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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廠의 特務活動

이를 종합하여 생각한다면, 영락제 때 환관 진수의 예가 빈번히 나 타나고 있었는데, 홍희제 때에 공식적으로 ‘진수태감’으로 상주하여 다 스리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명대 환관의 군대 통솔, 감군, 순시, 지방 진수, 남경수비 등 의 여러 제도가 영락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났고, 이것이 환관의 정치 간여에 크게 영향을 끼쳤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니라 그 외에 失火, 落雷. 시정 물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황제에게 보고하고 있었으니,98) 이 기관의 정탐과 첩보의 영역이 얼마나 폭넓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99)

환관이 군주의 이목이 되어 관리와 백성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특무 활동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첩보 기관으로서 이 미 태조 시기부터 특무기구인 錦衣衛가 설치되어 활동하고 있었으나, 이것은 통제권이 황실과 혈연관계가 있거나 훈공이 있는 都督으로 임 명되었던 것이며 결코 환관이 장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락제는 이와 더불어 영락 18년(1420), 처음 동창을 설치하 고, 환관이 장악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100) 이른바 동창은 금의위와 같은 특무기구였지만, 첩보 활동은 황제의 측근인 환관이 직접 관장하 였다는 데서 처음부터 출발이 다른 셈이다.

동창은 정보 수집, 형옥 등의 특무활동을 하도록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에 기능상 금의위와 상충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동창은 황제의 직 접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지위는 낮았으나 권력은 금의위보다 훨씬 더 강하였다. 측근의 세력관계는 전제군주에의 거리와 알현의 빈도에 비 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창의 설치는 환관의 권위를 크게 증강시켰다. “이때부터 환관이 더욱 전횡하여 다시 제압될 수 없었다.”101) 라는 것은 바로 이런 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방면에 환관이 참여한 범위도 점점 확대되었다. 명초에 강남 蘇州 지방에 방직, 염색 등의 일을 담당하는 織造局이 설치되었는데, 이 직조국의 감독을 처음에는 지방관이 담당하였으나 영락 연간부터

98) 丁易, 明代特務政治 (汲古書院, 1971), pp.28-29.

99) 환관의 권세는 더욱 높아만 갔는데, 특히 天啓年間(1621-1627)에 魏忠賢은 이 東廠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조정의 반대파를 탄압하고 정치 실권을 장악 하여 공포정치를 낳았다.

100) 明史 成祖本紀 3, 永樂 18年條, “是年 始設東廠 命中官刺事.”

101) 明通鑑 卷17, 成祖永樂 18年 8月條, “是月 置東廠于北京···乃設東廠于東 安門北. 自是中官益專橫不可復制.”

환관을 장으로 삼아 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박사 업무도 환관이 담당하게 하였다. 영락 원년(1403)에 환관 齊喜가 광동 시박의 제독이 되었는데, 그 후 이런 일은 일반화 되었던 것이다.102) 이로 인 하여 환관은 외국과의 무역 사무를 담당하는 시박의 대권을 쥐게 됨으 로써 환관의 권력은 점점 커져갔다.

영락 시기에 환관은 외부로 나가 여러 물건을 사들여 오는 일이 많 았고, 이로 인한 폐해도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영락 4년(1406)에 환관 李進을 山西로 보내어 天花를 캐오도록 하였는데,103) 이 때 이진은 황 제의 명령이라 허위로 선전하고, 가짜로 감합도 작성하여 공적이라 하 면서 사적 이익을 많이 챙겼던 것이다. 이 때 영락제는 어사를 산서에 보내어 이진을 국문하고 즉각 경사로 데려와 엄벌로 다스렸던 것이 다.104) 영락 22년(1424)에는 환관 馬麒가 交趾(베트남 북부)에 가서 거 짓으로 어명이라면서 많은 금은 진주 향료 등을 마구 사들여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처럼 환관이 지방에 내려가 많은 물건들을 구입 하여 왔는데 그 때에 환관의 물의가 많이 따랐던 것이다.

宣德(1425년-1435년) 연간에도 황제는 부단히 환관들을 각지로 보내 어 물건을 사들여 왔다. 환관이 지방에 내려가 많은 물건을 사들여 오 는 과정에서 번거로움이 많았고, 조정에서 많은 화초 나무 새 짐승 및 여러 진귀한 물품을 화관을 보내어 구하였는데, 그 때 환관이 이르는 곳마다 민들이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물건을 구하러 나간 환관 은 종종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챙기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하며, 심지어 조칙을 허위로 조작하여 군민의 재물을 탈취하기도 하였 던 것이다.105)

102) 王春瑜․杜婉言, 明朝宦官 (陝西人民出版社, 2007), p.7.

103) 弇山堂別集 卷90, 中官考 2, 永樂 5年 6月 己亥條, “上諭都察院 謂 去年 曾命內侍李進往山西採天花 此一時之過 後甚悔之 更不令採.”

104) 王春瑜․杜婉言, 明朝宦官 (陝西人民出版社, 2007), p.7.

105) 余華靑, 中國宦官制度史,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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