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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期倭典의 폐지

내성 예하 후기왜전의 운영은 7세기 후반 왜와 긴밀한 관계를 유 지하기 위한 필요에서 왜 학문승을 신라 왕실 차원에서 빈대한 것 이었음을 앞 장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들 왜 학문승이 더 이 상 신라에 파견되지 않는 시점에는 후기왜전 또한 그 기능이 축소 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199)

현재 일본의 견신라학문승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신라에 유학 한 인물은 심상으로, 그는 최소한 740년 10월 이전에는 신라로부터 귀국하였음은 앞에서 살핀 대로이다. 그렇다면 이 무렵을 전후하여 후기왜전의 기능이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신라 와 일본 간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면서 사신을 방환하기 시작한 시 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P-1. {景德王 元年(742)} 겨울 10월 일본국사가 이르렀으나 받아들 이지 않았다.200)

P-2. {景德王 12年(753)} 가을 8월 일본국사가 이르렀으나 오만무 례하여 왕이 알현하지 않았다.201)

《三國史記》신라본기는 8세기 일본의 견신라사에 대해 성덕왕 2 년(703) 기사202)와 함께 위 두 기사만을 전한다.203) 반면 일본측

199) 《삼국사기》직관지에서 내성 예하 왜전의 관원수가 전해지지 않은 것은 신라 당대에 폐지되어 그와 관련된 기록이 일찍이 소실된 것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200) 《三國史記》卷9 新羅本紀9 景德王 元年(742), “元年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201) 《三國史記》卷9 新羅本紀9 景德王 12年(753), “十二年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202)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聖德王 2年(703), “日本國使至 楤二百四人”

203) 한편 《삼국유사》는 원성왕 대 일본이 만파식적을 청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설화를 전한다.(《三國遺事》卷2 紀異2 元聖大王, “貞元二年(786)丙寅十月十一日 日本王 文慶[按日本帝紀 第五十五主文德王疑是也 餘無文慶 或本云是王太子] 擧兵欲伐新羅 聞新 羅有萬波息笛退兵 以金五十兩 遣使請其笛 王謂使曰 朕聞上世眞平王代有之耳 今不知所在 明年七月七日 更遣使 以金一千兩請之曰 寡人願得見神物而還之矣 王亦辭以前對 以銀三千 兩賜其使 還金而不受 八月使還 藏其笛於內黃殿”) 위 기사대로 당시 일본이 신라에 사신 을 파견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관련기사가 여타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고 당시 양국 관

연도 방환 사유

비고 원전

일본 신라

721 元明天皇의 登遐

《續日本紀》

卷8

735 王城國을 《續日本紀》

<표 5> 8세기 신라와 일본의 사신 방환 사유

사료에서는 8세기 일본의 견신라사와 관련하여 보다 많은 사례가 확인되는데 여기에서도 단 한 사례, 곧 779년의 일만 제외하면 모 두 753년 이전의 일이다.204) 그런데 779년의 견신라사는 일본의 견당사 송환목적으로 파견되었으므로205) 8세기 일본의 견신라사 파 견은 경덕왕 12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중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206) 그러한 가운데 위 사료에서 보듯 경덕왕 12년의 견신라사는 물론 경덕왕 원년의 견신라사 또한 방환된 것이다.

그 중 사료 P-2는 일본 사신의 방환 이유로 사신의 오만무례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신의 무례를 이유로 방환한 사례는 일 본에서도 다수 확인되는데, 신라의 견일본사는 721년 방환된 이래 774년까지 입경이 불허되어 大宰府에서 방환되었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신라 사신 반각의 이유는 사신의 관위가 높지 않거나 표 문을 지참하지 않았다는 점, 혹은 調를 土毛, 또는 國信物로 칭한 점 등 외교형식 상의 문제로 확인된다.(<표 5> 참조) 특히 《續日本 紀》에서는 8세기 신라 사신을 방환한 것은 오래도록 일본의 번국 이었던 신라가 번국으로서의 예를 지키지 않기 때문임을 거듭 강조 하고 있다.207)

계가 긴장되었음을 전하는 기사도 보이지 않으므로(김은숙, 2003, 〈Ⅳ. 대외관계 2. 일 본과의 관계〉《한국사》9-통일신라-, 국사편찬위원회, 284쪽)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 렵다. 본고에서는 일단 당해 기사와 관련된 논의를 보류하고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204) 延敏洙, 2003, 〈統一期 新羅와 日本關係-公的 交流를 중심으로〉《강좌 한국고대 사》4, 267~268쪽, 표 2-1 표 2-2

