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정보통신의 시발지
부산지역 중심으로 전신 전파 통신의 유입 경로
진용옥
_100811 6.부산구 설 해저전선 조관
7한국 최초의 전파 발사지점
-부산영도
부산입구 ( 암남동 육양지 ) 에 해저전선을 설치 하는 조약이라는 뜻으로 1883 년 한일간 맺었으며 일본 구주 - 대마도 - 부산구 암남동 - 일본 주민 거류지 ( 용두산 공 원 일대 ) 까지의 전신을 가설하는 조약을 말한다 .
외견상 한일간 조약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 (GNT) 의 대리 인으로 일본이 나선 것에 불과하다 ( 아래 조약문 참조 ), 왜냐면 일본은 기술과 자 본의 열세로 해저전신을 포설할 수가 없었고 다만 육양 지점과 운영 지점간의 육선 가설만 책임지고 나머지는 GNT 가 가설하고 소유하였다는 점에서 명확하다 .
일본은 20 년 조약으로 1912 년에야 소유권을 이양 받는다 . 이 전신선은 한반도 에서 첫 번째 가설된 전신으로 일본을 경유했지만 세계로 나가는 국제전신의 단초
였다 .
또한 한반도에서 날카롭게 대립하던 청국의 이해를 자극하여 2 년 후 1885
년 서 로 전신선 ( 인언 - 서울 - 의주 - 만주 봉황성 ) 가설이 급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釜山口 設 海底電線條款
처음에는 조영하 독판과 김윤식과 같은 보수파가 교섭을 벌리면서 협상이 지지부진 하다가 민영익 - 홍영식 개회파 콤비가 등장하자 마자 급진전되었다 .
이들은 이후 보빙사의 정사와 부사 , 갑신 정변의 주역과 반 주역으로 격돌하면서 개회기의 핵심 인물로 활동한다 .
홍영식은 우정의 선구자인 것은
분명하나 이 조약의 내용을 보면
전기통신의 전문가적 식견과
활동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정보통신 통합의 주역임을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 ..
조약의 성립과 홍영식의 역할
<. >
< 갑신정변 때 민영익은 17 군데의 자상으로 거의 빈사 지경에 이르렀으나 홍영식은 그를 어께에 둘러 메고 멜렌도르프의 집에 갔다가 그의 주선으로 알렌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완치된다 .
그러나 정변의 실패로 홍영식은 청군에 의하여 척살 되고 알렌은 홍영식의 자택을 하사 받아 제종원을 열 게 되다 . 오늘날 연세대의 전신이 된다 . 역사의 오묘함과 인연의 기묘함을 되 세기게 한다 .>
갑신정변과 홍영식
1884 년 부산 구설 해저 전선 ( 덴마크 대북전신 주식회사 가 설 )
1884 년 거문도와 상해간 ( 영국군 거문도 점령시 가설 )
1905 년 거문도 - 대련간 해저 전신 포설 ( 일본의 불법가설 )
1905-1945 년 대한 해협 해저 케이블 ( 식민 통치상의 필요 성 )
울릉 - 원산 해저 케이블 ( 대륙침략의 통과 기지 )
해저중계기 -- 일정길이마다 신호를 증폭
해저 분기기 - 독도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갈지는 지점 ( 진품을 수중전시 )
간략 해저 케이블 포설사
홍영식의 사저 - 나중 제중원
저서 모닝캄과 보빙사 일행
외무아문 직원들
(모닝캄에서 인용 )1883
년 우정사 협판으로 부산구설해저전선조
관에 참여한다
,당시 우정서
(郵程司
)는 교체
부 업무를 담당
부산구 설 해저전선 조관 ( 영문본 )
( 우취가 강해원 소장
–본협약 초안 )
보빙사의 큰절
(1883 년 뉴욕 )
아서 대통령 면담
(두번째가 홍영
식 협판
(부사
- vice minister)미국에서는 정사 민영익을 왕자
(princess민 황후의
6촌 조카
),부사 홍영식을 총리 아들
(영의정 홍순묵
)이하여 대대적 환영을 했 다
홍 영식은 방미 도중 전신기
8좌 구매
,우체국 순방 등을 통해 전신 과 우정을 개시할 것을 구상하고 고 종에게 복명하였다
.이듬해
1884년 우정총국을 개설
하고 총판에 취임하고 전신도 개설
하려 했으나 갑신정변으로 무산되
고 우정도 이후
10년간 중단되었
다
. . 해저케이블 육양지 - 암남동
육상 전신국 - 암남동 - 일본인 거류지 ? ( 초량왜관 )
암남동과 일본인 거류지 ?
