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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퇴계의 자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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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교육실천연구 제6권 1호 (2022.6.) 83-100.

인류세 문제와 교양교육적 담론 *

-퇴계와 율곡의 한국 자연관을 중심으로-

서욱수**

【목 차】

1. 들어가며

2. 한국 유교의 자연관과 인류세 문제

1) 퇴계의 자연관

(1) 의미의 확장 : 물리적 세계와 도덕적 주체로서의 하늘

(2) 天人合一의 風流的 조화

2) 율곡의 자연관

(1) 天人交與의 호혜적 자연관

(2) 理通氣局: 보편자와 개별자의 내적 조율

3. 인류세 문제의 조율 가능성

1) 인식의 전환-대자적 존재에서 즉자적 존재로

2) 좌표의 전환: 문명과 야만의 재평가

4. 맺음말

【초록】

이 논문은 대학의 교양교육에서 지나치게 서구적 자연관에 치우친 현대 한국의 철학적 빈 곤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 퇴계와 율곡이 언급한 자연관을 중심으로 인류세 위기에 대응할 방법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퇴계와 율곡의 자연관을 고찰하면서 교양교육의 소재를 개발하고 인류세 문제의 조율 가능성 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류세 담론에 대한 한국적 방법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세계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세 담론과 관련 한 기존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한국의 의미있는 관점들을 발견한다면 기후, 환경, 생태 등의 인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세는 파멸 과 절멸의 위기를 안고 있다. 인류세는 서양의 이성주의가 창조한 기술주의가 발전 과정에서

*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9S1A5C2A0 4081101)

** 동의대학교 디그니타스교양교육연구소 책임연구원, 62750@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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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타자화하면서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서구적 방식 이후의 해결 방식은 자연에 대한 타 자화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실존적으로 밀착한 즉자화에서 찾아야 한다. 이 논문은 이러한 추론에 착안하여 한국의 자연 친화적 관점을 찾아 보고자 한다. 정복과 지배가 아니라 배려 와 공존의 한국적 정신은 미래의 인류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 는 또한 교양교육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거니와 문화 주체로서의 소양이기도 하다.

【키워드】인류세, 인간중심주의, 자연중심주의, 테크놀로지, 실천 교육

1. 들어가며

오늘날 전지구적인 환경 문제는 차세대 교양 교육의 문제를 넘어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불가피한 논쟁거리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비례하여 필요한 상품의 생산은 더욱 가속화, 대량 화될 것이다. 인류세 문제가 직면한 이러한 통제 불가능한 생산과 소비의 지속은 필연적으로 환경오염의 가속화, 대량화도 수반한다. 가령 재활용이나 친환경 소재의 개발 등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결코 파괴의 지속은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구증가와 같은 일차적 요인의 증가 와 자연에 대한 습관적 지배 논리에 따라 환경훼손은 우리들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증가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노력의 성과 정도에 관계없이 인간 종은 기존의 인간 중심의 이분법 적 사고에서 벗어나 지구 생태계를 상수로 두면서 스스로의 존재방식과 생존방식에 대한 물 음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생태학(혹은 환경 론)은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기획이었다(김임미, 2021). 그러나 사고와 행동의 패러다임 전 환이 상징적이거나 ‘서구의 전통적 사유 습관’1)을 벗어난 새로운 場의 전환이 아니라면 그 기획은 순환론적 모순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유지 하는 수준에서의 기술주의적 생태론이나 환경론은 이미 논리적인 면으로나 실효성의 관점에 서 논쟁의 여지를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과학 기술의 문제를 폭넓은 과학 기술의 활용이나 확대 적용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적 견해는 윤리적 결단의 시간을 지연시킨다는 점에 서 더 이상 차세대 교육이나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없다.

본 연구에서는 현재 인류세 담론이 동서양의 무비판적 자연관이 혼용되는 상황에서 벗어나 한국의 자연관에서 인류세 위기를 타개할 관점이나 교양교육의 소재를 추출해 제시하고자 한 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자연관을 통해 현 단계 인류세 담론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자연은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1) 근대사회 이후 대량 생산과 생산의 기술적 가속화, 자연을 정복과 지배의 이원적 시각으로 보는 nomad ism적 사유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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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단순한 이론적인 교육 학습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체험하고 학습하는 실천 교육의 장이 기도 하다. 자연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학습 등과 같은 자연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인류세의 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주체적 대안까지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 한 목적을 두고 조선 시대의 유학에 언표된 자연관을 선별해 제시하면서 인류세 위기를 극복 하기 위한 관점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자연관을 고찰하면서 인류세 문제를 조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류세 담론은 우선 기존의 주류적 관점-서양의 자연관-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래야만 기존의 관점에 상존하는 문 제점을 파악할 여지가 있고, 우리 나름의 주체적 방법으로 국지적 혹은 전 지구적 위기 상황 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류세 담론에 대응하는 서양과 동양의 이론과 실천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한국의 토대에 기반한 기후, 환경, 생태의 인간학적 사유의 개입을 위한 정초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국의 자연관이 전 지구적 자연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을 모색하고 서양식 인 간중심주의와 동양의 자연중심주의를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이론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

