變法運動時期 湖南省 知識人의 書院改革 構想
李 暎 蘭 (朝鮮大)
Ⅰ. 머리말
Ⅱ. 청말 교육개혁론과 호남성 서원 의 개편
1. 청말 교육개혁 논의
2. 호남성의 교육개혁 논의와 서원 개편
Ⅲ. 호남성 지식인의 서원개혁 구상 1. 보수파의 실용인재양성
2. 변법지식인의 경세치용과 변법 인재양성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청조의 교육 개혁 가운데 특히 무술변법 전후로 이루어진 교육개혁 은 기술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었던 양무운동시기의 교육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과목의 전문화와 다양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 다. 당시 변법파의 교육개혁은 기술적 측면의 인재가 아니라 정치, 경 제, 사회문화적 인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새로운 교육기관 설립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전통교육에서 신교육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제도적인 측면에서 전 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어 서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들의 주요 관 심의 대상이었다. 서원 개혁은 전국단위의 개혁이 용이하였을 뿐 아니 라, 서원 수학 이후에 과거시험을 통해 학생들의 출로문제를 처리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개혁론자들의 관심을 받기에 매우 용이하였다.
전통서원을 근대식의 학당으로 고쳐 교육개혁을 실시한다면 신식교육 기관설립을 위한 재정적 부담을 줄일 수 있고 빠른 시일 내에 큰 효과 를 볼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기존의 書院을 學堂으로 개혁하자는 주장 이 제기되었다.1)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호남성의 경우도 1902년∼1903년 사이 他省에 비해 비교적 많은 서원들이 학당으로 모두 87개소가 개편되었다.2) 이 러한 호남성 서원 개편의 배경을 단순히 위에서 언급한 제도적, 경제 적 원인에서만 찾기는 곤란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호남성 서원은 호상학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왔던 곳으로 이러한 사상적 흐름의 영향 을 간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3)
호남성의 교육개혁과 관련된 연구는 유신운동시기 호북과 호남의 교육변화와 개혁·반개혁인물의 교육실천과 사상을 연구하여 변법시기 호남성 교육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연구4)와 무술변법시기 新學과 舊 學, 그리고 서양학과 중국학의 갈등을 다룬 논문도 다수 있다.5) 이외
* ‘변법운동시기’는 일반적으로 청일전쟁 후∼신정 이전 특히 1896∼1898년을 중 점적으로 다룬 시기로 본고는 호남성의 본격적인 서원개혁 구상이 1898년에 주요 논의가 되었던 점에 초점을 맞추어 논문을 전개하고자 하고자 한다. 다만 1902∼3년을 살펴본 이유는 변법운동시기 이후의 개혁과 비교하여 이 글을 이 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1) 朱有瓛 主編, 中國近代學制史料 第1輯 下冊 (華東師範大學出版社, 1986), pp.438-453 (이하 學制史料 下로 약칭)의 百日維新其間改書院爲學堂에서 康 有爲, 貴州巡撫 王毓藻, 張之洞, 山西巡撫 胡聘之, 管理大學堂大臣 孫家鼐 등이 주장하였다.
2) 欽定大清會典事例 卷三百九十五 禮部 學校 各省書院과 季嘯風의 中國書院 辭典 (浙江敎育出版社, 1996)에 의거하여 청대 시기별로 서원 설립을 수치화 하였다. 계유학제 반포 이전에 전국 省단위에서 서원이 가장 많은 지역은 四 川, 廣東, 江西, 浙江 그리고 湖南의 순서였다. 호남성은 5번째 순으로 서원이 많았다. 그런데 1903년 이전에 이미 서원을 학당으로 개편한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호남성이다.
3) 拙稿, 청말 호남성 지식인과 湖湘學 繼承 (明淸史硏究 34, 2010) 참조.
4) 曹運耕, 維新運動與兩湖敎育 (湖北敎育出版社, 2003); 深澤秀男은 변법운동시 기 경사대학당의 설립과 운용을 연구한 變法運動と京師大學堂 (東洋史硏究
, 1978)에서 변법운동시기 호남성 교육에 관한 내용도 함께 다루었다.
5) 賀跌夫, 戊戌時期之學堂與科擧之爭 (複印報刊資料, 1984.4); 羅小琼, 戊戌前
에도 大久保英子가 淸代 각 省의 商人과 서원의 관계를 발표한 이래 최근에는 청말 이후 호남성의 교육재정을 연구하기도 하였다.6) 이렇듯 1840년 이후 호남성이라는 교육에 대한 접근은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 고 있다. 다만 이들 연구 대부분이 유학의 재해석이라는 호상학적 전 통 활용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현실에 맞는 교육개혁에 대한 접근은 이 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호남성 지식인들이 서원개혁과 관련하여 어떠한 사상과 이 론을 가지고 참여하였는가를 살펴본다면 호남성 서원 개편이 비교적 다른 성에 비해 많았던 이유와 서원에서의 학맥관계와 개편과정에서 나타난 공통분모와 갈등구조도 덧붙여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 다.
호남성 지식인들은 아편전쟁 그리고 이어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전 통과 변화의 갈등구조 속에서 실용을 강구하는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 개혁을 위한 방법에 대해 여러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변법운동시기 호남성에서 교육개혁의 한 형태인 서원개혁 주장에 대한 논의를 분석 하면 그들의 개혁 구상과 방향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전체적으로 교육개혁의 구도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Ⅱ장에 서는 淸朝 서원이 근대교육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을 정리하고 근대학제 반포(1903년; 癸卯學制)이후 교과목 편성과 서원교학방식의 연계를 고 찰해 보고자 한다. 전국적 교육개혁을 살펴본 후, 청말 호남성 서원이 어떻게 개편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Ⅲ장에서는 변법운동시 기 호남성의 교육개혁방향을 이해하기 위해 호남성 지식인의 교육개혁
後的興學運動及歷史功績 (複印報刊資料, 1987.11); 徐啓彤, 維新敎育與中西 會通 (複印報刊資料, 1993.10).
6) 大久保英子의 明淸時代書院の硏究 (東京, 國書刊行會, 1976) 발표이후 최근 에는 宮原 佳昭는 長沙를 중심으로 1901∼신해혁명이전까지 지방 신사 기부로 설립되었던 민립학당을 살핀 淸末湖南省民立大學堂設立 -新敎育界の形成につ いて- (東洋史硏究 62-2, 2003)와 호남성의 한 현의 교육재정을 연구한 田 炯權의 청말민국기 호남 汝城縣의 신식학교와 교육재정 (중국사연구 28, 2004)이 있다.
구상과 활동을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악록서원의 마지막 원장인 王先 謙의 문집을 통해 그의 서구문화와 사상에 대한 이해와 함께 하였던 葉德輝 등의 보수 세력이 추진하는 개혁의 의미를 분석하고, 변법파 가운데 호남성 개혁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譚嗣同과 唐才常의 문집에 서 학문적 배경과 그들이 활용하고자 하였던 전통에 근거한 구상과 활 동은 무엇이었는가를 분석하여 호남성 지식인의 지식체계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청말 교육개혁론과 호남성 서원의 개편
1. 청말 교육개혁 논의
청말 신식교육은 1861∼2년 京師同文館과 上海廣方言館 설립으로부 터 시작하였다. 이후 청일전쟁 이전까지 중국인에 의한 신식교육기관 설립이 계속되어 30여 년간 29개에 다하는 新學堂이 설립되었다.7) 이 러한 교육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다양한 주장이 있었는데, 이른바 早 期 改良派8)라 불리는 학자들에 의한 교육개혁의 거론은 제도의 개혁 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조기개량파 가운데 서원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였던 인물은 王韜(1828∼1897; 江蘇)와 鄭觀應(1842∼1922; 廣
7) 陳學恂 主編, 中國近代敎育大事記 (上海敎育出版社, 1981)에서 청일전쟁 (1894)이전 설립된 학당은 모두 29개였다. 桑兵은 晩淸學堂學生與社會變遷 (臺北: 稻禾出版社, 2007, p.2, p.35)에서 청일전쟁이전에 설립된 신학당이 25개 교라 하였다.
