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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고대의 부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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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고대의 부산

김은영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는 지질학적으로 갱신세에 속하며 빙하기라고도 불린다 구석기인이 활동하였

, .

던 당시 부산의 기후는 현재보다 훨씬 추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지역에서는 해운대구 . 중동 좌동 청사포 금정구 노포동 등‧ , ,

지에서 17,000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구석기인들은 바닷. 가의 낮은 구릉에 터를 잡고 수렵과 어 로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1992년 조사된 좌동 중동 구석기유적에서는 수많은 석‧ 기와 석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망치돌 ‧ 모루돌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정밀한 기술로 제작된 좀돌날과 몸돌은 후기 구 석기시대에 동북아시아 전역에 걸쳐 확 산되어 있었으며, 수렵을 중심으로 한 이동생활에 적합화된 석기이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의 시작은 충적세로의 전환기 마제석기와 토기의 사용 정착생활 농경과 목축

, , ,

의 출현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이 모든 요건이 동시에 일어난 , 곳은 거의 없다 신석기시대라는 용어를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러시아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토기의 출현을 구석기, , 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이행의 지표로 삼고 있다.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전지구적 규모에서 온난화가 시작되고 신석기시대가 되면 해수면이

급속하게 상승하게 된다 그 결과 부산지역은 낙엽활엽수가 우세하고 내만에는 다양한 해양. 생물이 서식하는 온난습윤한 환경으로 변모되어 인간의 거주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부산의 신석기시대는 대체로 기원전 천년 내지 년 무렵부터 기원전 년 무렵까

6 5,000 2,000

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부산의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로의 이행. ~ , ~ 기에 대해서는 현재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부산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약 여 곳이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낙동강 하구 연안이나 내

20 ,

만지역 가덕도와 영도 등의 섬에 주로 분포하지만 드물게 구릉이나 산의 정상부에서 발견, , 되기도 하였다 이 유적들에서는 조개무지 집자리 화덕자리 무덤 등의 흔적과 음식물을 . , , , 조리하고 저장하는 토기 땅을 파거나 나무를 자르고 사냥이나 어로에 사용하는 석기 골, ․ 각기와 같은 각종 생활용구 조개껍질 동물뼈 생선뼈 등 먹을거리 장신구 토우 등의 유, ․ ․ , , 물들이 발견된다 특히 조개무지는 조개껍질이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만들어 산성토양에서는 . 남겨지기 힘든 유기물 자료가 많이 출토되기 때문에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다각도로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채집 사냥 어로를 통해 식량을 획득하였다 주변에서 쉽게 채

, , .

그림 1 좀돌날몸돌과 좀돌날

(2)

집할 수 있었던 도토리는 신석기시대에 가장 많이 이용된 식물성 식량자원이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 는 갈돌과 갈판은 도토리와 같은 식물성 식량의 껍질을 벗 기거나 가루를 내는 데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냥. 의 대상은 사슴 멧돼지가 중심이었으며 활이나 창 등의 , , 도구를 이용하였다 어로활동을 통해서는 다랑어 상어 . ․ ․ 대구 숭어 참돔 방어 등의 어류와 강치 고래 돌고․ ․ ․ ․ ․ 래 등의 바다짐승을 포획하였고 굴 홍합 전복 백합 , ․ ․ ․ ․ 피조개 고둥 가리비 소라 등의 패류와 성게 해초류를 ․ ․ ․ , 채취하였다 어류와 바다짐승 포획에는 낚시바늘 작살 그. , , 물 등을 사용하였으며 조개류 채취에는 동물뼈로 만든 빗, 창 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과 가까운 울산 황. 성동유적에서 고래뼈에 박힌 작살 머리 부분이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고래 포획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부산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농경의 기술도 알고 있었다 부산 동삼동패총의 집자리에서

.

는 기원전 3,300년 무렵의 불탄 조와 기장이 발견되어 이 무렵부터 초기농경이 시작되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말기까지도 강가나 바닷가에서 생활하고 조개무지를 남. , 긴 것으로 보아 농경의 비중이 어로나 사냥 채집을 대체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

토기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식생활을 지지해준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토기의 사용으로

.

도토리와 같은 다양한 식물질 식료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식생활이 안정되었다 음식을 익혀 먹는 . 것은 살균과 영양흡수가 잘 되도록 도와주어 인류의 건강유지에도 도움이 되었으며 저장용기로서의 기능, 은 식량의 저장과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에, 토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 중의 하 나로 일컬어진다 신석기시대 토기는 밑이 납작하거. 나 둥근 바리가 기본적인 형태이며 시기와 지역에 ,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만들어지고 매우 다양한 문 양이 새겨지기 때문에 고고학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 가 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주생활을 알 수 있는 집자리는 동삼동패총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

년 무렵의 이 집자리는 둥근 형태 또는 모가 둥근 네모 형태의 움집으로 움 벽

3,500 3,000~ ,

의 안쪽을 따라 기둥을 박아서 벽채나 지붕을 지탱한 구조를 하고 있다 또 금곡동 율리에. 서는 바위그늘에서 화덕자리가 발견되어 움집 외에 동굴이나 바위그늘에서도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의생활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동삼동패총에서 출토

. ,

된 뼈바늘이나 돌송곳 수가리패총에서 나온 가락바퀴와 같은 유물을 통해 실을 만들고 구, 멍을 뚫어 가죽 옷 등을 만들어 입었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을 가지

고 있었다 흙으로 구워 만들거나 돌을 갈아 만든 귀고리 동물뼈로 만든 뒤꽂이 조개껍질 . , , 그림 3 덧무늬토기 영선동패총( )

그림 2 결합식 낚시바늘

(3)

동물뼈나 이빨 돌 옥 등으로 만든 목걸이 조개껍질로 만든 팔찌 등은 신석기시대 사,

․ ․ ․

람들이 즐겨 이용한 장신구들이다 장신구 중에는 매의 발톱 상어의 등뼈와 이빨 멧돼지의 . , , 어금니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 있는데 이러한 장신구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속의 미, 의식 뿐 아니라 신앙이나 주술과 같은 정신세계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신앙이나 의례행. 위에 관련된 유물은 장신구 외에도 동삼동패총에서 출토된 조개가면 곰모양 토우 등이 있, 다.

부산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부산 이외 지역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동삼동패총

.

조도패총 범방패총 다대포패총 수가리패총 가덕도 대항패총 장항패총 등에서는

․ ․ ․ ․ ․ ․

흑요석 또는 흑요석제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화산지대인 일본 큐슈지역에서 입수한 것으로 , 밝혀졌다 동삼동패총에서 다량 출토된 일본의 죠몽토기 또한 일본 큐슈지역과의 활발했던 . 교역을 잘 보여준다 한편 일본 큐슈의 서북지역에서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가 종종 . , 출토된다 창녕 비봉리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배가 출토되었고 부산의 동삼동패총에서는 . , 배모양토기가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에 이미 먼 바다를 항해하는 기술을 터득하여 일본 . , 큐슈지역과의 교류가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삼동패총에서는 제주도와의 교류를 보여. 주는 토기도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기원전 세기 무렵 청동기 간석기 민무늬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

13 , ‧ ‧

되었다 벼농사를 비롯한 본격적인 농경활동으로 잉여생산물이 증가하였고 노동력과 수확물. 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신분계층이 나타났다 마을의 규모도 이전 시기보다 커졌다 청동기. . 시대 마을은 주거시설 뿐 아니라 무덤과 경작지 의례나 저장을 위한 공간 등을 포함하는 , 곳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땅을 파서 집을 지었으며 창고나 망루 등과 같은 고상건물도 만. , 들었다 마을 주위에는 울타리와 도랑 같은 방어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여러 사람이 모일 수 . , 있는 광장도 마련하였다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은 온천동 연지동 노포동 반여동 회동동. , , , , , 미음동 가덕도 기장 방곡리 가동 고촌 등 도심 외곽이나 아직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 , ‧ ‧ 일부지역에 남아있다 여기서 출토된 토기 화살촉 간돌. ‧ ‧

