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 아래의 조건을 따르는 경우에 한하여 자유롭게
l 이 저작물을 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 및 방송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따라야 합니다:
l 귀하는, 이 저작물의 재이용이나 배포의 경우, 이 저작물에 적용된 이용허락조건 을 명확하게 나타내어야 합니다.
l 저작권자로부터 별도의 허가를 받으면 이러한 조건들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저작권법에 따른 이용자의 권리는 위의 내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용허락규약(Legal Code)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것입니다.
Disclaimer
저작자표시. 귀하는 원저작자를 표시하여야 합니다.
비영리. 귀하는 이 저작물을 영리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 이 저작물을 개작, 변형 또는 가공할 수 없습니다.
文學碩士學位論文
新羅 倭典의 성격
2015年 2月
서울大學校 大學院
國史學科
李 現 珠
新羅 倭典의 성격
지도교수 宋 基 豪
이 論文을 文學碩士 學位論文으로 提出함
2014年 10月
서울大學校 大學院
國 史 學 科
李 現 珠
李現珠의 文學碩士 學位論文을 認准함
2015年 1月
위 원 장 (인)
부위원장 (인)
위 원 (인)
[국문초록]
新羅 倭典의 성격
李 現 珠
본 논문은 신라 倭典의 설치목적과 성격, 그리고 폐지 문제를 다 룬 것으로 이를 통해 7~8세기 신라 對倭外交政策의 변동상황을 살 펴보고자 하였다.
왜전은 領客典의 전신인 前期倭典과 영객전 성립 후 별치된 後期 倭典으로 나뉜다. 전기왜전은 ‘倭典’이라는 명칭 및 領客府(영객전) 가 대외외교업무를 담당한 관사임을 생각할 때 대왜외교업무, 특히 왜의 사신단을 접대하는 관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기왜전은 586년 예부령이 설치된 이후 처음으로 倭使가 신라에 내방한 591 년 설치되어 왜사의 접대를 담당하였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로부터 침공을 받으며 한반도 내에서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므 로 親倭外交政策을 전개하면서 왜전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후 전기왜전은 621년 唐使의 내방에 대응해 영객전으로 개편되 는데, 이는 신라가 국교를 맺은 대외각국의 사신에 대한 응접을 행 하는 관사의 성립, 곧 접대 대상의 확대와 사신 접대 관사의 상설화 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객전은 651년 영객부로 승격되면서 확대 개편되었다.
신라와 왜의 관계는 한반도 내에서 삼국통일전쟁이 전개되는 과 정에서 왜가 친백제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단절되었다. 양국의 사신교 환이 재개된 것은 668년으로, 신당전쟁이 전개되기 직전이었다. 신 당전쟁이 전개되는 와중에 배후에 위치한 왜의 동향을 주시할 필요 가 있었던 신라는 대당관계가 개선되는 8세기 초까지 친왜외교정책
을 유지해야 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672년 이후 당과 사신교환이 단절된 왜가 685년 무렵부터 8세기 초반까지 신라에 學問僧을 파견하였다는 점 이다. 대당교류가 단절된 상황에서 왜는 신라를 통해 외래문물을 수 입하고자 하였고, 신라는 대당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당과 왜가 연 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왜와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 야 했다. 왜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면서 다종다양한 물품을 보내 고, 왜의 견당학생 ․ 학문승의 송환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견신라 학문승의 신라 내 체류를 허용하여 신라인과의 교류를 추진함으로 써 왜의 문물교류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켜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친왜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신라는 왜사 가운데 일정기간 신라에 체류하게 된 왜의 학문승에 대한 접대와 관리를 담당할 왜 전을 별치하였다. 별치시점은 왜의 견신라학문승이 확인되는 685년 무렵일 것이다. 이때 후기왜전은 내성에 예속되었는데, 이는 왕실에 서 학문승에 대한 접대비용을 제공하고 이들 학문승과 신라인 간의 교류를 왕실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699년 효소왕이 당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대당관계가 개선되면서 신라는 대일관계의 비중을 축소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양국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은 신라를 배제하고 당과 교류할 방법을 모색하는 데, 발해를 경유하여 견당사를 파견하거나 당승을 일본으로 초청하 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일본의 견신라학문승 또한 740년 이전에 귀국한 審詳을 마지막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신라는 경덕왕대 일본 사마저 不納 ․ 不見하였고, 759년 무렵에는 전운이 감돌 정도로 양 국관계가 악화되었으므로 후기왜전의 기능 또한 사실상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견신라학문승으로 확인되는 審詳이 귀국한 이후 인 740년 무렵, 특히 신라가 일본사를 不納 ․ 不見한 742년~753년 무렵에 후기왜전이 폐지되었을 가능성이 상정된다.
그러나 신라학문승을 매개로 이루어졌던 인적교류의 영향이 단기 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최후의 신라학생으로 확인되는 審詳은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많은 경전을 전래하여 이후 일본 불교에 영향 을 주었다. 752년 김태렴 사행 시 審詳이 있던 大安寺를 방문한 것 또한 審詳이 신라학문승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 다.
전기왜전이 6세기 후반 왜사를 접대하기 위해 설치된 관사였다면, 전기왜전의 후신인 영객부가 존재하는 가운데 설치된 후기왜전은 7 세기 후반 왜가 파견한 학문승을 접대하고 관리하기 위한 관사로, 모두 친왜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운영된 것이었다.