8) 李澤厚, 十九世紀改良派思想硏究 (中國近代思想史論, 人民出版社, 1979).
조기개량파란 1870년대부터 中日戰爭이후 戊戌維新시기까지 활동하였던 王韜, 政觀應, 馬建忠, 薛福成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중국 봉건주의의 綱常名敎의 불 변과 서방의 학술을 수용하여 부강한 청왕조 건설을 주장하였다. 민권, 평등과 변법 유신을 주장하였던 후기 개량파와 구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金慶惠는 최근 20년 중국의 初期 變法派 연구 (中國史硏究 45, 2006.12)에서 조기 개 량파를 초기 변법파라 칭하였다.
東)이다.
왕도는 1883년 홍콩에서 간행한
弢園文錄外編
9)(12권)에서 “관리를 등용하는 법이 마땅히 변해야 하고, 학교의 형식만 갖춘 글이 마땅히 변해야한다.”고 하며 실용적인 인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書 院을 개혁하여 문학 즉 經史, 掌故, 詞章의 학문과 藝學을 강학하고 輿 圖, 格致, 天算, 律例를 강학하는 學塾으로 고칠 것을 건의하였다. 정관 응도 1884년
盛世危言
考試篇에서 “중국에는 州縣省에서 京師에 이르 기까지 각 學宮, 書院이 있는데 그 제도가 확충되지 않으니 서양(유럽) 형식에 비추어 점차 변통해야 한다.”고 주장하여,10) 서원을 이용하여 점차적으로 전국적 학교교육이 가능하도록 대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강 조한 바 있다.1887년 總理衙門과 禮部에서는 江南道監察御史 陳琇塋의 주청에 근 거하여 算學에 밝은 자를 科甲에서 참작하여 20인 가운데 1인을 취하 도록 하였다.11) 물론 매회에 응시한 사람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사회 적 효과를 기대하기는 곤란하였다. 그러나 과거시험에서 산학에 밝은 자를 뽑고자 하였다는 것에서 교육 개혁에 대해 청말 관료들 사이에서 도 일정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제도에 반영하고자 하였다는 점을 발 견할 수 있다.
청일전쟁시기까지는 대체로 기술과 번역에 중심으로 둔 학당설립을 계획, 실천하였다. 청일전쟁 이전 신식교육기관의 출현은 양무운동 시 기를 중심으로 언어와 기술, 군사학당이 주를 이루었고, 설치 지역도 주로 上海와 江蘇, 廣東지역이 중심을 이루었다. 청일전쟁 이후 1895년
9) 왕도의 도원문록외편(12권)은 양무와 관련된 글이 많다. 특히 변법 상중하 3편과 변법자강 상중하 3편은 변법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관한 내용이 반영되 었다. 그는 取士, 練兵, 學校, 法律 4가지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0) 陳學恂 主編, 中國近代敎育大事記 (上海敎育出版社, 1981, p.45); 陳學恂, 中國近代敎育文選 (人民敎育出版社, 1983), pp.42-43; 戊戌變法 一, pp.135 -141.
11) 江南道監察御史陳琇塋奏折 (中國近代敎育大事記), pp.50-51; 洋務運動 二, pp.207-211; 總理衙門會議算學取士 (光緖政要 卷13), pp.18-19.
부터 1899년까지 5년 동안은 전국에 무려 150여개 학당이 설립되었는 데 특히 변법시기에만 106개가 설립되어 1/3이상을 차지하였다.12)
1895년 順天府府尹 胡燏棻이
變法自强疏
상주문에서 인재양성을 위한 학당설립을 주청하여 格致 위주의 학당 이외에도 武備학당과 여 학교를 설립하자고 주장하였다.13) 또한 1896년에 刑部侍郞 李端棻(6 월), 山西巡撫 胡聘之· 山西學政 錢駿祥(7월), 翰林院侍講學士 秦綬章(9 월) 등이 모두 서원의 장정을 개정하거나 신학당 설립을 널리 추진할 것을 上奏하였고 아울러 御使 宋伯魯(1896년) 등은 鄕試 가운데 算學 및 時務를 중심으로 관료를 선발하자고 상주하였다.14)이러한 상주에서 청일전쟁 이후 교육개혁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서 원을 학당으로 고치거나 新書院 또는 新學堂을 설립하거나 서원을 정 돈하는 세 가지 형태로 서원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단행되었다. 그 가 운데에서도 기존 서원의 장정을 개정하여 서양의 학과목을 학습할 수 있도록 과목을 첨설하는 방법이 최선책으로 선택되었다.15)
청조는 1896년 刑部侍郞 李端棻, 管理官書局大臣 孫家鼐가 경사대학 당의 창립을 건의한 이후, 1898년에 京師大學堂이 창설되어 예전의 국 자감, 한림원, 庶常館 등을 대체하였다. 이후 교학체제는 경사대학당이 전국학제의 중심이 되었고, 청조의 서원 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1898 년까지 서원이 학당으로 개편된 수는 14개소였다.16) 학당이라는 이름 으로 설립된 신식교육기관이 179개에 이를 때 서원이 학당으로 개편되 었던 수는 14개정도였다. 무술변법시기에도 과거제도 아래에서 청조 12) 桑兵, 晩淸學堂學生與社會變遷 (臺北: 稻禾出版社, 2007), p.37.
13) 順天府府尹胡燏棻條陳變法自强疏 (1895년 閏5月) (光緖政要 卷21, pp.22 -23.
14) 麥仲華, 皇朝經世文新編 卷5, 學校上 (近代中國史料叢刊 第78輯 771, 臺北:
文海出版社, 1972). 胡聘之는 請變通書院章程摺, 李端棻는 請推廣學校摺, 秦绶章는 奏请整顿各省书院 (光绪二十二年八月二十四日)을 上奏하였다.
15) 諭各省府廳州縣設立學校 (光緖政要 卷24, 近代中國史料叢刊 345, 臺北:
文海出版社, 1967); 楊齊福, 科擧制度與近代文化 (人民出版社, 2003), p.237.
16) 김유리, 위의 책, p.198. 〈표4〉각성 서원의 학당으로의 개편 상황표: 연도별 건수 참조.
교육제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 변화를 시도하였던 것이 다.
1898년 초 경제특과의 上諭17)로 서원 改章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 고, 1901년 新政을 단행하면서 1901년 9월 14일 서원을 학당으로 개편 하라는 上諭18)를 반포하자 각지 서원은 학당으로 개편을 시작하였다.
무술변법을 전후하여 시작한 서원의 학당 개편은 1903년 (奏定學堂章 程 ; 癸卯學制)에 학제를 반포한 이후 전국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2. 호남성의 교육개혁 논의와 서원개편
호남성의 府學이 9개소, 縣學이 63개소, 州學이 7개소, 廳學이 4개소 로 총 83 곳이고, 또한 호남성의 총 서원 수는 275개나 되었다.19) 府州 縣廳學은 총 83개인 것에 반해 서원이 3배가 넘는 총 275개가 설립되 었다는 사실에서 호남성 교육에서 서원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호남성에서 서원은 부주현학보다 수적인 우세를 나타내면 서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호남성에서는 변법 지식인의 주도 아래 교 육개혁이 시도되면서 신교육을 위한 서원 개혁론이 대두하였다. 개혁
17) 諭開經濟特科 (光緖政要 卷24, 近代中國史料叢刊 345, 臺北: 文海出版社, 1967).
18) 光緖朝東華錄 七, pp.4179-4213.
