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日本書紀에서 백제가 주장하는 ‘建任那’의 의미를 究明하 고, 당시 존재했던 任那日本府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힘으로써 가야가 멸 망해 가던 6세기 전반 국제관계의 역사적 진상에 한걸음 더 다가가기 위 해 작성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는 과거 임 나의 체제를 다시 세우기 위해 ‘建任那’를 도모했다.
序言
日本書紀 편찬의 정치적 의도에 유의하면서 관련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역사의 진상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설치한 군사령부였다는 견해가 제출되어 주목을 받았다.23).
百濟의 ‘建任那’ 意味와 安羅
또한 이때 임나집사들은 회의의 주요 구성원으로 여겨진다.84). 이는 安羅가 당시 군사적으로도 다른 가야소국보다 부각되는 나라였.
安羅에 設置된 ‘任那日本府’와 百濟
백제는 또 다른 임나일본부 구성원인 移那斯와 麻都가 경계를 넘어와 농사를 짓다가 도망쳤다고 주장했다. 이는 문맥상 移那斯와 麻都가 신라 에서 安羅로 넘어와서 농사를 짓다가 다시 신라로 도망갔다는 의미로 보 인다. 移那斯와 麻都가 安羅와 신라의 경계를 넘었다 는 것은 임나일본부가 安羅의 땅에서 얻은 소출을 신라로 보냈다는 의미 로 추정된다. lt;라>를 통해서 的臣은 임나일본부의 경작권을 확보하는 일을 했고, 移那斯와 麻都는 임나일본부에서 얻은 수확을 신라로 보냈음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계 를 의미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190) 분명한 것은 백제가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우 큰 비용이 필요했으리란 사실이 다. 夫遣印岐彌於任那者 本非侵害其國 ….’. 를 치다”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백제는 임나일본부 관인을 직접 파견했던 것이다.. 印 支彌를 근거로 백제에서 임나일본부를 파견했다고 보는 연구는 이미 많 이 제기되었다.199) 임나일본부의 파견 주체가 백제였으므로 그 설치와 운영도 백제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200) 그런데 印支彌는 백 제에 의해 임나일본부로 파견되었음은 분명하지만, 파견 시점에 대해서 는 알기 어렵다.
安羅는 비록 그들의 땅에서 백제에게 府를 제공해야 했지만, 임나일 본부가 득이 되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201) 백제에서 왜로 전하는 문물 중 일부는 安羅를 통해 임나에도 확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제는 伴跛가 己汶을 약탈했다고 주장했다.244) 이는 己汶도 임나소국 중 하나로서 원래는 백제에 부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백제의 己汶 진출에 대해서 伴跛의 첫 대응은 왜에 珍寶를 바치며 협 조를 구하는 것이었다.246) 伴跛는 임나와 왜의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왜의 중재를 기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新羅의 ‘安羅’ 掌握과 韓半島 情勢의 變動
게다가 백제는 임나에 軍을 주 둔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阿尸村은 의성인 阿尸兮가 아닌, 함인인 安羅로 보아야 한다.265) 安羅에 신라 소경이 설치되었으므 로 安羅에 대한 신라의 영향력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아래의 기사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lt;사> 加羅王은 신라왕녀와 혼인해 드디어 자식을 낳았다.
왜에게도 임나 체제의 주관국이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던 安羅의 소경 설치나 멸망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앞서 安羅에서 열린 회의에서 왜는 입장을 바꾸었을 것으로 추정했 다.. 328) 왜가 백제의 南進을 지지할 당시 임나일본부에서 大和로 물자 공급이 제대로 이루 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군사공조가 재개된 것이다.337) 이는 백제가 신 라에게 久禮山을 빼앗겼음에도 먼저 화친을 청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 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성이 있다.346) 임나일본부는 신라의 영토에 있었으므로 임나일본부 관인 들이 백제로 옮겨온 이후에는 더 이상 임나일본부 관인이라 칭할 수 없 었고, 신라도 임나일본부 관인이 백제로 옮겨 갔기 때문에 임나일본부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大加耶를 따랐던 임나소국들이나353) 백제로 망명한 安羅 와 같은 나라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354) 하지만 실상은 온전한 국가의 형태를 띠는 것은 大伽耶뿐이었고, 대부분의 경우는 이미 당시에도 이름 만 남은 나라였다. 그러므로 신라에 나라를 잃고 백제로 망명한 경우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55) 신라는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와 大加耶 연합군에 승리하며, 실질적으로 가야를 복 속시켰다고 여긴 것 같다.
結語
임나일본부’를 통해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임나 체제의 주관국 으로서 임나소국들에 산재한 토지를 관리 및 감독할 수 있었다. 安羅는 ‘임나일본부’로 인해서 임나로서 입지를 유지할 수 있던 것이다. 따라서 백제와 安羅, 왜 모두에게 ‘임나일본부’는 중요한 것이었다.
반면 6세기 전반 백제의 임나 진출은 지지부진했다. 남아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역사상을 재구성해야 그 진상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4세기 중엽부터 백제와 임나, 왜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 로 임나가 安羅이기 이전의 가야 정세에 대해서도 窮究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