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宣化 遼墓의 묘주인이 모두 火葬을 한 후 매장된 불교 신자이므로 특별히 화 려한 고분의 꽃 장식이 꽃공양의 의미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많다. 河北省文物 硏究所 編, 宣化遼墓壁畵, 도59, 62, 66; 項春松, 遼寧昭烏達地區發現的遼墓 繪畵資料 (文物 1979-6), pp.22-28; Ellen Johnston Laing, “A Survey of Liao Dynasty Bird-and-Flower Painting”, pp.63-73, 91-94. 한편 꽃병의 甁은 平安의 平과 同音으로 모란을 꽂은 꽃병은 富貴平安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즐 겨 사용되었고 元, 明代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의 고분에 그려졌다. 野崎誠近 지음, 변영섭․안영길 옮김, 중국미술상징사전, pp.361-362; 徐光冀 主編, 中 國出土壁畵全集 4, p.167, p.198; 徐光冀 主編, 中國出土壁畵全集 10, p.141.
唐과 五代의 묘장제도를 계승해 벽화로 장식된 고분을 조성했던 遼 의 귀족과 달리 북송의 지배계층인 문인관료는 검약과 절제를 숭상하 는 유교적 禮制의 이념을 바탕으로 厚葬의 풍습을 따르지 않았다. 문 인관료의 묘는 장식이 거의 없는 단순한 구조의 磚室墓로 그들이 지닌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과 대비되며 벽화가 그려지거나 화려하게 장식된 고분은 이전과 달리 귀족이나 大臣高官이 아닌 부유한 지주나 상인계 층의 무덤이 대부분이다.67) 따라서 왕릉 이외의 북송대 벽화고분의 묘 주인은 대부분이 지방관료나 일반 백성으로 묘주의 사회적 지위와 권 위를 드러내는 생애에 대한 기록이 담긴 墓地銘 대신 피장자의 출생이 나 가족에 관한 간략한 墨書나 買地券이 부장되었고 신분보다 財力에 따라 묘실의 수와 크기, 벽화와 부조를 비롯한 장식의 수준에서 차이 가 드러난다.68)
목조건축을 모방하고 벽화나 벽돌 부조로 묘실 내부를 장식한 仿木 建築構造의 磚室墓 형식의 고분은 당말기인 9세기부터 축조되기 시작 해 燕雲16州의 漢族 묘장과 遼의 영역에서 유행했지만 북송묘에는 나 타나지 않다가 11세기 중엽에 이르러 하남성과 산서성에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69) 따라서 북송대의 仿木建築雕磚壁畵墓는 북송 후기에 낮 은 관직의 지방관이나 土豪, 또는 부유한 지주나 상인에 의해 축조되 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북송대 중기 이후 북방 이민족의 칩입에 따른 사회적 불안으로 인해 부장품을 매장하는 대신 벽화로 장식한 고분이 많이 조성되었고 회화 67) Dieter Kuhn, A Place for the Dead: An Archaeological Documentary on Graves and Tombs of the Song Dynasty(960-1279) (Heidelberg: Edition Forum, 1996), pp.1-2, 39-54.
68) 池旼暻, 10~14세기 동북아 벽화고분 예술의 전개와 고려 벽화고분의 의의 (미술사연구 25, 2011), pp.69-76.
69) 仿木建築雕磚墓의 특징과 묘장제도에서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Wei-cheng Lin, “Underground Wooden Architecture in Brick: A Changed Perspective from Life to Death in 10th-through 13th-Century Northern China” (Archives of Asian Art, vol.61, 2011), pp.3-35 참조.
<도15> 河南省禹縣白沙宋墓 3號墓 墓室南壁上部, 1124 이전.
의 발전과 함께 회화의 감상과 소장이 성행한 점도 벽화고분의 유행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70) 따라서 북송의 仿木建築雕磚墓는 목조 건축의 架構와 部材가 벽돌부조로 재현되고 벽화와 장식문양이 벽면을 가득 채워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벽화는 孝子圖, 家居圖, 備宴 圖, 宴飮圖, 伎樂圖, 梳匠圖, 侍奉起居圖, 升仙圖 등 인물화 중심의 화 제가 많아지고 같은 시기 요의 고분에 많이 그려진 모란도 등 花卉圖 는 주로 천장이나 공포 사이의 장식문양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화훼
70) 鄭州市文物考古硏究所編著, 鄭州宋金壁畵墓(北京:科學出版社, 2005), p.6.