19) 湖南通志 卷62∼66, 學校志 卷68∼70 (1885년(光緖 11), 續修四庫全書 663 史部-地理類) 참조; 東亞同文會編纂發行, 支那省別全誌 湖南省, 第10卷, 1918, pp.3-9; 湖南省地方志編纂委員會編, 湖南省志․敎育 上 (湖南敎育出版 社, 1995), p.38; 曹運耕, 維新運動與兩湖敎育 (湖北敎育出版社, 2003), p.54 참 조, 단 1898년(光緖 24)의 조사에 의거하면 활동을 한 書院은 겨우 139개이고 義學의 상황은 자세하지 않다. 鄧洪波의 中國書院史, pp.405-409의 청대서원 통계표에 의하면 청대에 신건과 중건한 서원이 모두 4365개인데 그 가운데 350개 미만은 직예, 강소, 절강, 호남이고 350개 이상은 강서, 복건, 광동, 사천 이라고 하였다. 張義植, 중국 근대 교육사에 대한 최근의 연구 동향중국학 보제39집, p.364에서는 지방지에 근거하여 서원이 279, 의학이 293이라고 하였 다.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서원개혁 내용 의 추이를 살펴보자.
호남성 출신은 아니지만 호남순무로 부임한(1895∼1898년) 진보잠의 적극적 동조로 호남성 개혁운동은 더욱 활발히 추진될 수 있었다. 그 가 조정에서 유지가 내려오기 전인 1896년에 호남성을 중심으로 각종 개혁을 시작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인데, 특히 각 서원에서 童卷(童試)을 없애고 算科를 설치하는 방향으로 교육 개혁을 진행한 점20)은 주목된다. 진보잠은 호남성 학정인 강표와 더불어 州縣에 설립 된 서원에서 장정 개정을 추진하였다.21)
변법운동시기 서원의 장정 개정(이하 改章으로 약칭함)에 참여하였 던 악록서원과 변법 지식인 주도아래 건립한 시무학당을 중심으로 호 남성의 교육개혁은 시작되었다. 개혁의 맥락은 청말 조정의 개혁 방향 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장에 참여하였던 호남성 악록서원은 조정의 유지에 따라 교학과정을 經學, 史學, 掌故之學, 與地, 算學, 譯學의 여 섯 부분으로 나누고, 그 중 한 가지를 전공하거나 몇 가지를 아울러 익히도록 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22) 호남성 변법 지식인이 중심이 되 어 설립한 시무학당도 교과 과정을 편성할 때 經史와 함께 실용적 학 문을 익히도록 하였지만 동시에 전통서원의 교학방식인 강학, 토론 및 학술연구 등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무술정변 실패로 호남순무 兪廉三(1898년∼1902년)이 부임하여 1899년에 求實書院23)으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외형적 이름만 바뀌었을 20) 湘學新報, pp.29-37, pp.181-182; 刑部左侍郞 李端棻의 上奏가 光緖朝東華
錄, pp.3773-3776.
21) 諭摺彙存, 光緖 29年 10月 19日, 嶽麓書院은 1896년 말에 장정을 개정하고 이후 高等學堂으로 고쳤다. 원래 고등학당은 農工商礦實業學堂으로 고쳤다. 그 다음에 求忠書院을 忠裔學堂으로 고치고 이후에 忠裔中學堂으로 발전하였다.
22) 禮部議覆整頓各省書院摺 (1896년 9월) (朱有瓛, 위의 책, 1986), pp.157-158, 서원은 3가지 측면에서 정돈하도록 하였다. 첫째는 課程, 둘째는 교사, 셋째는 경비였다. 과정 중에 算學은 일찍부터 唐制 六科의 하나였으며(明算科), 淸代에 도 건륭 이후 國子監에서 算學이 부설되는 등 원래 中學 가운데에도 존재하고 있어 다른 학문분야보다 수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뿐 교학 내용에는 변화가 없었다. 청정부의 신정이 추진되면서 1901년 8월 유렴삼은 구실서원이 여전히 규제가 완전하지 않고 분야도 많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니 기부를 받아 경비를 첨설하여 구실서원을 省城 大學堂으로 개설하자고 상주하였다. 교과 과정의 첨설이외에는 여전히 전문과정과 교사가 부족함을 지적하여 1902년 성성대학당을 高等學堂 으로 개편하였다.24)
그런데 1903년 호남순무로 부임한 趙爾巽은 고등학당이 초라하게 설비된 것을 보고 고등교육 발전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악록서 원과의 통합을 모색하게 된다. 그는 악록서원은 校舍가 고요하고 넓으 나 학생 10명만이 종일 풍월을 감상하며 즐기고 있으니, 옛날 종이는 쌓여서 맴돌고 변화의 흔적은 하나도 없다고 하여 악록서원의 환경이 학습에 적합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교육혁신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03년 3월에 그는 악록서원 원장 왕선겸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악록서원을 학당으로 고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25) 그 과정에서 악록서원과 시무학당을 통합하여 호남고등학당으로 개편 하였다.
한편 新政시기(1903년) 서태후는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서원개혁을 실행하도록 張之洞에게 명하고, 학교장정을 상정하게 하고 일본의 교 육제도를 근거하여 12월에 奏定學堂章程을 반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청조는 전국 각지 서원을 학당으로 고치는 詔書(주정학당장정; 癸卯學 制)를 반포하였다.26) 즉 정부에 의해 전국적 서원이 학당으로 본격적 23) 湖南巡撫兪廉三湖南省設立求實書院 (皇朝續文獻通考 卷一百, 學校考七
書院, 光緖 25年 5月).
24) 湖南巡撫兪廉三奏湘中改設學堂及派人出洋遊學情形折 (皇朝经世文新编续集
卷五, 学校上, p.22).
25) 張朋園, 위의 책, pp.181-182, 歲出·敎育에 의거하면 嶽麓書院이 高等學堂이 된 후에 원래는 매년 100명이었던 것이 正預兩科 290명에 이르렀다. 원래 求實 書院의 학생 수도 120명이었는데 實業學堂이 된 후 170명에 이르렀다. 求忠學 堂도 90명에서 120명으로 증가하였다. 학생 수가 비교적 적은 孝廉學堂도 고친 후에 50명이 되었다. 이들 모두는 公費學堂으로 충분한 예산이 있었기에 가능 하였을 것이다.
으로 개편되었던 것은 1903년 癸卯學制 반포에 의해서이다.
호남성 서원 가운데 1902년에서 이듬해 1903년 사이에 학당으로 전 환한 서원은 모두 87개27)에 달한다. 山東, 江蘇, 浙江省 또한 학당으로 개편한 서원의 수가 많았다. 그러나 서원 개편이 두 번째로 많은 산동 성(64곳)을 제외하면 강소와 절강성이 각각 41개, 42개이므로 호남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처럼 호남성이 1902년에서 1903년 사이 학당으로 개편되는 수가 가장 많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무술변법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1902년 새로이 부임한 조이손 이 악록서원에서 개혁의 실마리를 찾고, 또 그곳을 개혁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호남성에서 서원의 위상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호남성에서 1902년에서 1903년 사이 87개 서원이 小學堂(鄕間, 官立, 民立 포함), 高等小學堂, 中學堂(官立 포함), 省城大學堂, 校士館 등으 로 개편되었다.28) 8세부터 15세까지 다니는 관학의 예비학교격인 蒙學
26) 竹中康雄, 支那淸代の敎育 (文敎の朝鮮 vol.11, 1928, 조선교육회), p.37.
