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같은 위진 남북조의 정치사회적 변동기를 거치고 사회가 안 정되면서 점차 북방민족의 정권이 장기 지속되었다. 특히 오랫동안 잦 은 전쟁으로 戰馬가 대량 요구되고, 농업인구의 감소와 수리시설이 파 괴되면서 토지가 황폐화되어, 목축업을 통해 생존의 자원을 획득하기 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胡族의 음식습속이 농경민과는 달리 五穀雜 糧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못했던 점도 목축업이 발달한 원인을 제공했 던 것이다.
하지만 北魏 중기 이후, 남으로 향하던 農牧 교차지대가 점차 서북 102) 樊樹志, 國史十六講(中華書局, 2006).
103) 예컨대 孫一慰, 齊民要術部分飮食品溯源 (揚州大學烹飪學報 2004-4)에 는 齊民要術의 豚皮餠法과 粉餠法은 14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다른 이름 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제작방식과 공구도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으로 위축 축소되고, 중원지역의 牧場 토지가 점차 농지로 개간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魏晋시대에 인구감소와 농지의 황폐화로 인해 토지 가 방대한 草場으로 변한 것과 상반된다. 즉 인구의 회복과 함께 전쟁 으로 인한 토지황폐화와 식량부족사태가 발생하면서 점차 토지가 개간 되고, 草地가 농지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단위당 생산력 이 높은 쪽으로 산업구조가 변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 환경과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華北지역의 생산양상이 변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 중심지역은 齊民要術의 “非中國物産者”가 말해주듯 “中國”은 이들 “非中國”, 즉 동북, 남방, 서북 및 북부지역을 제외한 황하 중하 류의 화북지역이었던 것 같다. 남하한 胡族의 주근거지였던 화북지역 이 바로 中國지역이며, 非中國지역으로부터 엄청난 “非中國物産”이 유입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북방 鮮卑族이 남하 후 농업화가 철저했음 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4세기 무렵 농업발전은 慕容鮮卑의 역할이 컸 다.
後漢書 鮮卑列傳에 의하면 인구가 증가하면서 선비는 “田畜·射獵”
으로 식량을 충족하지 못하자 倭人을 붙잡아 그들로 하여금 “捕魚”하 게 하여 식량을 보충할 정도였다고 한다.104) 처음 모용선비가 遼西로 진입했을 때는 목축과 수렵을 생업으로 했다. 그러나 점차 주변의 宇 文部, 고구려, 부여 및 漢族의 유민을 수용하면서 “躬耕于野”105)하여 요서지역의 농업개발을 도모했다. 특히 慕容廆는 흉노의 풍습을 그대 로 전습하고 있었지만,106) 農商을 중시하여 대대적으로 선진기술을 확 대하고 법제도 上國과 동일하게 할 정도였다. 그 후 慕容皝은 龍城[朝 陽]으로 천도하여 牧牛와 農具를 貧家에 대여하고 苑中에도 田을 개간 했으며, 溝洫관개를 강조하여 비농업인구를 감소시키는데에 주력했 다.107) 이를 뒷받침할 고고학적 자료에는 遼寧 서북부의 北票喇嘛洞 104) 後漢書 卷90 烏桓鮮卑列傳.
105) 資治通鑑 卷91.
106) 晉書 卷108 慕容廆傳.
大凌河유역에서 최근 발굴된 3세기 말에서 4세기 중엽의 木棺 및 石棺 墓가 있으며, 그곳에는 陶器, 銅器 및 金銀器와 더불어 철기가 대량 출 토되었다. 鐵器로는 馬具(27件), 兵器(42건)를 비롯하여 대형 보습, 볏 과 각종 起耕농구 75건이 동시에 발견되었다. 그리고 요녕 北票縣 西 官營子에서 발견된 북연 왕족의 묘장에서 斧, 鏟 등의 철제 생산공구 가 출토되었으며, 요녕 朝陽 袁台子의 東晉시기 벽화묘에서는 二牛에 의한 犁耕法이 묘사되어 있다.108)
이런 출토유물들을 볼 때, 3세기 이후 자각한 慕容 鮮卑族이 농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정착생활을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109) 그러나 6세기 초 선비족이 漢化된 北燕정권을 건립하면서 農桑을 적극 적으로 장려하여 농업에 게으른 자는 戮하고 力田者를 포상하기도 했 다.
