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왕조 가운데 일시적으로 환관이 지방에 파견되는 경우는 있었 지만, 환관이 상주하면서 군대나 지방을 감시하고 총괄하는 일은 명대 만이 나타난 독특한 일 중의 하나이다.
환관이 지방이나 군대로 나가 상주하면서 관할하였던 예들이 보인 다. 鄭和는 南京守備太監으로서 南京에 상주하면서 활동하였고, 福建,
88) 明史 卷304, “當成祖时,锐意通四夷,奉使多用中贵.” 여기서 ‘中貴’의 ‘中’은 곧 ‘禁中’을 의미하는 것으로 ‘皇宫’을 가리키며, ‘中貴’는 권세 있는 太监을 이 른다.
89) 정화(鄭和, 1371~1434경)는 雲南省 昆陽 출신의 환관으로, 洪武 15년(1382) 3 月 운남이 평정될 때에 잡혀 南京으로 끌려 왔다. 이 때 그는 거세되어 운남 평정에서 활약한 潁川侯 傅友德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부우덕은 정화가 총 명하고, 준수하고 행동이 민첩하였기에 그를 연왕에게 헌상하였다. 정난의 변 때에 연왕을 도와 무공을 세워 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연왕이 황 제로 즉위하자 그는 영락제에 의해 내관감의 장관인 태감으로 임명되었다. 그 는 이슬람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성은 마(馬)씨이고, 자는 삼보(三 寶)였으나 영락제로부터 정화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으며 이후 남해 원정에 임 하였다.
廣東에는 提督市舶司太監이 있었고, 蘇松지방에는 織造太監이 있었으 며, 각 邊衛와 각 포정사에는 鎭守宦官이 상주하였는데, 환관들은 이런 임무를 통하여 조정이 요구하는 물품을 조달하고 징세를 감독하며 군 대를 감독하고 지휘하였다.90)
이런 여러 임무 중 영락제 시기 이후 환관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군권의 장악이다. 환관이 군대를 감시하거나 지방 군대에 출진 함으로써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이런 사례가 영락제 때부터 점점 많아 지기 시작하였다. 군사방면에도 이전보다 환관의 참여가 더욱 활발해 졌다. 영락 3년(1405) 정화는 제1차 원정 때 대선 62척과 수행 사졸 2 만 7천 8백여 명을 이끌고 나갔다. 이것은 환관이 대군을 이끌고 간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영락 8년(1410) 환관 王安은 황제의 명을 받고 都督 譚靑 등의 군대 를 감독하였고, 환관 馬靖은 甘肅을 순시하였는데, 이것은 태감이 감군 하는 선례가 되었다.91) 이로써 영락제 때부터 환관이 지방 군대에 출 진하는 사례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환관은 지방군대에 출진하거나 지방을 수비하는 일을 담당 하였던 것이다.
환관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가게 한 것 중의 하나는 鎭守太監의 출 현이다. ‘鎭守’라는 것은 명대 무관직의 하나로, 鎭戍將校에는 五等級이 있었다. 鎭守, 協守, 分守, 守備, 備倭 등이 그것으로, 이들은 모두 전쟁 사안에 따라 증설하였는데, 지세의 험준함과 중요성에 따라서 屯兵을 두어 군위를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92) 이러한 각 지방의 진수에 환관 이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환관이 정치적 세력을 키우는 데 주효하
90) 이 외에도 成化初年에는 廣东에 珠池奉御가 상주하였고, 弘治 17년(1504)에는 漕運의 거점 지역에 管倉宦官을 두었으며, 만력제 때에는 환관이 稅監으로 임 명되어 蘇州에 주재하게 되었다.
91) 明史 卷74, 職官3, 宦官條, “永乐八年,敕王安等奉监都督谭青等军,马靖巡 视甘肃,此监军巡視之始.”
92) 明史 卷72, 職官1 兵部, “凡鎭戍將校五等 曰鎭守 曰協守 曰分守 曰守備 曰 備倭. 皆因事增置 視地險要 設屯兵 戍之.”
였던 것이다.
진수태감은 홍희제 시기에 처음 실시되었다.
홍희 원년(1425)에 환관 王安이 칙령을 받고 甘肅의 진수가 되었으며 각 성의 진은 모두 진수를 설치하였다.93)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진수태감은 洪熙帝(仁宗) 때 처음 실시되었고, 正統帝(英宗, 1435-1449) 때에 두루 실시되었으며, 각 省의 여러 진에 진수태감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嘉靖 8년 후에 혁파되었다.’94) 라는 것을 보면, 鎭守太監은 홍희제 때 처음 실시되었다가, 선종 정통제 시기에 이미 각 지역에 두루 존재하여 지방에 세력을 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은 그 이전, 곧 영락제 시기부터 진수의 예가 보이고 있다.
王世貞의
弇山堂別集
에 “洪熙 元年 二月 敕甘肃總兵官都督費瓛 镇守 太監王安”95)이라 하여, 감숙 총병관에 도독 費瓛(비환)을, 진수태감에 王安을 임명한 사실을 소개하고, 왕세정은 이 말에 이어 “計永樂末已 有之矣”라 하여 영락 말기에 이미 이런 진수가 있었다고 덧붙이고 있 다.
明代特務政治
를 쓴 丁易도
明通鑑
卷14에 보이는 “(永樂元年) 是歲始命內臣出鎭”이라든지, 卷20의 “自文皇任宦官監軍分鎭 送之擅用 威福 激生事端 一時邊鎭總兵爲所脇制 往往畏之”(영락 문황제가 환관을 분진의 감군으로 임용한 때부터 환관을 보내어 威壓 또는 福德으로 마 구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심하게 소란 분규를 일으켰다. 때로는 변진의 총병이 환관들에게 위협을 당하여 종종 환관을 두려워하였다.)라는 기 사를 소개하면서 영락제 때에 환관이 감군으로 파견된 사례를 소개하 고 있다.96)93) 明史 卷73, 職官3 宦官條, “洪熙 元年 (前略) 敕王安镇守甘肃,而各省镇皆 设镇守矣.”
94) 明史 卷73, 職官3 宦官條, “镇守太监始于洪熙,遍设于正统,凡各省各镇无不 有镇守太监,至嘉靖八年后始革.”
95) 弇山堂別集 卷90, 中官考1.
96) 丁易, 明代特務政治, pp.292-293.
이를 종합하여 생각한다면, 영락제 때 환관 진수의 예가 빈번히 나 타나고 있었는데, 홍희제 때에 공식적으로 ‘진수태감’으로 상주하여 다 스리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명대 환관의 군대 통솔, 감군, 순시, 지방 진수, 남경수비 등 의 여러 제도가 영락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났고, 이것이 환관의 정치 간여에 크게 영향을 끼쳤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