變法運動시기 朝廷은 전국 書院을 學堂으로 고칠 것을 결정하였는데 政變의 실패로 인해 단행하지 못했다. 1901년(光緖 27) 慈禧가 개혁을 주도하여 서원 개혁을 실행하였다. 1903년(光緖 29) 張之洞에게 명하여 학교장정을 상정하게 하여 일본의 교육제도를 근거로 同年 12월에 奏定學堂章程을 반포하였다(金衡 鍾, 淸末 新政期의 硏究-江蘇省의 新政과 紳士層-,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pp.41-79). 강소성의 서원개혁은 완만하게 진행되었다. 여전히 과거제도 영향력 이 신학당의 발전 장애라고 보았다. 강소성의 교육개혁에 필요한 재정 충당을 위해 銅元餘利를 동원하였으나 호부의 제한 조치로 재원이 제한되었고 결국 교육개혁의 큰 장애로 작용하였다고 하였다.
27) 季嘯風과 김유리는 資興市의 樂城書院이 1903년 樂城高等小學堂으로 바뀌었 고, 漣源市의 豊樂書院이 1903년에 觀瀾小學으로 바뀌었다고 기록하였으나 府 州縣에 속하는 행정구역이 아니므로 본고는 제외하였다. 호남성의 서원에서 학 당으로 개편된 수를 파악한 결과 87개로 나타났는데 김유리와 2개소의 차이를 보였다(김유리, 위의 책, p.198, pp.347-355).
28) 김유리, 위의 책, pp.198-199, 〈표4〉에 의하면 1903년 이후 1904년∼신해혁 명까지 호남성 서원이 학당으로 개편된 총 수는 23(청말(光緖末)에 21곳을 제 외)곳이다. 전국 서원의 학당 개편은 1902년(194)∼1903년(183)에 일차 고조되
(私塾, 義學) 다음의 교육과정인 관학(府州縣學 그리고 國子監)에서 수 학하여야 했던 청대교육제도와 비교해 보자면, 개편된 서원의 학제는 보다 체계적이고 근대적인 교육체제로 진일보한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개편으로 서원은 관학의 보조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관학교육기관을 곧바로 대체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청대 州縣에 있는 서원은 小學堂으로, 府나 直隸州의 서원은 高等小 學堂 또는 中學堂으로 개편하였고, 長沙府에 있는 省城書院인 악록서 원, 성남서원 그리고 구실서원은 省城大學堂으로 개편하였다. 湘西地域 에 2곳, 洞庭湖盆地地域에 2곳 그리고 湘南地域에 2곳의 서원을 개편 하여 校士館을 배치하였던 것 같다. 악록서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원 은 공립학교로 개편되었다. 또 같은 시기에 明德學堂과 같은 사립학교 가 창설되기도 하였다.29)
이처럼 개편된 서원에서는 중국 학문과 서양 학문을 모두 학습시켰 다는 점에서 과거시험에만 매달리던 이전의 학습방법과는 그 내용면에 서 크게 차이를 보인다. 학당 교과 편성 자체가 중국의 학과 서양의 학을 두루 공부할 수 있는 체제로 經學, 史學, 國文, 輿地, 算學, 物理 化學, 博物生理, 英文, 體操를 학습하였다. 개편 초기에는 예과 2반을 모집하여 文理의 2科를 갖추도록 하였다.30)
이러한 학습방식으로의 개혁은 서원 전통의 교학방식 위에 근대 교 육을 혼합하는 체제 즉 中西兼用의 논리 안에서 개혁의 기본 방향을
었다가 1905년(240)∼1906년(210)에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서원의 학당 개편은 신해혁명 이후 민국시기에도 꾸준히 이어졌지만 그 숫자는 극히 적다. 1901년 은 44곳, 1907년은 68곳이 개편되었다.
29) 曾田三郞, 辛亥革命前の諸改革と湖南 (中國の近代化と地方政治, 勁草書 房, 1985), p.63; 宮原佳昭의 淸末湖南省長沙における民立學堂設立と新敎育界 の形成について-胡元倓と明德學堂中心に- (東洋史硏究 62-2, 2003.9). 초기 신정시기 교육개혁 추진에서 서원과 私塾 등이 신식학교에 건물 제공, 인적 자 원 제공 등의 토대로 사용된 것이 지적되었다. 호남최초의 사립학교인 明德學 堂은 1903년 龍璋과 黃忠浩가 日本留學 胡元倓을 초빙하여 창설하였는데 이 학당 역시 호남성의 개혁 신사들의 지원 아래 성립되었다.
30) 朱漢民, 嶽麓書院的歷史與傳統 (湖南大學出版社, 1996), p.60.
구상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중체서용을 기치로 내걸었던 양무 운동 시기는 온건적인 입장으로 타문화와의 조화 논리를 바탕으로 표 면적인 조화론을 추구하였다면 호남성의 개혁은 내면적인 조화에까지 이르는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근본적 개혁 이론은 유학의 재해석을 기초로 하여 서양의 이론을 접목하는 新學의 개념을 정립하여 중국의 교학방식에 서양의 학문을 조율하여 새로운 교학체제 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면 보다 구체적인 개혁의 구상과 방향에 대한 논쟁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Ⅲ. 호남성 지식인의 서원개혁 구상
1. 보수파의 실용인재양성
호남성은 청일전쟁 이후 가장 먼저 개혁을 실시하였던 지역으로 선 진적 면모를 보이기는 했으나, 반면에 보수적인 전통성향 또한 가장 강력한 곳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외국의 선교사들은 호남진출이 매 우 어려운 이른바 ‘鐵門의 城’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중국 내지의 주 요 성 중 가장 늦게 선교사가 주재할 수 있었던 사실31)에서도 보수적 이면서 전통적인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아래 개혁 의지가 날로 상승하여 호남성의 변법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반대편에 선 일부 지식인은 또 다른 국면을 형성하면서 양자가 대립의 촉각을 세우기 시작하였다.32) 변법파의 반대 흐름 안에 31) 崔熙在, 1890∼92년 湖南省에서의 反基督敎宣傳强化와 그 背景 (史學志
21, 檀國大學校史學會, 1987), p.437.
32) 閔斗基는 中國近代改革運動의 硏究 -康有爲中心의 1898年 改革運動- (一潮 閣, 1993, p.63)에서 신사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변법파와 수 구파의 목적이 같다 할지라도 그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청초 이후 신사계층 의 정치적 우위 요구(직접적 참정요구)는 청대 신사계층에서 볼 수 있는 일반 적 흐름으로 청말 호남성의 하급 신사층 경우에도 다른 상층신사와 대립상황
있는 호남성 지식인은 악록서원의 교학 중심에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인물들(이하 ‘보수파’라 칭함)33)로 그들 역시 개혁에 대한 의지 를 갖고 있었으므로 변법파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대립의 기점은 바로 시무학당에서 이루어진 교수 내용 가운데 민권, 평등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둘러싸고 변법을 주장하는 인사들과 갈등 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서원에서 수학하거나 강학활동에 참여하였던 보수파가 구 상하였던 서원개혁의 요지는 무엇인가? 구체적인 상황을 고찰하면서 보수파의 개혁구상과 지향점을 분석해 보자.
오랜 기간 악록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던 王先謙34)은
지금의 時文(과거)은 체계가 없이 문란하고 격식은 이미 자립할 수 없 다……우리처럼 士人된 자가 논의하여 공력을 쌓아 공부하는데 유용한 책을 많이 읽을 따름이다……호걸지사들은 章句에 얽매이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지만 용렬한 자들도 책을 묶어놓고 책 자체를 보지 않으므로 인 재는 줄어들게 된다. 또한 격식도 이미 체계가 무너져 많은 사람들은 격 하게 움직여 폐지를 말하고 있다.35)
라고 자신의 문집에 기록하여 팔고문 위주의 과거로 인한 인재 부 족을 지적하였다. 그는 과거만을 위한 교육이 아닌 인재 확충을 위한 유용한 학문을 많이 독서할 수 있도록 학생을 인도하기 위해 경서를 번역, 주해하는 저술 작업에 주력하였다. 1880년 악록서원에서 수학하
을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佐佐木保子의 논문 참조).
