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재택수업 참고자료 1
2020. 03. 23 표영관 拜
강원도립대학교 해양경찰과
들어가기 앞서 …
길가에 꽃 몽우리들이 봄 봄 을 외치고 있지만 , ‘ ’ 캠퍼스에는 학생도 , 선생도 없이 여전히 겨울 마냥 을씨년스럽습니다 . 강의를 하지 않는 선생이 되어버린 저 역시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
불안하고 당황스러운 오늘이지만 , 그래도 봄은 오겠지요 .
과제만 내주는 무능한 선생의 미안함으로 참고자료를 만들어 보내오니 , 부디 즐거운 마음으로 봄을 기다려 보도록 합시다 .
본 자료는 한 페이지에 중복 페이지가 있고 , 학습목적을 위해 슬라이드 쇼(Microsoft Powe rPoint-슬라이스 쇼 항목 - 처음부터 ) 를 이용하여 space bar로 한 줄씩 넘기면서 시청해 주시 기 바랍니다 .
육성으로 설명하고자 하였으나 , 그 과정이 번잡하고 수강생 여러분들께도 내용파악에 오히 려 혼란을 야기할 듯하여 지면에서 설명하오니 , 양해주세요 .
좋아하는 음악 청취와 함께 하시는 것도 좋으며 , 편안하게 시청하시고 , 과제 수행에 조금이라 도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
오늘 이야기는 오래된 그림 한 장에서 시작합니다 . 생소한 이 두 인물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
오늘 이야기는 오래된 그림 한 장에서 시작합니다 . 생소한 이 두 인물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
그림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 .
먼저 두 남녀가 서로를 향해 몸을 돌리고 의자에 착석해 있습니다 .
전근대 인물화의 주로 정면을 바라보는 정형화된 모습과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 두 분은 아마도 부부로 추정됩니다 .
인물의 복색으로 볼 때 , 신분이 높음을 알 수 있고 , 남성은 복두라는 관모를 쓰고 조복 ( 朝服 ) 에 홀 ( 笏 ) 을 들고있는 고위 관료로 볼 수 있습니다 .
국가 행사에 참가한 신하 혹은 외국 사신 ( 使臣 ) 의 복장인 것이지요 .
그런데 , 여러 모로 특이한 이 그림은 , 조선의 상징이자 왕실의 문묘인 종묘 ( 宗 廟 ) 에 모셔져 있었답니다 .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있고 ,
조선의 국란시기 마다 “즌하 ! 종묘 사직을 보전하시옵소서”라 외치던 바로 그 국 가 상징의 공간 한 켠에 , 그것도 별도의 건물을 지어 봉안해야 할 만큼 중요한 영 정이었던 것이지요 .
종묘가 조선의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니 , 그렇다면 , 이들도 조선의 왕과 왕비 중 하나일까요 ?
아니랍니다 .
그림의 주인공은 고려의 31 대 공민왕 ( 恭愍王 ) 과 그 비인 인덕왕후 ( 仁德王后 ) 입니다 .
우리에겐 노국대장공주 ( 魯國大長公主 ) 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
조선은 고려를 거꾸러뜨리고 창업한 국가인데 , 왜 조선의 왕실에서 고려말 왕 부부의 영정을 모신 것일까 ?
그 이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민왕이라는 인물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
공민왕은 1330 년 고려 27 대 충숙왕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 형인 28 대 왕 충혜왕 , 조카인 29 대 충목왕과 30 대 충 정왕에 이어 고려의 31 대 왕이 된 자입니다 .
공민왕 출생 무렵은 고려가 원 ( 元 ) 나라의 식민지배에 가까 운 간섭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였지요 . 소위 원간섭기 입니 다 .
고려국왕의 시호에 ‘忠 자가’ 붙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
고려의 국왕임명은 원에 의해 좌우되었고 , 공민왕의 부친인 충숙왕과 형인 충혜왕은 구미에 따라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기까지 하였지요 .
공민왕 역시 10 세 무렵인 1341 년 원의 수도인 연경 ( 현 북 경 ) 으로 숙위 ( 宿衛 : 실제로는 볼모의 형태 ) 를 떠나 유년기 를 보냈고 , 전례에 따라 1349 년 원의 노국공주와 혼인하였 습니다 .
공민왕은 원래 왕이 될 자가 아니었겠지요 . 점령국 의 볼모 신분이기는 했지만 빠이앤티무르 ( 伯顔帖木 兒 ) 라는 이름으로 , 그저 원의 귀족신분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요 .
그런데 , 본의 아니게 그는 왕이 되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 고려조정에서는 형인 충혜왕과 그 아들인 충목왕이 차례로 죽고 , 충목왕의 이복동생 충정왕이 계위하게 되었는데 , 원 에서는 충정왕이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구실로 강
제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공민왕을 세우기로 한 것이지요 .