2. 한국 유교의 자연관과 인류세 문제

1) 퇴계의 자연관

(1) 의미의 확장: 물리적 세계와 도덕적 주체로서의 하늘

개념적으로 天과 自然은 동양에서는 거의 같은 의미이다. 다만 天은 運命, 主宰, 義理 등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는 반면 자연은 감각 인식되는 대상세계 전체, 또 는 천지만물의 끊임없는 생성변화에 대한 상태나 원리에 대한 설명으로써 ‘스스로 혹은 저절 로 그러함(self-so)’이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이기용, 2000). 인문 사학의 관점으로는 唐 이후 북송을 거치면서 중국 문화의 주류는 불교와 도교였고 정치적으로는 북방에 위치한 遼나 金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처럼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소 수세적이었던 유교 세 력들은 이를 역전시키기 위해 道, 佛을 정치적 난관의 원인으로 몰아 비판하면서 동시에 불 교나 도교의 우수한 인식론이나 본체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연과의 일체감과 연속성을 전제로 자연에 대한 수동적인 一如를 견지한 노불과 는 달리 공자가 제안한 別愛의 차별적 세계관을 근거로 맹자의 兼·別 논쟁을 거쳐 훗날 주자 등이 ‘推己及人’으로의 논리적 확대를 시도한다는 점이 차이이다. 도교나 불교는 차이는 인정 하나 차별은 인정하지 않지만 유가는 공자의 仁의 논리를 근거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차별을 인정한다. 하늘의 천명과 사람의 성을 동류로 보고 천명과 성을 관통하는 근 원적 본질을 理라는 개념으로 정립한 사람이 宋代의 程伊川·程明道 형제이고, 이들은 천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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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동류이지 동질로 보지는 않았다. 이들을 비롯하여 훗날 주자를 관통하여 성리학의 중추 로 자리 잡은 것이 ‘理一分殊論’이다. 이들은 리의 稟賦에 따라 인간을 포함한 자연 세계는 차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사람은 차별적 본성을 이해하고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수양하여 나로부터 점차 외부로 확대하는 ‘推己及人’의 경로를 따라야 한다고 추론한다. 또 여기서 인간의 인륜이나 도덕의 명분을 찾으려고도 한다.

자연학의 관점에서 동양은 자연의 현상세계와 인간 사회의 법도나 윤리가 별개의 것이 아 니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내적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본다. 동양에서의 천은 인식론, 윤리 학 등의 근원, 즉 운명, 주재, 의리(법칙) 등 형이상학적 의미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물 리적 현상세계의 자연을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전체로서의 자연 질서와 부분 으로서의 인간 사회의 질서는 동일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의 연속선상에서 四書를 중 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性도 天의 大自我가 개별 사물의 小自我로 구현된 것을 의미한다.

『周易』의 天行(『周易』, 乾卦, 「象傳」, “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과 『中庸』의 天命(『中庸』, 1章,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은 자연과 사람 또는 사물들 사이의 내적 동일성을 유지하는 법칙 이며 인간과 현상 세계에 유출, 구현되는 ‘條理’의 의미이다. 이러한 생각은 공맹의 초기 유 가로부터 훗날 성리학의 심화과정을 거쳐 인간 사회의 윤리적 당위를 끌어내는 所以然者로서 체계화되었다. 조선의 경우도 중국의 이러한 사유 전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퇴계 이후 理의 主宰性을 중심으로 회자 되던 관념적 단계를 거쳐 氣의 물리적 근거를 논리적으로 강화 하는 경험적 원리로 진화한다.

‘天行’과 ‘天命’의 大自我를 率性하는 한 자연은 스스로 자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태계

내에서 인간만이 파멸의 속성을 유전하고 있다. 환경오염이나 생태계의 빈번한 멸종과 인간 은 늘 관련이 있어왔다. 이에 비해서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자연은 외부의 충격 없이는 파멸 적 요소를 지니지 않는다. 퇴계는 인간의 파멸적 요소, 즉 질서의 위반과 악의 發作은 ‘本然 之性’을 구현하지 못한 ‘氣質之性’ 때문이라고 한다.(『天命圖說』, 『天命舊圖』, “四端之發純理故 無不善 七情之發兼氣故有善惡”) 그의 『天命圖』에 따르면 인간은 한 편으로는 둥근 하늘을 닮 고 다른 한 편으로는 모난 땅을 닮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 편으로는 하늘을 닮아 본연지성 을 구현할 능력을 가졌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선-악의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땅을 닮아 기질의 차이에 따라 위반과 악의 逆天 행위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본연을 구현 하는 居敬 공부를 ‘存天理’라 하고 기질을 다스리는 거경 공부를 ‘遏人慾’이라 말하는 것이다.

퇴계의 『天命圖說』은 자연과 인간의 본질적 동질성을 체용의 관계로 이해하는 성리학적 논리를 朱子學的 도식에 따라 그려낸 것이다. 따라서 『天命圖說』은 이전의 주장과는 다른 독 창적인 작품이라 볼 수는 없고 이해하기 쉬운 교육적 목적과 朱子學에 대한 성실한 이해와 이론적 심화를 목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체론적이고 종교적 관념으로서의 天을 인식론적 관념인 세계의 내적 법칙으로서의 理로 객관화한 것이 주자학의 성과라고 볼 때, 四端과 같은 윤리적 절대가치를 리의 작용으로 독립시키고, 나아가 도덕적 주체로서 인 간의 존재를 부각한 퇴계의 사상은 중국에서조차 주장되지 않았던 主理的 세계관으로 심화하 였다. 말하자면 주자학이 리를 본체론적 관점에서 이론을 정리한 반면 퇴계는 이를 윤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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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로서 인간과 자연의 섭리를 필연으로 통섭하려는 의지가 확연해 보인다.

이것은 형식상 보기에는 주자 당시 도교나 불가에 맞서 세계를 종교적 관점에서 철학적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을 다시 리의 主宰的 기능을 수용하여 세계에 대한 이해를 종 교적 관점으로 환원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과 인간의 필연적 관계를 언급한 ‘中庸의 본지’2)를 취한 것이다. 나아가 물리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는 자연에서 도덕 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추론하여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질서를 위반하는 인 간의 독단과 오만을 경계하려는 교육적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퇴계의 방식으로 ‘天地合德’(『易經』 乾卦)이며, ‘天地化育’(『中庸』 22章)의 聖人大路를 현시하 고자 했던 것이다.

