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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國과 契丹(遼) 關係史의 硏究爭點과 向後 課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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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國과 契丹(遼) 關係史의 硏究爭點과 向後 課題

林 相 先 (東北亞歷史財團)

Ⅰ. 머리말

Ⅱ. 渤海國과 契丹의 關係

Ⅲ. 渤海遺民과 契丹國(遼)의 關係

Ⅳ. 맺는말

Ⅰ. 머리말

高句麗 멸망 후 大祚榮 집단이 사거되어 있던 營州 지역에는 고구 려 遺民, 靺鞨族과 함께 契丹人도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鮮卑 후예로 알려져 있는 契丹族은 營州都督 趙翽의 폭정에 반란을 일으키고, 이 틈을 타 대조영 집단이 동쪽으로 달아나 渤海를 건국하게 되었다.

발해와 거란은 이웃한 위치만 아니라 風俗이 유사한 점이 있었고,1) 거란, 高麗와 발해의 주민 간에 상당한 공통점이 엿보인다. 그러나 발 해국의 존속기간 중 거란족은 서쪽에 인접한 세력으로 발해와 교섭의 대상인 동시에 경계의 대상이었다. 발해가 결국 멸망하게 된 것도 다 름 아닌 거란의 침공에 의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발해와 거란의

1) (발해는) 풍속이 高麗 및 契丹과 같다(“風俗與高麗及契丹同”, 舊唐書 권199 下, 「渤海靺鞨傳」). (발해의) 나머지 습속은 高麗, 契丹과 대략 같다(“餘俗與高 麗契丹略等”, 新唐書 권219, 「渤海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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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7세기 후반 이후 11세기 전반 북방지역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빠질 수 없는 고려 대상이다.2)

이에 본고에서는 발해국과 거란(遼)의 관계에 대한 기왕의 연구현황 과 향후 과제를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발해국 건 국 이후로부터 발해 멸망까지이다. 즉,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초까지 는 발해가 국가 체제를 갖추고 북방지역의 중심 국가로 발전하고 거란 족은 唐과 발해국 사이에서 집단을 유지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는 시기이다. 두번째는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부터 거란이 멸망 하는 12세기 초까지이다. 이때는 거란족이 북방지역을 통일하고 남쪽 의 宋을 압박하는 형세로서, 발해는 나라가 망하고 그 유민이 거란(요) 의 지배를 받던 시기이다.

Ⅱ. 渤海國과 契丹의 관계

발해국과 거란족의 관계는 營州에서 거란인 李盡忠의 반란으로부터 비롯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건국 직전부터 시작되었고, 926년 발해 의 멸망은 바로 거란의 침공에 의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서 현재 발해와 거란 연구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는 渤海 建國과 ‘李盡忠의 亂’이다. 건국 전 거란과 대조영 집단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진충 난에 대조영 등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거란과 대조영 집단의 종속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대조영 집단의 反唐 活動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주로 대조영 집단이 거란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보는데, 주된 근거로 舍利라는 직책을 들고 있다.

2) 한규철은 발해와 거란의 관계를 “발해는 거란으로 인해 나라를 세울 수 있었 고, 거란으로 인해 멸망하였다. 한편,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유민들을 상당수 받아들인 거란으로서는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해유민으로 인해 요나라의 부흥을 꾀할 수 있었다.”고 한 바 있다(韓圭哲, 「渤海와 遊牧王朝의 交流」, 高 句麗渤海硏究 34, 高句麗渤海學會, 2009,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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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恩姝는 대조영 집단의 종속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乞乞仲象이 舍 利를 冒稱했던 것은 영주지역에서 한 집단의 지도자 또는 首領을 부르 던 호칭 중 하나를 사용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 였다. 특히, 新唐書 地理志의 기록을 인용하며, 사리가 거란만이 아 니라 고구려에서도 수령을 부르던 용어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점이 주목된다.3)

발해국 존속기간 발해와 거란족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논의 가 이루어지고 있는 또 다른 주제는 거란 太祖 耶律阿保機가 말한 발 해는 거란의 ‘대대로의 원수(世讎)’라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 지 라고 할 수 있다.4) 耶律阿保機가 925년 12월 “이른바 두 가지 일 가 운데 한 가지 일은 이미 완수하였으나, 발해에 대한 대대로 내려온 원 수만은 씻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5)라고 한 기록에 대한 검토이다. 즉, 발해와 거란이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원수 관계가 되었는지에 대한 해명이다.

먼저 야율아보기가 말한 두 가지 일에 대해서, 宋基豪는 야율아보기 의 경략 경로가 서방 정벌, 동방(발해) 정벌, 중원 정벌의 순이고, 야 율아보기가 중원 정벌의 전초작업으로 서방과 동방 정벌을 자신이 완 수해야 할 ‘두 가지 일’이라 표현하였다고 보았다.6) 權恩姝는 ‘世讎’는

3) 新唐書 권43하, 「志」 제33하, 「地理」 7下, 「河北道」, “高麗降戶州十四…舍 利州都督府…右隸安東都護府.” 권은주, 「발해와 유목민족 관계」 (정병준 외, 중국의 발해 대외관계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pp.99-104.

4) 발해 건국 이후 732년 渤海와 唐의 戰爭과 755년 安史의 亂도 발해와 거란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된 주요 연구로는 다음 의 논저 참조. 古畑 徹, 「唐渤紛爭の展開と國際情勢」 (集刊東洋學 55, 1986;

林相先 譯, 渤海史의 理解, 신서원, 1990); 石井正敏, 日本渤海關係史の硏 究 (吉川弘文館, 2001); 이기동ㆍ연민수 외, 8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상 (동 북아역사재단, 2011); 鄭炳俊, 「安史의 亂과 遼西 平盧軍의 南下 -李忠臣의 活動을 중심으로-」(中國史硏究 87, 中國史學會, 2013); 廉景伊, 「開元末, 唐의 東北方政策의 變化와 國際的 背景 -732년, 渤海의 侵唐(登州) 원인과 관 련하여-」 (中國史硏究』96, 中國史學會, 2015).