1351 년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
아마도 원 조정에서는 공민왕이 친원파로서 원에 충성할 것을 기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그런데 , 공민왕은 즉위 직후부터 원의 생각 과는 달리 움직입니다 .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애국심의 발로였는지 , 혹은 옆의 문구 “왕이 되고 싶은 왕 ” 처럼 왕 다운 왕 노릇을 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구에 의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이 시기 공민왕의 일련의 시책들은 결과적으로 원의 강압적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 력이었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
먼저 그는 원의 색채를 지우기 위해서 변발과 호복 (원나라 복장 ) 등을 금지하고 폐지합 니다 .(1352)
이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 문화적 요소를 지우는 것은 지금 으로서도 지대한 파급효과가 있습니다 .
일본인들은 식민지기간 동안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하고 , 폐기하면서 그들의 것을 강요한 바 있지요 .
심지어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 이름 조차도 일본식으로 개명을 강요하 기도 했지요 .
그 잔재들은 70년이 지났음에도 잔존해 있고 , 오히려 시간이 지난 지금에는 이것이 우 리 전통인지 , 일제의 잔재인지 분간이 어렵기도 합니다 .
이에 대한 반급으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왜색 이라는 이유로 일본 ‘ ’ 가요나 , 영화 , 드라마가 송출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했답니다 .
여하한 , 공민왕의 원색 금지정책은 마치 엄혹한 일제시대에 일본식 문화를 금지한다는 ‘ ’ 정책처럼 파격적인 행동으로 평가됩니다 .
덕성부원군 기철 ( 드라마 신돈 )
1356년은 공민왕 개인으로서도 , 고려라는 국가로서도 일대 전환기로 평가할 수 있는 해입니다 .
공민왕은 원의 강력한 반대를 무릎서고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문종 이전 , 즉 원의 간섭이전으로 복구합니다 .
또 조정의 인사에 간여하며 문제를 일으키던 정방을 폐지하고 , 귀족들이 소유 한 토지를 원간섭기 이전 소유자에게 반환하기도 했지요 .
이 모두가 친원귀족세력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 다 .
일제시기에 비의 한다면 ,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 조 선 혹은 대한제국 국제를 복구하고 친일파의 재산과 권력을 환수한 셈이지요 .
그리고 , 친원 세력의 ‘끝판왕 인 기철과’ 권겸 등을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
기철은 좀 전에 변발을 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 었지만 , 당대 고려에서는 최고 권력을 누리던 자였지요 .
고려사 열전 기철 편에 기록된 그의 언행은 국왕을 아랫 사람으로 대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
심지어 같은 책에는 기씨의 모친 영안왕대부인을 위한 잔 치 규모가 너무 크고 화려하여 국가의 물가가 치솟았을 정도였다고 기록되기도 합니다 .
실상 이러한 기씨 형제들의 패악에 가까운 권력부림은 그
들의 또 다른 형제를 등에 업음으로 말미 암은 것이지요 .
공녀(貢女)로 원에 들어가 황후까지 된 고려여인 기황후가 기철 형제의 동생인 것이지요 .
기황후의 인생역정을 여기서 설명하지 않아도 , 원제국의 황후에 까지 오르고 급기야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되는 상황이 되자 고려에 친원세력들은 기씨를 왕처럼 모신 것 이겠지요 .
원에 의해서 왕이 된 공민왕 역시 기씨 일족들을 무시할 수 만은 없었을 테지만 (공민왕이 기황후의 의도로 왕이 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 기씨를 위시한 친원세력의 토지수탈과 패악
으로 “국지부국 (國之不國 : 이게 나라냐?)”이라는 말이 유행일 정도였으니 , ‘왕이 되고 싶
었던 ’왕 , 그에게는 결단이 필요했으리라 보입니다 .
1356년 5월 18일 공민왕은 연회를 핑계로 기철 및 친원부원세력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장사로 하여금 이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합니다 .
고려사 기록에는 부원세력을 제거가 성공하자 같은 날, 고려 최고 권력기구이자 원의 행정 관소인 정동행중서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
또 동시에 군대를 출정시켜 1258년 이래로 몽골이 설치하고 직접 운영했던 쌍성총관부를 습격하여 고려의 영토로 수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 일대의 사건들이 모두 하루에 일어난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지만 , 아마도 공민왕은 오랜 시간 준비를 통해 변혁을 실행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
쌍성총관부 - 그 의미 .
660
년백제의 멸망
, 668년 고구려의멸망
이후를 국사교과서에서는신라
의삼국통일이라고 말합니다 . 때문에 이후의 시기를 통일신라로 명명하고
있지요 .그런데, 통일 혹은 일통된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 전역에 미치지 못했답니
다 .즉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우리 역사에서잃어버린 것이지요 .
