怠者, 亦以天變爲己懼, 不曰天地有某變, 必以我爲某事而至也. 亦以天下之正理考我之失而已矣.”

(16)

(c) 비가 많이 내린다는 증험이 반드시 어떤 때 어떤 일을 도모하는 데 순조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이치로 추론하는 데, 이것이 필연의 학설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믿기 어렵 게 한다. (d) 王荊公은 진실로 이 일은 검증하기 부족하지만 군주는 스스 로 마땅히 근신하고 경계해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漢儒들의 이 필연적 학설은 진실로 옳지 않으며, 王荊公처럼 (하늘과 사람이) 전혀 관계가 없 다는 학설 역시 옳지 못하다.”23)

인용문(c)에 나타난 주희의 주장은 사실상 왕안석의 입장과 완전하 게 일치한다. 특정한 자연현상과 인간의 특정한 행위와의 직접적인 인 과관계, 즉 ‘필연적’ 관계를 그 역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인용문(d) 에 따르면, 주희는 董仲舒를 비롯한 漢代 儒者들의 필연적 인과관계론 을 비판하는 동시에 왕안석까지 비판하였다. 주희는 왕안석이 天變과 人事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했다. 앞서 논 술한 것처럼 洪範傳에 나타난 왕안석의 입장은 분명히 주희가 말한 것과는 다르다. 北宋 先儒들의 관점과 굳어져버린 定說이 朱熹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Ⅳ. 春秋“斷爛朝報”와 春秋 災異說

‘天變不足畏說’에 대한 정치적 왜곡과 동시에 王安石을 둘러싼 또 하나의 논란이 朝廷 重臣들은 물론 宋儒들의 강렬한 비난을 불러일으 켰다. 왕안석이 孔子가 편수한 春秋를 “낡고 진부한 조정의 공문 서”(斷爛朝報)라 폄훼했다는 논란이 그것이다. 이 논란의 파급력은 ‘천 변부족외’발언을 둘러싼 정치적 파장보다 더 크고 광범위했다.

神宗 熙寧 4년(1071) 2월, 科擧制에 대한 개혁이 실행되었는데, 進

23) 朱熹, 朱子語類 (中華書局, 1994.3) 卷79, 「尙書二ㆍ洪範」, p.2049: “多雨 之徵, 必推說道是某時做某事不肅, 所以致此. 爲此必然之說, 所以敎人難盡信 .……荊公固是也說道此事不足驗, 然而人主自當謹戒. 如漢儒必然之說固不可, 如 荊公全不相關之說, 亦不可.”

(17)

士科에서 詩賦, 帖經, 墨義 등의 과목을 폐지하는 동시에 詩, 書,

易, 周禮, 禮記 등의 경전 중 하나와 論語, 孟子를 통해 인 재를 선발하는 새로운 貢擧制를 실시하였다.24) 儒家經典 가운데는 春 秋가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는 春秋 대신 周禮로 대체한 것이었 다.

熙寧 6년(1073) 3월, 王安石은 정식으로 經義局을 설치해25) 詩,

書, 周禮등의 三經에 대한 해석과 편수작업에 착수했고, 宰相에서 물러난 후에도 편찬 작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같은 해, 張敦禮가 神宗 에게 春秋學官을 설립할 것을 奏請했지만, 왕안석을 신임했던 神宗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6) 다시 2년 후인 熙寧 8년(1075) 2월, 다시 재상에 복귀한 王安石은 詩義, 書義, 周禮義 즉 三經新義를 저술했고, 神宗은 이를 과거시험의 표준 주해서로 공식 반포하였다27).

일련의 개혁조치의 과정에서 司馬光, 范鎭, 蘇軾, 蘇轍 등 반대파 인 물들의 맹비난이 이어졌다. 春秋로는 인재를 선발하지 않겠다는 王 安石에 대해, 司馬光은 “春秋는 버리면서 孟子를 넣는 것은 六藝 를 폐지하고 百家를 존중하는 것”28)이라 비난했다. 蘇轍(1039-1112) 은 “近世에 王介甫(安石)가 宰相의 자격으로 經典을 해석하여 세상에 유포시켰다. 春秋에 대해서는 천시하여 유통시키지 않고, ‘낡고 진부 한 公文(斷爛朝報)’이라고 폄훼하여 천하의 士人들이 다시는 (춘추를) 배울 수 없게 하였다. 아! 孔子의 遺言을 능멸한 것이 이 정도에 이르 렀으니 이는 오직 王介甫의 망령일 뿐만 아니라 儒者들의 (춘추에 대 한)講解가 명확하지 못한 잘못이다”29)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런 격

24) 續資治通鑑長編 (中華書局, 2004) 권220, “熙寧四年二月丁巳”條, p.5334.