5) 遼史 권2, 「本紀」 제2, 「太祖」 下, 天贊4년 十12月 乙亥조, “詔曰 所謂兩事 一事已畢 惟渤海世讎未雪 豈宜安駐 乃擧兵親征渤海大諲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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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초의 사건과는 무관하며, 실상은 거란과 발해가 수십 년간 싸웠던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적이라고 하였다.7)

宋玉样은 “世仇”를 설욕한다는 것은 첫째, 침략을 합리화하여 世人 의 耳目을 가리고, 둘째, 士氣를 鼓舞시키고 民心을 激動시켰을 것이 라 하고, 발해와 거란간의 “世仇”는 발해 건국 직전인 營州에서의 李 盡忠의 亂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8) 즉,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말갈의 乞四比羽와 乞乞仲象이 이진충을 지지하지 않고 동쪽으로 달아나고, 이로부터 거란족은 심각한 타격을 받아 쇠약해져 겨우 2백여 年이 지나서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란인들 은 이러한 상황이 靺鞨族의 배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라 고 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건국 이후 발해와 거란간의 친선 교류가 있 었던 점이나, 특히 발해의 건국과 지배집단이 말갈보다는 오히려 高句 麗係 遺民이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林相先은 발해는 건국 이전부터 거란과 친밀하였고, 이러한 관계가 8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었다. 이후에 9세기에 일시 긴장관계도 있었지 만, 거란 야율아보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 계를 유지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건국 이후 양측의 관계는 발해의 대 외 교통로의 하나가 ‘契丹道’이고, 夫餘府에 항상 강한 군대를 주둔시 켜 거란을 방어하였다9)는 점으로 미루어, 교류가 이루어지면서도 일정 부분 대립적이었다. 耶律阿保機가 거란족의 유력한 지도자로 등장하는 10세기부터는 거란이 발해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세로 바뀌기 이전까 지는 대체로 서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고, 아보기 등장 후 거란 이 無道하게 발해를 멸망시켰다고 高麗도 인식하고 있었다.10) 결론적

6) 宋基豪, 「발해 멸망기의 대외관계 -거란ㆍ후삼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韓 國史論 17, 서울대 국사학과, 1987), p.75.

7) 권은주, 「발해와 유목민족 관계」, pp.104-109.

8) 宋玉样, 「渤海与契丹“世仇”之浅见」 (北方文物 1995-4), pp.73, 18.

9) 新唐書 권219, 「渤海傳」, “扶餘故地爲扶餘府 常屯勁兵捍契丹 領扶仙二州 … 扶餘契丹道也.”

10) 高麗史 2권, 「世家」 2, 「太祖」 2, 25년 冬10월조, “契丹遣使來 遣橐駝五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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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발해가 존속한 시기 발해와 거란은 일부 대립의 시기가 있었지만 대대로 원수 사이는 아니었고, 거란 太祖의 언급은 中原 지역으로 진 출하려는 계획 하에 발해가 중국과 내통하여 거란의 뒤를 칠까 염려 한, 즉 후환을 없애려는 것이11) 주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12)

다음의 발해국 滅亡過程에서의 契丹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가 있다.

발해의 滅亡 原因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13) 발해가 2개월 전후라는 짧은 기간에 멸망함에 따라, 발해의 멸망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학계를 비롯하여 일반인의 관심도 높다. 발해 멸망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대체적으로 멸망의 원인이 발해의 내부에 있는지 아니면 외부에 있는지에 따라 內因說과 外因說로 나눌수 있는 듯하다.

먼저 발해의 멸망이 발해 내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내인설의 대표적인 논리는 바로 발해가 內紛으로 인하여 멸망했다는 것이다. 내 분의 주요한 근거는 거란의 耶律羽之가 왕에게 올린 글 가운데 “선제 (先帝, 거란의 태조)께서는 그들이 離心한 틈을 타서 군사를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14)고 한 언급이다. 이심했다는 것은 발해가 서로

匹 王以契丹嘗與渤海連和 忽生疑貳背盟殄滅 此甚無道 不足遠結爲隣 遂絶交聘 流其使三十人于海島 繫橐駝萬夫橋下 皆餓死.”

11) 資治通鑑 권273, 「後唐紀」 2, 「莊宗」 同光2년(924) 추7월, “時東北諸夷 皆役屬契丹 惟渤海未服 契丹主謀入寇 恐渤海犄其後 乃先擧兵 擊渤海之遼東.”

契丹國志 권1, 「太祖大聖皇帝」 天贊三年(924), “契丹日益强盛 遣使就唐求幽 州以處盧文進 時東北諸夷皆服屬 惟渤海未服 太祖謀南征 恐渤海掎其後 乃先擧 兵擊渤海之遼東 遣其將禿餒及盧文進據平․營等州 以擾燕地 師攻渤海 無功而退.”

12) 임상선, 「渤海國과 契丹의 교섭관계 재검토」 (高句麗渤海硏究 32, 高句麗 渤海學會, 2008).

13) 발해 멸망에 대한 여러 견해에 대해서는 金恩國, 「渤海滅亡에 관한 재검토 -거란 침공과 그 대응을 중심으로」 (白山學報 40, 白山學會, 1992) 참조.

14) 耶律羽之는 東丹國을 거란 內地로 옮기자고 올린 글에서 “太宗即位,上表曰 我大聖天皇始有東土,擇賢輔以撫斯民,不以臣愚而任之. 國家利害,敢不以聞.

渤海昔畏南朝,阻險自衞,居忽汗城. 今去上京遼邈,既不為用,又不罷戍,果何 為哉?先帝因彼離心,乘釁而動,故不戰而克. 天授人與,彼一時也. 遺種浸以蕃 息,今居遠境,恐為後患. 梁水之地乃其故鄉,地衍土沃,有木鐵鹽魚之利. 乘其 微弱,徙還其民,萬世長策也. 彼得故鄉,又獲木鐵鹽魚之饒,必安居樂業. 然後 選徒以翼吾左,突厥党項室韋夾輔吾右,可以坐制南邦,混一天下,成聖祖未集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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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갈라졌다는 의미이므로 발해 내부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고, 지 배층은 소수의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인이라는 이원적 사 회구성의 취약성에서 연유한다는 설명도 있었다.15) 또한 발해가 926 년 1월 멸망 전에 발해인들이 高麗로 來投하는 사례도 발해 내분설의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16)

宋基豪는 발해와 거란의 관계를 언급하며, 특히 10세기 야율아보기 의 등장으로부터 발해 멸망에 이르는 시기의 양국 간의 관계를 사료를 바탕으로 시간 순으로 정리하였다. 거란이 발해를 제거하기 위해 遼東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903년부터인데, 이때 발해는 자체 내 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11년 5월 거란 太祖가 奚와 霫을 점령하여 遼東 지역 진출의 길을 확보하자, 발해는 거란의 진출에 두 려움을 느끼고 비밀리에 新羅 등 여러 나라와 結援을 맺었으나,17) 내 분으로 인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양국이 본격적인 전쟁 상태로 들어간 것은 924년 5월 발해가 거란의 遼州(오늘의 요녕성 新 民)를 공격하여 刺史인 張秀實을 죽이고 주민을 탈취하고, 이때 발해 가 女眞, 回鶻, 黃頭室韋 등을 부추겨 연합하여 거란을 공격하도록 하 면서부터라고 하였다. 발해는 계속된 내분으로 거란 공격에 적극적으 로 대처하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렸다고 하였다.18)

功,貽後世無疆之福. 表奏,帝嘉納之”(遼史 권75, 「列傳」 제5, 「耶律羽之傳

」)라 하였다.