33) 악록서원 원장 왕선겸 주도 아래 악록서원 생도 일부는 변법파의 민주, 민권, 평등에 반대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서원 원장, 齋長 그리고 서원에 수학하였던 학생 일부가 포함되었다. 그들 가운데 수구적 입장에 서서 변법에 대해 반대를 표명하였던 세력을 본고는 이들을 ‘보수파’로 칭하고자 한 다.
34) 湖南人物志 上冊, pp.513-515; 楊布生, 嶽麓書院山長考 (華東師範大學出版 社, 1986), pp.229-231; 戊戌人物傳稿, pp.597-601; 葵園自訂年譜참조, 1894
∼1903년(光緖 20∼29)에 악록서원의 마지막 원장으로 7년을 재임하였던 왕선 겸은 이전에도 1890년(光緖 16) 思賢講舍에서 主講하였고 1892, 3년(光緖 18, 19) 城南書院 院長이었다.
35) 虛受堂文集, 科擧論 上, p.43; 科擧論下, pp.4-48.
였던 葉德輝도 1886년 호남으로 돌아와 경학에 몰두하면서 서적을 수 집하여 소장가로서 유명하였다. 그는 왕선겸이 책을 저술할 때 함께 연구 토론하였고, 경서 연구도 함께 하였다. 이렇듯 보수파 역시 과거 의 폐단을 지적하고 교육을 개혁하여 인재를 양성해야한다는 개혁론에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보수파의 대표인 왕선겸이 이러한 개혁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사 상적 배경을 師友관계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문집에서
郭嵩燾(筠仙)선생은 나(先謙)의 글을 볼 때마다 그것이 옳다고 여기면 칭찬을 반복하였고 또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그것이 옳지 않으 면 붓을 들어 대신 교정하고 용서하는 바가 없어 참으로 사람들과 더불 어 선을 행하려고 하는 분이었다.36)
라고 하였듯이 곽숭도는 자신이 설립한 思賢講舍37)(1890년)의 주강 자 리에 왕선겸을 초빙하였을 정도로 왕선겸의 학문에 대한 칭찬을 아끼 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선겸도 곽숭도의 학문하는 올바른 태 도에 대한 지적에서 그에 대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왕선겸의 저술 에 학문적 도움을 주었던 곽숭도의 경세학은 왕선겸에게 실용 학문에 대한 필요성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왕선겸 자신의 문집에서 증국번의 말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증국번의 경세적 측면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일찍 이 곽숭도의 후임으로 駐英공사로 부임하여 1878년 英·法大臣을 지냈 던 증국번의 아들 曾紀澤과의 교류로 서양의 학문에도 관심을 갖게 되 었다.38) 왕선겸은 곽숭도, 증기택 등의 경세적 성격을 가진 인물과 교 류에서 실용학문 교육을 위한 서원 개혁을 감안하였을 것이다.
36) 王先謙, 葵園四種 (嶽麓書社, 1986), p.298.
37) 1879년(光緖 5)에 郭嵩燾가 曾文正公祠 내에 설립하여 호남의 기풍을 열고자 하였다. 곽숭도는 1881년에 개관할 때 여러 학생들에게 船山의 사묘에서 제사 를 지내고 천문, 산학의 학문을 강학하고 여러 학생들이 익힐 수 있도록 격려 하였다.
38) 孫玉敏, 王先謙學術思想硏究 (黑龍江人民出版社, 2008), pp.37-53.
그들은 근대기업에도 자금을 투자하여 호남성의 黃自元, 陳文瑋39) 등과 함께 자금을 모으고 官款을 받아 1896년에 寶善成機器制造公司를 장사에 창설하는 등 경제적 근대화에도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 다.40) 이러한 일들을 추진하기 위해서 실무에 능한 인재 수요는 절실 하였을 것이다.
이들 보수파는 급진적 변화를 주장하였던 변법파를 공격하였지만, 실상 무술정변 이전에는 호남성의 개혁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이었다.
악록서원 원장 재임 시에 서원의 개혁만이 국가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고 여겼던 왕선겸은 호상학풍의 理學에서 실용적 학문을 제창하여 국 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은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이 아닌 經學의 학술적 측면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남개혁운동에 동참한 여러 인물이 수학하거나 강학에 참여하였던 악록서원은 서원 개혁이라는 변화 아래 장정을 개정하였다. 왕선겸은 1897년 악록서원 장정을 개정하여 교과 과정에 算學, 譯學 등의 새로 운 과목을 신설하여 이수하도록 하는41) 등 교육개혁에 솔선수범하였 다. 그는 학당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工藝를 서원에서도 강학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서원 개혁은 기존의 과거준비만을 위한 서원에 서 학술 위주의 서원으로 복귀하여 실무에 능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 였다. 또한 여러 학생들이
時務報
를 읽을 수 있도록 공급하여 시대 적 변화에 따른 학술 도모를 추진하고자 하였다.42)왕선겸과 엽덕휘 등의 보수파는 청조의 지배체제를 부정하는 정치 개혁으로까지 이끌어내고자 하였던 일부 급진적 개혁 주장과는 거리가
39) 진문위(1855∼1935; 長沙)는 호남에 錢庄을 개설하였고, 1905년에 호남상회를 설립하였으며 호남전성철로유한공사를 창립하는 등 호남을 대표하는 근대 실 업가이다. 이후 호남성 자의국 의원으로 선발된다.
40) 湖南省地方志編纂委员会 编, 湖南通鉴 二 (湖南人民出版社, 2008), p.1021.
41) 嶽麓書院院長王先謙月課改章手諭 (湘學新報 第9冊), 光緖 23년(1897.7.10).
42) 購時務報發給諸生公閱手諭 (陳谷嘉,鄧洪波 主編, 中國書院史資料下冊), pp.1993-1994; 朱漢民, 위의 책, 學堂論 上, pp.297-299; 時務報 第18號 참 조.
성명 출신지 변법운동시기의 직위(1898∼1899)) 王先謙 長沙 1865년 進士, 前江蘇學政, 國子監祭酒
城南, 嶽麓書院 院長, 時務學堂 發起人 葉德輝 湘潭 1885년 進士, 吏部主事
張祖同 長沙 1868년 進士, 候選郞中, 時務學堂 紳董 劉鳳苞 武陵 1865년 進士, 前雲南補用道, 城南書院 院長 孔憲敎 長沙 1886년 進士, 分省補用道, 孝廉書院 院長 汪 槩 善化 1880년 進士, 前國子監編修, 求忠書院 院長 蔡枚功 湘潭 1880년 進士, 工部郞中, 候選郞中
鄭祖煥 湘陰 1883년 進士, 吏部主事
黃自元 善化 1868년 進士, 前寧夏府知府, 咨議局議員
蘇 輿 平江 1897년 撥貢, 湘水敎經堂에서 수학, 王先謙의 문하생 嚴家鬯 善化 前華容縣 敎諭
賓鳳陽 長沙 嶽麓書院 齋長
있다 할지라도 경제적인 근대기업 창설과 함께 실무적 인재를 배출하 기 위한 교육개혁 등을 추진하려는 개혁적 의지를 갖고 있었던 호남성 의 지식인들이었다.
〈표 1〉호남성의 보수파43)
2. 변법지식인의 경세치용과 변법인재양성
瀏陽二傑44)로 칭해졌던 담사동과 당재상은 청말 호남성 개혁운동을 43) 湖南人物志 上冊(2), pp.513-517; pp.664-665; 戊戌人物傳稿 下, pp.597-602; 丁平一, 湖南文化傳統與湖南維新運動 (湖南人民出版社, 1998), pp.115-116; 湯志鈞, 戊戌變法人物傳稿 上 (中華書局, 1982), pp.602-608; 林 能士, 淸季湖南的新政運動 (國立臺灣大學院, 1972), pp.97-98; 大久保英子, 明淸時代書院の硏究 (東京, 國書刊行會, 1976), p.531; 有田和夫, 淸末意識構 造の硏究 (汲古書院, 1984), pp.89-96.
