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우역제도
2.봉수제도 3.파발제도 4.사발통문 5.황룡산 봉수꾼 배돌이 이야기
6.부산구설 해저전선 조관 7.영도에서 시작한 전파통신의 시발 참고자료-자격루,보신각종,봉수,훈민정으-dvd
봉수 ( 烽燧 ) 와 역마 ( 驛馬 ), 정보통신의 시발
-
부산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 -
진 용옥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방통학회장
) “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을 두고 소관 관청에 명하여 관도를 수 리케 하였다 "( 삼국사기 始置四方郵驛命所司修理官道 )- 우역제 도기록 ( 소지왕
_479~500_8 년 )
郵驛 ( 우역 ) 우편 [ 郵便 , postal system]
전명 ( 傳命 )- 전령 ( 傳令 )
驛站 ( 역참 ) 역전 [ 驛傳 , ]- 통신기관 행정기구
擺撥 ( 파발 )- 기발 ( 騎撥 ) 과 보발 ( 步撥 )
1840 년 영국의 Rowland Hill- 우표사용 .
1884 년 홍영식에 의해서 한성의 우정총국과 인천 우정분국 간 의 우편업무 개시 - 갑신정변으로 중단 후 갑오경쟁으로 재개 .
1 우역 ( 郵驛 ), 파발 ( 擺撥 ) 그리고 언로
물시계 ( 自擊漏 ) - 디지털 시계
보신각 종 ( 鐘 ) – 하방 시보 방송
봉수 – 상방 방통 시스템
훈민정음 – 민중언로 소통
한국방통학회 제작 DVD 시청 – 약 10 분간
물시계 , 보신각 종 , 봉수 , 훈민정음
중국종과 한국종의 비교
(a) 한국 (b) 중국
한국종은 종구가 오 무라져 있어 여운이 긴 맥놀이 파가 나오 지만
중국종은 토순처럼 입이 벌어져 있어 뭔 가 세는 기분이다
드리마 철의 제왕 ‘ 김수로 의 제철소본’ 부에 달린 종은 토순 모습의 중국종이다 . 이는 원 , 명 시대에 형성된 것이다 .
봉두발 형식 등을 포함해 외래 기준 사고가 지나치게 짖 게 깔려 있다 .
훈민정음
訓民正音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 伸其情者 多矣 . 予 爲此憫然 新制二 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 나 ` 랏 ^ 말써미 `, 듕귁에 ` 달아 `, 문쩌 ` 와로 서르 서못디 ` 아 ` 니 홀 세 `, 이런 젼처 ` 로 `, 어린 ` 뵉셩 이 ` 니르고 ` 져 흘 ` 배 ` 이 ` 셔도 , 모첨내 ^, 제뜨 ` 들 ` 시 ` 러펴디 ` 몯 ^ 홀노 ` 미 ` 하니 `라。 내 ` 이 ` 룰 ` 위호 ` 야 `, 어 ^ 엿비 너 ^ 겨 , 새` 로 ` 스 ` 믈 ` 여듧 ` 쩌 ` 룰 ` 묑가
` 노니 `, 사 ^ 룸 ` 마 ^ 다 ` 회 ^ 여 ` 수 ` 비 `니겨 , 날 ` 로 ` 쑤 ` 메
` 뼌킈 ` 호고 ` 져 ` 홀 뚜루미 ` 니 ` 라
( 가온점 소리는 앞에 오는 초성에 따 라 음가를 달리한다 2007 년 10 월 9 일 반재원아나여주영릉 한글반 포기념식에서 처음 봉독되었다 . )
훈민정음 = 訓民正音 = people’s (teaching) educated ortho-phonic alphabet 표음부호
나라말씀 = 國語 = native language / mother tongue / national language자국어
중국어 = 中國語 = global language / global writing system
서믓치다 = 相流通 = communicated with소통
어리석은 (글 모르는 )백성 = 愚民 ( 文盲 ) = literacy people대중 / 민중
니르고자 할 바 = 所欲言 = representation by self language사회 언로 ( 언론 )
시려펴다 = 得伸 = propagated (transmitted) massage표출하다
제뜻 = 基情 = information정보
< 일본에서 번역한 이 용어는 맹백한 오역이다 왜냐하면 = in + formation = ( 뜻을 ) 메기다이고 팡가하다는 뜻이다 . 정황을 알리는 것은 통신행위이다 . 중국에서는 信息 , 즉 믿을만한 소식이다 .>
여여삐 여겨 = 憫然 = impatiently feeling 보편적 사랑과 봉사 ( 보편적 민연 사상 )
28자 = 28字 = 28 ortho- phonemes표음기호
새로 만들다 = 新制 = creatively new design 창조
쉽게 익혀 = easy access and leaning 보편적 문해 ( 文解 )교육
날로 씀에 = 日用 = of daily useful necessity실용성
편안케 하다 = 便於 = well being comfort편의성
방통학 경전의 핵심어와 시사점
한글 금속 활자
-
1455 년능엄경 언해 인쇄 활자 - 쿠텐벨크와 동시대 _
한국 = 세로쓰기 - 모아 쓰기 - 불경인쇄 ( 방대 ) – 먹물을 종이에 묻히는 복사 방식
서양 - 가로쓰기 – 풀어쓰기 - 성서인쇄 ( 콘텐츠 ) - 활판술 ( 식자기를 고정 압출시키고 종이가 이동했다 .)
