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부수적이지만 불가결한 업 무는 바로 외국어 통역이다. 唐代에 中書省과 鴻臚寺는 외교 관리의 책임을 지는 두 개의 중요한 기구였으며 譯官은 이 두 기구에도 소속 되어있었다. 중서성의 역관은 新唐書 百官志에서 “蕃書譯語” 10人으 로 기록되어 있고 唐六典에는 “翻書譯語” 10인으로 기록되어 있어 역관 10인의 정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01) 중서성의 임무 중 하나 는 詔令의 기초이고 그 중 당왕조를 대표하여 사방의 외국으로 발행하 는 문서와 정령 역시 중서성에서 그 기초와 書寫를 담당하였을 것이 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방 각국의 사절이 휴대한 국서와 공물은 중서 성 내의 전담인원이 책임지고 접수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중서성 내에 는 “蕃語”에 익숙하고 정통한 인물이 배치되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였 다. 이렇기 때문에 胡三省은 “중서가 사방의 조공을 접수하고 표소를 유통하였기에 譯語人을 두었다”고 하였다.102)
사료의 한계로 인해 당대 중서성 역어인으로 고찰할 수 있는 인물 은 3명이다. 그 한 명이 貞觀 연간의 折衝都尉·直中書譯語 揖怛然紇로 그는 太宗에 의해 서역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파견에 따라 서역 焉耆의 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교통로의 정비를 청 하였다.103) 두 번째 인물은 史訶耽(혹은 史訶擔)으로 역시 胡人이며 昭武九姓 중 하나인 史國 출신이다. 「史訶耽墓志」에 의하면104), 史訶
101) 新唐書 권47, 百官2, 中書省, p.1212; 唐六典 권2, 尙書吏部, p.34-35.
102) 資治通鑑 권199, p.6273.
103) 冊府元龜 권1000, 外臣部45, 讐怨, p.11736-1.
104) 羅豊, 固原南郊隋唐墓地 (文物出版社, 1996), pp.69-71.
耽은 武德 9년(626)에 “直中書省翻譯朝令”의 칙명을 받았고 이후 태 종 시기에도 중서성에서 근무하였으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듭하였 다. 또한 다른 사서에 의하면 長安에 집을 구입하여 거주하고 있었는 데, 永徽 원년(650) 그가 소유한 주택에 대해 당시 中書令 褚遂良이 싸게 구입하려고 강박하였고, 이 사실은 감찰어사에게 적발되어 저수 량이 탄핵받아 同州刺史로 폄직되었다.105) 永徽 4년 고종은 史訶擔을 유격장군에 제수하고 直中書省翻譯은 예전처럼 담당하게 하였다. 乾封 원년(666) 虢州諸軍事·虢州刺史에 제수될 때까지 史訶耽은 40년 간 중서역어를 담당하였다.
세 번째 인물은 石佛慶이다. 그의 사적은 會昌 3년(843) 李德裕의 「 論譯語人狀」에서 찾을 수 있다.
石佛慶 등은 모두 回鶻 종류로서 반드시 본국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 다. 黠戛斯의 사신이 수도에 도착한 후 회골에 대해 불리한 말이 있으면 번역을 하지 않거나 아울러 몰래 그 말을 수도에 있는 회골 사람에게 바 로 제보할 염려가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劉沔·李忠順에게 조서를 내려 각 각 번어를 번역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회골과 친족이 아닌 자를 가려 수 도로 올려 보내게 하십시오. (이리하면) 서로 간에 교차 검증이 되어서 거짓과 은폐를 막을 수 있습니다.106)
이덕유의 표현으로 볼 때 석불경은 중앙아시아의 소무구성 중 하나 인 石國 출신이라 추정된다. 또한 이덕유는 당시의 재상으로 중서성을 관장하고 있었으니 석불경 등은 중서성의 번서역어였을 것이다.