205) 《續日本紀》卷35 光仁 寶龜 10年(779) 2月, “甲申 以大宰少監正六位上下道朝臣長人 爲遣新羅使 爲迎遣唐判官海上三狩等也”

206) 이는 8세기의 상황으로 9세기에 일본의 견신라사 파견은 재개되었다. 9세기 상황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칭함 卷12

738 未詳 《續日本紀》

卷13 742 新京의 宮室

미완성

《續日本紀》

卷14

742 未詳 《三國史記》

卷9 743 調를 土毛라

칭함

《續日本紀》

卷15

(752) 入京(표문 요구) 《續日本紀》

卷18

753 사신이

오만무례

《三國史記》

卷9

760 사신의 관등이 낮음

專對之人, 忠信之禮, 仍舊之調, 明驗之言을 신라에 요구

《續日本紀》

卷23

(763) 入京(사신의

관등을 문제삼음)

《續日本紀》

卷24

764 未入京(戒融의

도착여부만 확인)

《續日本紀》

卷25 769~

770

調를 土毛라 칭함

《續日本紀》

卷30 774 貢調를 國信,

土毛라 칭함

《續日本紀》

卷33

207) 《續日本紀》卷33 光仁 寶龜 5年(774) 3月, “勅問新羅入朝由使等曰 新羅元來稱臣貢調 古今所知 而不率舊章 妄作新意 調稱信物 朝爲修好 以昔準今 殊無禮數 宜給渡海料 早速放

이 때문에 일본학계에서는 일본이 신라 사신의 입경을 불허한 것 은 일본에 蕃國으로서의 禮를 행하던 신라가 태도를 바꾸어 양국관 계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면서 조공국으로서의 예를 다하지 않은 결과라고 본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208) 한국학계에서는 일본 의 신라 번국관은 신라가 신당전쟁 직후 대당관계가 긴장된 가운데 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저자세를 취한 7세기 후반의 상황이 배경이 되어 8세기 초반에 형성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209) 그러나 730년대 당과 발해가 갈등을 빚는 가운데 신라가 당측에 지 원을 함으로써 대당관계가 안정되면서 신라가 그간 일본에 대해 취 했던 저자세를 더 이상 고수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양국 간에 갈등 이 빚어졌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거의 없다.

그런데 최근 이에 대해 양국 간의 외교형식 상의 갈등은 小中華 意識에 기반한 漢化政策이 전개된 景德王代와 藤原仲麻呂 정권부터 시작되었으며, 小野田守가 신라에 파견된 753년 이전 일본이 신라 사신을 방환한 이유는 신라의 태도 변화가 아니라 일본의 내정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210) 이 견해에 따르면 738년과 742년, 신라사를 방환하였으면서도 이에 대한 답례사로서 740년과 742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은 당시 일본이 신라와 우호관

還”

비록 입경이 허락된 사례이기는 하나 752년 김태렴 사행 시, 그리고 780년 김난손 사 행 시의 조문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잘 드러난다.

《續日本紀》卷18 孝謙 天平勝寶 4年(752) 6月, “新羅國來奉朝庭者 始自氣長足媛皇太后 平定彼國 以至于今 爲我蕃屛 而前王承慶 大夫思恭等 言行怠慢 闕失恒禮”

《續日本紀》卷36 光仁 寶龜 11年(780) 二月, “王自遠祖 恒守海服 上表貢調 其來尙矣 日 者虧違蕃禮 積歲不朝”

208) 石井正敏, 1992〈古代東アジアの外交と文書〉《アジアのなかの日本使》Ⅱ, 東京大學 出版會, 323~324쪽

濱田耕策, 2002, 앞 책, 123~127쪽 209) 노태돈, 2009, 앞 책, 289~292쪽

210) 이에 따르면 735년 大宰府에서 발생한 역병이 일본 내에서 유행하면서 신라사를 기피 하게 되어 735년과 738년 신라사 방환이 결정되었고, 742년과 743년의 신라사 방환은 740년 大宰少貳 藤原廣嗣가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대재부가 742년 1월부터 745년 6월 까지 폐지된 까닭이라고 한다.(강은영, 2010〈8세기 중후반 일본의 內政과 對新羅關係의 추이-752년 金泰廉 使行團의 來日 성격 검토를 중심으로-〉《일본역사연구》31, 56~68쪽)

역대 왕(재위기간) 견당사212) 견일본사213) 문무왕(661~681) 14 11(+6)214)

신문왕(681~692) 1 8(+1)