주요어 : 왜전, 영객부, 왜사, 신라학문승, 신라의 대왜관계 학 번 : 2008-22589
목 차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1
一. 前期倭典과 領客府 ··· 8
二. 倭典의 별치 ··· 24
三. 後期倭典의 폐지 ··· 49
맺음말 ··· 66
참고문헌 ··· 70
Abstract ··· 77
표 목 차
<표 1> 왜전과 영객전(영객부)의 설치시점에 대한 제 논의
··· 12
<표 2> 영객부와 왜전의 직장에 대한 제 논의 ··· 13
<표 3> 7C 전반 신라를 내방한 왜의 사신 및 학생
․
학문승··· 31
<표 4> 7C 후반~8C 전반 신라를 내방한 왜(일본)의 학생
․
학문승 ··· 36<표 5> 8C 신라와 일본의 사신 방환 사유 ··· 50
<표 6> 문무왕~애장왕대 신라의 견당사
․
견일본사 파견횟수··· 53
도 표 목 차
도표 1 신라의 외교기구 추정도 ··· 48 도표 2 왜전과 영객부, 사전의 변천과정 ··· 65
머리말
倭典은 領客府와 함께 신라의 대외관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관 사로서, 《三國史記》職官志에 따르면 왜전은 領客典으로 개편된 뒤 다시 별치되었다고 전하며1) 동시에 內省 소속의 왜전2)도 확인되고 있어 신라 對倭關係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관련사 료가 소략한 탓에 왜전에 천착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먼저 영객전의 前身인 왜전의 설치시점에 대해 영객부 令이 설치 된 해로 전하는 眞平王 13년(591)과 眞德王 5년(651)3) 중 前者인 591년 始置되었다고 본 견해가 제기되었다.4) 이 견해에 따르면 진 평왕 43년(621) 신라에 도래한 唐使 庾文素를 맞이하기 위해5) 왜 전이 영객전으로 개편되고, 진덕왕 5년(651) 令이 설치된 시점에는 영객전이 영객부로 승격되었다고 본다.6) 한편 진평왕 13년(591) 對 隋外交를 위해 왜전에서 영객부로 고치고 진평왕 43년(621) 영객전 으로 고친 이후 진덕왕 5년(651) 令의 설치로 영객전의 위상을 높
1) 《三國史記》卷38 雜志7 職官 上 領客府, “領客府 夲名倭典 眞平王四十三年攺爲領客典 [後又別置倭典] 景德王又攺爲司賔府 惠恭王復故 令二人 眞徳王五年置 位自大阿湌至角于 爲之 卿二人 文武王十五年加一人 位與調府卿同 大舎二人 景徳王攺爲主薄 惠恭王復稱大舎 位與調府大舎同 舎知一人 景德王攺爲司儀 惠恭王復稱舎知 位與調府舎知同 史八人”
2) 《三國史記》卷39 雜志8 職官 中 內省, “倭典已下十四官貟數闕”
3)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13年, “十三年春二月 置領客府令二員”
《三國史記》卷38 雜志7 職官 上 領客府, “令二人 眞徳王五年置 位自大阿湌至角于爲之”
4) 井上秀雄, 1969〈《三國史記》にあらわれた新羅の中央行政官制について〉《朝鮮學報》
51;1974《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재수록, 269쪽
李成市, 1982〈正倉院寶物氈貼布記を通して見た八世紀の日羅關係〉《朝鮮史硏究會會報》
67;1998〈正倉院所藏新羅氈貼布記の硏究-新羅․日本間交易の性格をめぐつて〉《古代東民 族國家》, 岩波書店;김창석 譯, 1999〈3장 모전의 전래과정과 신라․일본 관계〉《동아시 아의 왕권과 교역》, 청년사, 98~99쪽
5)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43年(621), “四十三年秋七月 王遣使大唐朝貢方物 高 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常侍庾文素來聘 賜以璽書及畫屛風錦綵三百叚”
6) 井上秀雄, 1974, 위 책, 269쪽
李仁哲, 1991〈新羅의 中央行政官府〉《박성수교수화갑기념논총-한국독립운동사의 인 식》, 박성수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1993《新羅政治制度史硏究》, 일지사 재수록, 37~38쪽
李成市, 1999, 앞 책, 99쪽
채미하, 2011〈신라의 賓禮-당 使臣을 중심으로-〉《한국사학보》43, 54쪽
최희준, 2011〈신라 中代의 唐 사신 영접절차와 운용〉《한국사연구》153, 138~145쪽
이고자 하였다고 본 견해7)도 있다. 이에 따르면 왜전의 설치시점은 591년 이전이 된다. 그러나 진평왕 43년(621) 對唐外交의 비중이 증대되는 가운데 영객부를 영객전으로 격하시켰다고 보기는 어려우 므로 전자가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이 왜전의 직장에 대해서는 ‘倭’라는 특정국가의 명칭을 띠고 있 다는 점, 그리고 영객부가 외교업무를 담당하였다는 점을 근거로 대 왜외교업무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 다만 왜전이 설치되었다고 하는 591년 이후 621년 왜전이 영객전으로 개명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신라는 왜 외에도 사신을 교환한 국가가 있었는데 어째서 왜전만 확인되는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왜전이 담당한 대왜외교업 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 후신인 영객부의 직장이 참고가 될 것인데, 영객부의 직장에 대해서는 약간의 견해차가 존재한다. 賓客의 업무, 곧 사신 賓待, 혹은 그와 관련된 외교업무를 담당한 관사로 본 견 해8)와 ‘빈객 및 兇儀’로 본 견해9)가 있다. 양자 모두 영객부가 빈 객, 곧 외교업무를 담당하였다고 보았지만, 후자는 영객부가 후에 司賓府로 개칭된 바 있으므로 唐代의 司賓寺=鴻臚寺에 해당하는 관 사로 보고 홍로시가 관할한 典客署와 司儀署의 직장을 모두 통령한 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영객부가 사빈부로 개명된 시기는 景德王
7) 박남수, 2011〈8세기 신라의 동아시아 외교와 迎賓 체계〉-고대 동아시아사 학술회의-
《8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상》, 동북아역사재단;2011《한국 고대의 동아시아 교역사》, 주류성출판사, 138~140쪽
8) 金哲埈, 1964〈韓國古代國家發達史〉《韓國文化史大系》Ⅰ,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 所;1990《韓國古代史硏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재수록, 60쪽
三池賢一, 1972〈新羅內廷官制考(下)〉《朝鮮學報》62, 40쪽
李基東, 1980〈新羅 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震檀學報》50;1984《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일조각 재수록, 122쪽
9) 濱田耕策, 1990〈新羅の迎賓機構-關門と領客府〉《古代文化》42-8;2002《新羅國史の硏 究》, 吉川弘文館 재수록, 164~165쪽
李仁哲, 1993, 앞 책, 37~38쪽 채미하, 2011, 앞 논문, 54~55쪽 박남수, 2011, 위 책, 128~129쪽
18년(759)으로, 이 시기는 唐에서 司賓寺가 홍로시로 개명된 지 50 여 년이 흐른 후였으므로10) 단순히 영객부를 홍로시로 치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객부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주는 사료는 많지 않으므로 영객부가 성립한 시점의 신라 대외상황과, 영객부를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을 고려의 禮賓省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객부 의 성격을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영객전이 성립한 후 별치되었다고 전하는 倭典은 성격과 별 치시점을 두고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먼저 왜전의 별치시점 에 대해서는 사료에 명확히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자들마다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濱田耕策과 李成市는 신라의 대외관 계 상에서 대왜관계가 재설정된 시점에 주목하였다. 곧 濱田耕策은 신라가 대일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여 일본과 마찰을 빚게 된 시점, 구체적으로는 詳文師가 通文博士로 개칭되면서 당에 대해서만 서표를 작성하기 시작한 聖德王 13년(714)11)을 왜전의 별치시점으 로 보았다. 반면 李成市는 신라가 당과 책봉관계를 맺으면서 중국의 禮的 규제에 따라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眞德王 5년(651)을 왜 전의 별치시점으로 보았다.12) 김선숙은 眞德王 5년(651) 영객부 예 하에 배치하였다가 이후 통문박사가 성립한 聖德王 13년(714) 무렵 에 내성 예하로 재배치되었다고 보았다.13) 박남수는 倭가 日本으로 국호를 고친 해인 670년 이전에 신라와 일본이 사신을 주고받은 文 武王 8년(668)14)을 왜전의 별치시점으로 보았다.
이외에 대일교역이 확대된 시점에 주목한 견해도 있는데, 서보경 과 서영교는 신라가 일본에 대규모 물품을 증여하기 시작한 文武王
10) 당에서 司賓寺의 명칭이 사용된 기간은 光宅 元年(684)부터 神龍 元年(705) 사이였다.
(《唐六典》卷18 鴻臚寺 卿, “光宅元年改為司賓寺卿 神龍元年復舊”) 11) 濱田耕策, 2002, 앞 책, 127~137쪽․165쪽
12) 李成市, 1999, 앞 책, 99쪽
13) 김선숙, 2005〈신라 성덕왕, 효성왕대의 대일외교〉《대동문화연구》51, 318쪽;2012
〈제3장 신라 성덕왕(효성왕)․경덕왕․혜공왕대의 대일외교〉《韓國古代佛敎外交史硏究》, 한국학술정보(주), 225~226쪽
14) 박남수, 2011, 앞 책, 140~141쪽
19년(679)15)을, 김창석은 8세기 신라와 일본 간 교역이 확대되는 상황과 연결지어 聖德王 대 관문성(722)을 축조한 전후시기16)를 별 치시점으로 주목하였다. 이상의 제설들은 왜전의 성격을 어떻게 보 느냐에 따라 별치시점을 달리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별치시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전의 성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왜전의 성격에 대해서는 三池賢一이 내성 소속의 왜전이 생산관 계관사와 병기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대일교역과 관련된 제품의 생 산 및 收得을 도모한 관사로 파악한17) 이래 대일교역을 담당한 관 사로 이해되었다. 이후의 연구들에서 왜전은 대왜 ․ 대일 외교업무 를 담당한 관사라는 점이 주목되면서도 동시에 대일교역을 담당하 였다는 점 또한 함께 고려되었다.18) 왜전과 함께 나열된 관사들이 주로 생산관계관사인 점은 사실이지만 개중에는 寺典과 같이 생산 관계관사로 보기 어려운 관사도 포함되어 있어 내성 소속의 왜전을 대일교역을 담당한 관사라고 보는 데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 리라 생각된다.