44) 唐才常, 唐烈士才常墓誌銘 (唐集, 中國近代人物文集叢書, 中華書局, 1982), p.6, 강유위가 “나의 문하생 가운데 瀏陽의 두 烈士, 담사동과 당재상은 모두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만인의 용맹을 가져 학문이 깊고 넓으며 문장이 웅대하 고 뛰어나며 생각이 심원하고 인자한 덕성이 질박하고 후덕하다. 천하를 구제
정치적으로까지 이끌어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譚嗣同(1865∼
1898; 瀏陽)45)은 학당과 학회를 통한 학술활동으로 청조의 救亡과 보 존을 먼저 생각하였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무술정변 실패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유학과 군주제를 정면에서 비 판한 변법시기 급진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46) 담사동과 함께 호남성 의 학당, 학회 활동에 참가하여 정체변화를 주장하였던 唐才常(1867∼
1900; 瀏陽)47) 또한 호남 변법운동의 주요 추진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치적인 변화를 통해 개혁을 하고자 하였고, 결국 이러한 정체 변화의 주장에서 보수파의 견해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 이들이 주장하는 교육의 개혁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을 담 보하고 있는 것일까? 그 실상을 살펴보기 위해 호남성 변법파의 대표 적 인물인 譚嗣同과 唐才常의 문집에서 학문적 배경과 그들이 활용하 고자 하였던 전통에 근거한 구상과 활동을 통해 변법 지식인의 교육개 혁론을 분석해 보자.
하는 것을 책임으로 여기고 중국 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기운이 매섭고 뜻이 날카롭다.”라고 평가하듯이 양자는 호남성 변법운동의 중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45) 淸史稿 卷464, 列傳 251, pp.12746-12747; 戊戌人物傳稿 上, p.89; 湖南 人物志 上冊(2), pp.584-588; 담사동은 字가 復生이고 號는 壯飛이고 또 다른 號로 華相衆生, 東海褰冥氏로 칭해졌다. 梁啓超는 譚嗣同을 “그 사상은 우리들 이 도달할 수 없고 그 언어는 우리들이 감히 말할 수 없다” 라고 평론하였다.
46) 錢穆은 中國近百年學術史 下冊 (臺北, 商務印書館, 1997)에서 “近世以來 학 술 사상사에서 綱常과 名敎에 대해 정면으로 배척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西順 藏의 原典中國近代思想史 -洋務運動と變法運動- 第2冊 (巖波書店, 1977, p.43)과 李昶의 論譚嗣同的人道主義思想 (南昌大學學報 25-3, 1994.9, p.110)에서도 담사동의 인도주의 사상은 정치 투쟁의 직접적 이론으로 봉건 군 주 전제제도에 대해 직접적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서구 역사상에 출현한 인도 주의 사조와는 구별되고, 18세기 구국 계몽운동의 인도주의 사상과도 차이가 있다. 담사동의 인도주의 사상은 “三綱五常”을 핵심적 봉건 종법 예교로 삼고 宋明理學을 대표적 봉건철학으로 삼은 청조봉건군주전제제도에 첨예한 대립적 논리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47) 淸史稿 卷464, 列傳 251, p.12747; 湖南人物志 上冊(2), pp.601-603, 당 재상은 字가 紱丞이고 또 다른 字는 伯平이다. 號가 佛塵이고, 別號는 洴澼子 이다.
1877년에 13세의 담사동과 11세의 당재상은 모두 구양중곡48)의 문 하생이었다.49) 담사동은 스스로 “어려서
周易
을 공부하였고, 이어서
三禮
(周禮, 儀禮, 禮記)에 이르렀으며
春秋
는 홀로 해석하여 말하 기를 좋아하지 않았다.”50)라고 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사서오경을 교과 과정에 따라 학습하여 경전 본래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였던 유 학자였다. 담사동과 당재상은 구양중곡에게 유학경전과 史籍뿐 만 아 니라 算學과 자연과학도 학습하였으나 이 시기에는 주로 경학의 章句 와 音訓을 분석하는데 주력하였다. 때문에 고향 유양에서 구양중곡과 사생관계를 맺었던 이 시기에 두 사람은 경전 전통의 학술사상을 위주 로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經義가 깊은 구양중곡의 지도를 통한 스 승과의 관계에서 인격 배양과 도덕 교육을 배웠으며 그러한 학습과 강 학을 통해 호상학적 학맥을 연계함과 동시에 호상학의 민족, 애국 사 상의 영향으로 개혁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중불전쟁 이후 담사동은 중국의 법도를 바로 세우고 중국의 전통을 중심으로 서양오랑캐를 회유·견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治言 을 저술 하였다. 그는 상황에 따라 방법을 달리 해야 하겠지만, 법도는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장구한 역사 속에서 지켜져야 할 대원칙임51)을 주 48) 湖南人物志 上冊(2), pp.528-529. 구양중곡(또는 歐陽忠鵠) 역시 호남성 瀏 陽人이다. 字는 節吾이고 號는 瓣姜(瓣疆)이다. 그는 왕부지의 학설과 품행을 推崇하여 왕부지의 호인 ‘姜齋’에서 본인의 호를 취하였다. 즉 瓣香姜齋의 의미 를 취하였다. 1874년 北京 譚繼洵 家館에 머물러 담사동 형제를 敎授하였고 이 후 1896년 순무 진보잠의 구휼 위탁으로 호남성으로 돌아와 담사동과 당재상 에게 왕부지의 문집을 통해 민족, 애국주의의 사상을 가르쳤고 이후 담사동의 산학관 설립에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49) 陳善偉, 唐才常年譜長編(이하 唐長編으로 약칭) 上冊 (香港: 中文大學出 版社, 1990), p.6.
50) 史例自敍 , 三十自紀 , 譚集, p.16, pp.55-57, 담사동은 四書訓義의 傳 統理學에 대해 학습하였다. 그는 21세(1886년)부터 30세까지 거의 10여 년 동 안 여섯 차례 과거시험에 모두 낙방하였다.
51) 治言 (1885년(光緖 11), 譚集, pp.231-236; 譚嗣同年譜, p.63; 최향순, 중국 근대 교육사상가의 철학세계 탐색-담사동(1865∼1898)을 중심으로- (한 국교육사학제20집, 1998), pp.347-348, p.352 재인용. 이후 직예, 섬서, 감숙, 호 남, 호북, 산서, 안휘, 강서, 강소 등 여러 성을 수십 년 왕래하며 風土를 관찰
장하였다. 1889년부터는 호상학파의 船山학술에 관심을 갖게 되어 왕 부지 철학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담사 동은 전통 경학 안에서 실용적 학문을 유용하게 쓰고자 하는 호상학의 왕부지 철학에 관심을 보였고, 호상학통의 왕부지 학설에 근거한
周 易內外傳
,
張子正蒙注
를 저술하였다. 경학의 전통학술사상을 중시하 여 호상학적 학술 전통을 계승하였던 호남성 지식인의 학맥은 왕부지 에서 경세학에 바탕을 둔 경세학자인 구양중곡으로 다시 담사동과 당 재상으로 연계되었다.경세치용적 저술에 힘쓰고 있는 그는 전통학문 안에서 실용적 학문 을 유용하게 쓰고자 하는 학문에 관심을 보이다가 29세가 되는 1893년 에 과거시험을 위해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 상해에서 영국인 선교사 傅 蘭雅(John Fryer)52)를 만나게 되었다. John Fryer와의 만남은 그의 인 생에 있어서 또 다른 변화를 갖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담사동은 과거준비보다는 강남제조국 번역관에서 나온 서양의 자연과학 서적과 광학회에서 번역한 외국 역사·지리·정치·기독교신학 서적 및 서양각국에 대한 時事와 견문기로서
西國近事汇編
,
環游地 球新錄
등의 책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정독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의 여러 서적을 섭렵하면서 이를 기초로 1893년 말에하고 名士와 친교를 맺었다(戊戌人物傳稿 上, p.90; 譚集, pp.56-57).