아무도 계승하거나 발전 시켜 나가지 못함 - 창조 + 계승발전 의 노력
사발 ( 沙鉢 ) 통문 ( 通文 ) -
한국의 사회언로 (소셜 미디아 )의 원형 -1968 년 12 월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 古阜面 ) 송준섭 ( 宋俊燮 ) 의 집 마루 밑에 묻힌 족보에서 발견되었다
사회 언로 ( 言路 ):
- 인간 . 정보 , 통신망의 결합 -
현대의 사회언로 ( 소셜 미디아 )
현대한국의 사회언로
외적의 침입 같은 국경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정부나 이웃 지방에 알리고 , 주민이 재빨리 대응토록 하는 것이 주된 목적 - 상방향 방송통신 .
봉수망은 국가의 신경조직과 같아 역로와 함께 군사적으로 중 요한 역할 - 전국에 5 개 직봉과 간봉 , 제주도 일주로 포함
烽 ( 횃불 봉 ) 과 燧 ( 연기 수 )
전국 563 개소 - 경봉수 ( 착신점 ) 내지봉수 ( 중계 ), 연변봉 수 ( 발신지 )
5 개 아궁이가 있었음 - 세계최초 5 단위
현대적 의미 ; 디지털 , 광파 , 무선 , 방송통신 - 방통융합 ,
2. 봉수제도 ( 烽燧制度 )
수원성 봉돈 ( 봉수대 )
TERC 2000 ©.
1798
년 수원성
축조시 완성
5 단위 거화의 가장 확실한 유적
회령 북포 봉수
거화수 의미 빗기호표기 비고
무 사 시 10000
적 근 접 11000
국 경 접 근 11100
월 경 11110
전 쟁 중 11111
32 상 태 중 5개 만 사 용
1419( 세종원년 ) 년 최초의 5 단위 사용 디지털 통신의 원년
< 중국은 16 세기에야 5 단위 채용 >
봉수 ( 烽燧 ) 와 디지탈통신
밤 횃불 < 熢 > 과 낮 연기 < 燧 > 로 전하는 전래의 디지털 광파통신
봉수 거화도
조선의 5 갈래 봉수 체계
당나라시대
봉화대
-3~4 단위 50 만년전 시난드로프스 ( 북경원인 ) 의 불의 사용에서 기원
삼국초기 ( 기원전 1 세기 ), 가야시대 ( 서기 42 년 ) 에서 제도 화
고려 4 단위 봉수식 - 의종 3 년 ( 서기 1149) 조진약의 건의
조선의 5 단위 봉수식 제정 세종원년 (1419) 대마도 정벌 < 전국 5 개 방면 673 개소 1895 년 폐지 >
< 경봉수 ( 서울도착 ), 연변봉수 ( 국경지역 ), 내지봉수 = 중 계와 지역 통보 겸용 >
< 산악지역이면서 도로가 없는 환경에서 가장 신속하고효율 적인 전달방식이었음 >
한국 봉수 ( 熢燧 ) 의 특징
TERC 1999 ©.