25) 皇朝編年綱目備要 (中華書局, 2006) 권19, 「神宗皇帝」熙寧6年 2月條, p.459.

26) 續資治通鑑長編 권247, “熙寧六年九月辛未”條, p.6019.

27) 宋史 卷157, 「選擧」 3, p.3660.

28) 司馬溫公文集 (中華書局, 1985) 卷8, 「起請科場剳子」, p.206.

29) 蘇轍, 「春秋集解引」 (三蘇全集 第三冊, 上海人民出版社, 1990), p.13: “近 歲王介甫以宰相解經, 行之於世. 至春秋, 漫不能通, 則詆以爲斷爛朝報, 使天下士 不得復學. 嗚呼! 孔子之遺言而凌滅至此, 非獨介甫之妄, 亦諸儒講解不明之過也.”

(18)

분과 한탄이 春秋集解를 저술하게 된 직접적 동기로 작용했다. 또 家勤國은 春秋學의 폐지에 ‘분노’를 느껴 王安石의 三經新義에 대응 하는 春秋新義를 저술하기도 했다.30) 비록 南宋의 인물이지만, 周麟 之는 孫覺(1028-1090)의 春秋經解에 대한 跋語에서 “왕안석이 春 秋를 해석하여 세상에 내놓고자 했지만, 孫覺의 저서가 먼저 나오자 이에 질투심을 느껴 春秋를 ‘낡고 진부한 공문(斷爛朝報)’라 폄훼한 것이다”31)고 밝히기도 했다. 變法을 반대하는 이들 가운데는 民間에서

春秋를 講學하기도 했는데, 陳襄의 제자 林石은 “臨川王氏의 三經 新義가 공식 반포되자, 홀로 新學을 좇지 않고, 鄕里에서 春秋를 가르쳐 전수하였고, 春秋가 폐지되었던 시기에는 벼슬길에 나가려는 뜻을 아예 접었다”32)고 전해진다.

王安石이 실제로 春秋를 “斷爛朝報”라고 말한 직접적 증거는 현 재까지 찾아 볼 수가 없다. 明代에 편찬된 宋史紀事本末에서 왕안석 이 이 직접 신종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33) 이 史書는

宋史를 底本으로 삼았고, 또한 元代에는 이미 왕안석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또한 출처 의 절대 다수가 왕안석과 그의 변법을 반대하는 이들에게서 나왔다는 점은 더욱 더 객관적 실증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이 역시 앞서 논 증한 ‘天變不足畏說’과 동일한 방법으로 春秋‘斷爛朝報說’에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春秋와 관련한 王安石의 개혁조치는 그의 春秋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기인했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을 보여주는 왕안석의 언급은 매 우 적은데, 그의 문집에 수록된 「答韓求仁書」, 「石仲卿字序」, 「大理寺 丞楊君墓誌銘」, 「復讎解」등의 문장으로부터 春秋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언급은 바로 “春秋

30) 宋史 卷390, 「列傳」 第149, p.11949.

31) 春秋經解 (文淵閣四庫全書本) 「後跋」.

32) 宋元學案 (中華書局, 2007) 卷5, 「古靈四先生學案」, p.247.

33) 宋史紀事本末 卷9, 神宗熙寧4年2月丁巳條.

(19)

三傳에 대해서는 이미 믿기에 부족하며, 春秋는 다른 경전보다 이해 하기 어렵다.”34)는 것이다. “三傳不足信” 즉, “춘추 삼전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은 ‘三傳을 신뢰할 수 없다(三傳不信)’는 뜻이 아니다. 그는 왜 春秋는 다른 경전보다 난해하며, 三傳은 전적 으로 신뢰하기는 부족하다고 말했는가?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유독 春秋에 대해서만 「春秋傳」을 남기 지 않은 朱熹는 三傳의 특징과 결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 바 있 다.

