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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객부는 왕경 내 賓客에 관한 제반사항을, 그리고 그 전신인 왜 전은 왕경 내 倭使에 대한 제반사항을 관장하였으며 왜전의 명칭을 그대로 쓴 후기왜전 또한 왜사와 관련된 직무를 담당하였을 것임을 전장에서 추론하였다. 다만 후기왜전은 영객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별치된 것이기 때문에 역할 면에서 전기왜전과 일정한 차이를 가진 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후기왜전의 성립시기와 구체적인 직장 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단 ‘倭典’이라는 표현을 볼 때 왜가 日本으로 국호를 변경하기 전에 별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701년 이전에 별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후기왜전은 전기왜전의 직무를 계승하였을 영객전(영객부)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별치되었다. 곧 영객전(영객부) 이 倭使에 대한 賓待를 관장하는 가운데 또다시 倭使와 관련된 직 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후기왜전이 별치된 것이다. 倭使에 대한 賓待의 직무 가운데 변동사항이 생겼다면 신라 왕경을 방문한 倭使 에 일정한 변동이 생긴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왜가 신라에 學問僧을 파견한 일이다.

왜의 신라학문승으로 685년 觀常 ․ 靈觀, 687년 智隆, 689년 明 聰 ․ 觀智, 707년 義法 ․ 義基 ․ 摠集 ․ 慈定 ․ 淨達 등이 신라로부터 귀국하였던 것이 확인되고, 693년에는 辨通 ․ 神叡가 신라에 파견되 었으며, 이외에 沙門으로 신라에 유학한 적이 있는 山田史御形과

‘新羅學問僧’ 行達, ‘新羅學生’ 審詳(審祥)이 확인된다.103) 이 중 山

103) 田村圓澄, 1999《古代日本の國家と佛敎》, 吉川弘文館, 194~196쪽 申瀅植, 1994〈제4장 2. 統一新羅의 對日關係〉《統一新羅史硏究》, 三知院

崔在錫, 1996〈7세기 중국 파견 일본 사신·학문승과 新羅〉《韓國學報》22, 24~26쪽 정병삼, 2002〈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교류〉《한국고대사연구》27, 126~127쪽 연민수, 2005, 앞 논문, 186쪽

이병로, 2005〈나라시대 신라와 일본의 불교 교류에 관한 연구〉《日本語文學》29, 629~630쪽

최연식, 2010〈7-9세기 신라와 일본의 불교교류에 대한 연구동향 검토〉《불교학 리 뷰》8, 13쪽

이외에 《日本書紀》는 648년 三韓에 學問僧을 파견하였다고 전하는데(《日本書紀》卷

田史御形은 학문승으로 신라에 유학한 뒤 환속하여 관직에 나아간 인물로104) 당시 왜가 파견한 학문승을 단순한 승려로만 이해할 수 없게 한다.

이들 왜의 학문승이 신라에 파견된 배경에는 7세기 전반부터 신 라를 거쳐 귀국하거나 입당한 왜의 견당사 및 견당학생 ․ 학문승의 신라 체재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신라는 왜의 견당사 및 견당학생이 나 견당학문승을 왜로 호송하는 送使를 파견하거나 왜의 견당사에 入唐路를 내주었는데, 최초의 사례는 623년의 일이었다.

E. (推古) 31年(623) 가을 7월 新羅가 大使 奈末智洗爾를, 任那가 達率 奈末智를 보내어 함께 來朝하고 佛像 1具 및 金塔과 아울 러 舍利를 바쳤다. 또 大觀頂幡 1具 ․ 小幡 12條를 바쳤다. 곧 佛像은 葛野秦寺에 안치하고 나머지 舍利와 金塔, 觀頂幡 등은 모두 四天王寺에 두었다. 이 때 大唐學問者僧 惠齋 ․ 惠光 및 醫 惠日 ․ 福因 등이 함께 智洗爾 等을 따라 왔다.105)