검 반달돌칼 가락바퀴 등의 다양한 유물은 당시 부산‧ ‧ 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의 생활상을 알려준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농사짓기에 편리한 구릉지대의 골

짜기를 개간하여 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다 수렵 어로 . ‧ ‧ 채집생활도 함께 하였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 농경의 비중, 이 높아졌다 쌀 기장 수수 조 보리 등의 곡물과 . ‧ ‧ ‧ ‧ 이삭을 따는 데 이용된 반달돌칼 돌낫 등은 농경생활의 ‧ 흔적을 잘 보여준다 농경문화의 발전은 생산력의 증대뿐. 만 아니라 생활양식의 변화와 기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 . 결과 한층 다양한 종류의 도구도 만들어졌다 청동기시대. 는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난 간석기가 가장 발달하는 때이 기도 하며 간석기로 만든 목제 도구도 상당히 발달하였던 , 것으로 추정된다 또 거푸집에 구리물을 부어 비파형동검 . 투겁창 도끼 등의 청동제품을 만들었다 청동기는 희소.

‧ ‧

성이 높은 도구이기 때문에 신분을 상징하거나 의례를 치 그림 4 돌화살촉과 간돌검 미음동 분절유적

( )

(4)

르는 용도로 주로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무덤에는 고인돌을 비롯하여 돌널무덤 독무덤 ‧ ‧ 움무덤 주구묘 등이 있다 이 시대의 무덤에는 무덤 주인의 신분과 사회적 역할을 보여주‧ . 는 다양한 종류의 껴묻거리를 함께 묻었다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마을 전체의 노동력을 동. 원하였고 장례의식도 거행되었다 무덤은 , . 죽은 자를 묻는 장소 그 이상으로 공동체, 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례 장소였다 부산지. 역에서는 미음동에서 묘역을 가진 고인돌 이 다수 발굴조사되었으며 괴정동 , ‧ 두구 동 망미동 미음동 사직동 회동동 ‧ ‧ ‧ ‧ ‧ 기장 내동 등지에서는 돌널무덤이 확인되 었다 무덤에서는 붉은 간토기 . ‧ 민무늬토 기 간돌칼 간돌화살촉 옥 장신구 등‧ ‧ ‧ 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부산의 매장문화 를 알 수 있다.

삼한시대

기원전 세기 무렵 중국에서 들어온 철기문화는 한반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단단한 철제

3 , .

무기와 농기구의 발달로 사회분화가 촉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각 지역에서는 정치집단이 형성되었다 한반도 북부지역에서는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가 각각 성립 발전하였으며. ‧ ‧ ‧ , 남부지역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 (三韓)사회가 성립되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 따르면 마한은 개 변 진한은 각각 개의 소국으로 구성된다, 54 , ‧ 12 .

삼한시대 부산에는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변한 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이 있었던 것으로

12

추정된다 이 외에도 거칠산국 장산국 내산국 등의 나라 이름이 삼국사기 와 삼국. ‧ ‧ 『 』 『 유사 에 등장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 .

삼한시대에는 밀폐된 가마에서 구위 한층 단단해진 새로운 형태의 와질토기가 생산되고

철제품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무기 공구 농구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 ‧ ‧ 태의 철제품을 만들었다 철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 변 진한지역에서 생산된 철은 이 지역의 사회경제를 발전시킨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가‧ , 야문화를 발전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철제 농구의 사용은 농경기술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여러 가지 작물이 생산되면, 서 음식물의 종류를 비롯하여 취사도구와 식기도 발달하였다. 음식물의 조리에는 주로 연질토기를 사용하였다 동래패총 . ‧ 내성유적 등 당시의 생활유적에서는 쌀 ‧ 조 수수 기장 등의 곡류 각종 야채‧ ‧ , , 사슴 소 멧돼지 닭 개 오리 등 ‧ ‧ ‧ ‧ ‧ 육식 동물과 생선 조개 등 어패류가 출‧ 토되어 당시의 식생활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림 5 고인돌 상석 미음동 분절유적( )

그림 6 와질토기와 철제 무기 · 농구 온천동유적( )

(5)

또 삼한시대에는 평지에 방어시설을 두른 마을이 형성되었고 무덤의 형태도 크게 바뀌었

다 삼한시대의 대표적인 널무덤은 땅을 파고 통나무나 판재로 된 널을 안치하는 형태이다. . 무덤에는 칼 창 끌 등 청동이나 철로 만든 무기류와 공구류 청동거울 옥 칠기 등을 ‧ ‧ ‧ ‧ ‧ 함께 넣었다 토기는 쇠뿔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와 주머니모양 항아리 밑이 둥근 항. , 아리 등이 유행하였다 부산지역에는 구서동 거제동 노포동 내성 온천동 복천동 . ‧ ‧ ‧ ‧ ‧ ‧ 기장 방곡리 등지에서 널무덤이 조사되었다. 2세기 후반대로 접어들면서 동래구 복천동과 금정구 노포동 구서동 등지에는 무덤의 규모가 더욱 커진 덧널무덤이 만들어졌다 덧널무덤‧ . 은 판자나 각재 혹은 통나무로 널을 보호하는 시설인 덧널을 짜고 그 안에 널을 매장하는 형태이다 무덤의 규모가 커지면서 껴묻거리의 양과 종류도 증가하였다 무덤의 위치도 전. . 망이 좋은 구릉에 만들어져 신분이 높은 사람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껴묻거리로는 와질. 토기 무기 공구 농구 등이 출토된다. ‧ ‧ ‧

한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삼한시대 사람들은 옥을 귀하게 여겼으며 옷에 매달거 , 『 』

나 목과 귀에 달라 치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부산지역의 삼한시대 무덤에서는 옥 수정 . ‧ ‧ 유래 등으로 만든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또 동래구 내성유적에서는 일본 야요이토기가 발견. 되어 당시 부산지역과 일본 큐슈지역 등과의 교류활동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철기문화의 보급과 농업생산력의 증대로 성장한 여러 소국은 주변 지역을 통폐합하면서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장악한 왕권이 강화되었. 다 압록강유역에는 고구려 한강유역에는 백제 경주지역에는 신라가 각기 비약적으로 성장. , , 하였다 낙동강유역에서는 김해의 구야국 함안의 안야국 고령의 반로국 고성의 고자국 등 . , , , 변한의 여러나라가 각각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로 성장하였다 가야는 강과 ‧ ‧ ‧ . 바다를 통한 수로의 확보와 풍부한 철자원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또 대륙. 의 문화를 일본에 전달하여 일본의 고대사회 성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세기 . 6 이후 신라가 강성해져 주변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가야는 신라로 통합되었다, .

삼국시대 부산지역에 위치한 나라에 대해서는 문헌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복천동과

.