한편 별치된 왜전은 대일교역을 담당한 기구가 아니라 일본사신 을 영접하던 관사라는 점을 강조한 견해도 제기되었다.19) 영객부의 전신인 왜전의 명칭을 그대로 가져온 관사를 두었다는 것은 별치된 왜전이 영객부의 전신인 왜전과 일정 부분 성격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므로 왜전 역시 외교업무와 관련된 관사로 보는 것이
15) 서영교, 2006《羅唐戰爭史 硏究》, 아세아문화사, 319~325쪽
서보경, 2007〈7세기 후반~8세기 전반의 신라와 일본관계-‘왜전의 별치’ 문제를 중심 으로〉《일본연구》32
16) 김창석, 2005〈청주의 녹읍과 향도〉《신라문화》26, 150(14)~151(15)쪽 17) 三池賢一, 1972, 앞 논문, 41쪽
18) 濱田耕策, 2002, 앞 책, 165~166쪽 李成市, 1999, 앞 책, 99쪽
서영교, 2006, 위 책, 319~325쪽 서보경, 2007, 위 논문
김창석, 2005, 위 논문, 151(15)쪽 19) 李仁哲, 1993, 앞 책, 71쪽 김선숙, 2012, 앞 책, 225~226쪽 박남수, 2011, 앞 책, 140~141쪽
타당하다. 다만 영객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왜 왜전이 별치되었으 며 왜 내성에 소속되었는지는 해명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왜전의 별치시점은 대왜외교업무 상에 변동이 있었 던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때 주목되는 것이 7세기부터 8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왜의 견신라학문승의 존재이다. 본고에 서는 이를 중심으로 별치된 왜전의 성격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 전에 몇 가지 용어사용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먼저 왜 전의 문제이다. 왜전은 영객전 성립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존재한 왜전과 이후에 별치된 왜전, 두 종류로 구분된다. 이에 대해 濱田耕 策은 전자를 ‘前期倭典’, 후자를 ‘後期倭典’으로 구분하였으며,20) 이 외의 논자들은 사료상의 표현에 따라 ‘倭典’으로 통칭하고 전자와 후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을 때 후자를 ‘별치된 왜전’으로 언급하였 다. 사료 상에 등장하는 표현을 쓰자면 ‘왜전’으로 통칭하는 것이 타 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자의 후신인 영객부가 존재하는 상황에 후 자가 별치되었다면 전자와 후자 간에 성격차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 므로 전자와 후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러한 차이는 근 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이라기보다 공통적인 성격을 유지하면서 시기 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濱田耕策과 같이 ‘전 기왜전’과 ‘후기왜전’으로 구분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우선 濱田耕策의 구분법에 따라 영객전의 전신인 왜전 을 ‘前期倭典’으로, 후에 별치된 왜전을 ‘後期倭典’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다음은 倭와 日本의 문제이다.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변경된 시 점은 《新唐書》와 《三國史記》에서 670년으로 전하고 있지만,21) 671년 文武王이 薛仁貴에게 보낸 答書22)와 哀莊王 3년(802) 기사
20) 濱田耕策, 2002, 앞 책, 132쪽
21) 《三國史記》卷6 新羅本紀6 文武王 10年(670) 冬12月,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 以 爲名”
《新唐書》卷220 列傳145 東夷 日本, “咸亨元年(670) 遣使賀平高麗 後稍習夏音 惡倭名 更號日本 使者自言 國近日所出 以爲名 或云日本乃小國 爲倭所幷 故冒其號 使者不以情 故 疑焉 又妄夸其國都方數千里 南·西盡海 東·北限大山 其外卽毛人云”
에서23) 倭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으며, 8세기 초 일본 천황의 諡 號로 ‘大倭根子’(703) ․ ‘倭根子’(707)24)가 확인되는 등 670년 이후 에도 倭號가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2011년 7월 소개된 禰軍墓誌銘 (678)에서 ‘日本’이라는 명칭이 확인되면서 670년에 일본 국호가 개 칭된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였다.25) 그러나 곧이어 묘지명의 ‘日本’
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당의 입장에서 東方을 지칭한 일반명사로서 이 경우는 백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6) ‘日本餘 噍’ ․ ‘風谷遺甿’이 ‘扶桑’ ․ ‘盤桃’에 의탁하여 당에 대항하였다는 금 석문 상의 표현을 생각할 때27) ‘日本’은 백제유민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한 세력을,28) 이들이 의탁하였다고 하는 ‘扶桑’은 왜를 가리키
22) 《三國史記》卷7 新羅本紀7 文武王 11年(671) 7月, “龍朔三年 揔管孫仁師領兵來救府城 新羅兵馬亦發同征行至周留城下 此時倭國舩兵來助百濟 倭舩千艘停在白沙 百濟精騎岸上守 舩 新羅驍騎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即降下”
23) 《三國史記》卷10 新羅本紀10 哀莊王 3年, “冬十二月 授均貞大阿湌爲假王子 欲以質倭 國 均貞辭之”
24) 《續日本紀》에서 持統의 시호는 ‘大倭根子天之廣野日女尊’으로 전하며(《續日本紀》卷3 文武 大寶 3년(703) 12月, “癸酉 從四位上當麻眞人智徳 率諸王諸臣 奉誄太上天皇 謚曰 大倭根子天之廣野日女尊”) 文武의 시호는 ‘倭根子豊祖父天皇’으로 전한다.(《續日本紀》
卷3 文武 慶雲 4年(707) 11月, “謚曰倭根子豊祖父天皇”)
25) 王連龍, 2011〈百濟人『禰軍墓誌』考論〉《社會科學戰線》2011-7
拜根興; 조우연 譯, 2012〈唐代 백제유민 禰氏家族 墓誌에 관한 고찰〉《한국고대사연 구》66
金榮官, 2012〈中國 發見 百濟 遺民 禰氏 家族 墓誌銘 檢討〉《新羅史學報》24, 132~133쪽
26) 東野治之, 2012〈百濟人禰軍墓誌の『日本』〉《圖書》756
李成市;정동준 譯, 2013〈禰軍 묘지 연구-禰軍의 외교상 사적을 중심으로-〉《목간과 문자》10
27) 〈禰軍墓誌銘〉, “……于時日本餘噍㩀扶桑以逋誅 風谷遺甿負盤桃而阻固……”
28)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백제를 ‘日本’으로 표현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러나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한 이유로 나라가 日邊 혹은 日所出에 가까운 곳에 있음 을 들고 있는데,(《新唐書》卷220 列傳145 東夷 日本 咸亨 元年(670), “咸亨元年 遣使賀 平高麗 後稍習夏音 惡倭名 更號日本 使者自言 國近日所出 以爲名 或云 日本乃小國 爲倭 所幷 故冒其號 使者不以情 故疑焉”, 《通典》卷185 邊防1 東夷上 倭, “倭 一名日本 自云 國在日邊 故以爲稱”) 이는 왜가 동쪽에 있다는 인식이 바탕이 된 것이므로, 일본이라는 국호 또한 동방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불교에서 ‘日出處’가 동쪽을 지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東野治之, 1992, 앞 책, 99~100쪽) 聖住寺 朗慧和尙碑에서 도 동방을 지칭하는 단어로 ‘日出處’가 사용된 사례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聖住寺 朗 慧和尙塔碑〉, “……復云 東流之說 盖出鉤讖 則彼日出處善男子 根殆熟矣……”) ‘日本’이 동방을 지칭하는 단어였을 가능성은 상정할 수 있다. 당의 입장에서 동방은 왜(일본) 뿐 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까지도 포함될 수 있고, 따라서 ‘日本’이 백제를 지칭할 가
는 것으로 보이므로 678년 당시까지 ‘일본’이 국호로 사용되지 않았 다고 보인다.