左氏는 일찍이 國史를 보고 그 사실을 고찰하는 데는 대단히 정밀했 다. 그러나 그 大義를 알 수가 없어서 오직 극히 일부분에 따라서 그 뜻 을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 종종 講學할 수가 없었다. 公羊과 穀梁은 사실의 고찰에는 매우 疏略되어 있지만, 그 義理는 오히려 훌륭했다. 두 사람(공양씨와 곡량씨)은 經典을 공부하는 유생으로 많은 설화를 전하였 지만, 종종 모든 國史를 본 적이 없었다.35)

三傳에 대해 말하면, 左氏는 史學이며 公羊과 穀梁은 經學이다.

사학은 역사사실을 기록하는데 상세하지만, 그 道理 상에는 편차가 있다.

경학은 그 義理 상에는 그 공헌한 바가 있지만, 記事에는 많은 오류가 있 다.36)

주희는 春秋三傳이 가지고 각각의 특질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左氏는 史書로서의 春秋에 치중했기 때문에 史學이라고 칭했고,  穀梁과 公羊은 공자가 의도했던 의미 해석에 치중했기 때문에 經學 이라고 규정했다. 동시에 각각의 근원적 결함이 春秋를 온전히 이해 하기 어렵게 한다고 보았다.

春秋는 孔子가 편수한 儒家의 주요 經典 가운데 하나로, 春秋 魯

34) 王荊公文集箋注 (巴蜀書社, 2005) 卷35, 「答韓求仁書」, p.1213.

35) 朱子語類 (中華書局, 1999) 권83, 「春秋綱領」, pp.2151-2152: “左氏曾 見國史, 考事頗精, 只是不知大義, 專去小處理會, 往往不曾講學. 公穀考事甚 疏, 然義理却精. 二人乃是經生, 傳得許多說話, 往往都不曾見國史.”

36) 같은 책, 권83, p.2152: “以三傳言之, 左氏是史學, 公穀是經學. 史學者 記得事却詳, 於道理上便差; 經學者於義理上有功, 然記事多誤.”

(20)

나라 隱公 元年(기원전 722년)에서 哀公 14年(기원전 481년)까지 약 240여 년 동안 춘추열국의 전쟁과 회맹 등 주요 정치적 大事를 기록 하고 있는 編年體 사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記述이 지나치게 간략 하고 의미가 함축적일 뿐만 아니라, 이른바 左氏, 穀梁, 公羊 三 傳37)의 해설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 속에 담겨진 經義는 대 부분 이러한 정치적 사건과 사실로부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春秋大義’이다. 춘추의 특징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바로

“微言大義”38) 즉, 함축적이고 은미한 말 속에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 는 말이다. “尊王攘夷”, “尊君抑臣”, “大一統”의 원칙이 春秋 속에 담겨 있으며, 이는 현실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춘추

는 다른 경전에 비해 현실정치에 대한 지도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중요한 경전임에 불구하고, 각기 다른 해석과 의미를 담은 三傳을 모 두 종합하여 孔子가 말한 大義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다.

王安石의 春秋에 대한 관점은 기본적으로 주희의 관점과 일치한 다. 그가 비판한 것은 春秋經典이 아니라 春秋三傳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시험과목으로 春秋는 적합하

37) 史記와 漢書 그리고 陸德明의 經典釋文序錄 등에 의하면, 春秋에는 세 가지 解說本(傳授本)이 있다. 한 가지는 左氏春秋로 秦代 이전의 文字로 쓰여져 漢書「藝文志」에서는 春秋古經라고 불렀다. 다른 두 가지가 바로 公羊과 穀梁인데, 두 해설본 모두 口傳의 방식으로 전해지다가 漢代에 와 서야 문자로 기록되었다. 때문에 公羊과 穀梁은 ‘今文’라고 부르고, 先秦時 期의 문자로 기록된 左氏는 ‘古文’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해설본 은 대체로 비슷하긴 하지만 큰 차이도 존재한다. 예컨대, 魯襄公21年의 기재 를 보면, 公羊과 穀梁에는 각각 “11월 庚子에 孔子가 태어났다(十有一月 庚子, 孔子生)”, “庚子에 孔子가 태어났다(庚子, 孔子生)”라고 기록된 반면, 左氏에서 이 記事를 찾아볼 수 없다. 楊伯峻 春秋左傳注 (中華書局, 2000.7), p.5.