(2) 天人合一의 風流的 조화

성리학 위주의 도학자인 퇴계는 무엇보다도 덕성 함양이 우선이다. 공자의 仁者樂山, 智者

樂水를 단순한 글자 해독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退溪는 물과 산의 특성에서 ‘智’와

‘仁’의 德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본의라고 이해한다.(『退溪全書』 권37 『答權章仲』. “知

二樂之旨 當求仁智者之氣象意思”) 退溪가 자연을 찾는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생각하여 보면 山林 속에 즐길만한 것이 있음을 일찍이 알았으나, 중년에 망령되게 출세 길로 나아가, 풍진에 엎어져 세월을 헛되이 보내다가, 거의 돌아오지 못하고 죽을 뻔하였다. 이제 비 로소 새장 같은 세상을 벗어나 농촌으로 돌아와, 지난날 말하던 山林의 樂이 의외로 나의 앞에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묵온 病들을 해소하고 남모르게 지녀 온 근심(幽憂)을 없애게 되었다.”3)

이 글은 자연을 가까이 할 때, 인간은 ‘病과 근심’도 떨쳐버릴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윤사 순, 2000). 도학은 천지자연의 이치를 체현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仁者樂山과 智者樂水, 산림의 樂과 병의 해소는 천인합일의 도학적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동학적 개념으로 置換하 면 하늘의 리를 내 몸 속에 모시고(侍天), 나 또한 理의 주체로서 본연의 純善을 기르고(養 天), 현실에서 몸으로 체화하고 이를 실천(體天)하면 타락의 근심을 면할 수 있다는 도학적 수양론이자 교양 교육론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 즐기는 유학적 풍류는 “有慕玄處, 事高尙而樂”의 도가적 풍류가 아니라 “悅道義, 頤心性而樂”의 도덕적 지향성이 있다.(『退溪全 書』 권20, 「溪山雜誌」 下. 참조) 이로써 그가 자연을 애호한 이면에는 道德의 실천을 위한 心 性 修養의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自然은 도덕을 지향하여 행하는 2) 『中庸』 22章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3) 『退溪全書』 권20, 『溪山雜誌』 下, ”顧於山林之間, 尻知有可樂也, 中年妄出世路風埃顧倒, 逆旅推遷, 幾 不及自返而死也, (…)乃始脫身礎籠, 投分農敵, 而向之 所謂山林之樂者, 不期而當我之前矣, (…)然余 乃今所以消積病裕幽愚 而姜然於窮 老之域者捨是將何求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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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性 修養의 準撮인 동시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場이다(안병주, 2010). 이러한 풍류 문화는 일찍이 화랑도의 ‘周遊山水’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도덕과 자연의 융합적 조화 는 중국과는 차이가 있는 조선의 특색이기도 하다.

퇴계의 자연관은 현대와 같은 관점에서의 자연은 아니고 자연보호 등의 슬로건과는 거리 가 멀다. 왜냐하면 퇴계 당시 환경이 지금과 같은 파멸적 상황도 아니었고, 인간에 의해 자 연이 훼손될 위기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덕성과 수양의 場으로서의 역할이다. 그가 자연에 노닌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체득 하고 이를 수용하는 ‘法天道立人道’의 유교적 풍류를 의미한다. 理自然의 내재적 가치를 體天 하지 않는 자연과의 대면은 그에게는 의미가 없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퇴계는 “오직 사 람만이 그 빼어난 것을 얻었다”(『太極圖說』 “惟人也 待其秀而最靈 形旣生矣 神發知矣”)고 말 하고, 또 “군자는 덕성을 수양하기 때문에 길하지만, 소인은 거스르기에 흉하게 된다”(『太極

圖說』 “君子修之吉 小人悖之凶 故曰立天之道 曰陰與陽”)고도 말한다. 이것은 태극도설과 같

은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사람마다의 내적 根機에 따라 理自然으로서의 천도를 받아들이는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군자 소인의 이분법적 가치 분절은 차별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 라 앞서 말한 別愛의 사례와 같이 추기급인의 실천 경로를 따르기 위한 방법적 분별이라 보 아야 한다.

자연의 풍류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고 ‘游心太玄’의 경지를 추구하는 궁극의 좌표는 천인합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생각에 아마 욕심 없는 깨달은 이가 청명 고원한 심회로 어쩌다가 光風 霽月을 만나면, 自 然의 경관과 정취가 하나로 되니, ‘天 과 人이 합일’한 것이다. 興趣가 초탈 미묘하고, 정결(潔 淨), 정미 (精微)하며, 조용하고도 상쾌한 氣象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고 즐거움(樂) 또한 무 한하도다.”4)

자연은 이와 같이 인간과 合一 한다고 할 정도로 調和를 이루어야 할 대상이다. 그 조화된 자연으로부터 인간은 美感을 비롯하여 治病, 治心, 德性函養과 道德 지향의 수양의 준거 및 幸福(樂)을 얻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윤사순, 2000). 天은 원래 蒼天, 上帝 등의 의미 로 출발하였으나, 특히 孔子, 孟子 등을 기점으로 良心의 근거, 自然의 원리의 의미가 추가되 는 한편, 荀子부터는 ‘自然’ 자체를 가리키다가, 程伊川 이후의 性理學者에 이르러 ‘理’(天理) 의 의미까지 더하게 되었다(윤사순, 2000). 중국 대륙으로부터 이어진 유학사의 정맥은 이처 럼 조선의 퇴계에 이르러 윤리적 관념에서 현실적 교육과 실천으로 한층 심화되었다. 이것은

nomadism 색체의 지배와 정복이 아니라 모시고, 기르고, 체현하는 조선 도학의 배려와 공

존의 자연을 의미한다.

4) 『退溪全書』 上, 권28, 「答李宏仲」, “但愚恐只是無欲自得知人 淸明高遠之懷間 遇著光風霽月 之時 自然 景與意會 天人合一 興趣妙 潔淨精微 從容麗落底氣象 言所難狀 樂亦無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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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율곡의 자연관

(1) 天人交與의 호혜적 자연관

하늘의 법칙과 인간을 포함한 사물의 법칙은 서로 통하는 원리가 있고 사물의 법칙은 하 늘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유기체적 인식은 동양적 자연관의 근간이 되어왔다. 공자 이 전에 이미 형성된 초기 詩歌인 『詩經』에도 이러한 기저 사상은 이미 존재한다. “하늘이 수많 은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백성들이 그 이치를 알고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詩經』, 「大雅」, “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兼彛 好是懿德”)는 노래는 이미 이 당시에 하늘의 이치를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는 관념이 상식화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른바 자연의 근원적 실체인 리의 내재원리가 모든 사물에 투사되고 인간 또한 자연의 내재 원리가 투사되어 있으므로 자연의 원리를 쫓아 삶 속에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 동양적 사고이 자 윤리의 근원이다. 상하의 구분이 명확한 主宰天으로서의 의미가 강하게 감지되지만 四書 의 두드러진 공통 주제인 ‘法天道立人道’의 기본 도리는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동서양의 차이는 원리적 추론으로 인도의 正倫을 세우고자하는 동양에 비해 객관적인 사 물과 사실에 근거하여 현실의 법칙을 도출하려는 서구의 방법적 차이에 있다. 자연을 대상화 하고 감각적인 경험 세계의 실재로서 인식하는 서양적 사고와는 달리 동양은 자연의 개념 정 의에 도덕적 의미를 반드시 첨가한다. 이 도덕적 의미야말로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자연의 귀 속 존재로서 인간의 관계를 필연의 고리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天이라는 개념이 主宰之 天, 義理之天 등의 의미로 주로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담고 있었으나 점차 서구적 의미의 물리적 자연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은 앞서도 설명한바 있다. 그래서 자 연을 인간으로부터 대상화, 타자화하여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과 인간을 일체화, 내면화하여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즉자적 존재로서의 자연으 로 인식하는 것이 동양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이다.

