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R 資料의 政治學的 意味와 活用 方案
*李 圭 貞 (慶北大 아시아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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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起
Ⅱ. 윌슨의 이상주의와 IPR의 성립
Ⅲ. 냉전의 심화와 IPR의 해산
Ⅳ. 동아시아 지역의 주요 특 성
Ⅴ. IPR 자료의 현재적 가치
Ⅵ. 結
Ⅰ. 起
역사학(historiography)은 기록하며, 정치학(political science)은 분 석한다. 정치학의 시작을 플라톤의 고전 저작들을 비롯하여 특히 아리 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철 학(philosophy)과 학문적 내용과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 현대 정치학 분야에서 가장 뒤늦게 독립된 분야로 정립된 국제정치학의 시작을 투 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로 파악하는 시각은 역사학이 축적한 학문적 성과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 들어 다양한 학문 영역 사 이의 융합과 통섭이 정보통신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탈산업 사회에서 학문 발전의 당연한 수순처럼 이해되고 있다. 이때 학제 간
*이 논문은 2016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수행된 연구임 (NRF-2016S1A5B491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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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은 기실 인문학과 공학, 체육학과 의학, 예술과 물리학 등과 같이 완전히 다른 학문 영역의 결합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 사학과 정치학은 완전히 다른 영역의 융합이라기보다는 애초 학문의 출발과정에서부터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 분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과 정치학은 엄연히 구분되는 학문 분야 이다. 역사학은 과거에 벌어진 사건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하여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변화하는 해석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Furay and Salevouris, 2000).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학의 해석이 학자마 다 다른 것은 관점과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으나, 모 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실(fact)의 발견이 1차적 목적이 된다. 반면 정 치학은 행태주의(behavioralism)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과학적인 법칙 성을 발견하여 다양한 정치현상에 대한 단순한 설명을 넘어 예측을 지 향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연구 방법론에 있어서도 독립변수 와 종속변수를 설정하고 이를 측정하기 위한 통계와 수치의 엄밀한 수 학적 계산을 발전시키고 있다. 정치학에서 이론(theory)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셈이다. 정 치학이 방법론에 있어서 자연과학과 유사한 수단을 사용하게 되면서 현상에 대한 설명과 기술을 심도 있게 추구하지 못하는 경향이 발생하 고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이 역사학으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아야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과거의 정치학이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사실의 이해를 전제한 것이었다면 현재의 정치학 은 이를 역사학의 연구 성과에서 차용하거나 대체하는 경향이 강화되 고 있다.
이 논문은 태평양관계기구(IPR;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1)가
1) 아직 국내에서는 IPR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부족한 실정으로 이에 대한 명 칭 역시 태평양문제연구회, 태평양문제조사회, 태평양국제학회 등으로 다양하 게 구분되고 있는데, 영어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반영한 태평양관계기구라는 용어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아직 통일된 용어가 정립되지 않 은 것을 고려하여 IPR을 사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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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서 1952년 사이에 출판한 간행물에 대한 역사학적 의의와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정치학적 문제 의식에서 성과를 도출할 수 있 도록 학제간 통섭과 융합의 단초를 모색하고자 한다. IPR이 오랜 기간 존재하지 못하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해산되었지만, 국제정치 측면에 서 국내정치 측면에서나 격렬한 변화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IPR은 국내외적 정세의 변화에 직면하여 민간 차원에서 동아시아 지역에 대 한 이해를 증진하고 국제적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고 역내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한 단체로 평가할 수 있다. 비록 IPR이 국가의 영향 에서 자유로운 민간 조직 형태로 운영되었지만,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미국의 외교정책으로부터 완벽히 독립적일 수 없었다. IPR의 설립과 해산은 미국의 외교정책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되는 구조적 제 약 요인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논문에서는 IPR이 활동했던 기간 동안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 과정과 내용을 추적하고, 그것이 IPR의 활동에 미친 영향을 함께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IPR이 주요 연구 대상으로 인식하였던 동아시아 지역이 갖고 있는 공통의 속성을 살펴보고, 현재 시점에서 IPR에서 생산한 간행물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Ⅱ. 윌슨의 이상주의와 IPR의 설립
미국의 국가 건설은 구대륙과의 단절을 통해 성취되었다. 종교의 자 유를 찾아 신대륙에 도착한 미국인들은 구체제의 유산에서 벗어난 자 유롭고 평등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비슷한 시기 구대륙의 프랑스에서는 공포에 의해 유지되는 전제정치가 발생하는 역사적 퇴행을 거쳤지만,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다수의 구성원이 자유롭게 심의에 참여하고 공동의 결정을 내리는 미국의 민 주주의를 발전시켰다. 즉 구대륙에서는 귀족과 성직자와 같은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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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조장하는 세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부침을 겪는 사이 신대륙 미국에 서는 급속한 발전과 국가건설을 이루었다. 국가 건설의 마지막 과정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미국은 식민지 본국과의 치열한 전쟁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국가건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가 건 설 직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은 철저한 단절과 고립이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1796년 고별사에서까지 대외 교역을 제외한 어떠한 동맹 관계에도 가담하지 말 것을 강조한 것은 당연한 선택인 셈이다.2) 이와 같은 초기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 (isolationism)라 명명할 수 있으며, 1823년 12월 2일 의회에 대한 연두교서에 밝힌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은 이를 구체화하였 다.3)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isolationism)와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를 반복하는 순환구조를 갖는 것으로 대외적으로 고 립을 표방한 것이지만, 스페인 등의 쇠퇴로 촉발된 중남미 식민지들의 유럽 이탈 움직임에 대한 유럽의 간섭과 알래스카를 지배하고 있던 러 시아의 남하정책 등에 대처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독점 적 우월권을 선포한 양면성을 지닌 정책이었다.