이상의 중서 번서역어 중 2명은 소지한 각각 절충도위와 유격장군 의 관품을 가지고 있었다. 절충부의 장관인 절충도위의 관품은 상중하 로 나뉘어 각각 정4품상, 종4품하, 정5품하였고 유격장군은 종5품하의 武散官이었다. 新唐書에 의하면 번서역어는 종7품상인 主書와 종8품 하인 主事 밑에 令史·書令史 등과 같이 소속된 관리이었으므로 그 본
105) 唐會要 권61, 御史臺中, 彈劾, 1067쪽; 通典 권24, 職官6, 御史臺, 監 察侍御史, p.675.
106) 全唐文 권701, 李德裕, 「論譯語人狀」, p.7198-1.
품이 종8품하 이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중서성 내 더 상위 의 관직인 정5품상 중서사인과 근접한 관직을 수여하였다는 점은 중 서 번서역어 직무의 중요성과 그에 상응한 대우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당 홍려시 역시 역어인을 설치하였다. 唐六典에 의하면 홍려시에 20인의 역어를 두도록 되어있다.107) 또한 이에 의하면 중앙에 설치된 역어 인력은 모두 直官으로 그 품계는 자연히 높지 않았다. 新唐書
選擧志에 의하면 “홍려역어는 전객서령을 넘을 수 없다”라고 되어 있 다.108) 이는 홍려역어의 승진에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전객령의 품계 는 종7품하였으므로,109) 홍려역어의 품계 또한 종7품하 이상은 아니 었을 것이다. 이는 중서성 번서역어의 지위와 대비를 이루는데, 번역 업무의 중요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려역어의 지위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외교 활동 중 에 담당한 번역 임무는 중요하였다. 開元 연간 서역 箇失蜜이 사신을 보내어 王冊을 요청하자 홍려 역어가 이를 번역하여 상주하였다고 기 록되어 있다.110) 이를 보면 箇失蜜과 당의 외교 관계가 성공적으로 수 행된 데에는 역어의 역할이 개입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언어 적인 특기로 인해 역어는 외국 사절과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고 당조가 외국 사절과 접견하는 자리에서 빈객을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 하였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貞元 4년(788) 咸安公主가 회흘 可汗과 결혼하는 사안에서의 일이다. 당시 공주를 맞이하러 온 인원 중에서 회흘의 공주가 銀臺門에 들어서자 長公主 3인이 大內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譯史가 傳導하여 拜禮하고 들어왔다. 황제가 전각에 이르자 장 공주가 먼저 들어가 시립하고 회흘 공주는 장공주가 있는 장소로 인도 되었다가 다시 역사의 傳問이 있자 이에 함께 들어왔다.111) 여기서 역
107) 唐六典 권2, 尙書吏部, p.34-35.
108) 新唐書 권45, 選擧下, p.1174.
109) 新唐書 권48, 百官3, 鴻臚寺, p.1258.
110) 新唐書 권221下, 西域下, 箇失蜜, p.6256.