38) 微言大義란 말은 본래 漢書「藝文志」序文: “昔仲尼沒而微言絶, 七十子喪而 大義乖.”라고 기록한 것에서 출처를 두고 있다. 微言은 잘 들어나지 않는 음미 한 말 혹은 오묘하며 정미한 말이란 뜻이다. 이러한 방식을 ‘春秋筆法’이라고 도 부른다.

(21)

지 않다는 것이 왕안석의 생각이었다. 陸佃(1042-1102)은 스승인 王 安石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荊公(王安石)이 春秋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일찍이 들었다. 公이 말하길: “三經은 인재를 양성할 수 있으나 春秋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배우는 이는 經을 학습할 때 마땅히 가까운 것(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詩를 배우고 난 후 書를 배우고, 書를 배 우고 난 후 禮를 배워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나면 春秋

가 통하는 것이다.”39)

王安石에 의하면 春秋는 儒家經典 중 하나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지만, 현실적 관점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 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春秋가 三傳의 결함으로 인해 그 신뢰 성이 떨어지고 고증도 어렵기 때문인데, 初學者들에게는 詩ㆍ書ㆍ

禮에 대한 학습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안석은 학습의 난 이도 측면에서 春秋가 가장 어렵다고 보았지만, 이를 전면적으로 부 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의 실용주의적 개혁노선은 科 擧制에도 반영되었고, 이는 유가경전에 대한 선택적 학습과 해석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科擧制度가 인재를 관료로 등용하는 방법이지만, 향후 조정과 정계 에서 활동할 잠재적인 정치가를 키운다는 의미로 볼 때, 시험과목에 대한 규정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당쟁으로 인한 정치 적 대립이 첨예한 시기에 인재등용의 방식은 당쟁의 주요한 쟁점이 될 수 있었다. 春秋를 시험과목에서 제외시킨 王安石에 대한 비난과 질 책은 주로 新ㆍ舊法黨 간의 당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春秋學에 대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더욱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

宋史ㆍ藝文志의 통계에 의하면, 經典類 총 1304部 가운데 春秋

는 240部로 가장 많았고, 易이 230部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

39) 陶山集 (文淵閣四庫全書本) 卷12, 「答崔子方秀才書」.

(22)

다.40) 또한 “春秋를 講說한 학자가 兩宋에 가장 많았다”41)는 淸代 四庫館臣의 말처럼, 四庫全書 春秋類 총 114部 1838권 중에서 宋 人의 저작이 38部 689권에 이르러 부수와 권수가 각각 전체의 1/3 이 상을 차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저서들의 70% 이상이 北宋 중후기 왕안석의 변법 실행부터 본격적으로 저술되었고, 저자들의 절 대 다수가 왕안석의 정치적 학술적 입장을 비판했던 인물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춘추학자 胡安國(1074-1138)은 자신의 저서  胡氏春秋傳ㆍ序에서 ‘反王學’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近世에 王氏의 新說을 융성하여 國是로 삼았고, 오직 春秋만을 貢 擧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과목에서 채택하지 않고, 학교(庠序)에서도 교과 과목으로 설치하지 않았으며, 經筵에서도 강의하지 못하게 하였다. 國論 을 정하는 것에 절충하는 바가 없고, 세상이 어디로 나가야 할 지 모른 다. 人欲이 날로 자라나고, 天理가 점점 소멸하니, 그 결과 오랑캐로 하 여금 中原을 혼란시켜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아!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 렀구나. 孔子가 친히 혼란을 바로 바로잡는 책(春秋)을 집필하니 또한 (지금에서 그 大義를) 실행할 수 있다.”42)