52) 吳淳邦, 科技啓蒙到小說啓蒙: 晩淸時期傅蘭雅的啓蒙活動 (中國小說論叢 18, 2003), p.61; Bennett, Adrian Arthur, John Fryer: the introduction of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into nineteenth-century China (East Asian Research Center, Harvard University, 1967). John Fryer(1839∼1928)는 영국 인으로서 1860년 런던 凱伯利교육전업학원(Highbury Training College)을 졸 업하였다. 1861년 중국에 와서 처음에는 홍콩의 聖保國서원 원장을 맡았다.
1863년에는 북경동문관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한 후, 1865년에 상해로 와 英華學 堂 교장을 맡았고 아울러 중국어 신문인 上海新報을 창간하였다. 1868년부터 는 강남제조국의 번역관으로 복무하였다. 그는 상해에 格致書院을 창립하였고 인쇄출판업에 종사하였으며, 전문 번역인으로서 중국인에게 서양문화와 과학을 전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896년에는 미국 시카고 대학 동방학언어 교수로 부임하여 중국을 떠났다. 그의 저작으로는 과학 잡지 格致汇編과 번역서 治心免病法이 있다.
石菊影廬筆識
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모두 2권으로 제1권 學篇 은 총 77조로 되어 있는데, 대체로 중국문헌을 고증적으로 정리 서술한 내용이다. 제2권 思篇 은 총 54조로 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지금 소위 地學者는 화석을 고찰하여 그 생물을 얻어 이전의 춥고 더 우며 건조하고 습한 다른 기후로서 태고의 산해 수륙의 변화 형태를 안 다……그 시대가 아득히 멀어 다 표현할 수 없고 그 기록을 모두 쓸 수 는 없다. 즉 그 지식으로 천지 생물의 차례를 연구하였으니 대개 먼저 소 라, 조개의 屬이고 魚屬이 그 다음이고 뱀, 거북이의 屬이 또한 그 다음 이고 鳥獸가 또 그 다음이고 사람이 그 최후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라고 하여 자연과학 특히 지질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는 그 동안 습득한 서양학문에 대한 상식53)과 중국 전통의 학술 사상을 서로 연 결시키는 시도를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그는 자연과학 서적과 신학관련 저 서를 모두 강남제조국 번역관에서 번역한 역서를 통해 학습하였기 때 문에 수준 높은 철학체계를 규명하는 저술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 다. 그렇지만 “嗣同은 어려서부터 算學을 배우고 항상 格致류의 역서 를 읽어 당시 과학지식을 응용할 수 있었다.”54)라고 양계초가 담사동 을 평가한 것을 보면 그의 산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와 관심의 정 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당재상도 1887∼1891년 악록서원, 상수교경당에서 수학하면서
“함께 공부하면서 뜻이 같은 선비들과 經史를 정밀하게 연구하고 경세 치용의 학을 서로 갈고 닦았다.”55)라고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경학과 史學을 기반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세치용적 학문을 지향하였다.
그는 1891년 악록서원과 교경서원의 과정을 마치고, 四川學政 瞿鴻禨 (1850∼1918; 長沙)의 초빙으로 成都로 가서 閱卷과 敎讀을 담당하다 가, 1893년 5월 고향 유양으로 돌아와 스승인 구양중곡 家塾에서 敎讀
53) 石菊影廬筆識 思篇 15, 譚集, p.131.
54) 梁啓超, 淸代學術槪論, p.92.
55) 陳善偉, 唐長編 上冊, p.10.
이 되어 호상학의 경세치용을 전하였다.
청일전쟁 패배에 큰 충격을 받은 이후 담사동과 당재상은 호상학적 경세치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 개혁이라는 사상적 전환을 갖 게 되었다.56)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급진적 개혁의 성향을 보이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894년 봄 당재상은 武昌 兩湖書院 에서 수학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 담사동도 아버지를 따라 武昌에 오 게 되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그들은 정치토론, 학술연구를 위한 공론장으로 학당, 학회를 설립하고 보간을 창간하여 나라를 구제하고 보존할 계획을 모색하였다.
특히 담사동의 활동에 관하여 양계초는
호남이 가장 먼저 창도한 일로 內河小輪船, 商辦礦務, 湘粤鐵路, 時務 學堂, 武備學堂, 保衛局, 南學會 등인데 이 모두는 君(譚嗣同)이 기획하고 이끈 일이다……남학회에서 君이 학장이 되어 연설하였다. 연설 때에는 매번 모이는 자가 수백에서 수천인이다. 君이 천하일을 비분강개하여 논 하면 듣는 자들 중에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다. 따라서 호남 전성의 풍기 를 여는데 君의 공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57)
라고 하여 담사동이 학당, 학회 설립 활동에서 호남성의 새로운 기풍 을 여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을 명시한 바 있다. 담사동은
최근 수십 년이래 중국에 일찍이 양무가 있었는가? 또 사대부로 양무 를 강론한 자가 있었는가? 만약 양무를 강론하였다면 금일의 일은 없었 을 것이다. 그대들이 말하는 양무는 다만 輪船일 뿐이고, 電線일 뿐이고, 火車일 뿐이고, 槍礮, 水雷 및 織布, 鍊鐵 여러 機器일 뿐이다. 그것이 法 56) 瀏陽興算記 , 譚集, p.174; 閔斗基, 위의 책, pp.51-52; 有田和夫, 淸末意識
構造の硏究 (汲古書院, 1984, pp.55-64)에서 담사동의 변혁의식이 첨예화되었 던 시기로 그 요인은 경세치용의 ‘實’과 정신적 ‘實’과를 결합하는 매개로 예상 했던 士人意識, 古今東西의 모든 학문에 대한 자유적인 입장을 학파에 구속시 키지 않는 성격 그리고 가정환경을 포함한 생활상의 여러 조건 등이 들고 있 다.
57) 譚嗣同傳 , 譚集, p.554; 康有爲, 附 唐烈士才常墓誌銘 , 唐集, p.266. 강 유위 역시 1897년에 그에 관하여 “천하를 임무로 삼고 중국을 구하는 것을 일 로 삼아 기운이 용맹하고 뜻이 첨예하다” 라고 말하였다.
度政令에 잘 완비된 것을 꿈에도 본적이 없으니 진실로 그대의 말이 이 와 같음이 당연하다. 이 모두는 양무의 지엽일 뿐 그 근본은 아니다. 그 지엽으로 근본의 효과를 물으니 어찌 극히 드물지 아니하겠는가? 하물며 지엽으로 강구할 수 있는 것은 없다.58)
라고 하여 민지를 열고 변법 인재 육성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 였다. 양무운동 시기에 기술적 측면의 윤선·전선·창포 따위는 양무의 지엽적인 양무에 불과하고 그 근본을 강구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이야말 로 양무의 근본이라 생각하였다. 그들이 변법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우 선 수립한 계획은 학당과 학회를 설립하여 개혁적 의지가 충만한 인재 들이 모여 토론하는 공론장을 형성하는 일이었다.