먼로 독트린에 의한 고립주의 외교정책이 지속되면서 다양하고 복 잡한 국제관계가 얽혀있는 구대륙과 달리 미국은 오랜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주변에 침략적이거나 호전적인 국가가 존재하지 않 았던 미국인들은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도 유럽인들에 비하여 이상주의 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먼로 독트린과 같은 미국 고립주의 대외정책의 자연스러운 귀결은 윌슨(Woodrow Wilson)의 이상주의 외
2) Felix Gilbert, To Farewell Address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 Press. 1961), p.138
3) 먼로 독트린은 구대륙의 신대륙에 대한 개입을 봉쇄하는 것을 천명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이수형 역, 1997). “금후 서반구는 … 어 떠한 유럽 국가들에 의해서도 장래의 식민지화를 위한 종속국으로 여겨질 수 없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서반구의 어떠한 지역에 대해서도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체제를 확장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우리의 평화와 안전에 위험스러운 것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이는 미국과 서반구 국가들의 현존하는 정직함과 우호관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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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노선으로 정립되었고, 이는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와 결합되면서 개입주의로 변형되었다. 윌슨의 이상주의(Wilsonian Idealism) 외교정 책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신자유’(new freedom) 철학이다. 이는 국내 개혁을 염두에 두고 표방된 것으로 대 기업의 독점과 횡포로부터 자유 경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대기업의 트러스트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관계에서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맹체제를 일종의 트러스트로 이해하고 작고 힘없는 나라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둘째는 질서에 기초한 자유민주 주의 체제이다. 질서가 우선이냐 자유가 우선이냐는 논쟁은 미국 건국 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의 사이에서도 오랜 논쟁의 산물이었 다. 각각 애덤스(John Adams)와 제퍼슨(Thomas Jefferson)으로 대표 되는 논쟁에서 윌슨은 전자의 입장에 따라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과 법에 대한 존중을 통해 성숙하는 것으로 이 해하였다(Lafeber, 1989). 윌슨의 이상주의 외교정책은 경제적으로 자 본주의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 확산을 위해 그 이전까지 견지되었던 고립주의를 탈피하고 적극적인 개입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사 적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변화는 국제정세의 변화 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으 나 미국은 1917년 봄이 되어서야 참전을 선언했다. 유럽의 전쟁은 19 세기 말에 시작된 미국의 산업혁명에 활기를 불어넣는 긍정적 요인으 로 작용했으며 미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의 물자를 확 보하려는 영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독일 사이의 경쟁은 결국 무제한잠 수함 작전을 선포하게 되었고 결국 미국의 참전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순식간에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독일의 항복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평화 협상 과정은 유럽 국가가 주도하였으며 미국은 철저히 소외되었으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공허한 구호에 그치게 되었다.
비록 윌슨의 이상주의 대외정책은 국제연맹에 대한 가입 유보, 연이 은 세계 대전의 발발 등으로 국제관계에 대한 이상주의 시각은 적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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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상실하게 되었으나, IPR의 설립과 활동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고 볼 수 있다. 우선 IPR의 설립 자체가 국제적 차원에서 상호 협력과 이해를 증진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모색하기 위한 국제 규범을 만 들어내기 위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IPR은 다양한 태평양 연안 국 가들 사이의 현안에 대한 토론의 장을 제공하기 위해 1925년에 설립 된 국제 비정부기구로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각각의 국가에서 재계나 학계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었다. IPR의 조직 구성은 국가의 공식 행정 기관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재원 조달은 록 펠러 재단과 같은 기업과 자선단체에 의존함으로써 국가기구의 간섭과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IPR의 개별 국가 위원회들 역시 경우 에 따라서는 국가로부터 IPR 참여에 대하여 갈등을 불러일으킬 정도 로 철저한 독립성을 유지하였다.4) 이와 같이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개 인과 조직이 초국가적 행위자로서 국제 협력과 평화를 모색하려는 시 도는 칸트(Immanuel Kant)가 최초로 제기한 영구평화를 이루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5) IPR이 냉전이 심화되며 해산하는 운 명을 맞이하였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태평양 국가들의 협력을 이끌어내 기 위한 제도와 레짐을 형성하고자 노력했던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6)
4) 식민지 시기 한국의 경우에도 1925년의 제1회 대회에서 1929년 제3회 대회 까지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당시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상태라는 것을 고려한 다면 YMCA 간부인 신흥우, 유억겸, 보성전문의 김종철, 조선일보의 김양수, 동아일보의 송진우 등이 참여하여 일본의 동화정책과 식민정책을 비판했는데, 이는 IPR의 구성원들이 국가기구로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고정휴, 1991).