동중서의 ‘天人感應’을 기점으로 ‘天人合一’은 유학의 이념으로 확고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 었다. 이러한 유학 이념의 조선 유입 이후 퇴계에 의해 윤리나 수양의 誠者로서 天과 誠之者 로서 人의 관계, 즉 도덕적 줄탁 관계로 재해석되었다.(『中庸』, 20章, “誠者天之道 誠之者人 之道”) 또 율곡에 이르면 자연으로서의 천과 자연의 성을 부여받은 사람이 하늘의 본성을 받 들고 서로 더불어 교여하는 천인교여의 개념으로 정리된다.5) 율곡은 이러한 천인감응이나 천 인합일의 유교적 이념을 수용한다. 그러나 천인교여는 이들과 차이가 있다. 천인감응이나 천 인합일은 다분히 종교적이거나 천의 주재적 기능을 전제하여 상하로 작동하는 반면 천인교여 에서는 이러한 천의 우월적 기능 보다는 모든 자연의 내적 원리로서 사물의 본래 그러한 소 이를 담당하는 所當然의 자연질서에 우선 중점을 두고 있다. 나아가 사람의 행위에 따라 자 연은 파멸과 상생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교여의 주체는 하늘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러므로 율

5) 『栗谷全書』, 권14, 雜著 「天道策」 “人者天地之也 人之心正則天地之心亦正 人之氣順則天地之氣亦順矣 然則理之常 理之變者 其可一委於天道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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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에게 있어서 자연과의 상생을 위해서는 인간의 도덕적이고 전향적인 실천이 무엇보다도 중 요하다. 다만 자연의 섭리(천도)와 사람의 일(인도)은 서로 응하는 것이어서 천지의 안정은 사람의 덕을 닦는데 달려있다(『栗谷全書』, 14권, 雜著 「天道策」, “以此觀之 天地之位 萬物之 育 豈不繫於一人之修德乎”)고 하는 것은 하늘의 정연한 질서에서 군주나 백성의 도리를 추론 하고 실천의 당위를 구하고자 함이다. 그는 자연의 섭리를 파악하여 理의 정상(常)과 변괴

(變)의 차이를 변별해 내고,그 지각의 주체인 인간 本然의 실현을 통하여 변괴의 理를 정상

으로 변화시킨다는 도덕적 실천에 관한 해명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었으며 이것을 토대로 사 람이 취해야할 바의 도리를 규명하고 있다(곽신환, 1992). 이것은 하늘과 인간의 필연적 인과 관계와는 별도로 사회적 필요에 따라 자연의 섭리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은 있어 보 인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도덕을 자연의 섭리에서 추론한 준칙이 인간의 사회적 윤리와 모순되지 않는다면 합리적 연대관계로 인식하는 동양적 사유의 특징이기도 하다.

율곡은 특이하게 天人交與는 사람의 역할이 제한된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라 천(자연)의 변 괴조차 사람 스스로 능동적인 인심의 순화를 통해서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본다. 그는 天人交 與를 자연과 인간이 호혜적 相補, 相資의 의미로 사용하여 “천지는 사람의 형체이고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다. 사람의 氣가 和하면 천지도 그 和를 이루고 사람의 기가 不和하면 천지도 그 도수를 잃는다.”6)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의 인심 여하에 따라 천재지변으로 징벌하거나 보상하는 수직적 천인감응의 관계를 넘어 사람의 노력에 따라 하늘도 감응하는 수평적 천인 감응을 말한다. 주관적인 판단으로 본다면 율곡의 이러한 수평적 호혜성은 그의 경험에 따라 불교의 인연설을 유교적으로 원용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천지의 和가 사람의 氣和에 따라 능동적으로 반응한다는 생각은 서구 사회의 실증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과학기 술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분히 관념적이고 샤머니즘적이기까지 하다.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Wadie Said, 1935~2003)가 사용하는 의미의 ‘오리엔탈리즘’(E. said. 1978.)7)을 기 준으로 동양이나 한국의 자연관은 천과 인의 상호 인과적 관계에 있어서는 다분히 비약적이 라고 볼 수도 있다. “일찍이 옛날 災異가 생겨난 것을 연구해 보니 德을 닦은 治世에는 나타 나지 않았으며 薄蝕의 변화는 모두 숙손 계손씨의 쇄락한 정치에 나타났으니 곧 天人交與의 관계를 여기서 알 수 있다”8)는 언설을 보면 그러한 혐의가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율곡이 말하는 천(자연)과 인은 종교적 종속성을 지닌 징벌과 보상의 관계가 아니 다. 자연은 主宰的이고 권위적인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理라는 所以然의 법칙에 따라 물질로 서의 기가 취산하는 사물들의 총합이고, 인간은 이 자연과 횡적으로 관계된 호혜적 관계라고 6) 『栗谷全書』, 拾遺, 권5, 雜著2 「壽夭策」, “天地者 人之形體也 人者 天地之心也 人之氣和 則天地致其和

矣 人之氣不和 則天地失其度矣”