胡安國의 ‘反王學的’ 경향은 그의 학술적 연원과 관계되는데, 宋元 學案에서는 그가 “二程(程頤ㆍ程顥)의 ‘洛學’을 계승해 宋室 南渡 이 후 그 학문을 전파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했다.43) 二 程은 정치적으로 왕안석 변법을 반대했으며, 학술적으로도 反王學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위 인용문에서 호안국은 왕 안석의 春秋 ‘斷爛朝報說’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왕안석 의 ‘新說’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熙寧 8년(1075) 왕안석의 三經新義

40) 經典類 총 1304부 13608권 가운데 春秋는 240부 2799권에 달하고 있고, 그 다음으로 易 230부 1740권, 小學 206부 1572권, 禮 113부 1399 권, 樂 111부 1007권, 詩 82부 1120권, 論語 73부 579권, 書 60부 802부 經解 58부 753권, 孝經 23부 35권 등이다. 宋史 卷202 志 第 155 「藝文」1.

41) 四庫全書總目提要 권29, 「日講春秋解義」條.

42) 胡安國, 春秋胡氏傳ㆍ序, p.5.

43) 宋元學案 (中華書局, 2007) 「武夷學案」, p.1170.

(23)

(周官新義ㆍ詩經新義ㆍ書經新義)가 공인 해석서로 반포되면서, 이른바 荊公新學이 성립했다. 북송의 멸망과 남송 朝廷의 南遷을 경험 한 胡安國은 孔子의 春秋를 제외시킨 新學을 인정할 수 없었다. 요 컨대, 宋代 春秋學의 흥성에는 정치적 학술적으로 이러한 反變法과 反 王學의 경향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 胡氏春秋傳에서도 災異에 대 한 기록과 이에 대한 논설을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왕안석 의 ‘天變不足畏’, 春秋 ‘斷爛朝報說’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 공하고 있다. 유가경전 가운데에는 尙書와 詩經에도 재이에 관한 기록이 있지만, 가장 많이 기록하고 있는 경서가 바로 春秋이다. 총 122개 사례의 재이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孔子는 이 현상에 대 한 그 어떠한 해설도 덧붙이지 않았다.

예컨대 “隱公 9년 3월 계유, 큰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있었다”,

“桓公 17년 겨울 10월 초하루 日蝕이 있었다”, “莊公 18년 가을, 병 충해가 있었다.” 이렇게 간략한 記事만이 經文에 기록되어 있다. 춘추 학자들은 공자가 자연재해나 천문현상을 정치적 大事와 함께 기록했다 는 점에 주목하여, 그의 ‘微言大義’를 밝히고자 했다. 胡氏春秋傳에 서는 이에 대해 “春秋에서는 災異를 반드시 기록하였다. (공자가) 비록 그것이 어떤 특정 사건에 상응했음을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 았지만, 災異와 人事를 함께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天人相感)하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 상응의 이치가 분명히 드러난다. 바로 聖人이 이를 기록한 의도이다.”44)라고 해설했다. 莊公 18년 가을의 병충해 기록에 대해서도 “춘추가 재해현상을 기록한 것은 군주가 이에 감응하여 통치하는 데에 신중할 것을 경고한 것이 다. 세상의 도리가 쇠락하고, 邪說이 만들어지고, 正論이 사라지고, 소 인배들이 일어나고, 선한 이들이 퇴각하는 것에 天變은 위에서 地變은 아래에서 일어난다. 금수가 사람을 장차 잡아먹는데도 두려워할 줄 모

44) 胡安國, 春秋胡氏傳, p.34.

(24)

르니 이 또한 仲尼(공자)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45)라 고 논평한 바 있다.

이른바 春秋災異說은 孔子의 憂患意識이 반영된 정통유학의 학설 이지만, 漢代 董仲舒의 天人感應論에 의해 정치적으로 변화된 災異說 은 宋儒들에게 의해 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朱彛尊의 經義考에서 밝힌 대로 “宋儒들은 災異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漢儒들을 매우 비판했 다”46) 본문에서 이미 언급했던 王安石과 朱熹의 견해 역시도 이와 같 은 맥락에 있었다. 다만 왕안석은 變法을 추진하는 현실적 입장에 서 있었고, 반대파의‘재이설’이 정치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중요한 수단 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天變不足畏’ 발언과 春秋 ‘斷爛朝報說’이 실 제로 왕안석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인지의 진위 문제는 여전히 논란으 로 남아 있지만, 더 중요한 점은 災異說 자체가 정치적으로 본래의 의 미를 왜곡시키거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Ⅴ.맺음말

