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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 情報의 취득

Dalam dokumen 唐朝의 外國 使節 管理 (Halaman 39-42)

외국 사절이 경사의 객관, 사방관 등에 모여 거주하였기에 각국의 풍습과 문화가 이곳에서 드러났으며, 당은 이곳을 통해 국외로 정탐을 나가지 않아도 외국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은 조공 사절 에게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상서 兵部 職方 郞中은 외국의 정황을 살피는 직임을 지니고 있었다. 職方郞中은 홍려 시에 의탁하여 사절이 경사에 도착하면 해당국의 山川風土를 신문하고 이를 지도로 그려 황제에게 상주하였다.132) 아울러 외국인이 입국하면 그 용모와 의복을 그려서 보고하였다.133) 직방낭중은 간접적인 정보 취득 이외에도 직접 외국인을 마주하여 외국의 사정을 탐지하였다.  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엔닌이 장안의 사찰에 거주할 당시 직방 낭중 楊魯士가 자주 찾아와 相問하고 檢校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상 황은 단순히 양로사의 개인적인 사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직방낭중의 업 무 범위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134) 641년 (정관 15년) 직방낭중 陳大德이 高句麗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산천풍속 을 보기 위해 자신을 지키는 관리를 매수하여 가지 못한 곳이 없었다 는 기록 역시 직방사의 직무와 연관이 깊다고 할 수 있다.135)

또한 외국 사절이 도착하면 홍려시에서 그 나라의 山川과 風土를 조사하고 圖解로써 상주하였고 그 副本을 직방낭중에게 보내었다.136) 즉 홍려시는 단순히 외국 사절의 접대 업무 뿐 아니라 외국의 국정을 탐문하고 수집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홍려객관에 묵는

132) 唐六典 권5, 尙書兵部, 職方郞中, p.162.

133) 新唐書 권46, 百官志1,尙書兵部, 職方郞中, p.1198.

134) 黎虎, 漢唐外交制度史 (蘭州大學出版社, 1998), p.393.

135) 資治通鑑 권196, 唐紀12, 太宗貞觀十五年八月條, p.6169.

136) 新唐書 권46, 百官志1, p.1198.

귀빈들의 수가 그리 많이 않았을 것이고 대다수의 사절은 사방관 내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아 홍려시의 정탐은 홍려객관이 아니라 사방관 내에서 더욱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려시는 직방낭중 이외에 도 외국에서 조공 사절이 올 때 마다 해당국의 土地風俗, 衣服貢獻, 道里遠近을 勘問하여 史館에게도 보고하였다.137)

이런 정보 수집 활동은 臣僚의 선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황제 의 선에서도 이뤄졌다. 659년 高宗은 일본 사신의 알현을 받으며 사 신에게 직접 물어서 정보를 수집하였다. 고종은 우선 인사처럼 일본의 君臣과 國內의 평안 여부를 묻고 이어 사신이 대동한 蝦夷의 종류와 풍속에 대해 자세히 신문하였다. 이는 홍려시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정 보와 완전히 일치하며 당이 사절을 통해 외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자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견당사는 황제를 알현하고 冬至의 조회에도 참여하였으나 당장 귀국하지는 못하고 661년에야 귀국하였 다. 귀국이 지연된 이유는 당에서 “국가에서 내년에 海東之政이 있을 것이니 너희 倭客은 동쪽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칙지를 내려 西京 내의 별도 장소에 유폐되었기 때문이었다.138) 여기서 말하는 해동지정 은 이듬해인 660년의 百濟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사 절이 유폐된 이유는 “비밀로 해야 할 중대사”인 백제 공격 정보의 유 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660년 9월 19일 일본 사절은 유폐에 서 풀려나 서경을 출발하였고 10월 16일에는 동도에 도착하였으며 11월 1일에는 蘇定方이 백제왕과 신하를 포로로 끌고 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139) 이때 태자 이하 신료의 성명과 인원수를 명확하게 파악하 여 보고한 것으로 보아 당이 전해준 정보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 인다. 즉 당은 사절을 자신들의 정보 공작에 맞춰서 이용했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이런 당의 태도는 기우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이 당에 대항하여 白江 전투를 벌인 사실을 감안하면 사절을 억류

137) 唐會要 권69, 史館上, p.1089.

138) 日本書紀 권26, 齊明天皇5年, 秋7越條.

139) 日本書紀 권26, 齊明天皇5年, 秋7越條.

해 정보를 차단한 것은 필요하면서도 유효한 조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당에 입국한 사절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통제가 가능하였지만 외 국들 간에 왕래한 사절을 통한 정보 교류는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安史의 亂이 발발한지 3년 뒤에야 渤海와의 사신 왕래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安祿山이 東方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고 전쟁 에 대비하였다는 것을 볼 때140) 그 정보 취득의 질적 측면은 당에서 직접 정보를 얻는 것과 비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 공격 전에 일본 사신이 별도의 장소에 유폐되었다는 것은 다른 외국 사절로 부터 격리시켜 정보가 조금이라도 간접적으로 누출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처로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당에게 유리한 정보는 외국 사절에게 적극 홍보하는 경 우도 있었다.

神功 원년(697) 6월, 孫萬榮이 바야흐로 唐兵에 대항하며 두려움에 떨 었다. 奚가 손만영을 배반하여 神兵道總管 楊玄基가 전방을 공격하고 奚 의 군대가 후방을 공격하여 그 장수 何阿小를 포로로 잡았다. 군대가 패 주하자 손만영은 輕騎 수천을 이끌고 동쪽으로 도주하였다. 前軍總管 張 九節이 병사를 보내 추격하자 손만영은 곤란해져서 노예와 함께 潞水 동 쪽으로 도주하여 숲에서 휴식하며 탄식하였다. “이제 당에 귀부하자니 죄 상이 크고, 돌궐에 귀부하자니 죽임을 당할 것이며, 신라에 귀부하자니 역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면 좋은가!” 노예가 그의 머리를 베어 당에 투항하니 수급을 사방관 문에 효수하였다.141)

당 전기 거란의 李盡忠·孫萬榮의 반란으로 인해 이미 부흥한 突厥이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으며 고구려 유민과 말갈은 당으로부터 도주하여 渤海를 건국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준 대반란을 진압한 후 당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그 수괴인 손만영을 수급을 외교 사절이 거처하는 사방관에 梟首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140) 송완범, 「8세기 중엽 ‘新羅征討’ 계획으로 본 古代 日本의 對外方針」 (韓 日關係史硏究 25), pp.191-197.

141) 資治通鑑 권206, 唐紀22, 則天后神功元年六月條, pp.6521-6522.

외교 사절에 대한 이러한 시위는 이미 전례가 있어 漢이 匈奴 郅支單 于를 죽이고 외교 사절이 거처하는 곳인 長安 槀街에 효수함으로써 여 러 나라에게 시위하였었고,142) 당은 이 고사를 따라서 손만영을 효수 하였다. 당의 사방관 내에 거주하는 외국 사절들의 수효가 많았고 또 한 이곳에 사절이 고르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당이 孫萬榮의 首級을 사 방관 문에 효수하여 각국에 효과적으로 경고하고 거란의 반란이 완전 하게 진압되었음을 공표하는 작용을 할 수 있게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Dalam dokumen 唐朝의 外國 使節 管理 (Halaman 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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