7) 사이드는 동양을 정복하거나 지배하고 또는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제도 및 스타일’로 정의한다. 서구 국가들은 동양은 비합리적이고 관념적이지만, 서양은 합리적이고 실증적이라 분석하면서 동양에 대한 우 월 의식이나 지배 논리를 정당화 시켜왔다. 서양과 동양의 경계와 차이를 끊임없이 확장, 오늘날에도 다 양한 매체와 문화 양식들을 통해 열등한 동양이라는 이미지가 재생산 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왜곡된 관념이 근대 서구 사조의 유입과 미디어 등을 통해 동양인에게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8) 『栗谷全書』, 권14, 雜著, 「天道策」, “愚嘗求諸古昔災異之作 不見於修德之治世而薄蝕之變 咸出於叔季之 衰政 則天人交與之際 斯可知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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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 그러므로 사람의 욕망이 자연을 지배하는 역천 행위를 지양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이른 바 ‘遏人慾存天理’의 체화만이 공존(교여)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곡의 입장에서 는 자연 생태계와의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욕망을 억제하고 천지(자연)의 본질인 리의 소이(天地之心)에 따라 부여받은 인간의 윤리적 본성(人之心)을 회복해야 가능하다고 보 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세 시대의 기술 만능과 생산 과잉에 따른 자연과 인간의 불화를 해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양심과 도덕의 회복과 같은 상식의 복구가 지극히 중요하다는 충고로 받 아들인다면 학술사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2) 理通氣局: 보편자와 개별자의 내적 조율

‘理通氣局’의 학술사적 발단은 성혼과의 논쟁에서 氣一元論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려는 의 도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기일원론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라’는 과거 시험의 답안인 「天道 策」에 이미 나타난다. 그러므로 리통기국론은 율곡의 철학에서 오늘날의 동서양의 자연 개념 과 논쟁 좌표상 가장 일치하는 지점이라 하겠다. 리통기국이라는 개념이 불교적 용어인가 아 닌가(손영식. 2015)9)를 떠나서 리일분수의 순리에 따라 사물이 구성되었다는 율곡의 생각은 자연 현상에서 종교성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합리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절대적 으로 선한 존재인 신은 모든 존재보다 우월한 제일의 존재로 우리는 그를 신이라 부른 다”(Etienne Gilson. 김기찬 옮김. 1997)는 에티엔느질송(Etienne Gilson)의 보편자에 대한 서구적 인식이나 “天地가 있기 전에도 필경 理가 있었고, 만일 理가 없으면 천지 또한 없

다.”(『주자어류』, “未有天地之先 畢竟也只是先有此理 便有此天地 若無此理 便亦無天地”)는 유

교의 인식은 보편자에 대한 동서양 공통의 인식이고 이것은 이전의 종교적 관습을 세습한 이 념적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이해는 율곡에 이르러서는 모든 사물의 내부적 조리로서의 의미로 한정된다.

자연에 대한 개념을 정의할 때 동서양의 접근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서양은 대체로 배중 율의 형식논리를 추종하여 신이나 관념적 보편자의 개입을 배제하고 가시적이고 경험적이며 물화된 모든 것을 자연의 의미로 반영한 반면 동양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 중국의 성리학 주 류들이나 퇴계처럼 사물의 근원인 기의 주재자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하거나 율곡처럼 리 의 전통적 지위는 인정하지 않으나 본래 당연히 그러한(자연) 방향으로 사물의 생장소멸을 가능하게 하는 所以로서의 ‘理氣之妙’를 말한다. 물론 언어표현에 있어서 ‘理氣之妙’는 아리 스토텔레스 형식논리의 원리인 배중율(排中律)을 적용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황준연, 2012).

이러한 논리들은 서구의 이원론적 형식논리에는 벗어나 있지만 여기에는 인식논리의 부재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당연한 도리를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할려는 동양적 사유기조가 첨가되어 있다. 특히 율곡은 ‘리기지묘’를 리기의 ‘本合’, ‘妙合’, ‘理氣不相離之妙’, ‘理氣之 妙’, ‘理氣之妙用’(김승영, 2015) 등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때 이이는 ‘리기지묘’를 대체로 9) 율곡이 리통기국을 설명하면서 “리는 형체도 없고, 함이 없다”라거나 “리는 근본과 말단이 없고, 앞과

뒤가 없다”라는 설명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성리학의 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율곡의 리통기국은 불교 에서 온 것이라 보고 있다.

(10)

‘리’와 ‘기’라는 두 축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로서 ‘묘’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 하다. 묘라는 단어가 지닌 언어적 모호성이나 다의성은 아마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 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언어적 회피기동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가의 ‘以心傳心’의 법이나 『道 德經』의 ‘道可道非常道’의 의미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밖의 세계(황준연, 2012)를 설 명하기 위한 방편이다. 현상 세계에 반드시 존재하는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을 수 없을 때 굳이 언어의 한계를 각오하고 그 원인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억지로 찾아야 할 필 요는 없다. 노자의 말처럼 억지로 이름 붙이면(道可道)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非常道) 언 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현재의 결과가 발원한 근원을 리라고 보고, 여기서 유출되는 현상을 妙用 또는 分殊라 말하기도 한다.

‘理一分殊’는 정이천이 장횡거의 『西銘』을 해석하면서 리와 기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고

인간의 존재양상을 해명하기 위해 설정한 이론인데, 주자에 의해 보다 구체화 되어 성리학에 있어서 일체 존재구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되었다. 理一은 유출된 현상세계의 다양 성을 초월하는 근원적 통일성을 의미하고, 분수란 모든 존재의 종적 차이를 의미한다(황의동,

2011). 성리학의 자연현상은 리일에서 분수까지의 다양성이다. 다만 주자나 퇴계의 입장에서

는 리의 주재적 기능을 첨가하여 理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고, 율곡은 氣發로 설 명하여 리의 주재성을 배제하고, 기의 자립적 능동성을 주장한다. 다만 보편자로서의 리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는 모든 사물들의 생겨나는 소이이므로 리통이라 하고, 개별자로서의 기는 현상세계의 만물로서 이미 형체화된 사물을 통칭하므로 기국이라 말한다.