15) 李龍範, 中世 滿洲ㆍ蒙古史의 硏究 (同和出版公社, 1988), p.52.

16) 高麗史 1, 「世家」 권제1, 太祖8年(925) 秋9월 丙申, “渤海將軍申德等五百 人來投 庚子渤海禮部卿大和鈞均老司政大元鈞工部卿大福暮左右衛將軍大審理等 率民一百戶來附.” 高麗史1, 「世家」 권제1, 太祖8年, 12월 戊子, “渤海左首衛 小將冒豆干檢校開國男朴漁等 率民一千戶來附.”

17) 契丹國志 卷1, 太祖 天贊 6年, “太祖攻渤海 拔其夫餘城 更命曰東丹國 … 先是 渤海國王大諲譔本與奚契丹爲脣齒國 太祖初興 倂呑八部 繼而用師 倂呑奚 國 大諲譔深憚之 陰與新羅諸國結援 太祖知之 集議未決.” 발해가 결원을 맺는 국가와 시기에 대해서는 논쟁의 대상이며, 당시의 정세를 감안하면 결원을 맺 은 국가에는 新羅뿐 아니라 高麗도 포함되며, 그 시기는 923년 3월에서 924 년 5월 이전으로 추정된다(임상선, 발해의 지배세력 연구(신서원, 1999), pp. 11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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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因說은 발해의 멸망 원인이 내부보다는 외부의 요인이 더 강하다 는 입장이다. 가령, 金恩國은 발해 멸망원인으로 제기된 遼史의 ‘離 心’은 내분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발해 내부의 사회적 분위기에 따 른 民心의 動搖로 보아야 하고, 발해 멸망은 거란의 대규모 攻勢에 의 한 것이라고 하였다.19) 발해 멸망 시기 발해는 전통적인 군사력이 유 지하며 방비체계를 확고히 하였고, 주변 국가와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압박해 오는 거란군의 침략에 대응을 하고 있었다고 하였 다.

李孝珩도 발해 멸망의 큰 요인을 거란의 발해에 대한 戰術에서 찾 고 있다. 거란이 遼東을 차지하기 위해 이십여 년 동안 공을 들였지만 정작 본격적으로 발해를 침공하는 상황에서는 북부의 夫餘府를 거쳐 곧바로 상경성으로 진격하였다. 반면 발해는 老相軍을 제외하고는 상 경성 인근에서조차 큰 전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戰爭의 경험이 훨 씬 많은 거란의 전술이 발해보다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발해가 거란 의 침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멸망하였다고 주장한다.20)

김기섭은 강적 거란의 급습을 받고 발해가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유 로는 첫째, 기강해이로 인한 방어체계 와해, 둘째, 내분을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외부세력인 遼의 도전과 충격에 의한 파멸이었다고 단정하 였다.21) 구체적인 설명에서는 발해가 국내외적인 모순을 잘못 대처하 고, 당시의 국제 情勢를 誤判한 결과라고 한다. 國境을 침입한 거란의 선발대가 上京城까지 6일 만에 주파할 정도로 발해의 山城들과 군사 방어망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기강해이의 이면에는 문약해진 사

18) 宋基豪, 「발해 멸망기의 대외관계 -거란ㆍ후삼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pp.

84-87.

19) 김은국, 「渤海滅亡에 관한 재검토 -거란 침공과 그 대응을 중심으로」; 김은 국, 「渤海滅亡의 原因」 (高句麗硏究 6, 1999).

20) 李孝珩, 渤海 遺民史 硏究 -高麗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釜山大大學院 博士 學位論文, 2004), p.35

21) 김기섭,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 (韓國古代史硏究 50, 2008), pp.103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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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분위기와 사치스런 풍조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발해의 고위관료 상 당수가 高麗로 망명한 직후 거란이 침입하였으며, 별다른 전투 없이 거의 즉각적으로 항복이 이루어진 것은 발해에 내분이 있었기 때문이 다. 치열한 내분으로 발해는 점차 예전의 유연한 실리외교 전략을 상 실하고 강적인 거란과의 정면대결이라는 경직된 외교노선은 힘과 정확 한 정세분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발해의 멸망은 한 가지만이 아닌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초 래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0세기 초 거란이 세력을 확장하여 가는 것에 발해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도 결국은 외부 요인에 내부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卢伟․赵一은 발해가 거란에 의해 급속히 망한 원인은 9 세기 말 발해국 사회의 정치, 경제가 총체적으로 위기가 초래되며 세 력이 급격히 추락하는 등 衰落이 분명하였고, 또한 唐 王朝의 보호를 잃은 후, 강대한 거란의 공격에 발해가 외부 힘을 감당하지 못하여 급 속히 멸망하였다고 주장하였다.22) 구체적으로는 발해가 급속히 멸망하 게 된 원인은 첫째, 견실한 경제 기초가 결핍되어 취약한 발해 정권이 외부의 타격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둘째, 唐朝의 쇠퇴 멸망이 당조에 예속된 발해정권으로 하여금 중앙정권의 보호를 잃게 하여 강대한 契 丹의 전면에 완전히 노출되었고, 셋째,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발해 는 계급, 민족,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이 날로 높아져 발해의 통치역량 이 크게 쇠약해졌던 것이 원인이라고 하였다.

중국 학계가 보는 발해 멸망의 원인은23) 첫째, 발해 내부적 혼란으 로 거란에 대한 충분한 방어대책이 없었던 점, 둘째, 발해의 멸망이 발해사회의 계급모순과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과 투쟁의 필연적 결과라

22) 卢伟․赵一, 「试论契丹迅速灭亡渤海国的原因」 (佳木斯大学社会科学学报 22 -5, 2004), pp.77-78.

23) 방학봉, 「발해의 멸망원인에 대하여」 (발해사연구 1, 서울대학교출판부, 1993); 馬繼華, 「簡談渤海國的滅亡」 (高句麗渤海硏究集成 4, 哈尒濱出版社, 199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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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 셋째, 종주국인 唐 나라의 원조를 받지 못해서 복속민족에 대 한 통치력이 약화되었고, 이런 상태에서 거란의 흥기와 침입으로 결국 멸망하였다. 이 가운데 마지막의 당 원조를 받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24) 발해를 당조의 지방정권이라 보는 중국학계의 인 식이 바탕에 깔려있음을 엿볼 수 있다.

Ⅲ. 발해 遺民과 契丹國(遼)의 관계

926년 契丹의 공격으로 발해국이 멸망하면서, 발해인은 遺民으로서 거란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의 연구는 바로 渤海 遺民과 契丹國(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거란 시기 발해 유민에 대한 연구 는 크게 보아 渤海人의 構成, 거란 지배하의 발해인의 生活, 處遇의 측면과 거란 지배에 대한 抵抗, 즉 渤海 復興運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발해국의 住民이 누구인지는 渤海史의 대표적인 논점의 하나이다.