25 孝德 大化 4年(648), “二月壬子朔 遣於三韓[三韓 謂高麗·百濟·新羅]學問僧”) 이에 대 해 구체적인 정보가 담겨있지 않아 사료로서의 가치가 의심된다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 다.(연민수, 1998, 앞 책, 477쪽) 학문승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신라에 왜의 학 문승이 파견된 사례가 680년대 이후에 집중되어 있는 데 반해 이 기사만 시기적으로 동 떨어져 있으므로 648년 당시 삼한에 학문승이 파견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외에 논자에 따라 道行(신형식, 정병삼), 行心(신형식, 정병삼), 行善(신형식, 정병삼, 이병로, 최연식) 등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으나, 道行은 왜에서 초치검을 훔쳐 신라로 달아나다 도중에 돌아왔다고 하므로(《日本書紀》卷27 天智 7年, “是歲 沙門道行 盜草薙 劒 逃向新羅 而中路風雨 荒迷而歸”) 신라에 유학한 학문승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으며 行 善은 고려에 유학하였다고 하므로(《扶桑略記》卷6 元正 養老 2年 9月, “高麗留學之僧行 善歸朝 件老師行善 在于高麗之時”) 신라학문승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 行心은 ‘新羅沙 門’이라는 표현이나(《日本書紀》卷30 持統 元年 10月, “丙申 …… 又詔曰 新羅沙門行心 與皇子大津謀反 朕不忍加法 徙飛驒國伽藍”) 그의 아들이 金씨라는 점(《續日本紀》卷3 文武 大寶 3年 10月, “甲戌 僧隆觀還俗 本姓金 名財 沙門幸甚子也 頗涉藝術 兼知算曆”) 으로 보아 신라인으로서 왜에 건너간 사문으로 보이므로 역시 신라에서 유학한 학문승으 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

104) 《日本書紀》卷30 持統 6年(692), “冬十月壬戌朔壬申 授山田史御形務廣肆 前爲沙門 學問新羅”

105) 《日本書紀》卷22 推古 31年(623), “卅一年秋七月 新羅遣大使奈末智洗爾 任那遣達率 奈末智 竝來朝 仍貢佛像一具及金塔幷舍利 且大觀頂幡一具·小幡十二條 卽佛像居於葛野秦 寺 以餘舍利金塔觀頂幡等 皆納于四天王寺 是時 大唐學問者僧惠齋·惠光·及醫惠日·福因等 竝從智洗爾等來之”

사료 E는 왜의 遣唐學問僧 惠齋 ․ 惠光 및 遣唐學生 醫 惠日 ․ 福 因 등이 新羅使와 함께 왜에 도래한 사실을 전하는데,106) 이들 가운 데 福因은 608년 隋使 裴世淸이 왜 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 동행 하였던 학생이다.107) 裴世淸은 607년 수에 파견되었던 왜사 小野臣 妹子와 함께 왜에 도래하였는데, 이때 사행로는 백제의 경역을 지나 는 것이었다.108) 614년 수에 파견된 왜사 또한 이듬해 귀국할 때 백제사와 동행하고 있어109) 역시 백제를 경유하여 귀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623년에는 왜의 학문승 및 학생이 신라를 거쳐 귀 국하였던 것이다.

이 때 惠齋 등은 진평왕 43년(621) 신라와 당의 사신교환 시 신 라에 도래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110) 이에 대해 당이 惠齋 등을 신 라에 보내주면서 신라와 왜의 관계를 중개하고 신라는 당과의 관계 를 바탕으로 왜와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 었다.111) 이후 신라와 왜의 접촉은 9년 뒤인 632년에야 확인되므로 이때 신라와 왜의 관계가 개선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112)

106) 田村圓澄, 1979〈新羅送使考〉《朝鮮學報》90, 75쪽 김현구 외 공저, 2004, 앞 책, 81~82쪽

연민수, 2005, 앞 논문, 184쪽

107) 《日本書紀》卷22 推古 16年(608) 秋九月, “唐客裴世清罷歸 則復以小野妹子臣爲大使 吉士雄成爲小使 福利爲逸事 副于唐客而遺之 爰天皇聘唐帝 其辭曰 東天皇敬白西皇帝 使人 鴻臚寺掌客裴世清等至 久憶方解 季秋薄冷 尊何如 想清悉 此即如常 今遣大禮蘓因高 大禮 乎那利等徃 謹白不具 是時 遣於唐國學生倭漢直福因 奈羅譯語惠明 高向漢人玄理 新漢人大 國 學問僧新漢人日文 南淵漢人請安 志賀漢人惠隱 新漢人廣齊等并八人也”