5) 칸트는 영구평화의 조건으로 모든 국가들이 공화주의적 시민헌법을 채택하고, 개별 국가의 안보를 각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연방헌법의 틀에 들어오게 하고, 지구상의 사람들이 보편적 공동체에 다양하게 구성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 다(Kant, 1991).
6) 1920년대 이상주의(자유주의) 국제관계이론을 계승하는 신자유주의 국제관계 이론에 따르면, 국가 간의 상호관계는 어느 한 국가가 이익을 보면 다른 국가 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영합게임(zero-sum game) 상태가 아니라, 공통의 제도와 레짐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얻게 되는 이익의 총량이 최대화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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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IPR Publications 1925~1952 Word Cloud
두 번째로 IPR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은 국가 간 이해관계가 상충되 는 내용이기도 하였지만, 태평양 지역 국가들에 대한 상호 이해 증진 을 목표로 매우 광범위한 주제와 내용의 출판물을 생산하였다. 1925 년에서 1952년까지 IPR 국가 위원회와 사무국에서 출판한 간행물의 목록은 전체 1,408건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이 간행물들은 전체 35개의 분류코드를 설정하여 세부적으로는 총 28개의 개별 국가 및 지역을 설정하고 있다. 위의 <그림 1>의 IPR 간행물의 제목에 대한 단어 사용빈도를 단어구름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용빈도를 기준 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Pacific”이었으며, “China”, “Japan”,
“Economic”, “Relations” 등이 다음 수준으로 많이 사용된 단어로 집 계되었다. 더욱 구체적인 내용은 개별 간행물의 내용에 대한 세부적인 해제가 이루어져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겠지만, IPR의 주요 관심사
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Baldwin,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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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역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초점을 두고 경제 적 차원의 관계와 협력에 대한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 긍정
키워드 횟수 키워드 횟수
war 98 development 73
problem 97 peace 26
conflict 16 - -
<표 1> IPR Publications 1925~1952, 주요 키워드 빈도
방대한 분량의 간행물이 발행되었던 시점이 양차 대전을 전후한 국 제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때였음에도 갈등 지향적 내용만이 아닌 지 역에 대한 상호 이해증진을 목표로 하는 협력 지향적인 내용도 많았 다. 위의 <표 1>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IPR 간행물 목록의 제목 중에 서 갈등 지향성과 화합 지향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주요 키워드의 출현 빈도를 표시한 것이다. “war”, “probledm”, “conflict” 등의 갈등 지 향적 용어의 사용이 상대적으로 많으나, “development”, “peace”와 같은 용어 역시 상당한 사용량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갈등 요소가 많은 당시의 국제정세에도 국제협력과 평화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적 지 향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건조하고 딱딱한 보고서 형식이 아닌 기 행문 형식을 차용하거나,7) 가상의 소년을 등장시켜 어린이의 시각에서 아시아 각 지역을 소개하는 책도 간행하였다.8) 즉 IPR의 간행물의 제
7) Marguerite Ann Stewart는 자신이 직접 여행하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약간 의 허구를 가미하여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5개국의 소 년, 소녀와의 만남을 통하여 해당 국가의 학교 교육, 축제와 결혼 등과 같은 고유 민속과 문화를 소개하는 글을 작성하기도 하였다(Stewart, 1946).
8) Sydney Greenbie는 가상의 인물인 피터라는 소년이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면 서 경험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아시아 주요 국가의 지리, 자연환경, 자원, 문화와 풍습 등을 쉽게 설명하는 일종의 입문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 소련과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여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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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과 내용을 고려할 때, IPR은 갈등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당시의 국제 정세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협력과 평화를 지향하는 노력을 지속 적으로 기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Ⅲ. 냉전의 심화와 IPR의 해산
윌슨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미국 외교정책의 일대 전환은 제2차 세 계대전의 발발, 냉전의 시작과 같은 국제 정치의 극심한 변화를 맞이 하여 또 한 번의 본질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항구적 평화 수립을 위해 국제 여론과 규범에 호소하여 국가 간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국 제 레짐과 제도를 수립할 수 있다는 이상주의 국제관계이론이 퇴조하 고,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일종의 홉스적인 무정부 상태라는 전제 하 에 모든 국가가 자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하여 철저한 권력관계에 따 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 국제관계이론이 주류를 이루기 시 작하였다. 현실주의자들은 인간의 선한 의지나 보편적인 도덕률이 존 재한다는 생각에 회의적이다. 마키아벨리가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간지”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의 능수능란한 덕목을 강조한 것은 결국 국가를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국가이성(Raison d'État)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Machiavelli, 2014). 즉 현실주의자들이 국 제관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요소 중의 하나인 국가는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때로는 ‘잔인한 것이 친절한 것’이 될 수 있다 (Desch 2003). 아울러 현실주의자들이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중요한 원칙은 국가주의(statism), 생존(survival), 자조(self-help)라 할 수 있다.9) 이와 같은 국제정치학 이론의 일대 전환은 IPR과 같이
따라 소년의 시각에서 바라본 아시아 각 지역의 다양한 모습과 생활상을 극적 으로 묘사하고 있다(Greenbie, 1946).
