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독일의 분단과 통일 이전 상황 (1945~1989)
년 독일의 항복과 그에 따른 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일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대 전승국에 의해 네 지역으로 분할통치 된 다 이와 동시에 이전 독일 영토의 약 에 해당하는 면적이 폴란드 와 소련의 관리 하에 속하게 되면서 이 지역은 사실상 독일 영토로부 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수백만 명에 이르는 독일 인들이 추방당하였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독으 로 이주하였다
년 체결된 포츠담 협약 은 네 개의 분할지역에 대한 공동 관리 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냉전에 따른 대결구도가 심화되면서 개의 서 방관리지역만 우선 통합되어 년에 독일연방공화국 서독 으로 소련관리지역은 그 후에 독일민주공화국 동독 으로 재편되었다 독일 연방공화국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였으며 서방국가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였다 유럽연합의 창립멤버 이며 후에 서방군사동맹인 나토 북대서양 조약기구 의 회원 국으로도 참여하게 된다 반면에 독일민주공화국은 소련을 모델로 하 여 중앙계획경제 및 일당독제체제를 갖추었으며 소련과 상호지원관 계에 있는 경제연맹과 마찬가지로 소련과의 군사동맹인 바르샤바 조 약기구에 가입하였다
독일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두 개의 상이한 정치 경제 및 군사체제 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로 인해 내독 동 서독 간 국경지역에는 중무장한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내독간 및 독일 체 코슬로바키아 간 국경선은 동쪽에서 침범하기 가장 쉬운 통로였다
특히 서독 헤센 주에 위치한 풀다 시 주변지역은 전차들이 통 과하기에 좋은 지형을 가지고 있어서 소위 풀다 의 틈새 라고 불렀다
분단 초기에는 동 서독 간의 국경을 통해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 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제가 다른 동 서독 간에 생활수준의 편차가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서독에서는 년에 전설적 인 경제부 장관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주도 하에 시장경제가 재도 입됨으로써 빠른 시간 내에 소위 경제기적 을 이루게 된다 인플레이 션과 국가의 계획경제로 인해 억제되어있던 생산활동 및 투자가 활성 화되면서 서독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빠 른 전후 복구와 소비증가는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와 반대로 동독의 중앙계획경제는 모든 자원을 전후 재건사업에 투입 하는데 동원하였다 그러나 투입된 재원은 소비 진작으로 연결되기보 다는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중공업 관련 사업으로 흘러들어갔다 게다가 정치적인 분위기는 종전 직후의 다원주의 경향이 사라지고 억압과 독단적인 체포행위 검열 등의 부정적인 요소들로 점철되었다
년 독일민주공화국이 생겨날 당시에 이미 정당과 조직들은 획일 화되어 있었으며 정권에 대한 반대세력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그 결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년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될 때까지 베를린시 한 곳에서만 약 만 명이 서독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후 내독간 국경선은 점점 더 통행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년 동독정권은 이른바 야간 및 안개 속 소개 지시 에 따라 정치적 으로 신임할 수 없는 동독 측 접경지역 거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이주 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부동산을 몰수하였다 이때 이주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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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은 명에 이른다 뫼들라로이트 와 같이 마을 한 가운데에 바이에른 주와 튀링엔 주의 경계선이 관통하는 부락들은 초기에는 철조망과 같은 단순한 형태의 장벽을 통해 나눠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경시설 및 관리체계가 더욱 정교해지면서 서독으로의 탈 출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베를린이 지니는 특 수성으로 인해 동 서독을 완전히 분리하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베를 린도 다른 독일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네 개의 차 대전 전승국 관리지 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에 속하지 않은 서베를린은 서방전승국들에 의해 특별관리구역으로 선정되었으나 모든 법률 및 생활조건들은 서독과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전통적인 구도심이었던 동베를린은 동독의 수도가 되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만 오면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였 으며 서베를린에서는 계속해서 비행기를 이용하여 아무 문제없이 서 독으로 갈 수 있었다 년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육로 와 해로를 차단함으로써 서베를린의 고립을 시도하였으나 이에 미국 은 비행기를 이용하여 물자를 공급하였다 이 루프트 브뤼케 라는 물 자수송 작전으로부터 년 후 소련은 베를린 봉쇄를 해제하였다 년에 최초로 서베를린 전체를 둘러싸는 에 달하는 장벽이 건설되 면서 이전의 동서베를린 간 자유는 종식되었다