108) 小野臣妹子는 귀국 시 백제를 지나오다가 唐帝의 조서를 빼앗겼다고 하므로 당시 백 제는 왜와 수의 교류를 경계하였다고 보이지만(김현구 외 공저, 2004, 앞 책, 64~68쪽) 왜사가 수에 파견될 당시에는 백제가 길을 막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이후 615년에는 백 제가 귀국하는 왜의 遣隋使 편에 사신을 보낸 점으로 보아 백제 역시 왜의 遣隋使를 적 극적으로 막았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된다.

109) 《日本書紀》卷22 推古 23年(615) 秋九月, “廿三年秋九月 犬上君御田鍬·矢田部造 至 自大唐 百濟之使 則從犬上君 而來朝”

110) 田村圓澄, 1979, 위 논문, 74쪽

김은숙, 2007〈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한일관계사연구》26, 62쪽 111) 김현구․박현숙․우재병․이재석 공저, 2004, 앞 책, 81~82쪽

김은숙, 2007, 위 논문, 62쪽

112) 왜는 630년 처음으로 당에 사신을 파견하는데 이때의 견당사가 백제․고구려 사신이

하지만 唐使 유문소와 함께 신라에 도래한 惠齋 등은 신라 왕경을 거쳐 귀국하였을 것이므로 이 때 왜의 학문승 ․ 학생과 왕경의 신라 인들 간 교류가 있었던 것은 분명할 것이다.

또한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면서 왜인을 호송한 것은 당의 중개로 처음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당의 중개는 9년 뒤인 632년에 다시 시도되었다.

F. (舒明) 4年(632) 가을 8월 唐이 高表仁을 파견하여 三田耜를 호 송하였는데 모두 對馬에 정박하였다. 이 때 學問僧 靈雲 ․ 僧旻 및 勝鳥養, 新羅送使 등이 함께 따라왔다.113)

사료 F에서 확인되는 三田耜는 630년 8월 왜가 처음으로 당에 파견한 사신으로114) 당은 高表仁을 사신으로 삼아 그 귀국길을 호 송케 하였고, 이때 왜의 학문승 靈雲과 僧 旻 및 勝鳥養, 그리고 신 라의 송사가 따라 왜에 이르렀다. 이로 보아 고표인은 신라의 경역 을 거쳐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당은 다시 한 번 신라와 왜 의 관계를 중개하고 왜를 당-신라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하였음을 예상할 수 있으나 결국 고표인은 왜와 예를 다투다 사명을 완수하 지 못하고 귀국하였으므로115) 왜는 여전히 친백제 ․ 고구려의 외교 정책을 유지하였다고 생각된다.116)

왜의 견당학문승 ․ 학생에 대한 신라의 송사 파견은 639년 9월에

왜국이 체재하는 가운데 파견되었으므로 백제․고구려의 권유에 의해 파견이 이루어졌다 고 보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김은숙, 2007, 위 논문, 64~65쪽)

113) 《日本書紀》卷23 舒明 4年(632), “四年秋八月 大唐遣高表仁 送三田耜 共泊于對馬 是 時 學問僧靈雲·僧旻及勝鳥養 新羅送使等從之”

114) 《日本書紀》卷23 舒明 2年(630), “秋八月癸巳朔丁西 以大仁犬上君三田耜 大仁藥師惠 日 遣於大唐”

115) 《舊唐書》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倭國, “貞觀五年(632) 遣使獻方物 太宗矜其道遠 敕所司無令歲貢 又遣新州刺史高表仁持節往撫之 表仁無綏遠之才 與王子爭禮 不宣朝命而 還”

116) 山尾幸久, 1989, 앞 책, 369~370쪽 김은숙, 2007, 앞 논문,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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