봉수는 디지탈 통신의 원조
재래통신 - 봉화 5 단위 부호 (1419 년 : 세종원년 )
전기통신 - 텔레타이프 5 단위 부 (20 세기 초 호 )
정보통신 - 컴퓨터 7 단위 부호로 진화 (1948 년 )
TERC 1999 ©.
디지털 광통신의 원조 첨단 기술
국방과 민방위 통신을 겸함 호국 의지
전쟁과 평화를 5 단계 구분 평화 기원
세계 최초 5 단위 부호 지식정보시대 기원
상봉과 만남 그리고 알림의 공유 방송기능
한국봉수의 상징성
1. 삼국사기 하권 지리지 4에 전함
왕봉 (王逢)현⇒상봉한 곳⇒고양군 지도면
달을성 (達乙城)현⇒봉화를 올린 곳 ⇒ 고양군 고봉
2. 안장왕 11 년 (서기 529 년 )황해도 오성산성 ( 서흥군)에서 대규모 전투로 백제군2000 여명 사살 전과 후
3. 남하하다가 위기를 맞았으나 고봉에서 미녀 한씨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추정일 뿐 사실
관계는 아직 불 분명함 .\\
서기 42년 가야 건국 시 망산도 해상 조우 .- 가락국기
선박이 나타나자 붉은기와 봉화로 연락.
수로왕 등장과 상봉 후 혼인
고개를 넘어 수도에 가면서 비들치 고개 (비단 ) 등의 지명을 남김.
봉수와 상봉 이야기
○[ 동래 ]: 응봉 ( 다대포진 )→ 귀봉→황령산→계명산→○
[ 양산 ]: 위천 ( 원적산 )→○[ 언양 ]: 부로산→○ [ 경주 ]: 소산
→고위→접포현→사봉→○ [ 영천 ]: 방산→영계→성황당→성 산→구토현→○ [ 신령 ]: 여음동→○ [ 의흥 ]: 토흘산→보지현
→승목산→○ [ 의성 ] 승원→대야곡→성산→계란현→마산→
○ [ 안동 ]: 감곡산→봉지산→개목산→○ [ 예안 ]: 녹전산→○
[ 영천 ]: 창팔래산→○ [ 봉화 ]: 용점산→○ [ 안동 ]: 당북산→
○ [ 순흥 ]: 사랑당→○ [ 영천 ]: 성내산→○ [ 풍기 ]: 망전산→
○ [ 순흥 ]: 죽령산→○ [ 단양 ]: 소이산→○ [ 청풍 ]: 오현→○
[ 충주 ]: 심항→마산→○ [ 음성 ]: 가엽산→○ [ 충주 ]: 망이성
→○ [ 죽산 ]: 건지산→○ [ 용인 ]: 석성산→○ [ 광주 ]: 천림산
→○ [ 한성 ]: 목멱산 제 2 봉
제 2 노선 훼 ( 炬 ):
동래 - 서울간 ( 직봉 44, 간봉 110, 계 154)
부경 지역의 봉수
가덕 천성 연대
( 간봉 )
부산의 3 대 봉수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
1461 년 ( 세종 7 년 ) 경에
동평현의 석성 봉수대 ( 현재의 천마산정 )- 다대포 만호진 , 동래현의 황령산 봉수대 - 부산포를 지키는 해안초소
동래현의 간비오산 봉수대 ( 해운대구 우동 롯데아파트 뒷산 ) - 해운대 만호진 석성 봉수→황령산 봉수→간비오산 봉수→기장 남산 봉수→울산 임을랑포 봉수 를 연결하는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여 영해 , 안동으로 이어져서 서울의 남산까 지 19 개를 거쳐 도달하였다
부산경남역사연구소 편 『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 , 「부산의 정보통신 봉 수대」
(
간비오 산 봉수 -
남해 설흘산 봉수대
진해 가을포 봉수대
고성 곡산
봉수대에서
이어받아 함
안 파산 봉
수대를 거쳐
고령 망산
봉수대와 통
하여
“왕은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주어 망산도 앞바다에 나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 귀간은 승참(乘站)-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참 은 경기 안에 있는 나라다.-에 가게 하였다 .