연산동에서 큰 고분군이 발견되었고 출토되는 유물의 양과 질로 볼 때 동래 일대에는 삼한 시대의 독로국이 발전한 나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지역에서는 세기 후반 이후 . 3 복천동에 큰 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유물은 대체로 김해에서 출토되는 . 것과 비슷한데 이는 당시 부산지역이 정치 경제적으로 금관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 ‧

음을 보여준다. 5세기 중반 이후 금관가야의 세력이 점차 약해지고 고구려의 후원을 받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부 산지역의 사회 문화 전반에 변화가 일어났다 껴묻거리의 ‧ . 형태와 종류는 물론 무덤의 형태도 신라문화의 영향을 받 아 서서히 변화하였다. 6세기 중반 이후 부산은 정치 문화‧ 적으로 신라에 통합되었고, 757년 동래군이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토기나 철기 등 많은 양의 재화를 무덤에

함께 묻어서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과시하였으며, 순장 풍습도 있었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고대사회에서 지. 배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의 하나인 금동관이 호 1 ‧ 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또 갑옷과 투구 말머리가리개

11 . ,

그림 7 금동관 복천동고분군( )

(6)

와 말 갑옷 활 화살 칼 검 창 도끼 낫 등의 철제 무기 농공구류와 많은 양의 ‧ ‧ ‧ ‧ ‧ ‧ ‧ , 덩이쇠가 출토되어 철제 무기를 사용한 치열한 전쟁과 철을 독점한 지배자의 권위를 보여, 준다 덩이쇠는 네모난 철판으로 실질적인 제품을 만들기 전에 차 가공한 것이다 큰 무덤. 1 . 의 바닥에 1 3∼ 열씩 깔린 채 발견되어 철의 소유가 상징하는 경제적 부를 가늠해 볼 수 있 다 이 외에도 가지방울 원통형 청동기 등 청동기와 미늘쇠 굽은 손칼 등의 주술적인 도. ‧ ‧ 구 또는 상징적인 물건과 함께 유리옥으로 만든 목걸이 등 다량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세기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도질토기는 굴가마에서 이상의 높은 온도로 구워

3 1,000℃

졌으며 흡수성이 거의 없는 단단하고 실용적인 토기이다, . 5세기 전반까지 부산지역에서는 굽다리접시 화로모양 그릇받침 격자타날문 항아리 등 김해지역과 비슷한 토기가 사용되‧ ‧ 었다 하지만 세기 중반 이후 신라문화가 확산되면서 다리달린 항아리 상하 엇갈린 투창 . 5 ‧

굽다리접시 등 신라토기가 널리 이용되었 다 신라의 영향은 토기뿐만 아니라 장례.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이것은 신, 라의 영역 확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와 같은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세기 5 말에서 세기 초에 만들어진 연산동고분6 군이다 특히 연산동고분군은 부산지역의 . 유일한 고총고분으로, 1,500여 년 이상의 긴 시간을 견뎌온 하나의 건축물로서 축 조 당시의 선진 토목기술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부산지역의 무덤에서는 함안 창녕 일본 등에서 유행한 형태의 토기가 출토되었

, ‧ ‧

다 특히 하지키라 불리는 적갈색 연질토기가 많이 발견되어 당시 일본의 중심지였던 오사. 카 나라지역과의 교류관계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주거생활과 마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생활유적은 가동 고촌 청강리 대라

‧ ‧ ‧

리 등 기장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마을유적에서는 집자리와 창고 울타리 시설 뿐만 아니라 . , 토기 가마 수렵을 위한 함정시설 논 도로 무덤 등이 발, , , ,

견되었다 삼국시대의 집은 벽을 다라 기둥을 세우고 그 . 위에 도리와 지붕을 얹었다 또 바닥과 벽은 점토에 볏짚 . 혹은 풀을 섞어 만들고 벽면에 열을 가하여 벽체를 튼튼, 하게 보완하였다 집 내부에는 취사는 물론 난방의 기능을 . 한층 강화한 구들을 설치하였고 음식을 조리하기 편리하, 게 부뚜막을 만들었다 마을을 관통하는 저습지에서는 복. 숭아 오이 박 등 씨앗과 나무신발 옻칠그릇 나무절‧ ‧ ‧ ‧ 구 빨래방망이 책상 표주박 등 각종 생활도구가 발견‧ ‧ ‧ 되었다.

세기 전반 이후가 되면 부산의 중심고분군인 연산동고

6 ,

분군에 큰 무덤이 더 이상 축조되지 않는 등 부산지역에 는 대형묘가 사라지고 부산은 신라의 변경으로 되어간다, .

그림 9 집모양 토기 정관 가동유적

( )

그림 8 연산동고분군

(7)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

최정혜 부산박물관 유물관리팀장 ( )

임진왜란 .

세기 후반 동북아시아는 농촌시장과 화폐경제의 발달 국제교역의 증대와 전쟁으로 인

16 ,

한 경제적 변혁기를 맞이하면서 정치적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명. 나라 황제와 주변국의 왕을 군신관계로 맺는 책봉체제(冊封體制)가 기본이었으며 명나라에 , 대한 조공(朝貢)과 회사(回賜)가 합법적인 무역이었다 그러나 책봉 . - 조공체제로 운영되던 중국 중심의 질서는 명나라 후기에 이르러 군사적 경제적 힘이 크게 약화되면서 힘의 공백, 상태가 조성되었다.

조선은 건국 후 년 동안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부분적인 외침을 당한 것 이외에는

200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주변의 명과 일본과의 관계는 사대교린의 외교와 조공무. 역 왜구의 문제로 인식될 뿐 나라와 나라간의 국제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개념조차 미미, , 한 상황이었다 또한 붕당정치는 생산적인 국정 정쟁이 아니라 권력의 획득과 파당의 이해. 를 위한 세력 경쟁으로 치달아 국방이나 민생에는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일본의 내부상황과

(豊臣秀吉)

새로운 영토 개척에의 욕구 그리고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만들려는 망상으로 향도, 정명(嚮導征明 ) 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은 년 선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시작되어 년 선조 까지

1592 ( 2) 1598 ( 31) 7

년 동안 한반도에서 있었던 전쟁으로 왜군의 차침입기, 1 (1592-1596), 강화회담기(1593-1596), 차침입기 정유재란 으로 나누어진다 년 월 일에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2 (1597-1598: ) . 1592 4 14

왜군은 월 일 한성 서울 을 점령하고 평양과 함경도까지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에 5 3 ( ) . 의한 해전에서의 승리 의병의 봉기 명나라 군사 참전 등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왜군은 후, , , 퇴하여 남해안 지역에 왜성을 쌓고 분산 배치되었다.

년 월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며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1593 6 ,

왜와 강화교섭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욕을 버리지 않음으로. 써 강화교섭은 결렬되었다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 1597년 월 왜군은 재침하였다 그러나 이7 . 순신의 재기용과 조선관군의 정비 의병의 활약 등으로 수세에 몰리던 왜군이 노량진해전에, 서 크게 패하자 년간의 전쟁이 끝났다7 .

부산은 왜군의 최초 침입지였으며 또한 강화회담 사절의 통행로 왜군의 잔류지 정유재

, ,

란의 침입로 등으로 전쟁 기간 동안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

부산지역의 주요 전투

1)

부산진성전투 (1)

부산진성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다. 1592년 월 일 고니시 유기나가4 13 (小西행장 가 이) 끈 조선 침략 선봉군인 제 군 1 18,700여명의 대군은 700여척의 병선으로 부산포를 침략하였 다 부산진성은 경상도 해안에 설치된 수군첨제사의 개의 진영 가운데 제 의 해상관문 . 4 1 은 비교적 견고하였다.

(8)

당시 부산진성의 민호로 호로 군민을 합하여도 적의 대군

300

에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실제 병력은 , 1,000명 정도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1553~1592)을 비롯한 부산진성의 주민들은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전투는 일 시경에 시작되어 오전 중에 끝. 14 6 이 났다.