즉, 발해의 건국자와 주민에 대한 혼란은 발해에 관한 가장 기본사료 로 인정되는 舊唐書와 新唐書등의 서술25)이 서로 상이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26) 현재 학계에서의 논의는 高句麗人說, 靺鞨人 說, 그리고 渤海人說로 나뉘어져 있는데, 발해 유민의 경우에도 같은 논점이 유지된다. 발해국이 멸망한 후 발해인을 그들의 처신과 행방에

24) 권은주, 「발해와 유목민족 관계」, p.113.

25) 舊唐書 권199下, 「渤海靺鞨傳」,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新唐 書 권219, 「渤海傳」,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26) 발해국의 주민 구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 참조. 權五重, 「靺鞨의 種族系 統에 관한 試論」 (진단학보 49, 1980); 盧泰敦, 「渤海國의 住民構成과 渤海 人의 族源」 (歷史學會 편,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노태돈,

「발해국의 주민구성에 대한 연구 현황과 과제 -‘高麗別種'과 ‘渤海族'을 둘러싼 논의를 중심으로」 (韓國史硏究 122, 한국사연구회, 2003); 한규철, 「발해국 의 주민구성에 관한 연구」 (인문학논총 13-1, 경성대학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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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한규철은 첫째, 거란 통치력이 약한 다른 지역, 혹은 인접국에 投化한 사람들, 둘째, 발해 멸망 후 거란에 협조한 지 배층 유민, 셋째, 발해 멸망 후 거란에 순종한 피지배 주민들, 넷째, 거란과는 반독립적 상태에 있었던 유민들, 다섯째, 거란 지배 하에서 거란에 맞서거나 대항해 싸운 주민들로 나누고, 이들을 다시 발해 멸 망 후 발해인으로서 국가의식이 비교적 강한 사람들(좁은 의미의 ‘발 해 유민’)과 발해 의식이 사라지거나 약화된 후대의 발해계 ‘거란인’

(‘渤海遺裔’ 또는 ‘발해계 거란인’)으로 구별하였다.27) 한규철은 나아가 발해 유민의 활동 중 후발해, 정안국, 흥요국, 그리고 대발해국의 부흥 운동을 설명하고, 특히 고려와의 관련성에 주목하고, 고려에 온 발해 유민은 내투 시기 등에 따라 기록에 ‘渤海人’, ‘契丹人’, ‘女眞人’으로 달리 기록되기도 하였다고 자세히 분석하였다.28) 이 가운데 요나라 시 기 여진인은 발해국 시기에는 발해에 복속되지 않은 ‘黑水靺鞨’의 후 예로서, 遼나라 여진인은 다시 遼籍에 올라가 있는 여진(熟女眞)과 요 적에 올라가지 않은 여진(生女眞)을 구별되었다. 요나라 시기 渤海人은 女眞과 구별될 뿐 아니라 대체로 漢人과 유사한 대우를 받았다.29)

契丹 시기 발해인의 움직임 중 한국 학계에서 일찍부터 관심을 기 울인 부분이 멸망 직후부터 보이는 발해인의 復興運動이다.30) 발해가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은 발해국을 다시 세우려는 부흥운동을 적극적으

27) 韓圭哲, 渤海의 對外關係史 -南北國의 形成과 展開 (도서출판 新書苑, 1994), pp.237-238.

28) 韓圭哲, 渤海의 對外關係史 -南北國의 形成과 展開, pp.240-292.

29) 林相先, 「북방지역 種族의 繼承關係 검토 -靺鞨․女眞․滿洲族을 중심으로-」 (

高句麗渤海硏究 50, 高句麗渤海學會, 2014).

30)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에 대한 주요 논저는 다음과 같다. 和田淸, 「定安國に ついて」 (東洋學報 6, 說林, 1916; 東亞史硏究(滿洲篇),東洋文庫, 1955);

三上次男, 「高麗と定安國」 (東方學報 11-1, 1940; 高句麗と渤海, 吉川弘 文館, 1990); 日野開三郞, 「後渤海の建國」 (帝國學士院紀事 2-3, 1943; 日 野開三郞東洋史學論集 16, 三一書房, 1990); 韓圭哲, 「渤海復興國後渤海

硏究-연구동향과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國史館論叢 62, 1995); 韓圭哲,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 (한국사 10, 국사편찬위원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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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전개하였다. 後渤海31)를 시작으로 定安國32), 興遼國,33) 大渤海 國34)이 발해 멸망 후 100년이 넘도록 거란의 지배에 항거하며 등장한 부흥국가들이다.

특히 발해 유민 중에서도 한국학계가 관심을 가진 것은 高麗로 來 投한 무리에 대한 것이었다.35) 李孝珩은 고려시대의 발해·발해 유민 인식은 고려가 처한 시기별 대내외 상황과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었다고 한다. 고려 초기 특히 태조 대에는 발해를 동류·동 족의 국가로 인식하려는 입장이 강하였으나, 중기는 김부식이 편찬한

31) 발해가 멸망한 후 거란에 의해 세워졌던 東丹國이 927년 서쪽으로 옮겨간 이후 세워진 최초의 발해 부흥국가를 926년 이전의 ‘발해’와 구별하여「後渤海

」라고 한다. 후발해는 高正詞가 발해 사신으로 後唐에 갔던 929년경 처음 기 록에 등장하고, 멸망 시기는 후발해의 兀惹 정권이 거란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1003년 무렵으로 보고 있다.

32) 발해의 西京鴨綠府가 있던 압록강 일대에서 발해유민들의 부흥운동이 일어 나 정안국을 세우고 거란에 대항하였다. 정안국의 건국 연도에 대해서는 93 5~936년설과 937년설, 970년설 등이 있는데, 宋史에 列傳이 있다. 정안국 은 그 왕이 처음에는 烈萬華였다가 얼마 후에는 烏玄明으로 바뀌었고, 오현명 은 고구려의 옛 땅인 발해의 유민이라고 하며 고구려—발해--정안국이라는 계 승의식을 갖고 있었고, 元興이라는 年號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33) 흥료국은 1029년 8월초 遼의 東京道 관하에 있던 大延琳의 지휘 하에 건국 되었다. 발해인 다수가 거주하고 있던 東京遼陽府를 거점으로 그 주변의 발해 인을 규합하여 거란의 관리들을 가두거나 죽인 뒤, 국호를 興遼, 연호를 天慶 이라 하였다. 대연림은 당초 女眞의 호응과 高麗와의 공동작전을 통한 반거란 항쟁을 기대하여 건국 직후인 1029년 9월초부터 수차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 청하였으나, 고려는 응하지 않았다. 1030년 8월 25일 경에 대연림도 사로잡히 며, 부흥운동은 실패하였다.