9) 현실주의 국제관계 이론가들은 국제정치가 “모든 정치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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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의도에 기반하여 국제적 협력과 우호 증진을 모색하려는 민간 기 구의 유지와 운영에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미국의 외교정책도 국제정세의 변화와 현실주의 국제관계 이론의 영향을 받아 핵심 기조와 방향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기 존의 고립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미국을 국 제사법기구에 가입시키려는 후보와 루즈벨트 대통령의 노력이 실패하 기도 했으며, 국제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선의협정(good faith agreement)에 의지하는 등의 “이상주의와 무책임간의 불행한 동맹”이 유지되기도 하였다.10) 2차 대전의 발발은 미국 외교정책의 고립주의 원칙이 완벽히 폐기되고 세계 정치에서 주도적 국제주의적 행위자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트루먼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는 일 본과의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여 조기에 전쟁을 종결지었고 그 동 안 연합국의 일부로 대우했던 소련과의 관계를 친구가 아닌 경쟁자와 적으로 인식하였다.11) 트루먼은 1947년 의회 연설에서 공산주의 확대 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의 정부지배 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
위한 투쟁”으로 파악하고 국내정치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분석의 단위는 철저히 국가(state)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Morgenthau, 1948). 이에 따라 국제정치는 일종의 무정부상태(anarchy)이기 때문에 국가 로 하여금 안보와 생존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조 (self-help)를 추구하게 된다고 보았다(Waltz, 1979).
10) 이 시기 미국은 태평양에서 영국, 프랑스, 일본과 섬 보유에 관한 4대국 조 약, 중국의 주권, 독립 및 영토 보존에 관한 9대국 조약, 국가의 정책 수단 으로서 전쟁을 포기하는 켈러스-브리앙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주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 즘의 출현, 소련의 무력 개입과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 2차 세계대 전의 발발을 막지 못하였다(Dougherty, 1997).
11) 웬트(A. Wendt)는 국제 사회의 무정부 상태는 물질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이 거나 이념적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국제사회의 거시 수준 문화가 홉스적인 경우는 적국, 로크적인 경우는 경쟁국, 칸트적인 경우는 우방국으로 결정된 다고 설명하였다(Wendt,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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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를 제공한다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였다. 이 에 따라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는 공산주의 대한 봉쇄전략(containment strategy)으로 전환되었으며, 외국과의 교류와 협력은 비공산주의 국 가들로 제한되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시작된 냉전이 초래한 가장 격렬한 형태의 군사적 충돌이 되었 고, 한국전쟁 이후 미국 정치에서 시작된 매카시즘(McCarthyism)은 공산주의에 대한 외교적 대립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IPR의 활동 역시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와 국내적 차원에서 매카시 즘이 맹위를 떨치게 되면서 중단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IPR이 지속 해 왔던 외국과의 교류와 협력 사업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동조 행위 로 의심받기 쉬운 사안이었다.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는 미국 정부 내 에도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있다고 대중의 공포를 자극하는 방 식으로 무차별적인 의혹을 제기하였다. 후일 매카시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반공주의 열풍이 대중들을 사로잡고 있는 상황에서 유력 정치인의 폭로와 미디어의 부풀리기 보도 행태는 미국 사회 전체의 집단 지성을 마비시키게 되었다. IPR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과거 중국에서 직물제조 사업 을 했던 사업가 알프레드 콜버그(Alfred Kohlberg)라는 IPR의 후원회 원이 공산주의에 대한 동조 혐의자로 지목되면서 IPR에 대한 대중적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Marshall, 1976). 또한 IPR 회원 중 다수가 편집간부로 있었던 극동문제에 관한 학술지 Amerasia의 관계자들이 간첩혐의를 받은 것과 정부 문서를 무단으로 확보한 것에 대하여 FBI 의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에는 IPR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화되어 국세청으로부터 비과세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재 정난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IPR에게 지원되었던 아시아 연구 기금 들이 주요 대학으로 이전되면서 IPR은 1960년 최종 해산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IPR의 해산의 직접적 원인은 조직을 운영하고 유지할 수 있는 후원이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던 하버드, 예일, 버클리, 미시간 및 콜럼비아 대학교와 같은 대학 부설 연구소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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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이 주요 기업과 자선 단체의 후원금이 IPR이 아닌 대학으로 이 전된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 외교정책 상의 대립 기조가 강화되고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사회 분위기에서 용공 혐의를 받는 민간 조직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Ⅲ. 동아시아 지역의 주요 특성
IPR이 주목하는 지역적 관심은 용어상으로는 태평양 연안 국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리적 측면에서 태평양이 아우르고 있는 지역을 고려한다면 유럽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 러나 IPR이 실제로 관심을 두고 있는 지역을 한정한다면 아시아가 1 차적 대상이 되며,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이 위치하고 있는 동사이아 지역에 가장 주요한 관심을 두고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에 주목하는 최근의 지역 연구 경향은 주로 한, 중, 일과 미국과 러시아 를 포함하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주목하지만, 교통의 발달과 정보통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동남아시아 지역을 포함하는 지리적 차원의 확대가 필요하다.12) 즉 동아시아 지역은 중국의 한(漢)나라 시 기 구축된 실크 로드의 경로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과 유교가 전파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 일부 국가, 불교와 이슬람교가 전파된 국가, 몽 골이 건설한 대제국에 해당하는 국가를 모두 포함하는 지역으로 이해 할 필요가 있다.