군사 수와 무기 면에서 적에 비해 현저히 열세였음에도 불구

하고 군( )· ( )· ( )軍 관官 민民이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일본은 부산진성을 점령함으, 로써 조선군의 해안 방어세력을 제거하고 조선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동래읍성전투 (2)

년 월 일 오전 부산진성을 점령한 왜군은 동래 1592 4 14

로 진군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 은 경상좌병영과 인근 군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싸울 계획 이었으나 경상좌병사 이각, (李珏)이 왜군의 막강함을 보 고 도망가고 경상좌수영 수사 박홍, (朴泓,1534~1593) 또한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 다.

왜군은 부산진성 전투에서 조선민의 굳센 항전을 경험

하였기 때문에 대군을 동원하여 일시에 동래성을 포위·

공략하였다 패목에 싸울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 고 써서 성 밖에 세웠으나 송, 상현은 목판에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워서 죽기 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써서 싸울 의사를 표 명하였다.

조선측에서는 군 관 민 이 함께 싸움에 참 ( )· ( )· ( )軍 官 民

가하였으나 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다대포성전투

(3)

년 월 일 부산진성을 함락한 후 왜군의 다수 병력은 동래로 행하고 나머지 소수 1592 4 14

병력은 다대포성을 포위하였다 다대포성민들이 합심하여 차 침입은 물리쳤으나 일 왜의 . 1 15 대군이 다시 공격하여 성이 함락되고 다대첨사 윤흥신, (尹興信,?~1592)도 순절하였다.

이로써 왜군은 경상도 해안 지역의 요충지인 부산진과 다대포진을 점령하여 조선군의 해

안 방어세력을 제거하고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부산포해전 (4)

년 월 일 왜군의 침략으로 경상도의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좌수사 박홍 1592 4 13

은 도주하고 경상우수사 원균, (元均,1540~1597)은 노량으로 물러나 있었다 경상도로부터 구. 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출병을 결정하고 여러 차례의 전투, 를 치르면서 가덕도를 거쳐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그림 10 부산진순절도

< >

그림 11 동래부순절도 < >

(9)

왜군은 당시 부산진성 동쪽 산의 언덕에 삼군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적함의 수

,

는 무려 470여척이나 되었다 그러나 월 일 하루 종일 계속된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 9 1 났으며 이순신의 전라수군은 다음날 여수 본영으로 돌아왔다, .

부산포해전은 조선함대의 수가 적군의 분의 에 불과하였을 뿐 아니라 오랜 항해로 병사

3 1

들이 지쳐있었다 또한 왜군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에 아주 불리한 .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투로 임진왜란 해전 중에서 거둔 승첩의 하나이다 부, . 산포해전은 전술적으로 적군을 사살하는 것보다 적선을 부수는데 주력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한 대첩이었다 이 전투이후 왜의 수군 대부분이 와해되고 말았다. .

부산지역의 왜성 2)

왜성은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시기에 쌓은 일본식 성을 말한다 왜는 조선에 교두보를 마

.

련하고 항구적인 지배의 거점으로 동남해안 일대에 일본식 성을 쌓았다 왜성은 군사적인 . 목적 뿐 아니라 문화적 약탈과 인적 약탈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년의 기간 동안 . 7 전투를 치렀던 것보다 조선인과 조선의 문화가 일본에 의해 약탈된 기간이 훨씬 길었으며 이는 왜성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왜성의 축조는 본국에서 성곽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조선 백성을 사역하여 단기간에 성곽

을 쌓을 수 있었다 왜성의 외형상 특징은 성벽이 경사져 있으며 아래쪽에서 정상부로 향하. 면서 성벽이 몇 겹씩 중첩되게 쌓고 정상부에는 지휘소로 사용할 천수각(天守閣)을 마련하 였다.

남해안의 왜성은 가덕 웅천 영등성 서생포 기장 자성대 안골포 거제도 등지에 위치하

, , , , , , ,

며 부산에는 부산진지성 임랑포성 구포왜성 기장왜성 등이 남아 있다, , , , , .

부산진지성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호 (1) (釜山鎭支城, 7 )

동구 범일동에 있는 부산진지성은 흔히 자성대 라고 부르는 곳으로 원래는 부산

(子城臺) ,

성의 한 부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부산성을 헐고 일본식으로 다시 . 쌓은 석성(石城)이다 소서성 환산성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왜군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다 왜. · , . 군이 물러간 뒤에는 명나라 장군 만세덕이 머물러 만공대라고도 했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 후에는 성을 다시 고쳐 좌도수군첨절제사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이며 성문은 동 1.5 10m∼ , · 서 남 북으로 개가 남아 있다 성 안에는 · · 4 . 객사 동헌 등 많은 관공서 건물과 창고 건물, 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산진지성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단의 일본식 성벽과 명나라 장군 천만리

2 (千

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 기념비와 최영 萬里)

장군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구포왜성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호 (2) (龜浦倭城, 6 )

북구 덕천동에 위치하는 구포왜성은 김해 죽도왜성의 지성으로 년 일본장수 고바야가

1593

그림 12 부산진지성 < >

(10)

와가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취하려는 목 적으로 쌓은 왜성으로 낙동강변을 끼고 그 아, 래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시 일. 본군 나베시마의 군사들이 주둔하면서 방어했 는데 부산지역에 있는 개의 왜성 가운데 흔11 적이 많이 남아 있는 편에 속하며 성 상단부, 의 석축지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왜성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성벽은 나사모양으로 .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좁히면서 올 려 쌓았다.

기장왜성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호 (3) (機長倭城, 48 )

기장의 죽성리 마을 해안 가까이에 있는

구릉을 이용하여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 , 구로다(黑田長政)가 조선 명나라 연합군의 ·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기 위 해 쌓은 성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약 .

성벽높이는 약 이다 960m, 4m .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일본에서는

기장성 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양산의 서. 생포성과 울산의 학성 부산성을 연결하는 ·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성곽이 남 아 있지만 주위는 밭과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통신사 .

조선 초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사절들은 그 명칭이 다양하다 처음에는 회례사

. (回禮使)

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428 (년 세종 10)부터는 통신사(通信使)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임, 진왜란 이후에는 왜란의 종전을 위한 강화(講和), 포로쇄환(捕虜刷還)이 목적이어서 회답겸쇄 환사(回答兼刷還使)이었다 이후 대일외교체제가 정비되면서 막부장군의 습직. (襲職) 축하 대, 마번의 견제와 일본 국정 탐색을 목적으로 통신사와 문위행(問慰行)을 파견하였다.

통신사는 정사 부사 종사관 의 삼사 를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正使)· (副使)· (從事官) (三使) , 통신사행에는 통역을 맡은 일본어 역관(譯官)·외교문서의 초안을 담당하는 제술관(製述官) 도 파견되었다 그리고 의학에 정통한 의사. · 글씨에 능한 사자관(寫字官)· 서기· 화원 등 학술문화 교류에 대비하여 각 분야의 제 인자가 파견되었으며 승마술에 능한 마상재1 , (馬上

등도 파견되어 그 규모가 명 정도에 달하였다

) 400~500 .

통신사의 출발지 부산 1)

통신사 일행의 최종 출발지였던 부산은 일행의 접대와 특산물 및 예단의 수집 해신제

, (海

준비 등으로 통신사 파견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 .

神際

처음에는 충주 안동 경주 동래의 개소에서 일행을 위한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으나 후

, , , 4

그림 13 구포왜성 < >

그림 14 기장왜성 < >

(11)

기에 와서는 흉년이나 민생안정 등의 이유로 동래에서만 접대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통신. 사 파견이 있을 때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각기 마련한 특산물과 예단은 모두 , , , 동래부로 운송되어 일행에게 전해졌다 바람 등의 날씨 변화로 선박 운행에 맞지 않을 시에. 는 길게는 수개월 부산에 머물러야 했는데 이 기간에 통신사 일행들은 동래부사 등 인근지, 역의 지방관 유학자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주변의 명소를 찾아다니면서 시를 남기기도 하였, 다.