리는 귀한 존재로 기를 천한 존재로 본다(『退溪全書』, 卷12, 「與朴澤之」, “人之一身 理氣兼 備 理貴氣賤”)는 것이 퇴계를 비롯한 유학사의 주류였다. 그러나 율곡은 기를 천한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리의 소이에 따라 기가 스스로 凝聚하여 생성(氣自爾)된 자연은 리의 소 이에 따라 생멸할 뿐 스스로 역천의 본능은 지니지 않는다. 다만 인간만이 자연의 섭리를 벗 어나는 역천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氣는 이미 形跡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本末이 있고 先後가 있다. 氣의 본체는 湛一淸虛할 뿐이니, 어찌 일찍이 糟粕 ·煙壗 ·糞壤 ·汚檅의 氣가 있겠는가. 만은 그것이 升降飛揚하여 일찍이 쉬지 않으므로 천차만별의 수많은 변화가 생긴다. 여기에서 氣가 流行할 때에 그 本然을 잃지 않은 것 도 있고, 그 本然을 잃은 것도 있다. 그 本然을 잃으면 氣의 本然은 이미 있는 곳이 없다. 치우 친 것은 치우친 氣요, 온전한 氣가 아니며, 맑은 것은 맑은 氣(本然之氣)요, 탁한 氣가 아니며, 찌꺼기와 재는 찌꺼기와 재의 氣요, 맑고 깨끗한(湛一淸虛) 氣가 아니다. 이는 理가 만물의 어디 에서나 本然의 妙가 그대로 있지 않는 바가 없는 것처럼 氣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氣의 局限(氣局)이라고 하는 것이다.10)

기가 一陰一陽하여 응취할 때 기의 운행이 본연을 잃으면 탁한 기가 응취하게 되고 그 여 10) 『栗谷全書』, 卷10, 「答成浩原」, “氣已涉形跡 故有本末有先後也 氣之本則湛一淸虛已而 曷嘗有糟粕煙 壗冀壤汚檅之氣哉 惟氣升降飛揚 未嘗止息故 參差不齊 而萬變生焉 於是氣之流行也 有不失其本然者有 失其本然者 已失其本然則氣之本然者 已無所在 偏者偏氣也 非全氣也 淸者 淸氣也 非濁氣也 糟粕煙壗 糟粕煙壗之氣也 非湛一淸虛之氣也 非若理之於萬物本然之妙 無乎不在也 此所謂氣之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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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 선악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栗谷은 “性이 氣를 타고 움직인 것이 情”(『栗谷全書』, 卷10, 「答安應休」, “性之乘氣而動者乃謂情”)이라고 하고 四端과 七情을 氣發理乘의 결과로 보 아 선악이 모두 기에서 나온다고 본다.(『栗谷全書』, 卷10, 「答安應休」, “所謂氣發而理乘之者可 也 非特七情爲然 因端亦氣發而理乘之也”) 보수적 성리학의 계보를 벗어난 율곡의 견해는 형 이상학적인 공담에 매몰된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실의 도덕윤리를 문제를 합리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율곡은 천지자연의 위대함과 자연 만상의 변화는 내적 원리로서의 리와 물질적 기의 묘용 (『栗谷全書』, 권14, 雜著, 「易數策」, “一理渾成 二氣流行 天地之大 萬物之變 莫非理氣之妙用 也”)이라고 본다. 이 묘용의 자연 속에는 반드시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인간과 자연을 대자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곧 하늘(자연)이라는 즉자적 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내적 근 원인 四端七情과 같은 天理가 자연의 理法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천리는 자연 본연의 순리 속에도 구현되어 있으므로 사람은 그 순리를 찾아 잃은 본연을 바로잡고 不和를 和로 바꾸어 야 한다11)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대자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은 자연을 대상으로 파악하여 타자화된 관계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리와 기는 분리할 수 없고 서로 묘용의 관계 로 얽혀있는 것처럼 리-기의 묘용체인 사람과 자연이 분절되어 이원적으로 사유될 수 없는 것이다. 율곡의 천인교여라는 개념도 이러한 분리될 수 없는 즉자적 일체와 조화를 의미한다 고 본다.

3. 인류세 문제의 조율 가능성

1) 인식의 전환-대자적 존재에서 즉자적 존재로

인류가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기술의 문제를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순 환론적 사고는 ‘다이달로스의역설’12)에 직면한다. 기술만능이 인류세의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술은 실행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이것은 역으로 다시 생태계를 파괴하는 요인으 로 작동했던 경험 때문이다. 기술 만능은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시행 착오에 따른 파멸을 염 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 생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도구의 역

11) 『栗谷全書』, 拾遺, 권5, 雜著2 「壽夭策」, “天地者 人之形體也 人者 天地之心也 人之氣和 則天地致其 和矣 人之氣不和 則天地失其度矣”

12) 아들 이카로스가 크레타 섬을 탈출할 수 있도록 날개를 만들었으나 이카로스는 경고한 경로 이탈로 추 락하여 죽는다. 최선의 방법이 최악의 결과를 예기치 않게 초래하는 상황을 흔히 ‘이카로스의 역설’이 라 하지만 필자가 ‘다이달로스의 역설’이라 명명한 것은 날개 제작의 주체가 다이달로스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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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벗어나 인문학적인 사유의 전환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인류세의 환경에 대하여 윤리적 각성이나 기술적 방법의 전환이 아니라 기술적 문명 지향에서 도덕적 인격 지향으로 문화 지 향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자연관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국인의 자연관은 자연에 대한 윤리적 인식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과 합일된 즉자적 동일 체로서의 Ātman13)이고, 자연이 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의 몸이며 나 자신의 실존이라는 유 기체적 합일이고 천인합일의 함의이다.

유가에서의 ‘法天’은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높은 도덕적 경지를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최선의 생존을 위한 기술적 방법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인격적 인 방법의 요청이다. 물질 지향이 아니라 정신 지향이라는 점에서 동양의 사유가 대체로 그 러하다. 『荀子』에도 “人道를 잘 닦아서 어긋나지 않으면 하늘이라도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릴 수 없다”14)는 언급이 있다.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다분히 목적론적 필요에 따라 하늘(자연)을 해석한 자의적 의도는 감지되지만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길을 분리해서 판단하 지 않으려는 합일적 사고에 대한 애착도 감지된다.