담사동은 인재 양성을 위해 ‘變學校’, ‘變科擧’하여 ‘變官制’하고 또한
‘變養民衛民敎民’의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던 듯이 첫째, 과거 제도가 民智를 깨우치는 일을 제한하여 인재 양성을 속박하였기 때문 에 변해야 한다. 둘째, 과거제도를 변하게 하기 위해서는 학교제도가 변해야 한다. 셋째, 과거제도와 학교제도가 변하기 위해서는 관료 제도 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근본적 개혁으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수 있게 되므로 인재 양성이야말 로 개혁의 출발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1896년 變通의 법칙은 算學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여 유양 산학관을 설립하여 실용 학문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여 개혁의 기반 을 형성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장사에 시무학당을 설립하여 변법이론 을 강학하여 변법운동의 동조자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설립한 신교육기관59)은 모두 精舍, 學堂, 學館 등의 명칭아래 운영되었기 때문
58) 報貝元徵 , 譚集, p.202, p.210, pp.228-230, 담사동은 변법 계획의 기본 노 선을 “籌變法之費(財源), 利變法之用(機器), 嚴變法之術(軍事), 求變法之才(敎 育)”에 두었다.
59) 청말 새로 설립된 신교육기관의 명칭을 李國鈞은 ‘實學書院’이라고 칭하였고, 夏俊霞는 ‘新建書院’으로 칭하였다. 陳谷嘉, 鄧洪波는 ‘新型書院’이라고 하였다.
국내에서 김유리는 서원의 형식에 학당을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서원이 학당으 로 변화하기 전 과도기 형태로 ‘新式書院’이라 하였다.
에 서원과는 다른 근대교육기관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점은 확실하 다. 다만 서원교학방식과 관리체제를 여전히 유지하였던 측면을 볼 때 여전히 서원의 기능과 성격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교학체제 안에서 개혁을 시행했다는 점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변법 지식인이 양성하고자 하는 변법 인재는 호상학에서 출발하여 유학의 재해석으로 실용학문을 강구함과 동시에 서양의 자연과학과 사 회과학 등 여러 학문을 통한 이론을 정립한 새로운 학문체계, 지식 체 계를 습득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변법인재양성을 위 해 호상학파의 경세치용 전통 아래 서구의 자연과학, 사회과학을 첨가 하여 새로운 학문체계를 정립하여 西學과 또 다른 의미를 가진 학문체 계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호남성 변법 지식인의 새로운 학문체계 안에 서양의 여러 이론은 물론 호상학의 理學 전통도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Ⅳ. 맺음말
유학전통의 德育과 서양의 전문적인 교육을 채택한 새로운 모습의 서원이야말로 호남성 지식인에게 새로운 지식체계를 정립하기 적합한 곳이었다. 변법운동시기 호남성에서 시행하고자 하였던 서원 개혁 구 상은 전통 서원의 강학 및 학술활동과 여러 경전 과목을 교과 과정에 기본적으로 편성하는 것이었다. 경전학습의 편성은 호남성의 지식인에 게 개혁이라는 과제 아래 자신의 뿌리인 호상학에서 출발점을 찾아 유 학의 재해석을 통한 개혁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호상학의 경세적 입장은 태평천국 진압 후 지방 자치적 성격이 강 한 호남성에서의 서원개혁과 학회, 보간 활동에 참여하였던 호남성의 지식인들에게 개혁 의지를 갖게 하는 주요 연결고리가 되었다. 즉 그 들 모두는 서양의 지식과 이론의 도입은 물론 전통 유학의 재해석 안
에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지식체계를 확립하고자 하 였다.
호남성 지식인이 주장하는 서원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인재양성이었 다. 다만 보수파는 전통서원의 교학방식에 실용학문을 습득하게 하여 중국의 위기를 타개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변법지식 인은 서양의 자연과학, 사회과학 이론과 전통 재해석을 통한 ‘실학’을 접목하여 새로운 지식체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변법지식인은 신식서원, 보간과 학회에서 변법 이론을 공론화하여 변법인재를 양성 하고자 하였다.
변법 이론을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거론되었던 민권, 평등의 이론은 호남성 서원의 호상학 기풍을 계승한 호남성 지식인들을 ‘변법’과 ‘보 수’라는 갈등 구조를 갖게 하였다. 무술변법 초창기 협조적 태도를 취 했던 왕선겸, 엽덕휘, 院長, 齋長 등이 중심된 보수파는 변법파의 민권 과 평등 등의 정체변화 주장에 대해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호상학파가 서원을 기반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듯이 서원이라 고 교육기관에서 수학하였던 호남성 지식인들은 국가의 위망을 구하기 위한 그들의 개혁 구상이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개혁에 초점을 두었던 점, 특히 서원개혁을 통해 시도하고자 하였던 점에 동일하였다. 그들 모두는 국가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유학의 忠義 사상을 근본으 로 하는 지식인이었다. 보수 세력이니 변법 세력이니 하는 구분 이전 에 개혁의 필요에 따라 개혁활동에 참여하였고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인 재 양성을 위한 교육개혁론을 제시하였다.
(中文提要)
變法運動時期湖南省知識分子的書院改革構想
李 暎 蘭
湖南省知識分子來說, 采用了儒學傳統德育與西洋專門教育的新式書院 是適合建立新知識體系之處. 戊戌變法時期, 湖南省所實行的書院改革構想 是以傳統書院的講學及學術活動及經典科目課程爲基礎而形成的. 經典學 習的編排對湖南省知識分子來說, 是爲了在改革這一課題下, 從自身的根源
——湖湘學中找到出發點, 並通過對儒學的再闡釋來摸索改革之路.
太平天國鎮壓後, 在地方自治呼聲高漲的湖南省, 湖湘學所持的“經世”思 想, 成爲參與書院改革和學會
、
報刊活動的湖南省知識分子們改革意志的 主要連接紐帶. 即他們不但引入西方知識與理論, 而且在對傳統儒學進行再 闡釋的情況下, 爲了解決現實問題而確立新知識體系.湖南省知識分子所主張的書院改革的最終目標是培養人才. 僅保守派主 張應以傳統書院的方式來習得實用學問, 培養出解決中國危機的人才. 變法 知識分子則通過將西方自然科學
、
社會科學理論與對傳統的再闡釋結合的“實學”來確立新知識體系. 尤其是變法知識分子以新式書院
、
報刊與學會 來使變法理論輿論化, 培養變法人才.在變法理論輿論化的過程中, 拿出來討論的民權
、
平等理論使繼承了湖 湘學作風的湖南省知識分子形成了“變法”與“保守”的葛藤結构. 戊戌變法初 期持合作態度的保守派中心人物王先謙、
葉德輝、
院長、
齋長等, 反對變 法派的民權、
平等等政體變化主張. 然而, 湖湘學派以書院爲基礎形成了學 脈, 而且在被稱爲“書院”的教育機構裏修學的湖南省的知識分子們, 爲了挽 救國家的危亡, 他們的改革構想都是把培養人才作爲教育改革的重心, 尤其 是在通過書院改革來實現這一點上是一致的. 儒學的忠義思想是他們的思想之本, 他們都是憂國憂民的知識分子. 在劃定出保守派與變法派以前, 他 們根據改革的必要性來參與改革活動, 還爲了人才培養這一最緊迫的問題 而提出了教育改革論.
주제어: 청말, 교육개혁론, 변법운동시기, 호남성, 서원개혁, 지식인, 호상학, 보 수파, 실용, 변법, 경세치용, 인재배양
關鍵詞: 淸末, 教育改革論, 變法運動時期, 湖南省, 書院改革, 知識分子, 湖湘學, 保守派, 實用, 變法, 經世致用, 人才培養
Keywords: The late Q'ing, Education reform discussion, Reform Movement, Hunan Sheng, The reform of sewon, The intellectuals, Huxiang school, The conservatives, Practical science, Revolution, Jīngshizhiyong, Pick out good men
(원고접수: 2011년 3월 2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4월 8일, 수정원고 접수:
4월 21일, 게재 확정: 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