통신사 일행은 보통 명 정도 되었는데 이 가운데 하급 역관이나 선장 군인

400~500 , · ·

격군 등은 부산· 좌수영· 동래· 초량 등 인근지역의 사람으로 충당하였다.

부산 영가대 는 통신사 일행이 무사항해를 위해 해신제를 지냈던 곳이며 해신제의

(永嘉臺) ,

제물 준비는 동래부에서 모두 담당하였고 축문낭독과 행사는 제술관이 관장하였다.

국서의 전달 및 통신사의 환대 2)

통신사가 에도 지금의 도쿄 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일본 관료와 함께 국서 를

(江戶, ) (國書)

전달하는 의식과 일정을 논의하였다 국서를 전달하는 날 행렬 제일 앞에는 화려한 깃발을 . , 든 기수들이 행진하였으며 악대가 뒤를 따랐다 무관들이 나아가고 그 뒤를 국서 가마가 따. 랐다 국서는 은장식과 붉은 옻칠을 하고 금색으로 용을 그린 화려한 국서함에 보관하였으. 며 국서 뒤를 정장한 정사 등 통신사 일행이 따랐다, .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이 보내는 국서를 전달하고 조선에서 가져온 예단을 전달하였다

.

예단은 말과 말안장 호랑이 가죽 종이 인삼 비단 모시 삼베 꿀 등이었다 국서와 예단, , , , , , , . 을 전달하는 의식이 끝나면 통신사를 환대하는 연회가 베풀어 졌다.

통신사와 문화교류 3)

그림 15 통신사 노정도 < >

(12)

통신사의 파견은 조선과 일본 양국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통신사 일행이 머물던

.

객사에는 유학자· 문인 승려 등과 시문의 창화필담· (唱和筆談)·서화의 휘호 등을 통한 문 화 및 학술교류가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에서는 시를 잘 짓는 것이 문인의 교양으로 중시되. 면서 통신사의 문학교류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또한 마상재의 인가 높아 서화 공예품 . · 등에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통신사 악대의 연주는 일본에 조선 음악이 소개되, 는 계기가 되었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수입품에는 선물에 대한 답례로 받은 금병풍 서랍장 거울

· · ·

약재 등과 지도 각종 서적 등이 있었다· . 1764년 통신사 조엄(趙曮,1719~1777)은 일본의 농 업 방직기술의 발전에 관심을 두고 이를 수용하고자 하였으며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 , 와 백성들의 굶주림 해소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위행 4)

문위행은 외교 실무자가 중심이 되어 대마도에 파견된 사절로 조선후기 대일 외교사절

,

가운데 횟수가 가장 많았다 문위행은 당상역관 당하역관 군관 선장 도훈도 소통사 소. , , , , , , 동 악대 격군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원은 명, , . 50 ~150명이다.

통신사가 년마다 한번 씩 파견되었던 것에 비해 문위행은 평균 년을 주기로 파견

20~30 4~5

되었으며 두 나라의 실질적인 현안문제를 해결하였다 파견 목적에는 대마도 도주와 막부, . 에 대한 문위 통신사 파견에 대한 협의 일본 정세 정탐 외교상의 분쟁 해결 등 여러 가지, , , 가 있었으나 대마도 도주에 대한 문위가 중심이었다.

그림 16 마상재지도 < >

(13)

조선을 빛낸 부산의 사람들

장경준 복천박물관 학예연구사( )

장영실 동래 출신 조선의 과학기술자 1. -

조선 개국 직후 왕자의 난을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 하고 왕위에 등극한 태종(太宗)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 로 새 왕조의 기틀을 세우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군. 권 장악과 사병 혁파 의정부 권한 축소와 육조직계제 실, 시 공신과 외척세력의 제거 등이 그것이었다 이를 통해 , . 왕조의 초석을 다진 태종은 양위를 단행함으로써 자신의 한계였던 정통성의 취약점을 무마하고 세종(世宗)이 더욱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해 나갈 수 있는 길 을 터 주었다.

세종은 태종에 이어 더욱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 였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과학기술 진흥 정책이었다 조. . 선의 중추 산업이었던 농업을 발전시켜 국가생산력을 향 상시키기 위해서는 천문 역법 기상 측량 등에서 학문, , , 적 뒷받침이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천문관측기. 기와 시계 창제와 같은 국가적 프로젝트에 착수하였는데, 이 때 크게 기여한 이가 바로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건너 온 기술자 장성휘 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래현 관노 라는 미천한

(蔣成暉) . (東萊縣) (官奴)

신분이었지만 남다른 기술적 재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태종대에 궁중기술자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세종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천문관측기기와 시계 제작 프로젝트에 본격 참여함으로써 그 명성을 후대에까지 널리 떨치게 되었다.

천문관측기기의 제작을 위해 세종의 명으로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장영실은 마침내 조 선의 하늘에 맞는 천문관측기기인 혼천의 일성정시의 간의대 혼상 등의 제작에 성공하였다.

이어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고 세종은 이 자격루를 조선의 표준시, 계로 삼았다 또 태종대에 만든 계미자. (癸未字)의 단점을 보완해 인쇄능력을 크게 향상시킨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으며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어 우리 음을 제대로 표현해내기 어려, 웠던 편경과 편종을 우리 실정에 맞도록 개량하였다 이 같은 기술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 준으로서 조선의 국가적 자존심과 국왕의 권위를 드높여 주었다 또 그는 세종이 강력하게 . 추진한 부국정책을 기술적 측면에서 실현시켜 줌으로써 조선이 그야말로 불휘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의 나라로 나아가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장영실이 조선에 뿌린 과학기술의 씨앗은 조선후기 실학의 발달과 서양 과학의 영향에 힘 입어 그 꽃을 활짝 피웠다 다양한 천문도가 민간에서 제작 유통되면서 국왕만이 읽을 수 . 있었던 하늘이 민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영역으로 변모하였다 시계 역시 보다 세련되고 . 소형화되어 휴대용으로 많이 만들어지면서 생활에 편리함을 더했고 갑인자를 개조한 활자,

그림 17 장영실 영정 < >

(14)

의 주조로 서적이 많이 간행 유통되면서 지식과 정보의 확산도 더욱 광범위하게 이루어졌 다 이밖에도 지리학 의약학 건축학 군사기술 등에서도 장영실의 과학기술 전통을 계승하였. ․ ․ ․ 다 이제 조선의 과학기술은 제왕학 의 수준을 뛰어넘어 민과 더불어 행복을 나눌 수 있는 .

여민락(與民樂 ) 의 수준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이처럼 장영실이 뿌린 과학기술의 씨앗은 조선왕조가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으며 후대로 이어지며 성리학의 발전 아래 활짝 꽃을 피웠다 이는 곧 조선이 유교. 이념에 기초한 이상사회로 나아가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험은 조선후. 기 서양과학의 유입이라는 외부적 충격을 성공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림 2 <자격루>

그림 3 <간의>

장영실 연보

년경 원 나라 기술자인 아버지 장성휘와 동래 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다

-1390 ( )元 .

년대 태종이 장영실의 재주를 알고 불러들여 궁궐의 기술자가 되다

-1410 .

년 세종 남양 부사 윤사웅 부평 부사 최천구와 함께 세종의 부름을 받아 선기옥형 -1421 ( 3) ,

제도를 토론하고 연구하다 세종의 명에 따라 각종 천문 기계를 배우러 중국에

(璇璣玉衡) .