자연과 인간의 실존을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하는 바는 퇴계나 율곡에서 보는 바와같이 한 국인의 자연관에서도 유효하다. 다만 시대의 경과에 따라 진화된 합리적 이성이나 경험적 실 증을 우선하는 이론들이 득세하면서 종교적이거나 목적론적 비약을 어느정도 제거했을 뿐이 다.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퇴계의 천인합일이나 율곡의 천인교여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 다. 퇴계는 다음의 시로 자연과 합일의 경지를 예찬한 바 있다.

山前에 有臺고 臺下애 有水ㅣ로다 떼만 며기 오명가명 거든

엇다다 皎皎白駒 머리 고(「陶山十二曲」, 前六曲, 其五)

退溪는 自然을 매개로 하여 “道義를 기뻐하고 心性을 기르는 즐거움”이 얻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自然의 法則(사실의 법칙)과 道德의 法則(당위의 법칙)이 그 근원에서 일치되는 것으 로 이해하는 것은 退溪思想의 特性이라 할 것이다. 道義의 근본에 천착한 퇴계의 自然觀은 유학 일반의 宇宙觀 및 自然觀과 마찬가지로 “天人合一”의 사상에 집약된다. 天人合一思想의 근저에는 宇宙自然의 理法과 人間의 道德이 하나의 원리로 일관되어 있다는 신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김광순, 1993). 말하자면 즉자적 존재로서의 인식이다.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분 절된 별개의 존재로 타자화할 때 인간은 자연에 대한 소유욕구가 발동한다. 퇴계는 이를 윤 리적으로는 하늘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함유된 칠정의 기발이라고 본다.

율곡의 경우도 퇴계와 거의 유사하다. 전국시대 맹자가 비유한 牛山之木15)의 사례를 빗대 13) 힌두교에서 생명은 숨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아트만의 원래 뜻은 숨쉰다는 뜻이다. 숨쉬는 생명인

아트만은 ‘나’를 말하며, 따라서 한자로는 아(我)로 표기된다. 힌두교에서는 개인에 내재 (內在) 하는 원리인 아트만을 상정(想定)하고, 우주의 궁극적 근원으로 브라흐만을 설정하여 이 두 원리는 동일한 것(범아일여, 梵我一如)이라고 파악한다.(위키백과, Wikimedia Foundation, Inc.)

14) 『荀子』, 「天職篇」, “疆本而節用 則天不能貧 養備而動時 天不能病 修道而不戴 天則不能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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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율곡은 자연과 인간의 교여의 불가피성을 언급한다. 그는 “선조가 세대를 거쳐 가면서 이 루어 놓은 소나무도 도끼로 벤다면 하루 아침에 다 없어진다고 하고, 이루기는 어렵고 부수 기는 쉽다”(『栗谷全書』, 卷14, 「護松說」, 참조)고 충고한다. 자연을 대자적으로 이원화하고 인 간의 필요에 따라 수단화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공유지의 비극을 경계한 것이다. 이와같이 율 곡의 자연관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과 자연을 분리하거나, 수단화하거나, 타자화하지 않는다. 반대로 서구 근대성의 특징인 양분법적 체계에 따라 작동되는 ‘타자성의 수단화’ 즉 자연의 대상화는 타자화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주체 이외의 물리적 대상 세계가 바로 自然이란 개 념으로 범주화되고, 자연은 단지 그냥 존재하는 재료에 불과한 것으로 객관적인 분석의 대상 이 되는 것이다(장석만, 1992). 율곡의 자연관은 이러한 타자화되고 분절된 자연과 사람이 아 니라 사람과 자연을 합일의 존재, 즉 자연과 일체화된 즉자적 존재로 인식하여 자연과 소통 하고 연대(천인교여)하고자 한다. 이것은 자연을 타자화 하여 대립적 구도로 파악한 근대 서 구의 이념이나 인간을 인위적 개조의 기술적 대상으로 구획한 지금의 포스트 휴먼 시대와는 인간의 실존적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2) 좌표의 전환: 문명과 야만의 재평가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편견은 인류 문명사를 끊임없이 선악의 잣대로 평가하고 선 택을 강요해 왔다. 과학 기술주의의 성과인 문명과 문명의 대척점에서 혐오와 배척의 대상으 로 낙인찍힌 야만의 이미지는 선택의 기회조차 거부당한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해하고 있는 야만의 이미지가 왜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하는지는 반문해 볼 여지가 있 다. 그 반문의 시작은 현대사회로부터 다가올 미래 사회는 극단적인 기술 중독 사회라는 지 점이다. 편리성과 효율성에 기반하여 진행된 근대 산업사회 이후의 성과는 노동의 과정 소멸 이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원시 사회로부터 초기 산업사회까지의 극단적인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여가 창출이라는 노동 과정 축소를 통한 양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자본이나 상품의 생산을 도모한다. 또 인간의 자아실현과 정신적, 육체적 활력을 얻 기 위한 여가 확보라는 내적 목표가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이르러 부분적이긴 하지만 자아실현의 과정은 과잉 축소되고 노동과 여가의 균형은 급격하게 여가 과잉 상태로 기울고 있다. 노동은 기계에 의해 대체되고 사람 의 역할이 기계의 작동이나 감시에 한정되는 버튼화16)는 노동의 과정 소멸에 따르는 역할의 감소, 균형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근현대의 이행 과정에서 제기 되었던 상품으로부터 인간이 소외 된다는 상품 소유의 문제에서 인간 자체의 실존, 존재 가치가 배제되는 인간의 15) 미국 UCSB 생물학과 교수인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이 1968년 12월 13일자 사이언스(Science)지

논문의 제목에서 처음 용한 ‘공유지의 비극’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孟子』, 告子 上(8章)에 나오는 말 이다. “牛山之木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伐之, 可以爲美乎?”