의 장식 문양에서 모란이 수적으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모 란 애호의 전통이 지속되었음을 반영한다.
북송대 벽화고분으로 가장 잘 알려진 河南省 禹縣 白沙의 북송대 고 분은 3기의 묘의 위치와 고분 구조, 장식문양, 부장품의 형식으로 보아 같은 趙氏 가문의 묘로 여겨진다. 1호묘는 발견된 買地券의 기록에 의 해 哲宗 元符2年(1099)에 사망한 趙大翁의 묘임이 확인되었고 2호와 3 호묘는 宣和6年(1124)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묘주인은 地主 이면서 상업을 병행한 부유한 집안의 일원으로 사회적 신분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仿木建築構造의 묘실은 李誡(?-1110)가 元 符3年(1100)에 완성한 건축이론서인
營造法式
의 건축양식을 반영하 였고 고분 전체가 墓主人像과 일상생활 장면을 묘사한 벽화 및 건축부 재를 묘사한 建築彩畵의 벽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는데 모란을 비롯한 화훼화는 包作 사이나 門楣의 장식문양으로 그려졌다(도15).71)북송대 벽화고분에 그려진 독립된 화조화의 대표적인 예는 陝西省 韓城, 河南省 洛陽, 山西省 壺關縣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주목되 는 예는 2009년 陝西省 韓城市 북송묘에서 발견된 <湖石牧丹圖>이다 (도16). 한성시 盤樂村에서 발굴된 47기의 묘장 중 하나인 218호묘는 완전하게 보존된 고분으로 하남성과 산서성에서 주로 조성된 仿木結構 磚室墓와 다른 券頂磚室墓의 형식이며 부장품이 없고 벽화로만 장식되 었다. 墓誌가 없어 묘주인의 신분이나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지 만 女墓主人의 손에서 熙寧元寶가 발견되어 神宗 熙寧年間(1068-1077) 에서 12세기 전반까지의 시기에 조성된 북송 후기의 묘로 추정된다.
묘실의 북벽 아래쪽에는 草書屛風 앞 의자에 정면을 향해 앉은 남자 묘주인 초상과 주변인물들이 묘사되었고 위쪽에는 태호석과 모란이 그 려졌다. 동벽에는 釋迦涅槃圖, 서벽에는 雜劇演出場面이 자세하게 표현
71) 宿白, 白沙宋墓(北京: 文物出版社, 2002), pp.99-104. 白沙墓와 유사한 구조 에 벽화로 장식된 11세기 중반에서 12세기 전반에 조성된 仿木雕磚壁畵墓가 河南省, 陝西省, 山西省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鄭州市文物考古硏究所編著, 鄭 州宋金壁畵墓, pp.31-158.
<도16> 陝西省韓城 218號墓 墓室北壁, 11세기 후반-1125.
되었다.72)
묘실 북벽 위쪽의 穹窿形 천장과 연결되는 반원형 벽 전체에 그려진
<湖石牧丹圖>는 중앙에 커다란 태호석이 있으며 그 뒤로 붉은 색과 흰색의 만개한 모란꽃 다섯 송이와 봉오리 열 송이가 둥글게 펼쳐진 듯 그려지고 위에는 나비가 날고 있으며 양쪽에는 丹頂鶴이 한 마리씩 서있는 대칭 구도이다.73) 굵은 필선으로 묘사한 태호석과 몰골법으로 그린 모란, 나비, 학 모두 상당한 수준의 솜씨를 드러내며 태호석과 모 란, 나비, 새의 배치에서 왕처직묘에 그려진 <牧丹湖石圖>와 매우 유 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 이러한 모란도의 전통이 중국 북방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易元吉이 英宗 治平元 年(1064)에 孝嚴殿의 齋殿인 迎釐殿의 御扆에 그렸다는 모란, 태호석, 새의 도상이 북송대 묘장문화에 파급되었음을 확인해준다. 그러나 묘 실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그려진 왕처직묘나 요대 고분의 모란도와 달 리 묘주인의 초상 위쪽에 그려진 점은 모란도의 의례적인 의미보다 부 귀와 장수와 상징하는 길상적인 의미와 장식적인 목적이 강조되었음을 말해준다.