파견되다.

년 세종 상의원 별좌 벼슬을 얻다 -1422~23 ( 4~5) (尙衣院) (別坐) .

-1425 (년 세종 7) 수동물시계 경점기 를 완성하고 이 공으로 면천(免賤)되어 실첨지(實僉知)를 제수 받다.

년 세종 세종이 정인지 정초 에게 명하여 간의대 를 짓게 하고 이천 -1432 ( 14) ㆍ (鄭招) (簡儀臺) ,

장영실에게 이 일을 감독하게 하다 평안북도 벽동군 사람 강경순이 청옥

(李蕆), . (碧潼郡)

을 진상하니 세종이 사직 장영실을 보내 채굴하게 하고 사람들이 채취하는 것을 (靑玉) (司直)

금지하게 하다

.

-1433 (년 세종 15, 50세 무렵 자동물시계 자격루 를 완성하고 이 공으로 정 품 벼슬인 호군에) 4 오르다.

년 세종 이천 김돈 김호 이세형 등과 함께 구리 활자인 갑인자를 만들어 인쇄 능 -1434 ( 16) , , ,

률을 향상시키다 경복궁의 보루각에 자격루를 설치하다 자격루를 조선의 표준시계로 사용 . . 하다.

(15)

-1437 (년 세종 19) 명나라 기술자 지원리와 김새 등이 조선에 오자 세종이 장영실(蔣英實)에게 명하여 그 기술을 전습(傳習)하게 하다.

년 세종 자동물시계 옥루 를 만들고 흠경각 을 완성하다 경상도채방 -1438 ( 20) (玉漏) (欽敬閣) .

별감(採訪別監)에 임명되어 창원 울산 영해 청송 의성 등 각 읍에서 생산된 동철· · · · (銅鐵) 과 안강현 소산 연철(鉛鐵) 등을 바치다.

년 세종 대호군 장영실이 감독하여 만든 안여 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나다

-1442 ( 24) (安輿) .

이 일로 처벌을 받고 파직되다.

정발 흑의 장군 2. -

년 선조 월 일 오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1592 ( 25) 4 13

가 이끈 조선 침략 선봉 제 군 1 18,700명의

〔小西行長〕

대군이 700여 척의 군선에 나눠 타고 부산포를 침략하 였다 이후 년간 계속된 동아시아의 국제전쟁 임진왜란. 7 이 발발한 것이다 왜군은 월 . 4 14일 아침 우암 부근에 상륙한 뒤 곧바로 부산진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부산진성의 민호는 300여 호 병사는 1,000여명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열세에도 불구하고 첨사. (僉使) 정발

을 위시한 군민은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에 맞서 (鄭撥)

싸웠다 하지만 성의 북쪽이 뚫리고 왜군이 난입하면서 .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을 위시한 군민이 모두 장렬히 전 사하였다 대마도주 종의지. (宗義智)의 종군 승려인 천형 의 서정일기 에 왜군들이 저항에 대 (天荊) 『 (西征日記)』

한 보복으로 개와 고양이까지도 모두 죽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부산진성 군민들의 저항 이 얼마나 거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직전에 부산진 첨사로 부임해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해온 정발은 왜군에 의해 임진왜란 중 가장 용 감하게 싸운 조선인 장수로 칭송되었으며 검은 갑옷을 , 입고 싸웠기 때문에 흑의장군(黑衣將軍)으로 불렸다.

그림 5 <정공단>

정발(1553~1592)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판윤 지례(之欚)의 고손으로 할아, 버지는 돈녕부도정 세현(世賢)이고 아버지는 군수 명선, (明善)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남, 숙(南淑)의 딸이다. 1579 (년 선조 12)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 해남현감 거제현령을 지냈, , 다 이어 비변사 낭관 위원군수 훈련원부정을 거쳐 . , , 1592년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 에 올라 부산진첨절제사가 되어 방비에 힘썼다.

이 해 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4 로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전사하였다 이 때 첩 애향. (愛香)은 자결하였고 노, ( ) 奴 용월(龍

그림 4 <부산진순절도>

(16)

송상현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긴 어렵다 3. -

년 선조 월 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동래성으로 몰려들었다 왜군의 침

1592 ( 25) 4 14 .

입 소식을 접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경상좌병영과 인근 군현의 군사력을 이용해 성을 지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경상좌병사 이각. (李珏)이 왜군의 기세에 눌려 송상현과의 약속을 어기고 달아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 (朴泓) 또 한 달아나 동래성은 고립무원이 되었고 송상현은 군사 지원 없이 홀로 성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동래성에 무혈입성하고자 했던 왜군은 동래성 남문 밖에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싸우려고 하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 라는 패목을 내걸고 조선군의 항복을 종용하였, ) 다 하지만 송상현은 . 戰死易 假道難(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라고 써, ) 서 결사항전을 표시하였다 대군을 동원하여 . 동래성을 세 방면에서 에워싸고 있던 왜군은 월 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총을 난사하

4 15 .

며 성을 공격하는 왜군에 맞서 동래의 군민 은 활과 칼로 맞섰으며 부녀자들도 가옥 지, 붕의 기와를 부숴 왜군에 대항하며 이에 가 세하였다 그러나 성의 동북쪽 방어선이 무. 너지면서 이내 동래성은 왜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전투의 결과는 매우 처참해 휘두른 .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모두 죽어 곡을 해줄 사람조차 남지 않은 집이 얼마인지 모른다 고 할 정도였다.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송상현은 왜군 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였다 통신사의 일행. 으로 내왕한 바 있던 왜군의 평조익(平調益) 은 송상현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죽기를 각오하였다 거센 항. 전에도 불구하고 동북쪽 성벽이 뚫려 왜군이 밀어닥치자 송상현은 조복(朝服)으로 갈아입 고 한양을 향해 절을 올려 임금께 하직 인사 를 올린 후 순절하였다.

도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동래의 충렬사 뒤의 에 제향

) . , ( : )

月 忠烈祠 樂安書院

되었다 시호는 충장. (忠壯)이다.

그림 22 동래부순절도 < >

(17)

안용복 울릉도 지킴이 4. -

세기 말엽 조선과 대마도 간에 있었던 울릉도 영유권 시비에서 울릉도를 지켜내는데 결 17

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안용복이다.

동래부 출신으로 평민 신분의 어부였던 그는 일찍이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 으로 복무 부산의 왜관 에 자주 출입해 일본말을 잘하였다 년 숙종 봄 동

) , ( ) . 1693 ( 19)

軍 倭館

래 울산의 어민 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 어민들과 충돌하다가 동료 ․ 40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굴하지 않고 호키주. 〔伯耆州〕 태수와 에도막부에게 납치 행위와 울릉도 침범의 부당성을 따졌다 그 결과 에도막부로부터 울릉도. 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받아내었다.

그런데 서계를 가지고 오는 도중 나가사키〔長崎〕에서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겼다.

대마도주는 차왜(差倭)를 동래에 보내 안용복을 송환하는 동시에 예조에 서계를 보내 일본 , 영토인 다케시마〔竹島〕에 침범한 죄인을 송환하니 조선 정부가 앞으로 조선 어민들의 다 케시마 고기잡이를 금지해야 한다 고 요청하였다 대마도주가 울릉도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 고 일본 영토 다케시마 라고 표기한 것은 울릉도와 다케시마가 별개의 섬이고 이 중 다케, 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착각을 유도하려는 속임수였다 조선이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문서를 . 그대로 수용한다면 장차 이를 빌미로 울릉도를 탈취하려는 속셈이었다.