이러한상황은 940
년 무렵 고려왕조가 개창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때까지의 우리 영토는 대체적으로 앞선 지도에서 공민왕이 1356
년 수 복한 지역남쪽에 국한 되겠지요 .
그렇다면
‘ 현재 북한지역의 절반이 우리땅이 아니었던
것일까 ? 이런 것을 배운 적은 없는데..’라 생각이 드실거예요 .여러분들은 분명 배우셨답니다 .
“ 종성 , 온성 , 회령
,경원 , 경흥
, 부령등
6 진의 개혁이 완료되었다 .(144
9
년 세종31)”. 바로 저 유명한“ 김종서의 4 군 6 진의 개척으로 조선의 국
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게 되었다 .”
기록인 것이지요 .우리는 영토를 넓히고 개척했다는 것은 배우지만 , 빼았겼다거나 원래 우리 땅이 아니었다라는 식으로 배우지는 않으니까요 .
여하한 1258년 무렵부터 몽골-원제국의 영토가 되었던 쌍성총관부 지역을 수복함은 , 1361 년 ( 공민왕 10) 무렵 강계지역에 만호부를 설치하면서 압록 강 중류지역까지 진출한 사건과 더불어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영토를 확보하
는 교두보를 마련한 중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쌍성총관부 사건이 주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지요 .
고려군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원의 지방관리였던 이자춘이라는 인물이 포섭되어 성문을 열어주었고 , 이 공을 인정받아 자춘은 개경으로 이주하여 고려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이지요 .
요즈음 말로 ‘듣보잡 이었던’ 인물의 화려한 데뷔라고 할까요 ?
그리고 그의 아들도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지요 .
그 이름 이성계(李成桂)..
개혁군주 공민왕 vs 광인 ( 狂人 ) 공민왕
이때까지의 공민왕의 면모는
북진과 폐단개혁을 통해 외세에 맞서는 독립 군주이자 개혁군주로 평가됩니다 .
그런데 역사는 그를
또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기도 하지요 .정사를 내
팽개치고 나라를 망하게 한 미친 광인으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
역사에서 개혁을
꾀하던
인물들의 평가가엇갈리는 것은 비단
공민왕에 국 한되지는 않음을 이미 여러분들도알고 있습니다 .
북벌을 주장하고 세제개혁을 외치던 광해도 꼭 닮은 모습이지요 .
어쩌면 개혁은 기존
권력자들에게는 생사를 위협받는 일이기도 할 테니 ,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은 그것이필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공민왕과광해
의닮은 꼴은 역사의 우연일까요 .
역사의필연일까요 .
개혁군주 미친 자로 스러지다 .
공민왕의 개혁자적 모습은 수도를 남경(南京 : 현 서울 )으로 천도하려는 실 행단계에 이르러 변모합니다
수도를 옮기겠다는 생각은 기록 상 왕사 (王師) 보우의 건의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실상 500여 년 간 국가의 중심이었던 지역을 옮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었겠지요 .
역사에서 천도를 계획하는 군주는 대부분 구제도의 개혁을 꾀하는 자이고 , 천도는 권력구조를 바꾸는 종착지이기도 하지요 .
때문에 전란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이도 이외의 천도는 거의 불가능함을 역 사는 말하고 있답니다 .
역사의 우연이겠으나 , 조선의 정조 역시 화성 천도를 천명하였으나 , 갑작스 러운 죽음을 맞기도 했지요 . 그 죽음으로 일반화 시킬 수는 없지만 , 기존 권 력층의 반대가 극렬했음은 사실이랍니다 .
지금 수도를 서울에서 강릉으로 옮긴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 까요 . 집값은 떨 어지고 , 조물주 보다 높은 건물주들은 그 정책에 찬성할 수 있을까요 .
이러한 의혹은 의혹일 뿐, 역사에서 공민왕의 변화는 왕비의 죽음으로 인 함으로 합치되고 있습니다 .
공민왕비는 오랜 동안 후사를 못 보다가 1364
년에 만고 끝에 회임 하였 는데, 이듬
해 2월 난산 끝에 태아와 함께 사망하게 되었답니다 .
원의 공주로서 원에 맞서는 공민왕을 목숨을 걸고 지지해준 정치적 동반자
이기도 했던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이 공민왕에게 큰 충격이었을 듯 합니다 .
그래서 인지 , 기록에는 공민왕이 머리를 산발하고 음식을 거부하기도 하 고 , 스스로 초상화를 그리고 , 살아있는 것처럼 대화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
왕비의 릉인 정릉( 개경)은 직접 설계하여 9년여에 걸쳐 조영 했고 , 자신 의 무덤을 미리 곁에 마련하였다고도 말합니다 .