34) 1116년 1월 발해유민들은 遼陽 지방에서 高永昌을 중심으로 다시 ‘大渤海 國’을 세워 거란에 대항하였다. 10일 만에 인근 지역이 모두 호응하여 군사가 8천명에 달하였다. 이에 스스로 황제라 하고, 국호를 대발해, 연호를 隆基라 하였다. 거란 동경도 관하의 79州 가운데 50주를 공략할 정도로 발해 유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금나라의 공격을 초래하여 東京城이 함락되 자, 남은 군사 5천과 함께 長松島로 피하였으나 얼마 뒤 금나라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장송도에 피신한 대발해국 잔여부대들의 활동에 대하여 기 록에는 ‘雲隊’ 또는 ‘海隊’라고 하였다.

35) 이효형,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과 대외관계」 (정병준 외, 중국의 발해 대외 관계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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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에서는 단지 新羅 북방의 인접 국가로만 인식하고, 같은 시 기 尹彦頤는 발해를 한국사로 인식하였다. 元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 는 三國遺事와 帝王韻紀가 발해를 한국사로 인식하였다.36)

다만, 발해 유민들의 고려 내투에서 定安國을 제외하고 발해, 후발 해, 대발해 관련 사실들이 모두 발해로만 기록돼 있으나, 발해와 후발 해의 사례를 세밀히 분석한 韓圭哲의 글은 매우 의미가 있다.37)

발해 멸망 이후, 거란 지역으로 遷徙된 발해인에 대해서는 해명이 필요한 분야가 많다.38) 이와 관련 최근 임상선은 발해 멸망 전, 926 년 발해 멸망 직후, 928년 耶律羽之의 건의에 따른 東丹國 천사, 그리 고 동란국 천사 이후의 거란 내에서의 추가 천사 등에 대해 遼史의 기록을 중심으로 정리한 바 있다. 먼저 발해 멸망 전부터 동란국의 천 사에 이르기까지 발해에서 거란 內地로의 천사를 검토하였다.39) 발해 가 멸망하기 이전에 거란 지역에서 발해인이 거주한 곳이 上京道 臨潢 府의 潞縣, 饒州의 長樂縣이 있고, 東京道에서는 遼州, 同州의 東平縣․

永昌縣, 瀋州 소속 巖州의 白巖縣, 廣州, 銀州, 辰州가 있었다고 한다.

36) 李孝珩, 「渤海 遺民史 硏究 -高麗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釜山大大學院 博士 學位論文, 2004).

37) 한규철, 「渤海遺民의 高麗投化」 (釜山史學 33, 1997); 이효형, 「발해 유민 의 부흥운동과 대외관계」, p.234, 註30.

38) 거란내의 발해 유민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저 참조. 李龍範, 「遼代 東京道의 渤海遺民」 (정재각선생회갑기념논총, 1973; 中世 東北亞細亞史 硏究, 아세 아문화사, 1976); 李龍範, 「遼代 上京․中京道의 渤海遺民」 (白山學報 15, 1973); 金渭顯, 「遼代의 渤海復興運動」 (遼金史硏究, 裕豊出版社, 1985); 장 국종, 「발해국멸망후 그 고토의 주민구성과 반거란투쟁」 (발해사연구 1, 사 회과학출판사, 1997); 李孝珩, 「渤海 遺民史 硏究 -高麗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釜山大大學院 博士學位論文, 2004); 徐炳國, 「渤海遺民史硏究」 (高句麗渤 海硏究 25, 高句麗渤海學會, 2006); 이효형, 「발해 유민 연구」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韓圭哲, 「渤海와 遊牧王朝의 交 流」 (高句麗渤海硏究 34집, 高句麗渤海學會, 2009); 羅永男, 「契丹의 異民族 支配政策과 渤海人의 存在樣態」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 문, 2013).

39) 임상선, 「渤海人의 契丹 內地로의 강제 遷徙와 居住地 檢討」 (高句麗渤海硏 究 47, 高句麗渤海學會,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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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년 발해 멸망 직후, 발해인이 천사된 지역으로는 上京道에서 临潢 府, 祖州, 懷州, 慶州, 永州, 饒州, 東京道에서는 通州, 龍州, 韓州가 있 고, 중경도 錦州 소속의 巖州에도 발해 포로가 있었다. 928년 12월부 터 거란은 後患을 염려하여 옛 발해 지역에 있던 東丹國과 그 주민을 거란 지역으로 천사시켰는데, 발해 上京龍泉府는 東京遼陽府, 湖州, 渤 州에, 中京玄德府는 盧州․鐵州․興州는 발해와 거란의 주의 명칭이 같고, 거란 崇州는 발해 榮州를 잘못 표기한 것이고, 東京龍原府의 慶州가 거란에서 開州로 개칭되고, 鹽․穆․賀 3州는 명칭이 바뀌지 않은채 옮겨 졌으며, 西京鴨淥府의 神州는 거란에서 淥州로 개칭되고, 나머지 桓州, 豐州, 正州는 명칭이 바뀌지 않았으며, 南京南海府의 沃州는 거란에서 海州로 바뀌고, 해주의 소속 주인 耀州와 嬪州는 남경남해부의 椒州와 晴州가 명칭이 바뀌어 옮겨간 것이다. 5경 이외에 遂州와 信州는 발해 의 懷遠府에 있던 주민이 옮겨간 곳이고, 발해의 특수한 주인 郢州·銅 州·涑州의 3개 州도 천사되었다고 보았다.

이어서, 東丹國의 遷徙 이후, 발해 유민이 어떤 이유에서, 어떤 발해 유민이, 어느 지역으로 강제 천사되었는지를 검토하였다.40) 요대 발해 인의 강제 移住는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목적이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건은 1029년에 발생한 大延琳의 興遼國 건설이다. 대연림의 난에 참여한 지역은 東京道의 중심인 遼陽 지역을 비롯하여 黃龍府, 保州, 瀋州 등 이 있으나, 遼史에서 발해 유민이 거주했던 곳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海州와 淥州였다. 난에 직접 관련된 발해 유민들이 강제 이주된 지방은 上京道와 中京道 지역이었다. 이 중, 발해 유민 가운데 謀勇者 와 같은 지배 세력은 난이 진압되면서 죽음을 당하고, 上京臨潢府 직 할의 統縣 10개 중 易俗縣, 遷遼縣, 渤海縣에는 대연림의 난에 직접 참가한 사람과 그 가족이 천사되었다.