한편 조선 정부는 당시 좌의정 목내선(睦來善)과 우의정 민암(閔黯)이 무사주의의 외교 정 책을 취해 비워둔 땅으로 인해 왜인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좋지 않은 계책이라 하고 멀, 리 떨어진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조선 정부의 공도정책(空島政策)에 일본도 협조하도록 권 하는 예조 복서(禮曹覆書)를 작성해 동래의 일본 사신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 울릉. 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송상현(1551~1592)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으로 본관은 여산이다 선조 년. 3 (1570), 20세의 나이 로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보임되었다.

년 선조 년 저작랑이 되고 이듬해에 박사에 서임되었다가 경성판관 이

1578 ( 11) (鏡城判官)

되었다. 1583 (년 선조 16)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돌아와 예조 호조 공조의 정랑, , (正 이 되었다 이듬해인 년 선조 종계변무사 의 질정관 으로

) . 1584 ( 17) ( ) ( )

郞 宗系辨誣使 質正官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7 (년 선조 20)에 다시 지평(持平)이 되고, 1588 (년 선조 21)년에 백 천군수(白川郡守)로 나아가 년 만에 전직되어 들어와서 충훈부경력 사헌부집의 사간원3 , , 사간 사재군자감정이 되었다, .

년 선조 에 동래부사 에 제수되어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1591 ( 24) (東萊府使) .

그러나 이듬해 왜군이 침입하자 군사를 이끌고 사력을 다해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고 조복(朝服)을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절하였다. 1594 (년 선조 27)년 김응 서(金應瑞)의 보고로 충절이 알려져 특명으로 정려가 세워졌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 다. 1605 (년 선조 38)에는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제사지내고, 1657 년 효종 에 충렬( 8) (忠烈)로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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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황한 대마도주는 이듬해인 1694년 월에 다시 사신을 보내 예조 복서를 반환하면8 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 라는 표현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때 영의정 남구만. 우의정 윤지완 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삼척첨사로 하여금 울릉도를 조사 (南九萬), (尹趾完)

시켰다 그리고 접위관을 동래에 보내 오히려 일본이 남의 영토에 드나든 무례함을 책하는 . 예조 서계를 차왜에게 전달하였다 에도막부는 자체 조사에 착수하여 . 1696년 월 울릉도의 1 조선 영속 및 어업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고, 1697년 조선의 울릉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공식적 입장을 조선에 통보하였다 그 결과 조선 정부는 울릉도 영유권을 확고하게 유지하. 였다.

한편, 1696년 봄에 안용복은 다시 여 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마10 침 어로중인 일본 어선을 발견하였다 이에 송도. (松島)까지 추격해 조선의 영토에 들어와 고 기를 잡는 침범 사실을 문책하였다 또 울릉우산양도감세관. (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자칭하 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국경을 침범한 사실을 항의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

하지만 안용복은 이 일로 귀양에 처해졌다 정부의 허락 없이 국제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 유였는데 처음에는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남구만의 간곡한 만류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 결정되었다 이듬해인 . 1697년 대마도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를 조선 땅으로 확인한다는 막부의 통지를 보냈으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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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식, 임진왜란을 지켜낸 의로운 부산사람들「 」 『, 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 늘함께, 1999.

부산박물관, 『부산의 역사와 문화』, 2002.

부산박물관, 『窮理』, 201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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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근현대사와 생활

류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

부산 근현대사를 보는 네 가지 테마 1.

가 부산항.

조선시대 부산은 현 좌천동에 있는 증산(甑山)을 가리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는 』 부산 이 가마솥 모양과 같아서 이름이 지어졌으며 아래에는 바로 부산포 가

‘ ’ ‘ ( ) 釜 , (釜山浦)

있고 상주하는 왜인들의 집이 있다 고 하였다 항구로서 부산의 역사를 추적한다면 이 부산, ' . 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조선시대의 부산포는 좌천동 인근의 바닷가로 수군이 머무. 는 진지이자 고깃배가 출어하는 어촌이었으며 왜인들의 출입이 있었던 작은 포구였다, .

오늘의 부산은 곧 부산광역시를 지칭하는 시대이다 하나의 산과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 부산이란 지명은 이제 인구 356만명 면적 , 768㎢의 우리나라 제 대 도시를 가리키고 있다2 .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부산 항구의 공간 변화와 이동도 커졌다 개항 이후에는 용두산 주변. 에 일본인들의 전관 거류지가 형성되었고 용미산 아래를 매립하고 항구로 개발하기 시작하, 였다 배가 닿을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인 제 잔교와 제 잔교는 현재의 중앙동 일대에 만들어. 1 2 졌다 그리하여 근대의 부산 항구는 중앙동 쪽의 바닷가를 상징하게 되었다. .

나 영도다리.

영도다리는 ‘목도부산도진교(牧島釜山渡津橋), 도진교 도개교 부산대교 영도대교 영도다, , , , 리’ 등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붙여졌다. 1980년 현재의 부산대교가 가설된 이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영도다리가 준공될 당시의 이름은 ‘부산대교 였다’ . 다리를 처음으로 조성할 때에는 목도 영도 와 부산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목도부산도진교 부( ) , 산목도간도진교 등으로 불렸지만 1932년에 이르러 부산대교 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부‘ ’ . 산을 상징하는 큰 다리인 만큼 부산대교라 불리는 게 적합했던 것이다 부산과 영도를 잇는 . 다리 건설의 필요성은 1920년대부터 제기되어 왔다. 1930년대 접어들어 영도의 인구가 만2 명을 넘어섬에 따라 도선(渡船)에 의존하는 해상 교통이 한계에 다다랐다 동시에 지역민들. 의 불만과 원성도 극에 이르렀다. 1926년 월경 조선총독부는 당시 토목건축학계에서는 최8 고로 유명한 동경제국대학의 공학부 세키노부오(關信雄) 교수를 초대하여 다리 건설의 타당 성을 조사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다리를 설치하는 예산에 큰 부담을 느끼면서도 동양에. 서 제일로 가는 거대한 다리를 놓기로 한 구상을 갖고 있었다.

년 월 공사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석 을 바다에 던져 넣는 기공식을 시작한 뒤로

1932 4 (基石)

영도다리 건설 공사는 약 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일본 최초의 3 . ‘들리는 다리 의 탄생을 ’ 위해서 부산부는 근대 과학과 공학 기술을 총동원하였다 일제에게 영도다리는 식민지 조선. 의 발전상을 드러내주고 제국의 위용을 보여줄 수 있는 근대의 총아였던 것이다, , . 1934년

월 일 드디어 만원의 어마어마한 공사비를 투자한 영도다리가 완공되었다 영도다

11 23 , 360 .

리의 준공식을 대서특필했던 당시 언론에서는 “동양제일이라는 도개식 장치를 한번 보는 자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데 라고 하였다 영도다리의 초점을 교량의 상판을 들고 내리” . 는 도개식 기능에 맞췄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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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산의 산동네.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해안선을 가로막아 매립을 진행했건만 늘어가는 인구에 비하여 평지 는 항상 부족했으며 토지와 부동산을 독식한 일본인들 때문에 조선인이 살 수 있는 땅은 , 많지 않았다 이럴 때 조선인의 선택은 인적이 드문 산동네일 수밖에 없었다 부산의 빈민. . 들은 산에서 토굴을 파서 살았다 아미동에서 구술조사를 하면서 실제로 토굴을 파서 살았. 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한 가마니나 새끼를 엮어서 만든 토막집도 유행하였다. .