동독 측에서 일방적으로 설치한 국경시설들이 보강되면서 국경을 넘어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동독지역에는 실질적인 국경 의 수 떨어진 곳에서부터 검문소가 설치되었으며 농업 등을 목적 으로 한 특별통행허가증 을 받은 사람들만 출입이 가능하였다 이 보 안구역부터 실질적인 국경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지점에는
높이의 철책이 서 있었다 이 구역 안의 구성을 살펴보면 약
너비의 발자국 표시구간과 최소 부터 최대 너비의 지뢰 설치구간이 존재하였다 그 밖에도 넓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감시 탑 및 경비견 활용시설과 기타 보안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보다 앞쪽에는 차량을 이용하여 통과할 수 없도록 차량통행 방지참호 를 파놓았다 참호 앞쪽에는 소리와 전기신호를 통해 사람의 접근을 감지할 수 있는 철책이 또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최전방에는 차단기 와 국경을 표시하는 기둥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진짜 국경선이었다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와 가장 큰 차이점은 독일의 경우 서독 측 국경 지역에는 아무런 시설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독 측에서는 국 경선의 바로 앞까지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경계를 표시하는 표 지판이나 횡목이 설치된 것이 경계표시의 전부였다 전 세계적으로 유 명해진 베를린 경계 체크포인트 찰리 에는 주의 미국관할지역 종료 라는 문구의 국경표지판만 존재하였다 내독간 경계선을 둘러싼 차이를 통해 확연히 드러난 사실은 당시 동독정권 이 공식적으로 주장했던 바와 같이 내독간 국경선을 따라 동독에서 설치한 국경시설들이 서독의 공격으로부터 동독을 지켜내기 위한 서 독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보호막이 아니라 실제로는 동독정권의 의사에 반하여 동독을 탈출하려는 주민들을 가둬두기 위한 시설이었 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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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Ⅲ-1 구동독에서 설치한 구 내독간 국경 군사시설
그림 Ⅲ-2 구동독에서 국경선에 설치했던 차량통과 방지 참호
그림 Ⅲ-3 구동독에서 설치했던 국경선 감시탑
년대까지만 해도 국경은 부분적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동독 전역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나고 소련군 전차의 투입으로 인해 진압된 이후 불과 주 뒤인 년 월에 국경은 봉쇄되었다 바이에 른 주와 접경지역에 위치한 튀링엔 주 하이너스도르프 마을에서는 동 서독 양측에서 참가한 축구 및 음악동아리들이 마지막으로 회합을 가진 이후에 다시 만날 때까지 무려 년 이상이 걸렸다 이 마지막 행사 직후에 국경은 완전히 닫혔으며 국경을 사이에 두고 헤어지게 된 친척들은 장벽너머 서로 얼굴을 마주치는 경우에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아무런 불순한 의도를 지니지 않 은 이러한 행동마저도 동독 측의 금지결정에 따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국경이 닫힌 이후 얼마 가지 않아 국경선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들 희생자들은 대부분 동독에서의 삶에 실망한 젊은이 들이었으며 때로는 가족전체가 탈출을 시도한 사례도 있었다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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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도 다양했다 년대에는 서독 측에서 국경선 밑으로 땅굴을 파서 동독주민들을 탈출시키는 방법이 많이 활용되었으나 동독 측 경계지역의 너비가 점점 더 확장됨에 따라 이 방법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직접 만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 사례가 있는가 하 면 기구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다 기구를 활용한 탈출과 관련해서는 심지어 영화까지 제작되었다 이밖에 비행기를 활용한 탈 출도 있었으며 국경수비를 임무로 하는 국경수비대 군인들이 탈출한 사례들도 꽤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탈출시도가 성공하지는 못했 으며 체포되는 경우도 많았다 몇몇은 실행시점을 몇 달이나 남겨놓 고 비밀경찰 슈타지 에 발각되기도 했으며 탈출 직전에 체포되기도 했다 통일 이전 동독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사례 수집을 전담했던 서 독의 기관인 잘츠기터 정보수집처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 사람들의 숫자를 공개한바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까지 감안하면 그 숫자는 훨 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내독간 국경선은 모순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 곳은 한 편으 로는 세계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했던 국경으로 수 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동 독내에 위치한 서베를린의 위치로 인해 서독에서 서베를린에 이르는 즉 동독을 관통하는 교통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따라 서 동독과 서독은 국경왕래와 관련된 사안들을 결정짓기 위해 지속적 으로 접촉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년대에 접어들면서 서독에는 자동차가 급증하여 거의 모든 가정이 차량을 보유하게 되었다 자동 차가 일반화되기 이전인 년대의 대표적인 국경왕래수단은 철도 였지만 차량의 보급과 함께 도로를 이용한 국경 간 왕래가 점차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