災異는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이라는 현상적 의미를 넘어서는 정치적 학술적 해석이 가능한 다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災異說은 그 자 체로‘理想’과 ‘歪曲’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理 想’에서 본다면, 최고 권력자인 군주가 조화로운 자연 질서의 궤도에 서 벗어난 ‘災異’현상을 통해 자신의 도덕성과 통치행위를 성찰하고 경계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또한 비록 근본적 한계점(군주전제)은 있지만, 군주에 대한 비판과 독단적 권력행사에 대한 견제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ㆍ사상적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특정

45) 胡安國, 春秋胡氏傳, p.72.

46) 朱彛尊, 經義考 (文淵閣四庫全書本, 第679冊) 卷185, p.479.

(25)

한 정치적 목적과 주관적 의도에 따라 왜곡된 해석을 허용하는 ‘빌미’

가 되었으며, 당쟁의 격화와 정치적 농단의 상황에서는 政敵을 축출하 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災異說은 北宋 王安石 變法 실행시기에 黨爭의 중심에 있었으며, 왕 안석에게는 변법시행의 큰 장애가 되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春秋

와 災異說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孔孟 儒學의 정통을 부인하는 것이 나 다름없었고, 비판을 하는 것도 반대파의 정치적 사상적 공세의 빌 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본고에서는 王安石의 ‘三不足說’ 중 ‘天變 不足畏’는 災異說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비판이었으며, 이는 반대파들의 春秋‘斷爛朝報說’로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다루었다.

王安石이 사망한 이 후, 南宋 朝廷에서는 북송 멸망의 원인을 왕안 석과 그의 ‘失政’에서 찾았다. 왕안석을 둘러싼 논란의 쟁점들은 정치 적으로 모두 사실로 공인되어 버렸다. 즉, ‘천재지변은 무조건 두려워 하기에는 부족하며(天變不足畏)’, ‘春秋는 낡고 진부한 朝廷의 공문 (斷爛朝報)’이라는 발언은 모두 왕안석의 입으로부터 나왔다는 定說이 다. 후속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王安石에 대 한 평가는 거의 모두 부정적이다. 元代에 편찬된 宋史를 비롯한 正 史類 史書와 司馬光, 蘇軾, 蘇轍, 程頤, 程顥, 朱熹의 文集이 朝鮮王朝 의 文人 士大夫들에게서 尊崇되면서, 이들의 평가를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朝鮮王朝實錄에도 災異현상과 이를 둘러싼 朝廷의 정치적 논쟁과 일련의 조치에 관한 기록이 대단히 많다는 점이 다. 유교의 정치이념을 채택하고, 文治主義를 표방한 두 王朝, 宋朝와 朝鮮王朝의 정치과정에 공통적으로 災異說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參考文獻目錄>

脫脫 等, 宋史 (北京: 中華書局, 1971) 李燾, 續資治通鑑長編 (北京: 中華書局, 2000)

Referensi

Dokumen terkait

1.はじめに ~激甚災害~ 近年の激甚災害(局地激甚,九州のみ) 自然現象等 地区 H28(2016 平成28年6月6日から7月15日までの豪雨 熊本県下益城郡美里町 H25(2013 6月8日から8月9日の豪雨及び暴風雨 熊本県球磨郡水上村 (梅雨前線) 熊本県阿蘇郡産山村 (梅雨前線及び台風4号) 熊本県上益城郡御船町

第三課 曲選 共同討論單2 九年 班 號 姓名: ◎天淨沙 秋思 1.你認為哪些景色的安排和秋天意象有關?說明理由以支持你的看法 代表秋天意象景色 理由說明 枯藤、老樹 秋天是萬物凋零的季節 昏鴉 秋天帶有淒涼的意味,〈楓橋夜泊〉「月落烏啼霜滿天」,同樣是秋天。 西風 就是秋風 2.想一想,中作者以「秋思」為題,表達的主題是什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