670년을 제외하고 일본 국호의 개칭시점으로 제시된 것은 史書가 편찬되기 시작한 天武 대, 곧 飛鳥淨御原令이 제정되고 일본열도 전 체를 통칭하는 호칭으로 ‘大倭’가 성립한 686년 무렵29)과 大寶律令 이 편찬된 701년 무렵30)이다. 현재로서는 ‘일본’ 국호가 사용되었음 이 확실시되는 大寶律令이 편찬된 701년 무렵을 일본 국호변경시점 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왜는 최소한 701년 大寶律令이 편찬될 시점에는 日本으로 국호를 변경하였으며, 약 30여 년만에 견당사 파견이 재개된 702년에는 대외적으로도 국호 변경 사실이 공인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31) 본고에서는 일본 국호의 개칭시 점을 大寶律令이 편찬된 701년 무렵으로 보는 견해에 따라 701년 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일본열도 내 정치체를 ‘왜’로, 그 이후를 ‘일 본’으로 칭하고자 한다.
본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먼저 왜전의 연혁을 살펴 보면서 왜전과 관련된 논의의 쟁점을 짚어본 뒤 영객부와 그 전신 인 전기왜전의 성격과 설치시점을 검토해볼 것이다. 나아가 전기왜 전의 명칭을 계승한 후기왜전은 어떠한 성격의 관사였을지를 추론 해볼 것이다. 2장에서는 1장에서의 검토결과를 바탕으로 후기왜전 의 별치시점과 목적,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객전 성립 이후의 대왜관계 전개과정 속에서 어느 시점에 어떠한 목적으로 후기왜전 이 별치되었으며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것이 다. 마지막으로 3장에서는 대일관계의 변동과 함께 후기왜전의 존속 여부를 검토해볼 것이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후기왜전은 어떠한 성 격을 가진 관사였으며 신라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 당하고 있었는지 그 의의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29) 山尾幸久, 1989《古代の日朝關係》, 塙書房, 467쪽 30) 東野治之, 1992《遣唐使と正倉院》, 岩波書店, 101~107쪽 31) 東野治之, 1992, 위 책, 101~107쪽
一. 前期倭典과 領客府
倭典의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그 연혁부터 살펴볼 필요 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왜전의 연혁은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그 설치시점 및 존속한 기간에 대해서조차 구체적인 서술을 확인할 수 없으며 領客府 관련서술을 통해 그 설 치시점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다음은 왜전과 영객부가 언급된 사료를 모아본 것이다.
A. 領客府는 본래 명칭이 倭典이었는데 眞平王 43年(621) 領客典으 로 고쳤다. [後에 다시 倭典을 別置하였다.] 景德王이 다시 司賓 府라 개칭하였고, 惠恭王이 復故하였다. 令은 2人으로 眞徳王 5 年(651) 두었는데 位가 大阿湌에서 角于에 이르는 자로 삼았다.
卿은 2人으로 文武王 15年(675) 1人을 더하였는데 位는 調府卿 과 같다. 大舎는 2人으로 景徳王이 主薄로 고쳤다가 惠恭王이 大 舎로 復稱하였으며 位는 調府의 大舎와 같다. 舎知는 1人으로 景 德王이 司儀로 고쳤다가 惠恭王이 舎知로 復稱하였으며 位는 調 府의 舎知와 같다. 史는 8人이다.32)
B. 倭典 已下 14官의 官員數는 빠져있다.33)
C. {眞平王 13年(591) 春2月} 領客府의 令 2員을 두었다.34)
D. {敬順王 6年(932)} 여름 4월 사신 執事侍郎 金昢과 副使 司賓卿 李儒를 唐에 보내 朝貢하였다.35)
32) 《三國史記》卷38 雜志7 職官 上 領客府, “領客府 夲名倭典 眞平王四十三年攺爲領客典 [後又別置倭典] 景德王又攺爲司賔府 惠恭王復故 令二人 眞徳王五年置 位自大阿湌至角于 爲之 卿二人 文武王十五年加一人 位與調府卿同 大舎二人 景徳王攺爲主薄 惠恭王 復稱大 舎 位與調府大舎同 舎知一人 景德王攺爲司儀 惠恭王復稱舎知 位與調府舎知同 史八人”
33) 《三國史記》卷39 雜志8 職官 中 內省, “倭典已下十四官貟數闕”
34)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13年(591) 春2月, “置領客府令二員”
35) 《三國史記》卷12 新羅本紀12 敬順王 6年(932), “夏四月 遣使執事侍郎金昢 副使司賔卿
사료 A는 《三國史記》職官志 領客府條의 기사로 영객부의 연혁 을 전하면서 그 전신으로 왜전을 들고 있으며, 전기왜전을 영객전으 로 고친 후 다시 왜전을 별치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사료 B는 내 성 예하에 왜전이 있었음을 전하는데, 영객전이 최소한 진평왕 43 년(621)에는 성립하였고 내성은 622년에 성립하였음36)을 생각할 때 내성에 소속된 왜전은 영객전 성립 후 별치된 왜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외에 왜전의 설치시점이나 職掌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 가 없어 왜전과 관련된 논의는 전기왜전의 설치시점, 그리고 후기왜 전의 성격과 별치시점에 초점이 맞춰졌다. 특히 쟁점이 된 부분은 후기왜전의 문제이다.
곧 濱田耕策과 李成市는 후기왜전을 신라 대외관계의 전개과정 속에서 당과 일본을 차원을 달리 하는 교섭대상국으로 설정하면서 둔 관사라고 보았다. 다만 별치시점에 대해 濱田耕策은 通文博士를 두면서 당에 대해서만 書表를 쓰기 시작한 聖德王 13년(714) 무 렵37)을, 李成市는 신라가 중국의 조공책봉체제에 편입되어 제도를 개편한 眞德王 5년(651) 무렵38)으로 달리 들고 있다.39)
신라의 대왜외교정책과 관련하여 왜전의 별치시점을 살핀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대일관계에 비해 대당관계를 중시하는 시점에 대 일외교를 전담하는 관사를 따로 설치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별치시점으로 지적된 651년 이후에는 삼국통일전쟁이 전개되면서 신라의 대왜관계가 점차 소원해지고 있었고, 714년 이후 또한 日本
李儒 入唐朝貢”
36) 《三國史記》卷39 雜志8 職官 中 內省, “私臣一人 眞平王七年三宫各置私臣 大宫和文大 阿湌 梁宫首肸夫阿湌 沙梁宫弩知伊湌 至四十四年 以一貟兼掌三宫”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44年(622), “二月 以伊湌龍樹爲內省私臣 初王七年 大宮·梁宮·沙梁宮三所各置私臣 至是置內省私臣一人兼掌三宮”
37) 濱田耕策, 2002, 앞 책, 127~137쪽 ․ 165쪽 38) 李成市, 1999, 앞 책, 99쪽
39) 한편 眞德王 5년(651) 영객부 예하에 왜전을 부활시켰다가 聖德王 13년(714) 왜전을 영객부로부터 분리하여 내성에 재배치하였다고 본 견해도 있다.(김선숙, 2012, 앞 책, 225쪽)
賊路를 막기 위해 毛伐郡城(722)을 쌓고40) 경덕왕 원년(742)과 12 년(753)에는 신라가 일본사신을 不納 ․ 不見하는 등 대일관계가 악 화되고 있었으므로41) 이 시점에 왜전을 별치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왜전의 별치를 신라 대왜관계의 전개과정 속에서 살펴야 함은 분명 하지만, 후기왜전의 職掌 및 성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바탕 으로 별치시점을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후기왜전은 명칭 상 대왜외교와 관련된 관사임은 틀림없다. 다만 구체적으로는 내성 예하 생산관계관사와 병기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주로 대왜 ․ 대일교역을 담당한 관사라고 보는 견해42)와 영객부의 전신인 전기왜전의 명칭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영객부의 직장인 使臣 賓待와 관련된 관사로 보아 왜 사신의 영접을 담당한 관사라 는 점을 강조하는 견해43)로 나뉘어 있다.
