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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Dalam dokumen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Halaman 32-62)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仕宦當作執金吾” .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吏에 下屬한 徒隸’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吏에 下屬한 徒隸’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職을 食한다’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皂隸牧圉”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二年律令>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吏에 下屬한 徒隸’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吏에 下屬 한 徒隸’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121-1,

2012.1), p.32.

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輿人’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輿人’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皁臣(臣屬)輿’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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