河南省 洛陽 邙山의 宋代壁畵墓는 12세기 전반인 1124년 이전에 조 성된 仿木建築雕磚墓이다. 피장자는 여성이며 각종 金銀器, 銅鏡, 瓷器 등 부장품이 상당히 풍부하지만 誌石이 발견되지 않아 관직이 없는 부 유한 가문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묘실 내부는 벽화로 장식되었는데 특 히 동벽과 서벽에 세로로 긴 軸畵와 가로로 긴 橫掛를 쌍으로 마주보 게 걸어놓은 모습이 묘사되어 주목된다(도 17). 동벽에는 버드나무, 모 란, 초목 등을 채색으로 그린 軸畵와 연꽃, 연잎, 浮萍 등을 역시 채색 으로 그린 橫掛가 묘사되었다. 서벽에는 대나무, 매화 등 花木과 山石
72) 벽화의 내용 역시 묘주인 생전의 일상생활을 반영하는 宴飮圖, 梳妝圖나 二 十四孝, 升仙圖가 주로 그려진 북송대 고분과 달라 주목된다. 東壁과 西壁에 그려진 벽화의 자세한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康保成, 孫秉君, 陝西韓城宋墓 壁畵考釋 (文藝硏究 2009年 11期), pp.79-88 참조.
73) 徐光冀主編, 中國出土壁畵全集 7, pp.416-417.
위에 앉은 山雉를 채색으로 그린 軸畵와, 먹선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채색한 세 송이 연화와 연잎, 浮萍 등을 그린 橫掛가 그려졌는데 두 폭의 軸畵와 橫掛는 각각 크기가 비슷하고 모두 같은 형식으로 표구된 그림임을 알 수 있다.74)
<도17> 河南省 洛陽邙山宋墓 墓室西壁, 1124 이전.
이 벽화는 북송대 건물의 실내에 감상용이나 장식용 그림이 어떻게 걸렸는지를 보여주어 흥미롭다. 米芾의
畵史
에 3尺 폭의 橫掛와 3 척 길이의 축을 그려 寶晉齋에 걸었고 두 폭의 그림을 쌍으로 걸었다 는 기록이 있어 洛陽邙山 고분에 묘사된 蓮花가 그려진 옆으로 긴 그 림은 미불이 말한 橫掛의 형태임을 알 수 있으며 동벽과 서벽의 벽화 는 당시 실내에 그림을 걸었던 실례를 재현한 것이 확실하다.75) 또한 대나무와 매화를 배경으로 화면 왼쪽 바위 위에 앉은 꿩을 그린 축화 는 좌우대칭의 화면구성을 벗어나 崔白(약 1060-1085 활동)의 1061년 작인 <雙喜圖>와 유사한 구도를 보여 熙寧年間(1068-1078)에 활동한 최고의 화조화가인 최백 화풍의 영향을 반영한다.76)山西壺關下好牢宋墓는 묘실 북벽의 墨書題記에 의해 북송말인 宣和5
74) 軸畵의 크기는 각각 125x55cm, 127x54cm이며 橫掛는 93x73cm, 88x70cm이 다. 洛陽市第二文物工作隊, 洛陽邙山宋代壁畵墓 (文物 1992-12), pp.37-50.
75) “···只作三尺橫挂三尺軸, 惟寶晉齋中挂雙幅成對, 長不過三尺···” (米芾, 畵史), p.24.
76) Ellen Johnston Laing, “A Survey of Liao Dynasty Bird-and-Flower Painting”, p.86; 陳韻如, 奪造化, 興人意 -宋代花鳥畵的畵史意義 (동아시아 자수예술의 역사 국제학술심포지엄 발표논문집, 국립고궁박물관, 2013), 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