이쯤 되면 세기의 사랑
‘ ’
정도로 불릴수 있겠으나 , 기록은 그
상실감을 도
‘ ’
가 지나친 미친자 로 전합니다 .
상사병은 폭음과 폭력으로 이어졌고 , 8
년이 지나도록후사를 얻기 위한 후궁
들에게는 전혀 정을 주지 않아후궁들 역시 비구니가 되는 등 불운한 삶을 살 았다고 합니다 .
또
, 기록에는 공민왕이 자제위 (子弟衛 : 귀족의 자제로 이루어진
소년집단) 의 미소년들과 동성애에탐닉하였고 , 폭력성은 주변이 막을 수 없는 타락한
존재로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런 상황이니 , 개혁정책은 고사하고 정사를
돌보는 일은 불가능했겠지요 .
그런데,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사후 국정 업무를
엉뚱한 인물에게 일임해 버립
니다 .그는 변조 ( 遍照 )라는 자로
신돈
(辛旽
)으로더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이때 비선실세로
신돈을 등용한 것은 , 단순히 역사에 한 인물이 등장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의 씨앗을 심은 일이 됩니다 .
변조는 출가한
승려이긴
했지만 ,관복을 입고 머리를 길렀기에 사람들은
그를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
(非僧非俗
)이라 부르기도 했습 니다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던 노국공주를
잃은 상실감에 빠져있던
공민왕에게 변조는새로운 그리고 유일한 위안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
왕비가
죽자 공민왕을 반대세력들은 그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
왕비의 장례비용과 불교행사에막대한 국고를 탕진하면서 기존 옹호세력들
도 등을돌리게 된 것이지요 .
이에 공민왕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지하는승려 변조를 불러 스승으로 삼고 정사를 일임하게 된 것이지요 .( 신돈이라
는 이름으로 개명 )
신돈은 집권과 동시에 개각이라는 미명하에 고관대작 등을 유배 , 좌천시키
고 심지어병권을 쥐고 있었던 최영 장군을 체포하여 신문하기도 했지요 .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
공민왕은 이를묵살하고 신돈에게 모든 권력을 일
임하였답니다 .
당시 신돈이 제수 받은 직책은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 ( 守正履順 論道燮理保世功臣 ) 벽상삼한삼중대광 ( 壁上三韓三重大匡 : 임금에 준하는 국정책임자 ) 영도첨의사사사 ( 領都僉議使司事 : 관직명은 있 었으나 가장 높은 벼슬로서 실제 임명하지는 않는 관직 ) 판중방감찰 사사 ( 判重房監察司事 : 국방부장관 ) 취성부원군 ( 鷲城府院君 : 최고 귀족장 ) 제조승록사사 ( 提調僧錄司事 : 불교 , 문화 , 사회부 장관 ) 겸 ( 兼 ) 판서운관사 ( 判書雲觀事 : 기상청 , 농림수산부 장관 ) 로 , 제가
아는 한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길고 높은 벼슬을 제수 받은 인물입니다 .
신돈은 막강한 권력을 누리다가 1371 년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게 됩 니다 .
그런데 , 신돈이 심어 놓은 씨앗이 발아한 것이지요 .
이 씨앗은 결국 고려를 멸망 케 합니다 .
한 장의 그림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
다음 편에는 신돈이 심어놓은 씨앗이 어떻게 고려를 멸망시키는지 ,
그리고 그 혼란기에 기회를 잡은 인물들 .
조선의 건국과정과 역사에서의 정당성문제를 살펴볼 것입니다 .
또 한국사의‘
최고 위인 세종대왕의 우리가 미쳐 알지 못했던‘
,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모습을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
이 과정에서 문제의 그림이 종묘에 위치하게 된 연유도알게
될 것입니다 .
여건이 허락되면 영조와 정조의 시대도 다른 시각으로 엿보도록 하지요 .3 주차 제출 과제
재택 1주차에 작성하고 3시기로 구분한 연표에서 , 두 번째 해당하는 기간 내에 서 인물 혹은 사건을 선정합니다 .
선정 인물 혹은 사건에 대하여 내밀히 탐구하고 ,
선정 인물 , 사건의 시말과 해당시대에서 선정한 이유 등을 A4 3매 이상으로 작성 하여
3월 30일 부터 4월 6일까지 이메일로 제출하시면 됩니다 .
제출시 문서제목을 ( 성명 , 학번 , 제목 순으로 기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전에 제출한 과제는 검토 후 보내주신 메일로 1 주 내에 피드백을 드리도록 하겠 습니다 .
한 주간도 건강하시고 , 의문점 등은 언제든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