전자의 경우 별치시점 또한 신라와 일본 간 교역물품이 확대되는 시점에 주목하기도 하였는데, 서영교는 신라가 왜에 대규모 물품을 증여하기 시작한 文武王 19년(679)을,44) 김창석은 신라의 대일국가 교역이 개시된 8세기 초, 구체적으로는 성덕왕 대 관문성이 축조될 무렵(722)을 별치시점으로 든 것이다.45) 그러나 후기왜전을 내성 예하 생산관계관사와 병기되어 있다는 점만으로 그와 관련된 관사 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기왜전을 생산관계관사군으로 분
40)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聖德王 21年(722),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41) 申瀅植, 1990《統一新羅史硏究》, 삼지원, 329~330쪽 42) 三池賢一, 1972, 앞 논문, 41쪽
李成市, 1999, 앞 책, 99쪽
尹善泰, 2000〈新羅 統一期 王室의 村落支配-新羅 古文書와 木簡의 分析을 中心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11~112쪽
濱田耕策, 2002, 앞 책, 165~166쪽 서영교, 2006, 앞 책, 319~325쪽
김창석, 2005, 앞 논문, 150(14)~151(15)쪽 43) 濱田耕策, 2002, 앞 책, 165~166쪽 李仁哲, 1993, 앞 책, 71쪽
김선숙, 2012, 앞 책, 225~226쪽 박남수, 2011, 앞 책, 140~141쪽 44) 서영교, 2006, 앞 책, 319~325쪽 45) 김창석, 2005, 앞 논문, 151(15)쪽
류한 이는 三池賢一인데, 그는 내성 관하의 관사를 職員 구성에 따 라 총 8개 관사군으로 분류하면서 왜전 이하 14개 관사를 職員不明 官司群으로 묶고,46) 당해 관사군에 생산관계관사가 포함되어 있음 을 근거로 왜전 또한 생산관계관사로 파악하였다.47) 관원수가 미상 이라는 이유로 병기된 관사가 반드시 같은 성격의 관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례로 왜전과 같이 병기된 관사 가운데는 寺典이 포함되어 있는 데 三池賢一은 이를 寺院과 관계된 물품의 생산에 관여한 관사로 보았으나48) 《三國史記》職官志 上에서 大道署의 별칭으로 언급된
‘寺典’49)과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내성의 사전과 대도서의 관계에 대해서는 내성 예하의 사전을 대도서의 前 身으로 이해하거나50) 사전이 대도서로 개편된 뒤 다시 내성 예하에 사전을 두었다고 이해한 견해가51) 제시되었다. 공통적인 것은 내성 예하의 사전을 대도서와 함께 신라 僧政機構의 하나로 보고 불교감 찰기구52) 혹은 불교통제기구53)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내성 소속의 사전과 대도서(사전)를 같은 성격의 관사로 볼 수 있다면 내성 예하 의 왜전 또한 영객부(전기왜전)와 직장 상 맥락을 같이 하는 관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54)
46) 三池賢一, 1971〈新羅內廷官制考(上)〉《朝鮮學報》61, 32~33쪽 47) 三池賢一, 1972, 앞 논문, 39~41쪽
48) 三池賢一, 1972, 앞 논문, 41쪽. 한편 寺典의 ‘寺’에 內侍의 뜻이 있음에 주목하여 사전 을 內侍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 관사로 파악한 견해도 있으나(李仁哲, 1993, 앞 책, 67 쪽)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49) 《三國史記》卷38 雜志7 職官 上 大道署, “大道署[或云寺典 或云内道監] 屬禮部”
50) 井上光貞, 1965〈日本における佛敎統制機關の確立過程〉《日本古代國家の硏究》, 330 쪽
남동신, 2000〈新羅의 僧政機構와 僧政制度〉《한국고대사논총》9, 164~166쪽 51) 李成市, 1983〈新羅中代の國家と佛敎〉《東洋史硏究》42-3, 455~456쪽 박남수, 2013〈신라 대도서의 정비과정과 승정체계의 변화〉《韓國思想史學》44 52) 남동신, 2000, 위 논문, 164쪽
53) 李成市, 1983, 위 논문, 444~446․455~456쪽
54) 한편 내성 소속의 內司正典은 중앙관서인 司正府와 같은 감찰기구로서 내성 관하의 관 리들을 규찰한 관사로 이해되는데,(三池賢一, 1972, 앞 논문, 34쪽, 李仁哲, 1993, 앞 책, 60쪽) 내사정전과 사정부가 감찰대상을 달리 할 뿐 같은 성격의 관사라는 점은 후기 왜전과 영객부의 관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論者 왜전과 영객전(영객부)의 설치시점
591년 621년 651년 왜전 별치시점 井上秀雄 왜전
설치
왜전
→영객전
영객전
→영객부
三池賢一 왜전
→영객전
濱田耕策 왜전
→영객전
(759년 영객전→사빈부
776년 사빈부→영객부)
714
李成市 왜전 설치
왜전
→영객전
영객전
→영객부 651
이인철 왜전
→영객전
영객전
→영객부 김선숙 왜전
설치
왜전
→영객전
영객전
→영객부
651 (영객부 예하)
<표 1> 왜전과 영객전(영객부)의 설치시점에 대한 제 논의
이러한 관점에서 후기왜전을 왜 사신의 영접을 담당한 관사로 본 후자의 견해가 주목된다. 특히 박남수는 내성 소속의 왜전을 왕실에 서 왜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설치한 관사로 보고 신라와 왜의 사신 교환이 재개되기 시작한 문무왕 8년(668)에 별치되었다고 보았 다.55) 후기왜전을 왜 사신의 영접을 담당한 관사로 파악하고 왜사 의 방문이 이루어진 시점을 별치시점으로 지적한 점은 경청할 만 하지만, 단순히 왜사의 방문을 이유로 왜전을 별치하였을지는 의문 이다. 전기왜전의 후신인 영객전(영객부)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왜 사에 대한 영접 또한 영객전(영객부)에서 담당하였을 것이기 때문이 다. 영객전(영객부)이 성립한 후 왜전을 별치하여 내성에 예속시킬 필요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714 (내성 예하)
김창석 왜전
→영객전 722
서영교 왜전
→영객전
영객전
→영객부 679
박남수 왜전→
영객부
영객부
→영객전
영객전
→영객부 668
論者 영객부와 왜전의 직장
영객부 후기왜전
三池賢一 賓待 대왜교역 관련 제품의 생산 ․ 획득 濱田耕策 賓客 및 兇儀 왕궁에서의 빈례 관장 및 대일교역을
통해 얻은 원료를 왕실에 수납 ․ 가공
李成市 대당교섭 대왜교섭+대일교역
이인철 賓客 및 兇儀 인견례 전후 일본사신의 영접
김선숙 대당외교 대왜외교→일본사신 영접에 필요한 경 비․물자 등을 관리․조달
김창석 대일외교+왕실 주도의 대일국가교역
서영교 대외교섭 대왜외교에 필요한 물품 조달 박남수 賓客 및 兇儀 왕실에서 일본사신을 영접
<표 2> 영객부와 왜전의 직장에 대한 제 논의
즉, 후기왜전은 같은 시기 병존한 영객부와 구체적인 직장 상에서 는 일정한 차이를 가지지만 큰 틀에서는 전기왜전 및 그 후신인 영 객부와 같은 성격을 가진 관사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후기왜전의 성격 및 별치시점을 추론하기 위해서는 전기왜전과 영객부의 성격 을 검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료 A는 621년 전기왜전이 영객전으로 개편되었다고 전한다. 이