갑짜기 붉은 돛에 붉은기를 단 배가 북쪽을 바라보면 오고 있었다. 유천간이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 리니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뛰어 오르므로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다가 대궐로 달려가 왕께 아뢰니 매우 기뻐했다. 이어서 아유타국의 허황옥이 나타나고 몇차례의 확인 절차가 진행된 후 왕비를 맞 아드린다. .버들치 고개라는 지명이 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중략).이제 모 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이에 왕이 이를 받아들여 드디어 혼인하고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이윽고 대궐로 돌아왔다.이후 제도를 일신하고 나라의 기틀을 공 고히 했다.
매년 7월29일에 승참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논다. 이들은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서 망산도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로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위에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를 향해 다투어 달린다.대개 이는 옛날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자취이다 - ” 이상 가락국기에서발췌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부인이 고양 고봉 봉수에서 도 나온다.>
김 수로왕과 봉수 이야기 ( ad 49 년 )
제 1 봉 시점 ; 서수라 봉수터
제 2 거 경상도 방면 ( 위성지도 )
1976 년 복원된 황령산 봉수대
보다 심층적인 고증과 재복원의 필요성이 있다 . ( 원형 봉수대 - 부대시설 - 아궁이 - 현대정보통신과 방송의 원형 등
5. 황룡산 봉수군 배돌이
(裵乭伊
),그는 누구인가
?
“ 이달
14일 묘시에 황령산 봉수꾼 배돌이가 달 려와 보고
<馳告
=치고
>하기를 왜적들이 부산포 의 우암에서
3개 부대로 진을 치고 있다가 날이 밝을 무렵에 부산포를 포위하고 접전을 벌였는데 포를 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다” 합니 다
.<壬辰狀草 1592년 4월16 일 이 충무공의 승첩 장계 - 국보 76호- 에서 >
그를 기념하는 곳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고려와 조선의 수백만은 족히 될 도공들 중에서 우리가 기억하거나 그 이름을 아는 이는 하나도 없다.
< 이 참평과 심 수관이 일본에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400년 후에 우리들은 어찌 그
이름을 알았겠는가 ? 이름을 아는 우리들의 마지막 도공은 결국 일본의 도조(陶 祖)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1592
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당시 왜선이 침입한 사실 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 이를 알린 사람들
1). 4
월
13일 음봉
(鷹峯
=가덕도
)의 봉수
(송신소
)감고
(監考
)이등
(李登
)과
,연대
(煙臺
=초소
)감고 서건
(徐 巾
)등 초급 장교였으며
,2). 4
월
14일 봉수군 배돌이는 부산 황룡산 봉수터에서 좌수 영으로 달려가 전한다
. (약
7,4킬로미터
)
우리들은 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는가
?
그들이 다려가서 보고한 치고가 한국 마라톤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유추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임진왜란을 제일 먼저 알린 사람들
-3
인의 봉수군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가
-치고 ( 馳告 ) 와 마라톤의 유사성
< 치고란 위급한 정보를 접했을 때 또는 봉수망이 두절되었지만 위급한사항 이 있을 때 달려가서 보고하는 제도이다 . >
1592 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대규모 왜선이 침입한 사실을 제일 먼저 발견
하고 이를 알린 사람들은
4
월
13일 음봉
(鷹峯
=현 가덕도
)의 봉수감고
(監考
)이등
(李登
)과
,연대
(煙臺
=초소
)감고 서건
(徐巾
)등 초급 장교 였으며
,다음날에는 호국용사 배돌이가 부산 황룡산에서 좌수영으로 달려가
전한다
.< 이들은 모두 승전보를 전했던 아테네 용사들과 같지만 우리들은 그를 기
억하거나 기리는 일은 어디에서도 없었다 .>
배돌이 기념 마라톤과 기념비 건립제안
임진왜란의 급보를 달려가서 보고했던 봉수 꾼들의 이야기는 왕조 사에만 길 들여진 우리들의 시각으로는 한낮 이름 없는 용사일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위하 는 마음에 어찌 상하와 귀천이 있겠는가 ?
더구나 위급한 조국의 명운 앞에서 온몸을 던져 달리고 또 달렸던 봉수군 배 돌이는 , 마라톤 평야를 달려 승전보를 전했던 아테네 용사를 연상하기에 충분 한 가치가 있다 .
그러나 ,
우리에게도 비슷한 역사적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 조차 잘 알지 못하는 까닭은 이를 기리면서 경기로 승하시키는 사람들 과 그렇지 못한 차이에서 비롯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이 글을 기념비를 건립할 때 비문으로 새기면 좋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