대연림의 난의 처리와 관련하여 공을 세운 인물에게는 상을 내리고,

40) 임상선, 「遼代 渤海人의 再遷徙 事由와 그 內容」 (白山學報 97, 白山學會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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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舊族’ 중에 공훈이 있고 재능이 있는 자는 敍用하고, 나머지는 來 州, 濕州, 遷州, 潤州 등의 州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내주의 속현인 遷州는 聖宗이 大延琳의 난을 평정하고 歸州民을, 그리고 또다른 내주 의 속현인 潤州는 寧州의 민을 옮겨 각각 설치한 주이다. 귀주와 윤주 에는 통화 29년(1011) 고려와의 전쟁에서 사로잡은 渤海戶가 있었다.

975년 7월, 발해 유민인 燕頗가 반란을 일으킨 곳은 발해 夫餘府가 있던 거란의 龍州 黃龍府이고, 난을 진압한 후 거란이 城을 쌓고 발해 유민들을 천사시킨 곳이 通州였다. 거란 天祚帝 天慶 5년(1115) 2월 에는 발해인 古欲이 饒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요주는 聖宗 때 그 주민의 일부가 다른 쪽으로 천사되었으나, 11세기 초에도 이곳에 발해 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契丹 內部의 要因에 의해서도 발해 유민이 遷徙되었다. 顯州에는 世 宗과 穆宗 때, 奉陵의 목적으로 천사된 발해 유민이 있었다. 그 속현 인 奉先縣은 遼東의 長樂縣民, 그리고 山東縣은 동경요양부 永豐縣民 을 재천사하여 陵戶를 삼은 것이었다. 변방 방어를 위하여 발해인이 거란 내에서 강제 이주된 곳으로 鎮州가 있다. 統和 22년(1004), 室韋․

羽厥 등을 방어하기 위하여 屯軍을 채울 때, 渤海․女直․漢人의 귀양간 7백여 戶가 鎮州, 防州, 維州에 나누어 배치되었다.

거란 당대에 이루어진 府州縣의 개폐 과정에서도 발해 유민이 천사 된 경우가 있다. 東京道의 貴德州와 廣州는 모두 聖宗 통화 8년(990 년)에 소속 발해인의 재천사가 이루어졌고, 開州는 開泰 3년(1014)에 雙州와 韓州의 千餘戶를 옮겨와 재설치된 것이다. 또한 발해 후예인 大公鼎의 경우, 그 선조가 遼陽 率賓縣에 살다가, 통화 연간에 요동의 豪强한 집단의 일부로서 中京으로 천사되었다. 거란이 새롭게 부주현 을 개폐할 때, 자신들에게 잠재적 위협이 되는 세력을 약화시키고, 결 과적으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주민의 강제이주를 시행하였 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란 치하의 발해 유민의 생활이나 처우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 주목한 연구들이 있다. 이종훈은 요나라 발해 유민의 사회적 지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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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경내로 이주한 후 그들의 원래 신분, 이주방식, 이주지점 등의 다름에 따라 그 사회적 지위와 처지도 좀 달라졌다고 하였다. 발해 왕 족, 관료와 “공로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은 요나라에서도 일정한 우대 를 받았다. 발해 왕족은 거란의 最高族帳인 遙輦帳의 다음 자리에 놓 였는데 이것은 거란의 일반 족장의 대우보다 더 높은 것이었다. 일반 발해 유민의 처지도 그들 각자가 처한 환경이 다름에 따라 같지 않았 다고 한다.41)

거란 시기 발해인에 대한 지배방법과 발해인의 처우에 대해서는 최 근 羅永男에 의해 자세히 검토되었다.42) 요대 발해인의 강제 이주는 대부분 遼 전기에 발생하였던바 주로 太祖, 太宗, 聖宗 세 시기에 걸 쳐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漢人 및 발해인 등의 농경민에 대한 이주정 책을 적극 추진하였고 이를 통해 거란 본토를 충실히 개발하여 안정적 인 소득원을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反遼 성향이 강한 발해인 들을 거란 및 한족, 奚族 등의 거주지로 이주시켜 다른 민족과 잡거하 게 함으로써 그들의 역량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거란 통치자들은 발 해인을 내지로 이주시켜 그들의 정체성을 희석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 란주민으로 순치시켜 요조의 세원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하였 다. 강제 이주된 발해 유민을 거란은 일반 州縣의 編戶, 頭下軍州의 頭下戶, 그리고 斡魯朶의 宮分戶로 安置시켜 관리하였다고 한다.

林相先은 京, 府, 州가 아닌 斡魯朶43), 즉 皇帝나 皇后를 호위, 시종 하는 독특한 조직에 예속된 遼代 州縣에 대한遼史 宮衛志와 地理志 의 기록을 비교하고, 아울러 이곳에 거주하는 발해 유민에 대하여 검

41) 리종훈 저․김영국 역, 「료나라 발해유민의 사회적지위 및 그 영향에 대하여」

(발해사연구 3, 연변대학출판사, 1993), p.299.

42) 羅永男, 「契丹의 異民族 支配政策과 渤海人의 存在樣態」, pp.117-171.

43) 遼史 권35, 「志」제5, 「兵衞志」 中, 「宮衞騎軍」, “太祖以迭剌部受禪, 分本部 為五院六院,統以皇族,而親衞缺然. 乃立斡魯朶法,裂州縣,割戶丁,以強幹弱 支. 詒謀嗣續,世建宮衞. 入則居守,出則扈從,葬則因以守陵. 有兵事,則五京 二州各提轄司傳檄而集,不待調發州縣部族,十萬騎軍已立具矣. 恩意親洽,兵甲 犀利,教練完習. 簡天下精銳,聚之腹心之中. 懷舊者歲深,增新者世盛. 此軍制 之良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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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하였다.44) 알로타와 이곳에 속한 주현은 요사 궁위지를 통하여 확 인할 수 있는데, 요사 지리지의 5경 아래의 주현은 궁위지와 일치하 는 주현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발해 유민이 거주한 곳은 上京道의 알로타 주현중에서 定霸縣, 祖州, 饒州, 富義縣, 降聖州, 保和縣, 宣化縣이고, 漢人과 섞여 있는 곳은 懷州, 儀坤州, 永州, 慶州 였다. 東京道의 알로타 주현중에서 발해 유민이 다수 거주하는 곳은 顯州, 奉先縣, 山東縣, 歸義縣, 遼州, 銀州, 韓州, 同州, 貴德州, 康州, 巖州, 開州이고, 漢人과 섞여 있는 곳은 祺州, 遂州, 乾州, 雙州, 瀋州, 遼西州 등이다.45) 中京道의 알로타 주현중에서 발해 유민이 다수 거주 하는 곳은 來州와 恩州가 있고, 발해인이 漢人과 섞여 있는 곳은 嚴州 와 黔州라고 하였다.