55) 박남수, 2011, 앞 책, 140~141쪽
외에 전기왜전에 관한 사료는 전하지 않으므로 설치시점 및 職掌은 영객전(영객부)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료 C는 영객부 令의 설치를 眞平王 13년(591)으로 전한 다. 이를 근거로 591년 전기왜전을 영객부로 개편하였다고 보는 견 해56)와 사료 A를 근거로 621년은 전기왜전을 영객전으로 개편한 시점으로 보고 전기왜전이 설치된 시점은 591년으로 보는 견해57) 가 제시되었다. 전자의 경우 621년을 영객부에서 영객전으로 고친 시점으로 보고 651년 다시 영객부로 고쳤다고 본다.58)
그러나 신라 관제 상 典은 독립된 하위관서, 府는 부속관서를 거 느리지 않는 상위관서에 해당한다.59) 신라의 대외관계가 활발히 전 개되고 있던 眞平王 43년(621) 시점에 영객부를 영객전으로 그 위 상을 격하하였다고 보기보다는 이 때 전기왜전을 영객전으로 고쳤 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60)
주지하다시피 621년은 신라가 당과 국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한 해로서 처음 당의 사신을 맞이한 해였다.61) 이에 따라 당의 사신을 맞이할 의전과 客館이 새로이 필요해진 결과 관제 상 전기왜전을 영객전으로 개편하였을 것이다.62) 자연히 전기왜전의 설치시점은
56) 박남수, 2011, 앞 책, 138~140쪽
57) 591년 영객부 令을 두었다고 한 것은 왜전과 영객부를 혼동하여 왜전의 始置를 영객부 의 始置로 잘못 서술하였다고 본 것이다.(井上秀雄, 1974, 앞 책, 269쪽 李成市, 1999, 앞 책, 98~99쪽)
58) 박남수, 2011, 앞 논문, 138~140쪽
59) 신라의 중앙관서는 상위관서인 部․府와 하위관서인 署․典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部는 署를 부속관서로 거느리며 府는 부속관서를 거느리지 않고, 典은 독립된 하위관서로 존 재하였다.(李仁哲, 1993, 앞 책, 40~42쪽)
60) 사료 A와 사료 C의 영객부 令 설치시점에 차이가 있는 데 대해서는 60년의 차이로 干 支가 동일한 까닭에 착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濱田耕策, 2002, 앞 책, 161쪽)
61)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43年(621), “四十三年秋七月 王遣使大唐朝貢方物 高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常侍庾文素來聘 賜以璽書及畫屛風錦綵三百叚”
62) 井上秀雄, 1974, 앞 책, 269쪽 三池賢一, 1972, 앞 논문, 40~41쪽 李仁哲, 1993, 앞 책, 37~38쪽 李成市, 1999, 앞 책, 99쪽 濱田耕策, 2002, 앞 책, 160~163쪽 채미하, 2011, 앞 논문, 54쪽
621년 이전이 된다.
한편 영객전은 眞徳王 5년(651) 令의 설치와 함께 영객부로 승격 되며63) 文武王 15년(675)에는 卿 1人이 증치되어 영객부의 업무와 비중이 보다 증대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영객부의 직장은 ‘司賓府’라 는 명칭을 통해 추정되는데, 唐의 鴻臚寺가 光宅 元年(684) 司賓寺 로 개명된 적이 있었으므로,64) 사빈부=영객부의 직장이 唐代 司賓 寺=鴻臚寺의 직장과 유사한 것이었다고 추정된 것이다.65) 다만 영 객부의 구체적인 직장에 대해서는 사신 접대 및 외교업무로 보는 견해66)와 鴻臚寺의 직장인 ‘賓客及兇儀之事’로 보는 견해67)가 제기 되어 약간의 견해차가 있다.
唐代 9寺 중 하나인 鴻臚寺는 賓客 관련 업무를 담당한 典客署와 兇儀 관련 업무를 담당한 司儀署를 통령하는 관사였다.68) 그런데 隋 이래로 唐 開元 25년(737)까지 鴻臚寺는 釋道를 관장한 崇玄署 또한 예속관서로 두고 있었다.69) 그러나 사빈부(영객부)가 흉의 및 석도 관련 업무에 동원된 사례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사빈부(영객부)
최희준, 2011, 앞 논문, 138~145쪽 63) 井上秀雄, 1974, 앞의 책, 269쪽 李仁哲, 1993, 앞 책, 37~38쪽 李成市, 1999, 앞 책, 99쪽 채미하, 2011, 앞 논문, 54쪽 최희준, 2011, 앞 논문, 138~145쪽
64) 《唐六典》卷18 鴻臚寺 卿, “光宅元年改為司賓寺卿 神龍元年復舊”
65) 三池賢一, 1972, 앞 논문, 40~41쪽 濱田耕策, 2002, 앞 책, 164~165쪽 66) 金哲埈, 1990, 앞 책, 60쪽 井上秀雄, 1974, 앞 책, 453쪽 三池賢一, 1972, 앞 논문, 40~41쪽 李基東, 1984, 앞 책, 122쪽 67) 濱田耕策, 2002, 앞 책, 164~165쪽 李仁哲, 1993, 앞 책, 38쪽
68) 《唐六典》卷18 鴻臚寺, “鴻臚卿之職 掌賓客及兇儀之事 領典客司儀二署 以率其官屬 而 供其職務 少卿為之貳”
69) 隋의 鴻臚寺는 典客署와 司儀署, 崇玄署까지 세 개 관서를 통령하였으며 唐은 이를 계 승하였는데,(黎虎, 1998《漢唐外交制度史》, 兰州大學出版社, 314쪽, 최재영, 2009〈唐 代 長安의 朝貢使節의 변화와 鴻臚寺의 기능〉《동북아역사논총》24, 279~284쪽) 崇玄 署가 宗正寺 예속이 된 것은 開元 25년(737)의 일이었다.(石曉軍, 1996〈隋唐外務官僚の 硏究〉, 關西大學文學博士學位論文, 14~15쪽)
를 단순히 司賓寺(鴻臚寺)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
한편 사료 D에 의하면 敬順王 6년(932)에는 사빈경을 後唐에 파 견하는 副使로 삼고 있어 신라 말기에 이르면 사빈부가 사행의 실 무를 담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70) 사빈부의 관원이 부사로 파견 된 사례는 932년 단 한 차례 확인되므로 신라 중대나 중고기까지 영객부의 관원이 부사로 파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領客’, ‘司 賓’이라는 명칭이나 신라 말기의 사빈경이 사행의 실무를 담당하였 다고 볼 때, 영객부(사빈부)가 외교와 관련된 직무를 담당하고 있었 던 것만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신라의 영객부를 계승한 것으로 생 각되는 고려 禮賓寺(禮賓省)71)의 직장이 ‘賓客燕享’72)으로 빈객과 관련된 업무만이 규정되었다는 점을 참고할 때,73) 그 전신인 신라 영객부(사빈부) 또한 빈객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 관사로 볼 수 있 을 것이다. 곧 영객부는 鴻臚寺 예하의 典客署에 가까운 관사였다고 보인다.74)
70) 신라의 사빈부를 계승하였다고 보이는 고려 禮賓省의 卿이 사행단의 副使로 임명되는 것이 상례화되었는데, 이는 사행의 실무를 예빈성에서 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 다.(김대식, 2009〈고려초기 중앙관제의 성립과 변화〉《한국중세사학회 연구총서1-고려 중앙정치제도사의 신연구-》, 혜안, 70~71쪽) 신라 사빈부의 경이 副使로 後唐에 파견 되었다면 역시 당시 사행의 실무를 사빈부에서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71) 고려 禮賓寺는 설치 이래 오랫동안 쓰인 칭호는 禮賓省으로 客省․典客寺라고도 불렸다.