사는 홍려시의 역관일 것이다. 이 역사는 회흘이 함안공주를 맞으러 온 자리에서 傳導와 傳問의 역할 담당하였다. 傳과 問이라는 글자는 역어의 언어 특기를 가지고 회흘 사절단과 언어 소통을 하여 당 황제 의 慰撫가 회흘 공주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게 해 준 사실을 설명하여 준다. 또 한편으로는 導라는 용어의 의미를 고찰해 보면 역어가 번역 임무를 담당했음과 동시에 儀禮 진행자로서의 책임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홍려시 역사는 회흘 사절단이 당의 의례에 의거하여 迎親 관련 의식과 그 순서를 이행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이러한 번역 임무의 성격 때문에 역관은 당대 외교에서 불가결한 요소였다 天寶 11년(752) 내부한 돌궐 수령 阿布思가 부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당 安西北庭節度使 程千里가 이를 공격하였다. 궁박해 진 아포사는 葛邏祿 部로 도주하였지만 천보 13년 葛邏祿 葉護가 그 를 잡아 당에게 보냈다. 현종은 조서를 내려 엽호에게 인장을 주고 대 대적인 포상을 하였다.112) 이때 갈라록이 청한 印信과 譯語는 그 表와 같이 하라는 명이 있는데, 이를 보면 갈라록은 사신을 보내 아포사를 바칠 때 당에게 역어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를 당이 수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역어를 파견하여 왕명을 전달하고 외국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며 이를 통해 당의 대외 관계 개 선에 상당한 역할을 역어가 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대 역관의 관리는 엄격하였다. 제도로써 역어·掌客 등 홍려시 관 할의 客館 등을 출입하는 인원은 장관이 발급한 狀牒에 의거하여 監門 衛에서 통행을 허락하고 동행하였다.113) 이는 역어의 일상 활동에 대 한 규정과 제약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역어의 직업적 소양과 관련이 있 는 것이다. 唐律은 역어의 번역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당률 제387조 詐僞26에서는 “무릇 증인이 실정을 말하지 않거나 역인
111) 新唐書 권217上, 回鶻上, pp.6123-6124.
112) 全唐文 권40, 「賜葛邏祿葉護璽書」, p.444-1; 冊府元龜 권975, 外臣部 20, 褒異2, p.11459-1.
113) 唐會要 권66, 鴻臚寺, p.1151.
이 거짓으로 통역하여 죄에 덜고 더함이 있게 한 경우, 증인은 2등을 감하고 역인은 같은 죄로 처벌한다”고 하였다.114) 여기에서 역인이 거 짓으로 통역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 외에도 역인이 죄를 범한 외국 인을 위해 고의적으로 거짓 통역을 한 것을 말한 경우도 상정할 수 있 다.
중앙의 중서성과 홍려시에 소속된 역어 이외에도 당의 변경 州府·節 度使·都督府 등 역시 전문 번역 인원을 보유하였다. 역어인, 역사, 역 관, 역어관, 역자 등 다양한 명칭으로 등장하고 있으나 이들이 지칭하 는 대상은 동일하다. 일반적으로 변경 주부로 이민족과 인접하는 곳은 당대 외교 업무의 최전선이었고 또한 주변 이민족 역시 이곳이 가장 먼저 접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지방정부는 역어 인원을 설치하여 당과 이민족 사이에서 발생한 각종 사안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방에서 역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아스타나201호 墓에서 출토된 貞觀 23년(649) 「唐史王公□牒爲杜崇 禮等綾價錢事」에서는 “譯語人等”이라는 구절이 있다.115) 또한 같이 출 토된 “軍資練事” 관련 문서에는 “高昌縣 譯語人 康”이 등장한다.116) 貞觀 14년, 당이 高昌國을 멸망시키고 西州를 건립하고 고창현을 설치 하였다. 본래 다수의 이민족이 거주하였던 지역이었고 역어인 康某는 이러 정황 속에서 당의 西州都督府에서 근무하며 번역 업무에 종사하 였을 것이다.
아스타나29호 「唐垂拱元年(685)康尾義羅施等請過所案卷」에서는 서 역 상인 康尾義羅施 등이 서쪽에서 와서 동쪽으로 가서 장사하려는 와 중에 過所를 신청하는 내용으로 그 문서 중에 “譯 翟那你潘”이라는 구 절이 발견된다. 즉 당시 역어가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인물인 翟那你 潘은 그 이름으로 보았을 때 외국 이민족 출신일 것이다. 이 상단이 거느린 여러 일꾼과 노비 및 대량의 가축 등에 관련되어 관에서 발급
114) 唐律疏議 권25, 詐偽, 諸證不言情及譯人詐僞條, p.475.
115) 吐魯番出土文書(第六冊) (文物出版社, 1985), p.70.
116) 吐魯番出土文書(第六冊), p.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