중국학계의 발해 유민 연구 동향에 대해서는 李孝珩의 검토가 있 다.46) 이효형은 발해의 유민에 대한 연구는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진 행되고 있지만, 내용상으로 한국과 일본은 유사한 면이 많지만 중국의 시각은 여러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하고,47) 중국 학계의 발해 유민 연구를 정리하였다.48) 중국의 발해 유민 연구는 발해사 연구 중에서 비중이 높지 않고, 고려에 내투한 사실은 의미를 축소하면서, 발해 멸 망 후 옛 발해 땅에 세워진 채 거란의 조종을 받았던 東丹國에 대해서 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일정한 지역을 거점

44) 임상선, 「遼史地理志의 斡魯朶 州․縣」 (高句麗渤海硏究 49, 高句麗渤海學 會, 2014).

45) 東丹國과 함께 다수의 발해 유민이 옮겨와 살던 東京 지역 遼의 軍史組織에 대해서는 林相先, 「遼代 提轄司와 東京지역의 軍事組織」 (中國史硏究 92, 中 國史學會, 2014) 참조.

46) 이효형, 「발해 유민 연구」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 단, 2008); 이효형,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과 대외관계」 (정병준 외, 중국의 발해 대외관계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47) 李孝珩, 「발해의 멸망ㆍ유민사에 대한 연구 현황과 과제」 (釜大史學 30, 2006), p.24.

48) 이효형,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과 대외관계」 (정병준 외, 중국의 발해 대외 관계사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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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부흥운동으로 세운 대표적인 나라인 定安國, 興遼, 大渤海, 그리 고 後渤海49)에 대한 중국학계의 연구동향을 정리하며,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후발해․정안국은 거란의 공격으로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후신이었고, 중국 역시 10세기 초부터 강력하게 성장하는 거란의 위세에 위협을 느끼며 이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후발해 와 정안국은 중국의 五代, 송나라와 긴밀한 국제관계를 맺고, 더불어 거란에 공동으로 대처하려 했다는 것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하였 다. 興遼國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거란의 발해 유민에 대한 가혹한 경제적 수탈에 있었으며, 흥료국은 송이 아닌 고 려로부터의 구원에 매달렸으나, 고려는 11세기라는 동아시아의 복잡한 상황에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앞세우는 외교적 고려에서 구원에 응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高永昌의 大渤海는 12세기 동아시아사의 판도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요동 지역의 역사 주인이 거란족의 요에서 여진족의 금으로 교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라고 평가하였다.50)

중국학계의 발해 유민연구가 한국과 다른 가장 두드러진 주제가 東 丹國에 대한 이해인 듯하다.51) 동란국은 거란 야율아보기가 926년 1

49) 韓圭哲, 「渤海復興國‘後渤海’硏究 -연구동향과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國 史館論叢 62, 국사편찬위원회, 1995).

50) 이효형,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과 대외관계」, pp.233-250.

51) 東丹國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저 참조. 園田一龜, 「東丹國人皇王南奔の行迹」

(奉天圖書館叢刊 22, 1935); 日野開三郞, 「五代時代に於ける契丹と支那との 海上貿易 -東丹國內に於ける渤海遺民の海上活動(上ㆍ中ㆍ下)-」 (史學雜誌

52-7ㆍ8ㆍ9, 1941); 尾崎康, 「北魏における渤海高氏」 (斯道文庫論集 2, 慶 応義塾出版會, 1963); 李龍範, 「遼代 東京道의 渤海遺民」 (정재각선생회갑기 념논총, 1973; 中世 東北亞細亞史 硏究, 아세아문화사, 1976); 王德忠, 「辽 朝对东丹国的统治政策及其评价」 (昭乌达蒙族师专学报(社会科学版) 1987-2);

島田正郞, 契丹國-遊牧の民キタイの王朝 (東方書店, 1993); 何俊哲, 「耶律倍 与东丹国诸事考」 (北方文物 1993-3; 최태길 역, 「야률배와 동단국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고증」, 발해사연구 6, 연변대학출판사, 1995); 杨雨舒,

「近十五年来国内东丹史研究概述」 (社会科学战线 1996-3); 杨雨舒, 「辽代耶 律羽之“墓志”所记东丹国史事考」 (社会科学辑刊 1996-5); 金渭顯, 「東丹國考

(宋遼金元史硏究 4, 宋遼金元史硏究會, 2000); 盖之庸, 「耶律羽之墓志铭考 证」 (北方文物 2001-1); 李孝珩, 「渤海의 멸망과 遺民의 諸樣相 -東丹國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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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발해를 멸망시키고, 2월 발해국을 東丹으로 고치고, 발해 忽汗城을 天福이라 하고, 皇太子인 倍를 人皇王으로 삼은 것에서 비롯되었다.52)

중국에서는 동란국의 건국과 폐지과정, 행정기구와 같이 요의 동란 국 통치에 대한 연구가 있지만,53)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왕이었던 耶律 倍(899-937)54)에 관심이 많다. 야율배는 거란 태조의 長子, 太宗의 兄, 그리고 世宗의 父였기 때문에 거란의 초기 정치사와 왕위 계승 등 과 관련된 서술이 많다.

李孝珩은 金毓黻 이래 발해 멸망 후 등장하는 (후)발해를 동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55) 10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동란 국이 발해가 아니었다는 것은 南唐書와 일본의 扶桑略記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즉, 남당서 기사에는 契丹과 東丹 이 각각의 사신을 파견한 내용이 등장하고,56) 발해 멸망 후 일본에 사

련 渤海遺民을 중심으로」 (白山學報 72, 2005); 李雪梅, 「論東丹國的建國原 因及其性質」 (遼寧師範大學學報 30-3, 2007); 石井正敏, 「藤原定家書寫長 秋記紙背文書「高麗渤海關係某書狀」について」 (人文硏紀要 61, 中央大學人 文科學硏究所, 2007); 刘浦江, 「再谈“东丹国”国号问题」 (中国史研究 2008 -1); 篠崎敦史, 「東丹国使について -来朝理由を中心に」 (續日本紀硏究384 號, 2010); 康鵬, 「東丹國廢罷時間新探」 (北方文物 2010-2, 北方文物雜誌社, 2010).

52) 遼史 권2, 「本紀」 제2, 太祖下, 天顯 원년 2월 丙午조, “改渤海國為東丹,

忽汗城為天福. 冊皇太子倍為人皇王以主之. 以皇弟迭剌為左大相,渤海老相為右 大相,渤海司徒大素賢為左次相,耶律羽之為右次相. 赦其國內殊死以下.” 遼史

권72, 「列傳」 제2, 「宗室」, 「義宗倍」, “改其國曰東丹,名其城曰天福,以倍為人 皇王主之. 仍賜天子冠服,建元甘露,稱制,置左右大次四相及百官,一用漢法.