“한국 최초의 통신용 전파는 부산에서 쏘아졌다 .” 우리나라 최초의 전파통신 시발점은 부산인 것 으로 확인됐다 . 경희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진용옥 교수는 우리나라의 전파발사는 지난 “ 1900
” “
년 주한일본공사관의 방침에 따라 무선전 허가신청을 받아 수행한 것이 최초 라면서 부산 영도가 ”
시발점이 될 것 이라고 밝혔다 . 이는 진 교수가 그동안 주장해 왔던 1904년 광제호 진수를 기점
‘ ’
으로 한 인천첫전파발사설 을 뒤집는 것으로 시점도 기존에 비해 4년 이른 것이다 .
한국 전파발사 100주년을 기념, 전파통신 시발점을 찾아 우리나라와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
“
료를 수집해 온 진 교수는 1900년 당시 일본은 절영도 또는 부산거류지 북방 등 연해 항구근처 19개소에 무선전을 허가했고 실제 제국신문이 이 때 무선전보 시험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고 설명” 했다 . 이를 바탕으로 1904년 6월 15일 전파통신설비가 탑재된 군함 광제호가 진수됐고 이듬해 5월 러·일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것도 이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
이후 일본은 경술국치일 (1910년 8월 29 일 )로부터 7일 지난 9월 5일에 인천 월미도에서 광 제호간 무선 공중업무를 개시해 왔고 지금까지 이날이 전파시발 시점으로 인정받아 왔었다 . 그러
“
나 진 교수는 이번 조사결과 전파시발시점이 광제호 진수시점인 1904년 6월 15일이나 일본 해군성이 한반도 연해 각항에서 무선 전보를 시험한 1900년 4월 17일로 앞당겨질 수 있을 것 ” 이라고 주장했다 .
전파 시발지의 문제
한국 전파발사 100주년을 기념, 전파통신 시발점을 찾아 우리나라와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
“
집해 온 진 교수는 1900년 당시 일본은 절영도 또는 부산거류지 북방 등 연해 항구근처 19개소에 무선
”
전을 허가했고 실제 제국신문이 이 때 무선전보 시험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고 설명했다 .
이를 바탕으로 1904년 6월 15일 전파통신설비가 탑재된 군함 광제호가 진수됐고 이듬해 5월 러·일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것도 이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 이후 일본은 경술국치일 (1910년 8월 2 9 일 )로부터 7일 지난 9월 5일에 인천 월미도에서 광제호간 무선 공중업무를 개시해 왔고 지금까지 이 날이 전파시발 시점으로 인정받아 왔었다 .
그러나 진 교수는 이번 조사결과 전파시발시점이 “ 광제호 진수시점인 1904년 6월 15일이나 일본 해군 성이 한반도 연해 각항에서 무선 전보를 시험한 1900년 4월 17일로 앞당겨질 수 있을 것 이라고 주장 ” 했다 .
진 교수는 “ITU가 공인한 최초 전파발사 연도가 1885년임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정보통신도 이에 못
” “ ‘
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며 따라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IT강국 이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라고” 강 조했다 . 이에 따라 진 교수는 부산 영도에 전파시발 기념비 를 ‘ ’ 건립하거나 전파산업단지와 해양전파통신 센터를 두어 영도를 한국 전파 시발지점으로 기념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 나아가 영도 봉 래산 정상에 우주등대를 건립해 우주에서 오는 미지의 전파신호를 받아들이는 SETI와 반대로 우주로 신 ‘
’
호 보내기 운동 을 벌이는 사업 등을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 부산=허의원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