12) 민족(nation)이란 개념이 명확히 구분되는 실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시작되면서 정치 권력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에 불과하다는 앤더슨의 지적(Anderson 2002)과 같이 동아시 아 지역을 어디까지 규정하는가에 관한 국내 학계의 논란은 여전한 실정이 다. 즉 동북아시아 지역주의는 유동적이고 단속적인 발육 부진의 상태에 처 해 있는 반면, 동남아시아까지 아우르는 동아시아 지역주의는 1990년대 후 반 적자생존의 ‘시장’이 초래한 경제 위기를 넘어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 해 상호의존을 위한 ‘광장’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박사명,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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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지역의 특성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 째, 문화적 차원에서 미작농업과 관련된 공통의 특성을 갖고 있다. 동 아시아 지역은 언어와 민족, 종교, 문자 등 공통의 문화적 속성을 발 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언어와 종교 등의 문화적 다양성은 동아시아 지역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우며 지역 내 갈등을 부추기 는 요소로 파악되었다. 이 지역의 아래의 <그림 2>와 같이 미작농업 은 동아시아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공통의 문화적 속성을 형성하고 있다. IPR 간행물에서도 벼농사가 아시아 지역에서 갖고 있는 의미를 경제적 차원에서 살펴본 것이 존재하기도 하며 (Wickizer and Bennett, 1941), 최근에 들어 미작농업이 갖는 문화적 의미가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13)
<그림 2> 세계 미작농업 지역
13) 해밀턴은 아시아에서 쌀문화는 인간 생활에서 차지하는 각별한 위상과 긴밀 하게 연계되는 관념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아시아 지역의 종교적 다양성에 우선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Hamilton,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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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경제적 차원에서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경제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동아시아 지역은 세계 경제에 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은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동 아시아 지역 국가 중 일본이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여 아시아 지역 의 경제 성장을 주도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했고,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자본주의와는 다른 경제성장의 경로 를 선택했다.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과거 제국주의로부 터 해방된 이후 새롭게 국가를 건설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발 전시키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수용해야 하는 이중 전환(dual transition)의 과제를 부여받았다. 이로 인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미미하였으나, 아래의 <그림 3>과 같이 전후 일본의 경제 성 장과 기러기편대모형을 이루는 한국 등 신흥 경제성장국가가 등장하고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면서 현재는 세계 경제를 선도하 는 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14) 또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유로 존(Euro Zone)의 통합과 같은 세계 경제의 지역 블록을 중심으로 하 는 통합 추세와 발맞추어 ASEAN을 중심으로 경제적 통합을 지속하고 있다. 1997년에 촉발된 아시아 지역의 경제 위기는 역내 국가들의 경 제 협력의 필요성을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중국, 일본과 같 이 세계 경제에서 비중과 역할이 큰 국가들을 포함하는 ASEAN+3 형 태로 확대 발전되고 있다.
14) OECD 개발센터는 아시아 신흥국가들의 실질 GDP 성장률은 2016년에 6.4%, 2017년에 6.3%로, 성장세를 굳건히 유지할 것으로 예측한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동남아시아, 중국 및 인도 지역 경제는 비록 단기적으로는 완만한 추세이나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OCED Development Centr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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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세계 주요 지역의 경제 비중
셋째, 동아시아 지역은 오랜 역사 과정의 변화를 공유하는 네 단계 에 걸친 지역질서를 발전시켜 왔다. 1단계는 14세기 중국의 명(明) 왕 조가 설립된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조공책봉체제를 형성한 중화질서이 다. 중화질서는 한국, 일본, 베트남을 물론 태국(시암), 인도네시아(자 바, 스리비자야, 수마트라), 캄보디아(쩐라), 브루나이, 필리핀(루손, 술 루), 라오스(난장), 미얀마를 아우르는 정치적 교환과 위계의 질서를 구축하였다. 2단계는 서구의 아시아 진출이전까지 유지되다가 아편전 쟁의 결과로 중화질서가 붕괴된 이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구축한 식민질서라 할 수 있다. 국가별로 식민지 지배의 내용은 서로 다른 형 태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제국주의 국가를 통해서 근대를 접하고 봉건 적 정치구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경험을 공유하였다. 3단계는 2차 대전 과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 이후 구축된 냉전질서이다. 동아시아는 각 각 동서 양진영에 가담하거나 비동맹운동의 중심지로 국제적 차원의 냉전 질서를 각자의 방식으로 경험하였다. 냉전이 시작할 무렵에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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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전쟁을 통하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대리전을 치르기도 하였 으며, 베트남 전쟁에서는 세계 최강대국을 역내로 불러들여 세계적 차 원의 냉전과는 대조되는 격렬한 열전을 치르기도 하였다. 끝으로 현재 진행형의 4단계는 신자유주의 질서이다. 냉전의 종식으로 과거와 같은 방식의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피아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발전에 유리한 이익과 기회의 구조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더욱 중요해졌다.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협력과 대립을 필요 에 따라 선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구질서에서 형성된 동맹 관계가 사안에 따라서는 느슨해지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하는 변화무쌍한 새 로운 국제질서가 정착되고 있는 상황이다.