歲貢布十五萬端,馬千匹. 上諭曰 此地瀕海,非可久居,留汝撫治,以見朕愛民 之心. 駕將還,倍作歌以獻. 陛辭,太祖曰 得汝治東土,吾復何憂. 倍號泣而出.

遂如儀坤州. 未幾,諸部多叛,大元帥討平之. 太祖訃至,倍即日奔赴山陵.”

53) 杨雨舒, 「近十五年来国内东丹史研究概述」 (社会科学战线 1996-3).

54) 遼史 권72, 「列傳」 제2, 「宗室」, 「義宗倍」.

55) 金毓黻은 “동란의 국왕은 비록 거란 사람이지만 통치하는 백성은 모두 발해 의 유민이다. 그러므로 정치제도도 또한 대부분 발해의 옛 제도를 답습하였다.

거느리는 여러 주는 비록 대부분 발해의 옛 지역에 있지 않지만 또한 그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동란국을 일러 발해를 계승하고 지속한 국 가라고 하여도 무방하다”(金毓黻 지음ㆍ동북아역사재단 번역, 김육불의 東北 通史 下, 동북아역사재단, 2007, p.677)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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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 간 裵璆가 929년 “발해가 이미 멸망하여 이제 동란국의 신하 가 되었다”고 한 기록을 들고 있다.57) 동란국은 발해 계승국가, 발해 유민국가, 발해 부흥국가가 아니라 단정하고, 발해사의 연장 혹은 발 해 유민사의 일부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58) 그러나 동란국이 여타 발 해 부흥운동과 같이 발해를 재건하려고 하거나 반거란 행동을 하지 않 았지만, 여기에 발해 다수의 유민이 참여하고, 遼陽으로 천사된 뒤에 이곳에서 발해 부흥운동이 일어난 점에서 발해 유민의 역사에서 제외 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羅永男은 최초 거란은 발해를 직접 통치할만한 역량을 지니지 못했 기 때문에 시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니, 東丹은 거란속의 또 다른 국으로 존재하면서 궁극적으로 거란 一國으로 통합하는 과정의 산물이 라고 보았다.59)

Ⅳ. 맺는말

이상에서 渤海國과 契丹(遼)의 관계사에 대한 주요 연구 쟁점을 검 토하였다. 그 개요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발해국과 거란족의 관계는 발해국 건국 직전부터 시작되었다. 발해 국 존속기간 발해와 거란족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 어지고 있는 시기는 10세기 이후 발해 멸망과정에 이르기까지이다. 이

56) 宋 陸遊, 南唐書 「列傳」 권제15, “契丹事見唐書本傳及五代史四夷附錄 今 取其事之繫南唐者為傳 烈祖昇元二年 契丹主耶律徳光及其弟東丹王 各遣使以羊 馬入貢 别持羊三萬口馬二百匹來鬻 以其價市羅紈茶藥 烈祖従之 於是翰林院進二 丹入貢圖 詔中書舍人江文蔚作贊 其詞曰皇帝建西都之歲 神功邁于三古皇風格于 四裔華夷咸若駿奔結軌 奧六月 契丹使梅里捺盧古 東丹使兵器寺少令高徒煥奉書 致貢 咸集都邑公卿庻尹 拜手稽首 稱賀以為文徳所服受命之符也.”

57) 本朝文粹 卷12; 扶桑略記 卷24.

58) 이효형,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과 대외관계」, pp.255-258.

59) 羅永男, 「契丹의 異民族 支配政策과 渤海人의 存在樣態」,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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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서 주목되는 주제는 거란 耶律阿保機가 발해를 공격하는 빌미로 제기한 ‘대대로의 원수(世讎)’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아울러 발해의 멸망과정에서 거란의 역할 등이다. 발해가 존속하고 있던 시기 발해와 거란은 일부 대립의 기간이 있었지만 대대로 원수 사이는 아니 었고, 거란 태조의 언급은 다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발 해국 멸망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대체적으로 멸망의 원인이 발해의 내부에 있는지 아니면 외부에 있는지에 따라 內因說과 外因說로 나눌 수 있다.

926년 야율아보기의 공격으로 발해국이 멸망하면서, 발해인은 遺民 으로서 거란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의 연구는 바로 발해 遺民과 契丹國(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거란 시기 발해 유민에 대 한 연구는 크게 보아 발해인의 구성, 거란 지배하의 발해인의 생활, 처우의 측면과 거란 지배에 대한 저항, 즉 발해 부흥운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거란 시기 발해인의 움직임 중 한국 학계에서 일찍부터 관심을 기 울인 부분이 멸망 직후부터 보이는 渤海人의 復興運動이다. 발해가 멸 망한 후 그 유민들은 발해국을 다시 세우려는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後渤海를 시작으로 定安國, 興遼國, 大渤海國이 발해 멸망 후 100년이 넘도록 거란의 지배에 항거하며 등장한 부흥국가들임이 규명되었다. 한국학계는 高麗로 온 발해 유민에 대한 연구가 자못 풍 성하지만, 정작 다수의 발해유민이 있던 거란내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 심이 적었다. 고려에 있던 발해 유민이 거란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포 로가 되어, 그 이전에 거주하던 발해인과 함께 재차 遷徙되는 사례에 서도 알 수 있듯이, 발해 유민은 그 소재지와 상관없이 민족적, 역사 적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던 점에서 종합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발해 멸망 전부터 東丹國의 遷徙에 이르기까지 발 해에서 거란 內地로의 천사 과정, 그리고 동란국의 천사 이후, 발해 유민의 강제 천사에 대하여 주목하게 된 점은 긍정적인 조짐이다. 한 편, 중국학계가 金毓黻 이래 발해 멸망 후 등장하는 (후)발해를 동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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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을 비판한 성과도 발표되었다.

이상의 검토과정을 통하여, 향후 연구에서는 발해와 거란의 관계는 양측만이 아니라, 7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 에서 구명되어야 실상에 접근할 것으로 생각된다. 즉, 8-10세기 초의 발해, 新羅, 日本, 그리고 唐간의 국제관계속에서 渤海國의 위치를 살 피고, 발해 멸망 이후는 거란, 宋, 高麗의 동아시아 세계 속에서 거란 의 위치를 설정하고, 그 속에서 발해와 북방민족 거란, 거란과 유민으 로서의 발해를 엿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해 설립한 東丹國에 대한 정치한 해명 이 필요하다. 동란국은 설립 후 얼마 뒤 遼東 지역으로 천사시키고, 10세기 후반에는 유명무실해졌다. 거란 내에서 동란국은 국가내의 국 가인지, 아니면 특수한 행정조직인지 등과 같이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 할 필요가 있다. 요동 지역으로 옮겨진 후 동란국 관할 지역, 주민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들과 다른 거란 치하의 발해인과 차이가 있는지 등도 의문스러운 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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