(박용운, 2009《『高麗史』百官志 譯註》, 신서원, 294쪽) 고려 예빈시는 중국의 鴻臚寺 에 비견되는 관사로 본 견해(박용운, 2009, 위 책, 294~296쪽)와 함께 鴻臚寺 隸下의 禮賓院에 비견되는 관사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김대식, 2009, 앞 논문, 70~71쪽) 예빈 원은 唐代 객관으로 성립한 뒤(石見淸裕, 1998, 앞 책, 374~379쪽, 黎虎, 1998, 앞 책, 330~331쪽) 宋代 들어 객관을 관리하는 동시에 互市, 譯語 등 외국사신단과 관련된 제 반업무를 함께 담당한 관사였다.(《宋史》卷165 志118 職官5 鴻臚寺, “禮賓院 掌回鶻吐 蕃党項女真等國朝貢館設 及互市譯語之事”) 고려 예빈시가 賓客에 관한 직무만을 담당하 고 있다는 점에서 예빈원에 가까운 관사로 본 견해는 타당한 면이 있다고 생각되며, 예 빈원이 唐代 객관에서 기원하였고 신라 영객부의 후신일 고려 예빈시가 예빈원에 가까운 관사였다는 점은 신라 영객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참조가 될 수 있다.
72) 《高麗史》卷76 志30 百官1 禮賓寺, “掌賓客燕享”
73) 예빈시는 西女眞人에 대한 향연 및 賜物과 같은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譯語의 선발장소 이기도 하였고, 나아가 고려에 내투한 서여진인의 귀화 여부나 宋人의 송환문제를 상주 하는 등 고려의 禮賓寺(禮賓省)는 賓客과 관련된 직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박용운, 2009, 위 책, 294~296쪽)
74) 김선숙은 후기왜전에 대해 眞德王 5년(651) 영객부 예하에 왜전이 부활되었다가 성덕 왕 13년(714) 왜전을 영객부로부터 분리하여 내성에 재배치하였다고 보고, 내성에 재배
신라의 중앙관서는 法興王 3년(516) 兵部가 설치된 후부터 정비 되기 시작하여 眞平王 대를 거치면서 그 기반이 마련되고 眞德王 5 년(651)에야 그 정비가 일단락된 뒤 文武 ․ 神文王 代 완비된다.75) 특히 영객전에 令이 설치되면서 府로 승격된 진덕왕 5년은 執事部 와 倉部, 左理方府의 성립과 함께 唐의 육전조직에 준하는 관서체계 를 갖춘 시기였다.76) 진덕왕대는 唐의 연호를 사용하고 衣冠制를 채용하며 처음으로 賀正禮를 거행하는 등 唐制를 적극적으로 수용 하던 시기이다.77) 진덕왕 5년의 관제개혁 역시 당의 관제를 전범으 로 삼았으리라 생각되며, 이 때 영객전 역시 당의 전객서를 전범으 로 조직과 직장 상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영객부로 승격되었다고 보인다. 진덕왕 5년 영객부가 전객서를 전범으로 정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면, 그 직무 또한 전객서를 바탕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唐六典》에 따르면 唐代 典客署의 직무는 ‘賓客’을 관장하는 것 으로, 二王後 및 四夷의 籍을 관리하고 朝貢 ․ 宴享 ․ 送迎 시에 사 신의 等位에 따른 예를 관련관사에 통지하며 사신을 館에 안치하여 접대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었다.78) 구체적으로는 사신이 타고 온 私蓄의 관리, 헌상한 물품을 수납하여 중서성으로 보고하는 일, 사 신에 대한 引見 ․ 연회를 행할지의 여부를 상신하는 일, 생활하는
치된 왜전이 당의 典客署에 해당한다고 보았다.(김선숙, 2012, 앞 책, 225쪽) 그러나 전 객서는 鴻臚寺 예하의 관서이므로 이 견해에 따른다면 오히려 영객부 예하에 배치된 왜 전이 전객서에 더 가깝게 된다. 전객서에 비견되는 신라의 관서는 후기왜전보다 영객부 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가 한다.
75) 이기백, 1963〈稟主考〉《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74《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 潮閣 재수록, 140쪽
이기동, 1984〈신라 중대의 관료제와 골품제〉《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22~123쪽
김철준, 1990《韓國古代史硏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59~63쪽
76) 여호규, 2013〈6~8세기 신라 왕궁의 구조와 정무공간의 분화〉《한국역사연구회․한성 백제박물관 공동주최 학술회의 발표자료집-고대 동아시아 도성의 공간구조와 의례의 재 구성》, 한국역사연구회, 9쪽
77) 여호규, 2013, 위 논문, 13쪽 최희준, 2011, 앞 논문, 141~145쪽
78) 《唐六典》卷18 鴻臚寺 典客署, “典客令掌二王後介公酅公之版籍及東夷西戎南蠻北狄歸化 在蕃者之名數 丞為之貳 凡朝貢宴享送迎預焉 皆辨其等位而供其職事 凡酋渠首領朝見者 則 館而以禮供之”
데 필요한 물품을 사신의 등위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는 일, 질 병에 걸린 자가 있을 경우 醫人을 파견하고 탕약을 지급하는 일, 喪 事가 있을 경우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는 일, 귀환 시의 하사품 수령 을 돕는 일 등이 확인된다.79) 즉, 사신단에 대한 빈대의 제반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 때 京外에서 사신단에 대한 접대는 지방관이 담당하였고80) 典客署의 사절에 대한 접대는 入京 시부터 出京 시까 지로 제한되었다. 신라의 영객부 또한 이와 같은 직무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객부의 전신인 전기왜전 또한 ‘賓客’을 관장하는 관사 로 생각해볼 수 있다. 전기왜전의 경우 특정국가명을 관칭하고 있다 는 점에서 왜의 빈객만을 관장하는 관사였을 것이다. 7세기 전반 이 전에 신라 중앙에서 맞이한 왜인은 공식적인 사신단 일행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전기왜전은 왜의 사신을 접대하는 관사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신접대의 직무는 외국사신이 신라에 파견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발생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당에서 신라로 사신을 파견 한 첫해에 영객전이 성립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다.