16) 인간의 노동력에 의한 생산 과정이 삭제된 자동화된 기술사회의 상징으로 표현한 개념. 필자는 특히 극대화된 산업 자본주의 사회의 효율성이 내포하고 있는 자기모순, 즉 노동과정의 학습이나 성취를 통 해 달성되는 자아실현의 기회 박탈과 같은 인간 실존의 훼손을 내포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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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화 문제와 관련이 있다. 환경이나 인구, 도덕적 타락 등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 스스로의 자율의지를 배제한 기술주의적 해결 방식은 자연 생태계 안에서 인간 개개인 의 자기 생존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게 한다는 점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타자화는 문제가 있다. 야만이 불필요한 살생이나 폭력 등을 의미한다면 역설적으로 생존을 위한 고대 사회의 수렵이나 채집, 원시적인 농경보다 포스트 휴먼의 등장은 훨씬 더 야만적으로 보인다. 그러 므로 현대의 문명사회는 기술적 진화보다 인간의 자아나 실체를 긍정하고 과정을 복원하는 인식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하여 기계에 인간이 예 속되거나 인간의 사이보그화에 따른 실존 소멸의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牛山(공유지)의 비극’이나 ‘다이달로스의 역설’과 마주하게 된다는 뜻이다.

문제 해결의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전 생태 환경 문제에서의 기술주의적 접근 방 식은 명백히 그 실효성을 상실했다. 왜냐하면 기술적 방식 그 자체가 또 다른 환경오염의 원 인으로 작동하여 오염의 순환을 야기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생태계 위기는 서구 문명이 초래한 것이며 서구의 인간 중심주의는 자연을 수단으로 보는 도구적 자연관과 表裏 관계에 있다(한면희, 1997). 인간과 자연의 왜곡된 관계를 해결하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정복 과 지배의 초기 자본주의 형식과 논리가 계속 진행되는 것은 방향이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현대 서구 사회의 포스터 휴먼에 대한 정의가 여전히 기술주의적 방향으로 흐르고 심 지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환경 문제에 대한 기술적 낙관론과 다를 바 없이 그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나 의식을 기술적으로 조작하여 초인간으로 능력을 향 상 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위 조작이지 인간의 실존적 자아나 본질적 가치를 인간 스스로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향상 시키는 인격적 체현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 는 공간적인 좌표뿐만 아니라 시간적 연속성을 점유한 존재이고 결과로서의 공간적 좌표는 시간적 연속성으로서의 존재 형성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과정은 결과의 내적 존재 양식이 고 결과는 내적 존재 양식에 따라 생멸의 이유나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 다.

4. 맺음말

르네상스나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근대 사회의 특징은 개인을 자연, 사회에서 분리 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정복과 지배의 자본주의적 도식을 일반화시킨 것이다. 이것 은 개인을 중심으로 세계를 타자화 시키면서 생산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배타적 관계를 의 미한다. 초기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서 배타성은 자연을 개인 또는 인간을 위한 도구적 대상 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윤리적 통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자본주의는 과학기술과 결합하면서 자연의 자원들은 빠른 속도로 인간을 위한 도구로 훼손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오 늘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근래 자연 생태의 위기는 지역적인 위기에서 전지구적 위기로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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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되었고 인류생존은 기본 생존 조건마저 위협 당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자연 파괴의 결과는 자연계의 자기정화 메카니즘 기능마저 마비 시켰다(김형일, 2001). 이른바 인 류세 시대의 모든 환경 변화가 경고하는 위기는 좁게는 개인, 넓게는 인류가 원인이라고 진 단한다. 이른바 자연을 타자화 시킨 과거의 형식에서 역으로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타자화하 여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 구조를 통제해야 한다는 논쟁이 오늘날의 포스트 휴먼 논쟁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을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파악하는 한 자연파괴 등의 환경 문제는 결 코 해결될 수 없다. 둘은 서로 종속의 관계가 될 수 없다. 모든 자연 생태는 각자 주어진 생 존 기능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존재한다. 생존 기능의 제한이나 박탈은 그 존재의 실존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그러한(自然) 생존 기 능은 어떤 경우에도 제한되거나 박탈당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로서 사유를 생 존 기능으로 삼는다. 설령 진화의 방향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사유나 신체를 인위적으로 조작 하거나 간섭해서는 안된다.

SF영화 『더 나은 선택』과 같은 의식이나 신체가 조작되고 통제되는 포스트휴먼 사회는 새

장 속의 새처럼 본래 스스로 그러한 존재의미와 가치의 박탈이고 상실일 뿐이다. 유일한 해 결책은 모든 자연의 동등한 가치와 실존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의 실현이다. 한국의 전통적 인 자연관이 유의미한 것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侍天, 養天, 體天하는 어우러짐이다. 기계에 종속된 의식은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과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위해서 존재한다. 손가락으로 누른 버튼이 상품 생산의 과정을 대체한 버튼화된 현대 사회 문명과 최소한의 필요 상품을 얻기 위해 과정이 극대화된 초기 인류의 야만은 상반된 가치가 아니다. 속도에 마취된 기술주의적 맹목성은 인간의 본연성을 실현할 기회마저도 박탈할 것이다. 속도와 기계에 감금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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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nthropocene and Liberal Education Discourse

- Focusing on Korea's view of nature by Toegye and Yulgok

Seo, Uksu

This thesis was written as a part of an effort to overcome the philosophical poverty of modern Korea, which is overly biased toward the western view of nature in the liberal arts education. I would like to explore a way to respond to the anthropocene crisis focusing on the view of nature mentioned by Toegye and Yulgok in the Joseon Dynasty. To this end, this study aims to develop materials for liberal arts education while examining the view of nature of Toegye and Yulgok, and examine the possibility of coordinating the anthropocene issue. In the process of exploring Korean methods for the Anthropocene discourse, this study hopes to secure a theoretical foundation for overcoming current global crises. If we critically accept existing theories related to the anthropocene discourse and discover meaningful Korean perspectives, it could contribute to a certain extent in solving human problems such as climate, environment, and ecology. The anthropocene is on the brink of destruction and extinction. The anthropocene occurred when technologism created by Western rationalism changed nature in the process of development. Therefore, the post-Western approach should be found not in the otherization of nature, but in the instantaneousization of nature. Based on this reasoning, this thesis tries to find the nature-friendly perspective of Korea. The Korean spirit of consideration and coexistence rather than conquest and domination would be a good way to solve future human problems. Such discussion is also an important subject of liberal arts education and knowledge as a cultural subject.

【Key Words】anthropocene, anthropocentrism, naturocentrism, technology, practical education

논문투고일 : 2022년 6월 3일 ㆍ심사완료일 : 2022년 6월 16일 ㆍ게재결정일 : 2022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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