Ⅳ. IPR 자료의 현재적 가치와 정치학적 활용 1. IPR 자료의 현재적 가치
1925년에서 1952년까지 IPR에서 간행한 저작물은 총 1,408건에 이른다. 국내에는 아직 IPR이라는 조직 자체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실 정이며, IPR에서 구축한 방대한 저작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제 막 시작된 상황이다. 한국연구재단의 토대연구지원사업에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가 “한국의 동아시아 연구 세계화를 위한 해외 연구 성과 DB 구축: IPR을 중심으로”라는 연구 제목의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 는데, 이 프로젝트가 완료될 즈음에야 IPR의 연구 성과를 이해하기 위 한 기초 작업이 완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시아연구소 프로젝트의 성 공을 위한 필수 조건은 1차적으로는 방대한 자료의 확보이며, 확보된 자료에 대한 충실한 해제와 체계적 분류를 통한 데이터베이스의 구축 이다.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이지만, 이미 해산된 조직 IPR의 간행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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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는 문헌학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동아시아 지역학의 시원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도모할 수 있 다. 미국 내 중국학 연구의 대가인 하버드대학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교수는 아시아학의 출발을 IPR이라 지적한바 있다. 물론 IPR에서 출발한 동아시아학이 모두의 축복과 호를 받은 것은 아니었 다. 서양의 관점으로 보면 IPR이 아시아학을 탄생시킨 공로자이겠지 만, 중국에서는 IPR을 ‘제국주의자의 어용기구’라 인식하였고, 이에 참 여하는 위원을 ‘제국주의자에 영합하는 주구’라고 평가한바 있다. IPR 이 제국주의자의 어용기구인지 국제적으로 평화를 위해 노력한 기구인 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지만, 당시 식민지 국가였던 조선과 필리핀의 대표가 참가하여 국제회의를 개최한 것은 동아시아 지역의 개별적 정 체성을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참여의 개방성을 부여한 IPR 활동의 결과, 동아시아 지역은 하나의 지역권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오늘날의 ‘환태평양’이라는 개념도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었고, 이는 서양에서 동아시아학을 형성하는데 기초를 이루었다.
둘째, IPR은 동아시아학의 체계화에 기여하였다. 16세기 말부터 17 세기 초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연구를 중국학의 원 조로 보고 400여년의 전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심재훈, 2014). 1822년에 프랑스에서 아시아학회(Société Asiatique)의 창설 과 아시아학 저널(Journal Asiatique)의 창간이 있었던 점을 고려해야 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192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당 시 서구에는 아시아 및 태평양에 대한 어떠한 체계적인 학문이나 대학 원 프로그램, 연구소, 전문학회, 정규적인 회의, 관련 도서 전문 자료 실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시기 는 사실상 IPR이 유일한 연구와 교육, 출판 및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조직이었다. 즉 서구에서 근현대 동아시아 연구의 기초가 형성되는데 있어 다른 어떠한 기관도 IPR에 필적할 역할을 한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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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IPR은 동아시아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집대성하였다. IPR은 자체적으로 하와이 대학에 도서관도 운영하였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풍부하고 체계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한 것으로 평가된다.15) 비록 지금은 IPR이 해체되었지만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초기 연구 자료의 양은 현재 연구자들에게도 지역학 연구 발전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넷째, IPR은 미국 지역학 연구의 경향을 대표한다. 냉전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IPR은 공산권 국가가 즐비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연구를 지 속하였다. 록펠러 재단, 카네기 재단의 후원으로 전후 미국의 지역학 이 대학에서 정착할 수 있었으며, 미국 대학에서 동아시아 지역에 대 한 연구의 체계화에 기여하였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1937년에 극동 언어학과(Department of Far Eastern Languages)가 생겼고, 1939년 에 최초로 “동아시아문명사”(History of East Asian civilization)가 개설되었으며, 1941년에는 사학과와 공동으로 첫 번째 박사학위를 수 여했다. 이때 박사학위를 받은 페어뱅크는 미국 내 중국사 연구의 대 가가 되었으며 IPR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IPR은 미국 내 동아시아 지역 연구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15) 콘드리페(Condliffe)는 “IPR 도서관은 매우 독특하며 소장하고 있는 자료가 모든 미국 도서관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규모가 작은 것은 일시적인 문제 이다. 비숍 박물관에서도 IPR보다 나은 자료를 얻기 힘들다.”라고 극찬하였 다(“Library Report: 1929-1931”,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Archives,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1931 Conference Documents, Folder No. 51-1, Biennial Report of the Acting General Secretary to the Pacific Council 1929-1931, Honolulu, Hawaii, June 30, 1931, First Draft, p.10). 슈트어트(Graham H. Stuart) 역시 IPR 도서관은 “국제관계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가치 있는 자료로 가득하다. 