더군다나 신라의 중앙관사는 稟主에서 調府와 倉部가 분화되었던 데서 보듯이81) 직무가 분화되면서 각 직무에 따른 독립관사가 성립 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82) 이러한 관제정비과정 속에서 왜전과 같
79) 《唐六典》卷18 鴻臚寺 典客署, “凡朝貢宴享送迎預焉 皆辨其等位而供其職事 凡酋渠首領 朝見者 則館而以禮供之[三品已上準第三等 四品五品準第四等 六品已下準第五等 其無官品 者 大酋渠首領準第四等 小酋渠首領準第五等 所乘私畜抽換客舍放牧 仍量給芻粟 若諸蕃獻 藥物 滋味之屬 入境州縣與蕃使苞匭封印 付客及使 具其名數牒寺 寺司勘訖 牒少府監及市 各一官領識物人定價 量事奏送 仍牒中書 具客所將獻物 應須引見宴勞 別聽造止] 若疾病 所 司遣醫人給以湯藥 若身亡 使主副及第三等已上官奏聞 其喪事所須 所司量給 欲還蕃者 則給 舉遞至境[首領第四等已下不奏聞 但差車牛送至墓所] 諸蕃使主副五品已上給帳氈席 六品已 下給幕及食料 丞一人判廚事 季終則會之 若還蕃 其賜各有差 給於朝堂 典客佐其受領 教其 拜謝之節焉”
80) 黎虎, 1998, 앞 책, 411~527쪽
森公章, 2008〈第一部 第一章 遣唐使が見た唐の賓禮〉《遣唐使と古代日本の對外政策》, 吉川弘文館, 3~8쪽
81) 이기백, 1974, 앞 책, 140~152쪽
82) 신라의 중앙관서는 법흥왕대, 진흥왕대 상위관직이 먼저 설치된 뒤 진평왕대 하위관직 이 설치되면서 3-4단계의 관원조직을 갖추게 되어 각 관부가 독립관서체계를 갖추는 방
이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기관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외교의례를 담당하는 독립관서, 곧 禮部의 성립이 우선요건일 것이다. 따라서 왜전과 같은 사신접대관사의 성립은 최소한 禮部令의 설치와 함께 예부가 성립한 眞平王 8년(586)83) 이후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진평왕 8년 이후 唐使의 도래와 함께 영객전이 성립하는 진평왕 43년(621)에 이르기까지 신라에 외국사신이 파견된 사례는 倭使가 591년84)과 597년85), 600년86)까지 총 세 차례, 그리고 隋 使가 613년87) 한 차례 확인되는 것이 전부이다.
이 시기 신라가 백제 ․ 고구려와 사신을 교환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데, 당시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와 화친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보 기는 어렵다. 백제의 경우 554년 管山城 전투에서 聖王이 전사한 뒤 관계가 악화되어 회복되지 않았다.88) 眞智王 2년(577)에는 一善 지역을 백제군이 침입하였고,89) 眞平王 24년(602) 阿莫城(운봉)90), 同王 33년(611) 椵岑城91)을 두고 전투가 벌어지는 등 신라와 백제
향으로 정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정비는 진덕왕대에 이르러 거의 마무리되 었다고 한다.(여호규, 2013, 앞 논문, 9~14쪽)
83)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八年(586), “八年春正月 置禮部令二員”
《三國史記》卷38 雜志7 職官 上 禮部, “禮部令二人 眞平王八年置 位與兵部令同”
84) 《日本書紀》卷21 崇峻 4年(591), “冬十一月己卯朔壬午 差紀男麻呂宿禰 巨勢巨比良夫 狹臣 大伴囓連 葛城烏奈良臣 爲大將軍率氏氏臣連爲裨將部隊 領二萬餘軍 出居筑紫 遣吉士 金於新羅 遣吉士木蓮子於任那 問任那事”
85) 《日本書紀》卷22 推古 5․6年(597․598), “冬十一月癸酉朔甲子 遣吉士磐金於新羅”
86) 《日本書紀》卷22 推古 8年(600), “是歳 命境部臣爲大將軍 以穗積臣爲副將軍[並闕名]
則將萬餘衆爲任那撃新羅 於是直指新羅以泛海往之 乃到于新羅攻五城而拔 於是新羅王惶之 擧白旗到于將軍之麾下 而立割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加羅․阿羅々六城以請服 時將軍共 議曰 新羅知罪服之 強撃不可 則奏上 爰天皇更遣難波吉師神於新羅 復遣難波吉士木蓮子於 任那 並検校事状 爰新羅任那王二國遣使貢調 仍奏表之曰 天上有神 地有天皇 除是二神 何 亦有畏乎 自今以後 不有相攻 且不乾般柁 毎歳必朝 則遣使以召還將軍 將軍等至自新羅 弭 新羅亦侵任那”
87)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35年(613),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 設百高座 邀 圓光等法師說經”
88) 金恩淑, 1994〈6世紀 後半 新羅와 倭國의 國交樹立過程〉《新羅의 對外關係史 硏究》, 신라문화선양회, 186쪽
89)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智王 2年(577), “冬十月 百濟侵西邊州郡 命伊湌世宗出師 擊破之於一善北 斬獲三千七百級 築內利西城”
90)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24年(602), “秋八月 百濟來攻阿莫城 王使將士逆戰 大敗之 貴山․箒項死之”
간에 공방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고구려 역시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는 모습이 확인되는데, 진평왕 25년(603) 北漢山城, 同王 30년(608) 牛鳴山城(함남 안변) 등지에 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92) 이와 같이 신라는 백제 및 고구려의 침공을 받고 있었으므로93) 586년 이후 621년까지 신라에 백제 ․ 고 구려 사신이 파견된 적은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
․ 고구려 사신 영접을 위한 관서가 상설적으로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반면 隋와 왜에 대해서는 사신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진평왕 16년(594) 수로부터 책봉을 받은94) 뒤 신라는 비교적 지속적으로 수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이에 613년에는 수가 王世儀를 사신으 로 신라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북변 침공에 진평왕 30년 (608) 圓光으로 하여금 수에 청병하는 乞師表를 짓게 하고95) 동왕 33년(611) 견사 시에 請兵을 하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신라는 고구 려 ․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대수외교관계를 강화해나갔다고 보인다.
신라와 왜의 관계는 가야멸망 이후 적대관계가 지속되어 왔지 만96) 6세기 말 이후 변화하기 시작한다. 왜의 경우 친고구려 ․ 친신 라적 외교노선이 추진되기 시작하여 610년대에 들어서면 왜가 新羅 使에 대해 賓禮를 행하는 등 대신라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외교정 책 상의 변화가 감지된다.97) 왜는 대수통교를 위해서도,98) 대백제
91)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33年(611), “冬十月 百濟兵來圍椵岑城百日 縣令讚 德固守 力竭死之 城沒”
92)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25年(603), “秋八月 高句麗侵北漢山城 王親率兵一 萬以拒之”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30年(608), “二月 高句麗侵北境 虜獲八千人 四月 高 句麗拔牛鳴山城”
93) 森公章, 2011〈朝鮮三國の動亂と倭國〉《律令國家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32~34쪽 94)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16年(594), “隋帝詔 拜王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95)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平王 30年(608), “王患高句麗屢侵封埸 欲請隋兵以征高句 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 不惟命是從 乃述以聞”
96) 연민수, 2005〈고대 일본의 동아시아 교류와 정보〉《동북아 역사총서5-동아시아 역사 상과 우리 문화의 형성-》, 한국한중앙연구원, 178~182쪽
97) 연민수, 1998《고대한일관계사》, 혜안, 444~4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