용두산 주변의 넓은 평지인 광복동 보수동 등은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된 반면에 영주동, 과 초량동 대신동 아미동 등 도심의 변두리이며 산지인 곳에는 조선인들의 거주지로 분할, , 되었다 식민지 부산에서 평지는 일본인 고지대는 조선인이라는 주거공간의 이분법이 생긴 . , 것이다 가난한 조선인들은 그래도 부산항 주변에서 막노동 등의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기. 에 불편한 산자락이지만 토굴을 파거나 움막을 지어서 정착을 하였다 근대 도시 부산이 거. 대해질수록 산비탈로 모여드는 조선인들이 많아졌다 운이 좋아 도심의 하천변이나 매축지. 에서 한 평의 자리를 마련했던 조선인들은 비위생 주거지를 없애려는 식민지 권력에 의해서 이내 쫓겨나 최후 보루인 산동네로 향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부산 산동네는 가난한 조. 선인들이 사는 소외와 빈곤의 장소성 을 상징하였다‘ ’ .

해방 전 부산부의 인구는 32만 명까지 늘어났지만 현재와 같이 인구 밀집지역은 아니었 다 부산이 인구 포화 상태를 맞게 된 것은 좀 더 아픈 기억이 있었다 해방 후에 귀환동포 . .

만여 명이 부산에 정착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 피난민 여만 명이 부산으로 이주해왔

10 , 40

다 적기 수용소와 대한도기주식회사 등 여러 곳으로 피난민을 분산 배치시켰지만 폭발적으. 로 늘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수용시설에 들어갈 수 있으면 천만 다행인데 그렇지 . 못한 대다수의 피난민들은 스스로 살 집을 마련해야 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산으로 산. , 으로 가는 길이었다 산비탈의 경사면을 대충 다듬은 뒤에 도심 주변에서 구한 볼박스나 판. 자 거적때기 등을 이용해서 임시 주거를 만들어 살았다 물도 없고 불도 들어오지 않았지, . , 만 그저 전쟁을 피해서 살 수 있다면 산꼭대기라도 집을 지어야 했다 전쟁 이후 아미동. , 대신동 보수동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등 예전부터 산동네가 있었던 곳은 물론이요 범일, , , , , 동 감천동 연산동 등 비교적 도심과 떨어진 고지대에도 산동네가 형성되었으니 이제 부산, , 의 산비탈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공간이 돼버렸다.

라 부산밀면 .

적기 는 우암동 일대를 말한다 일제 강점기 우암동에는 소들을 검역하고 일본으로

‘ (赤琦)’ .

반출하는 검역소와 우사들이 모여 있었다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들이 살 곳이 . 없자 임시로 소막을 개조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다시 한국전쟁으로 피난민들이 우암동에 몰. 려들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피난민들은 소막을 개조하거나 판잣집을 지어 살았으며 공동. , 묘지가 있는 산으로까지 진출하였다 피난을 온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주로 행상을 하. 였다 시장 주변에서 먹거리 장사를 하거나 먹거리를 만들어 수용소나 부대 주변을 돌아다. 니면서 팔았다 그런데 북쪽 피난민을 대상으로 장사하기에는 냉면이 제격이었다 적기와 . . 비슷한 피난민 마을인 당감동에 본정냉면 흥남냉면 등 냉면집들이 많이 들어섰고 전쟁 당, , 시 부산 시내를 촬영한 사진에 냉면집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업으로는 무엇보다 북쪽의 음식이었던 냉면이 가장 안성맞춤이 었던 것이다 우암동 내호냉면의 정한금 씨도 흥남에서 했던 냉면 장사를 시작했다 변변치 . . 않은 식탁이 있을 리 없었으니 나무로 된 박스를 엎어서 사용하였고 사기 대접 몇 개를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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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냉면을 말아서 팔았다 그러나 생각한 만큼 냉면이 잘 팔리지가 않았다 피난민들은 . . 차치하고서라도 부산 토박이들이 냉면을 잘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한 꾀는 냉. 면과 국수 장사를 같이 하는 것 냉면은 피난민에게 국수는 경상도 사람에게 파는 두 가지 . , 방식을 취하였다 이 동안에 적기의 피난민들에게 구호식량으로 밀가루가 배급되었다 미국. . 은 전쟁기간 동안 한국인의 식량난을 해소하고 사회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 농산물을 원조, 하였는데 대표적인 원조식량이 밀이었다 이러한 원조는 미국 잉여농산물의 재고량을 줄이. 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굶주림에 지친 피난민들에게 식량원조는 그 자체로 희소식이었지. 만 막상 밀가루를 받고 보면 북한 사람의 음식 재료로는 맞지 않았다 정한금씨도 밀가루, . 를 받았지만 북쪽에서는 수제비를 잘 먹지 않았던 탓에 별로 쓸모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 고 아까운 식량을 버릴 수도 없는 일 그래서 냉면에 들어가는 전분도 비싸거니와 구하기도 . 쉽지 않았으므로 밀가루를 섞어서 냉면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밀가루만으로 냉면을 만들었더니 면발에 힘이 없고 뚝뚝 끊어졌다 수차례 실험을 한 끝. 에 밀가루와 전분을 3:1의 비율로 혼합해보았다 쫄깃하면서 고소한 맛이 나는 것이 진미였. 었다 내친 김에 정한금 씨는 이 새로운 냉면을 손님들에게 팔기 시작했는데 이를 먹어본 . ,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했다 원래 정한금 씨는 이 냉면을 밀가루가 들어간 냉면이라 해서 . 밀냉면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성질이 급한 부산 사람들은 밀냉면 을 줄여서

‘ ’ . ‘ ’

밀면 으로 불렀다 이처럼 밀가루와 전분이 적당히 섞인 밀면의 탄생은 시대가 만들어낸

‘ ’ .

사회상과 사람들의 입맛과 선택이 버무려진 결과였다.

부산 근현대사의 개요 2.

가 강화도조약과 부산의 개항.

년 개항은 자본주의 국가가 생산한 공장제 상품과 조신이 가지고 있던 원료를 교환할 1876

수 있는 시장개방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후기 이래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자본주의. , 국가들은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년 미국에 의해 개항된 일본은 조선을 공산품 판매시장과 미곡 수입처로 생각하였다

1854 .

그리하여 일본은 1875년 운요호(雲楊號)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구실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 하였다 그 결과 . 1876년 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조일수호조규2 (朝日修好條規)가 체결되었고, 같은 해 월에는 조일수호조규부록8 (朝日修好條規附錄)이 승인되었다 이 조약은 강화도에서 . 체결되었으므로 일명 강화도조약‘ ’ 이라고도 한다.

강화도조약 후 1877년 월 부산구조계조약1 (釜山口租界條約)이 체결되어 조선시대 용두산 주변의 일본인 마을이었던 초량왜관이 부산 일본인 거류지로 개방되었다 이것을 전관거류. 지(專管居留地)라고도 하는데 부산구조계조약에는 일본정부가 매년 일본 돈 , 50엔을 조선정 부에 납부하고 이곳을 임대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측이 경찰권 징세권. , , 지방 행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어서 일본 영토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전관거류지의 설치. 는 곧 조선 영토의 침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 일제의 부산 침탈.

일제는 부산을 침략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행정기구를 설치 정비하였다 조선후기 초량왜· . 관의 왜인 감독은 대마도주가 담당하였으나, 1873년 일본 내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일본 외 무성이 관리하였다 일본 정부는 개항 직후 관리관청을 설치하였다가 영사관. (1880 ), 년 이사

Refere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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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zani, Using R for Introdu tory Statisti s,CHAPMAN &amp;

Tempat/Tanggal Lahir : Rangkasbitung, 24 Januari 1999 Jenis Kelamin : Laki-laki. Umu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