사실상 태평 양 지역 관계에 대해서 이곳의 수집 자료는 이례적인 것”이라 평가했으며 (“Library Report: 1929-1931”,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Archives,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1931 Conference Documents, Folder No. 51-1, Biennial Report of the Acting General Secretary to the Pacific Council 1929-1931, Honolulu, Hawaii, June 30, 1931, First Draft,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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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IPR 자료에 대한 이해는 동아시아학의 변화 양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 열풍이라는 정 치 현상은 동아시아 연구 경향과 학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IPR의 해체는 단순한 조직의 설립과 해산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학문 연구 경향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IPR 해체 이후, 호주, 캐나다, 영국, 인도, 네덜란드, 뉴질랜드, 파키스탄 등에서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World Affairs Council’ 등의 후속 조직이 지 속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미국 내에서는 서부지역의 ‘World Affairs Councils’와 호놀룰루의 ‘The Pacific and Asian Affairs Council’이 존재하였다. 또한 IPR의 기관지인 Pacific Affairs는 브리티시 컬럼비 아 대학(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이, Far Eastern Survey는 버클리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이 출판을 담당하였 다. IPR의 해체 이후 특정 주제를 조사 연구하고 논의하던 분위기는 변화하였지만, 각국에 남아 있던 IPR 조직들의 변신과 계승을 통해 오 늘날과 같은 동아시아학이 만들어지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6)
여섯째, IPR은 동아시아 연구자들의 충원과 관심 확대에 기여하였 다. 1926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SIPR(Student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의 출범은 동아시아지역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 인종, 문화, 정치 문제에 대한 다양한 관심사를 논의하는 장이 되었다. SIPR은 이 를 운영하는 영구적인 조직이 없지만, 세계 클럽(Cosmopolitan clubs), 국제관계클럽(International Relations Clubs), 각국 학생회 (Student National Clubs), 기독학생회(Student Christian Associations) 등의 학생 단체를 형성하였다. SIPR의 태평양지역에 대한 관심은 학생들에게도 태평양지역에서 발생하는 현상에 대해 주의 하고 논의함으로써 신진 연구자를 발굴하고 학계에서 자연스럽게 동아
16) 박선영은 동아시아 지역학이 시작된 계기를 아시아ㆍ태평양에 관심과 이권 이 있는 주요 국가들의 지식인이 모여서 출범한 IPR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IPR의 설립 이후 30년 간 변화 양상을 이해하는데 유력한 수단이 된다고 설명한바 있다(박선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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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학의 확산에 기여하게 되었다.
2. IPR 자료의 정치학적 의미
이상에서 정리한 IPR 자료의 현재적 가치는 정치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IPR 자료는 현대 지역 연구의 주류를 형 성하고 있는 미국의 시각을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아시아는 유 럽과 대륙과 해양으로 연결되어 오랜 시간동안 직간접적 교류를 지속 하였다. 비록 오리엔탈리즘에 따른 서구인의 편향이 존재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시아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인들에게 알려질 수 있 었다. 반면 미국은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지리적 경계로 분리되어 상대 적으로 늦게 아시아를 이해하게 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세계사 의 중심을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바 야흐로 미국의 시각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IPR 자료에 대한 데이 터베이스의 구축은 현대 지역 연구의 중심이 되는 미국의 대 동아시아 및 태평양지역 이해를 형성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최근에 이루어진 많은 동아시아 관련 저서들의 상당수가 IPR 자료를 이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은 역사학적 활용을 넘어 정치학 연구 에서도 다양한 자료의 활용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둘째, IPR 자료는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의 역사적 등장 시기의 국 제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존재한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의 사실과 달리 서구의 입장에서는 근대화의 성공과 제국주의 식민지 지 배, 전쟁을 거치며 비로소 이 지역을 인식할 수 있었다. IPR이 지속되 었던 시기는 이러한 역동적 순간의 마지막 단계로 사실로 존재하였던 지역이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즉 IPR 자료는 식민지 건설과 민족해방투쟁, 전쟁과 국민국가(nation state)의 건설, 냉전의 심화와 같은 당시의 역동적인 국제관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학술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엄밀한 사회과학을 지향하는 정치학이 원하는 연구 결과를 도출하기 위하여 연구 주제를 대상으로 원하는 실험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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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이는 정치학의 탐구 대상이 인간의 생활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윤리적 문제에 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IPR 간행물이 다루고 있는 주제 는 정치학에서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갈등과 투쟁, 전쟁과 평화 등 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에 이에 대한 이해는 실험을 대신할 수 있는 중 요한 연구 소재가 될 수 있다.
셋째, IPR 자료에 대한 성찰은 국지적 냉전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의 국제관계에 대한 해결 방안을 도출하는데 통찰을 제시할 수 있다.