효소왕(692~702) 1 4

성덕왕(702~737) 46 10

효성왕(737~742) 3 1

경덕왕(742~765) 16 6

혜공왕(765~780) 12 3

선덕왕(780~785) 2 0

원성왕(785~798) 3 0

소성왕(799~800) 1 0

애장왕(800~809) 5 1

<표 6> 문무왕~애장왕대 신라의 견당사 ․ 견일본사 파견횟수 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당시의 양국관계를 악화일변도로 볼 수만은 없다고 하였다.211)

다만 신라의 경우 성덕왕대부터 외교정책의 비중이 일본에서 당 으로 옮겨가는 양상을 보인다. <표 6>을 보면 성덕왕대를 기점으로 견당사 파견횟수가 견일본사 파견횟수를 앞지르고 있는 양상을 확 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효소왕 8년(699) 대당외교관계가 실질 적으로 복구되었다는 견해가215) 주목된다. 이해 2월 신라는 견당사 를 파견하였고 이듬해인 효소왕 9년(700) 당의 曆에 따라 정월을 寅月로 고쳤다216)는 점에 주목하여, 이는 699년 견당사 파견 시 신 속관계를 전제로 하는 정치적 의례인 正朔의 수수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므로 이 때 양국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본 것이다.

211) 강은영, 2010, 앞 논문, 58~60쪽

212) 권덕영, 2006〈羅唐交涉史에서의 朝貢과 冊封〉《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 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44쪽의 〈표 1〉 및 사료 《三國史記》, 《三國遺事》, 《舊 唐書》, 《新唐書》, 《册府元龜》, 금석문(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앞 책)을 참조 하여 작성하였다.

213) 延敏洙, 2003, 앞 논문, 264~267쪽 〈표 1-1〉 〈표 1-2〉 〈표 1-3〉 〈표

특히 이 시기는 大祚榮이 698년, 李楷固의 추격을 피해 東牟山에 서 건국한 직후로, 당시 대조영은 신라로부터 대아찬의 질을 받는 등 신라와 관계를 맺는 한편으로 거란 및 돌궐과도 연계하여 당에 대비하고 있었다.217) 이진충의 난, 이어 대조영의 건국으로 동북부 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 당은 돌궐과 함께 북방의 위협이 된 발해를 견제할 대책이 필요하였다.218)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발해 건국 초기 대조영에게 대아찬의 질 을 주었지만 발해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대신 발해를 적대시함으 로써 당과 외교관계 개선을 도모하였다고 보인다. 발해와 사신을 교 환한 사례가 확인되지 않는 반면 효소왕 8년 견당사 파견 이후 성 덕왕대의 잦은 견당사 파견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219) 특히 성 덕왕 32년(733) 당의 원군요청에 응하여 신라가 발해의 남변을 공 격하였던 사건220)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그 결과 735년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 영유권을 인정받으면서221) 대당

1-4〉 및 사료《三國史記》, 《日本書紀》. 《續日本記》, 《日本後紀》를 참조하여 작 성하였다.

214) 괄호 안의 숫자는 고구려 사신이 신라 송사와 함께 왜에 도래한 사례로, 이때 신라 송 사는 모두 筑紫에서 향연을 받고 귀국하였으므로 신라의 견일본사 파견횟수에는 포함하 지 않았다. 다만 당시 파견된 고구려 사신은 報德國의 사신으로 신라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였다.

215) 권덕영, 2006, 앞 논문, 242쪽

216)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孝昭王 8年(699), “遣使朝唐 貢方物”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孝昭王 9年(700), “九年 復以立寅月爲正”

217) 송기호, 1995, 앞 책, 53~71쪽

김종복, 2009《발해정치외교사》, 일지사, 76~79쪽

노태돈, 2010〈古代 東아시아 國際秩序의 再編과 韓日關係-7~8세기-〉《제2기 한일 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1권, 경인문화사, 429쪽

218) 古畑徹, 1983〈七世紀末から八世紀初にかけての新羅․唐關係〉《朝鮮學報》107, 48~54쪽

古瀨奈津子, 2011〈隋唐と日本外交〉《律令國家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64쪽 219) 古畑徹, 1983, 위 논문, 44~48쪽

노태돈, 2010, 앞 책, 129쪽

220)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聖德王 32年(733),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 越海入寇登州 遣太僕員外卿金思蘭歸國 仍加授王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發兵擊靺鞨南鄙 會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死者過半 無功而還”

221)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聖德王 34年(735), “三十四年 春正月 熒惑犯月 遣金義忠 入唐賀正 二月 副使金榮在唐身死 贈光祿少卿 義忠廻 勑賜浿江以南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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