전 세계적 차원의 냉전 종식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과 냉 전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의 핵개발과 같은 평화체제를 위협 하는 행위는 한반도 전체 구성원들을 넘어서 복잡한 동맹과 적대관계 로 얽혀있는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된 것이다. IPR 의 설립과 해체 과정 역시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가 영향을 미친 것 이기에 과거 다양한 논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검토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IPR이 활동하던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점하고 만주에 괴뢰국을 건설하여 중국과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조선과 만주국 문제는 IPR 회의에서도 중요한 의 제로 등장하여 중국과 일본의 첨예한 대립이 전개되기도 하였으며, 미 국은 양자 사이에서 적절한 중재와 균형을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IPR 주요 참여국 사이의 미묘한 입장 차이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자 조(self-help)를 추구하는 현대 국제관계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즉 IPR 자료에 대한 정리와 연구는 우연처럼 반복되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관계의 핵심을 파악하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국제적 해법을 모색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Ⅴ.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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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IPR은 초기 동아시아학이 체계를 갖추 는 것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오늘날에도 IPR이 활약했던 시기의 역사가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IPR 자료들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관계는 갈등과 협력의 이중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반복하고 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관계의 갈등적 요소 를 설명한다면,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 시도에 따른 역내 군 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 싸드(THAAD) 배치를 둘러싼 한국-미국- 중국의 이해관계 충돌과 같이 관련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결부되어 지 구상에 유일하게 냉전이 지속되는 상황, 역사 인식과 영토 문제와 관 련된 한국-중국-일본의 갈등 상황 등이 산적해 있다. 이를 고려할 때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세계대전이 발발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생소할 것 같지 않은 익숙함은 동아시아의 갈등 요소를 역동적으로 웅변하고 있 는 셈이다. 반면 지역 협력을 추동하는 요인도 갈등 요인 못지않게 다 양하다. 우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역사적 승리(Fukuyama, 1992)가 만들어 낸 경제발전을 위한 상호 협력의 필요성은 과거 적성국가 사이 의 무역을 증가시키고 교류를 심화시키고 있다. 대기와 해양 오염, 지 구 온난화와 같은 환경문제의 대두 역시 지역과 국경을 초월하여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를 모으게 되었다. 또한 북한의 핵문제는 지역의 군 사적 균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면서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새로운 과 제에 대한 관련 국가의 협력이 필요한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즉 IPR이 존재했던 시기 미국의 대외정책이 협력 지향적인 이상주의 에서 갈등 지향적인 현실주의로 변화한 것은 결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냉정한 역사의 반복이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학문의 사명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불과 100년도 안 된 시점에 역 사적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더욱 치밀하고 심도 있는 이해를 요구하는 셈이다. 특정 지역에 대한 이해는 인문학적 지 식을 바탕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동반되어야지만 비로소 완결적 형식을 갖게 된다. 비록 지금은 IPR이 해산되고 방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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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의 간행물만 남아 있는 상황이지만, 과거의 역사는 또 다른 방식 으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IPR이 유산처럼 남긴 간행물들을 발굴하 고 해제와 주석을 다는 작업은 우선적으로 역사학이 이룬 성과를 이용 해야 한다. 정치학은 역사학의 성과를 사회과학의 시각에서 현실에 적 용가능한 실질적 지식이 될 수 있도록 2차 가공과 분석을 담당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자료의 해제 작업에서부터 역사학과 정치학의 협업 이 이루어진다면 후속 연구의 진전을 위한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 다.
이 연구는 갈등과 협력이 반복되는 동아시아 지역의 현실을 IPR 자 료를 통해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학과 정치학의 접점 을 모색하려는 시론적 연구이다. 아직까지 1,408 종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전부 검토하지 못한 상황에서 관련 학계의 관심 환기를 우선적 인 목적으로 선정하였기에 한계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우선 IPR이 간 행한 1차 자료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미비하여 IPR에 관하여 설명 한 2차 자료에 의존한 측면이 상당하다. 또한 IPR 간행물이 라틴 아메 리카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태평양 연안 국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 는데, 특히 동아시아 지역으로 한정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였다. IPR 간행물 중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것이 양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으며 현재에도 이 지역의 정치 경제적 관심이 집중되 고 있으나, 동아시아 지역을 지역학의 핵심 연구 대상으로 특정하기 위하여는 엄밀한 의미 부여가 보완될 필요가 있다. 즉 앞으로 남겨진 과제들이 더욱 많은 상황이지만 역사학의 빈틈없이 내밀한 사료의 발 굴과 해제 역량의 성과를 계승하여 정치학의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 방법이 결합되어야 한다. 이를 통하여 IPR을 설립하고 운영했던 활동 가와 학자들, 그리고 동아시아의 각 지역에서 IPR의 설립 취지에 공감 하여 참여와 토론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모든 이들의 노력과 헌신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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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The Political Meaning of IPR Publications and its Application
Yee, Gyu Jeong
This study attempts to understand about the significances and applications of ‘IPR publications on the Pacific, 1925-1952’
through the convergence between history and political science.
The establishment and dissolution of IPR which was independent organization from the government is influenced by the changes of US foreign policy. The IPR was founded in the era of Willsonian idealistic foreign policy which seek the promoting mutual understanding and goodwill, but was dissolved in transition to realistic foreign policy after World War Ⅱ and deepening the Cold War. The main concerned are of IPR, East Asia has three common features which are cultivation of rice, rapid economic development and pursuit of economic unification, and share of regional order which was built in long history. The IPR publications promote the historical understanding of East Asian study, broaden the information of changes of East Asian study, and contribute to systematization of area study. In the light of reiteration of history in East Asia, the convergence and fusion between the historical discovery and the analysis of political science to the IPR publications are very important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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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ve the problems in real world.주제어 : IPR 간행물, 역사학과 정치학의 통섭, 동아시아 지역학, 미국 외교정 책
關鍵詞 : IPR刊行物, 歷史學與政治學的統攝, 東亞細亞地域學, 美國外交政策 Keywords: IPR publication, the convergence between history and
political science, East Asian regional studies, US foreign policy (원고접수: 2017년 5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7년 6월 17일, 수
정원고 접수: 6월 24일, 게재 확정: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