이처럼 선비족을 비롯하여 북방 유목민들이 빠른 시일 내에 경작활 동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정 정도는 漢族과의 접촉과정을 통해 설명할 수 있겠지만,110) 전적으로 漢人에 의해서만 농업을 습득한 것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어쩌면 유목민이 이 동과 교류를 통해 서역에서 생산도구나 농경기술을 수용하여 농경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유목민들이 일찍부터 스텝로드를 통해 中東 지역으로부터 청동기, 철기, 마차와 전술 등을 수용했던 사례를111) 생 107) 衣保中, 앞의 책, 中國東北農業史, pp.62-65.
108) 遼寧博物館 等, 朝陽袁臺子東晉壁畵墓 (文物 1984-6).
109) 拓跋鮮卑의 경우 北部鮮卑라고 하여 大鮮卑山 즉 大興安嶺에서 기원하여 한 대에는 呼倫貝爾 草原으로 들어왔다. 초기의 鮮卑墓에는 약간의 鮮卑문물, 즉 骨器, 鐵器, 銅器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수렵용구와 장식품이었으 며, 아직 農具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鮮卑人이 狩獵경제단계에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후반기의 유적으로 내몽고 북서부 변경지역인 札賚諾爾 木 圖那河東岸의 31座 鮮卑墓群에는 대량의 철제수렵공구가 출토되고, 철기는 점 차 주요한 수렵공구로 자리 잡았다. 다만 이곳의 陶罐 속에 약간의 모래가 포 함된 穀粒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미 간단한 농업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5胡를 통합하여 북위를 건국하여 華北의 농업지대를 통치하게 되었다.
110) 李泳集, 從考古發現看鮮卑族農業 (農業考古 1991-3)에는 漢문화와의 접 촉과정에서 鮮卑농업이 발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각해보면, 카자흐초원의 유목민으로부터 농경기술을 유입했을 가능성 도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3세기 초 遼西지역에 건립한 前燕, 後燕과 北燕의 三燕은 고 구려의 西進과 맞물려서 서로 간의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민족 간의 접 촉과 교류는 가속화되었다. 비록 상호간의 文化淵源은 다르지만, 문화 가 移入되면서 墓葬, 陶器, 馬具(鞍具, 馬鐙, 馬鏣, 三鈴環, 杏葉), 甲騎 具裝飾(馬冑), 帶扣, 步搖 등 각 부분에서 유목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확인 되었다. 그 중에는 후술하겠지만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족 重裝騎 兵의 흔적도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兩國에서 끝나지 않고 한반도나 日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112) 이처럼 이동뿐 아니라 민족간의 전쟁과 충돌 역시 일종의 중요한 문화교류 형식이다. 동북지 역의 여러 소수민족은 그런 점에서 西아시아의 각종 선진문화를 일정 정도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113)
고구려 역시 그 先住民이나 그와 국경을 같이하던 민족이 농경, 수 렵, 유목 등으로 다양한 생활을 했던 것을 보면 고구려 문화의 토대는 복합적이었을 것이다.114) 遼寧과 吉林의 남부에 위치한 高句麗는 夫餘 系 또는 貊系라는 설도 있지만, 後漢書 高句麗傳에는 “好修宮室”하 고, 정착지가 “多大山深谷 人隨而為居”하고, 경제활동은 “少田業 力作 不足以自資”을 보면115) 半農半獵 생활로서 농업은 보조수단이었던 것 111) 청동기, 철기, 마차 등 당시 사회경제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요소들이 모두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어 甘肅을 거쳐 中原으로 유입된 것을 출토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이 같은 사실은 崑崙山 神話 속에 내재되었다고 한다[金秉駿, 古代中國의 西方전래문물과 崑崙山 神話 (古代中國의 理解 5, 지식산업사, 2001)]. 그러나 漢代 이전 이들 문화를 전달한 사람들은 분명 유 목민이었을 것이고, 東北지역 경우 중국을 거치지 않고 바로 스텝로드를 거쳐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112) 田立坤, 靑果集(知識出版社, 1998), pp.339-340.
113) 朱學淵, 中國北方諸族的源流(中華書局, 2002). 유목민에 의해 서방과 靺鞨, 鮮卑와 蒙古族 등 東北 諸族은 기원전부터 상호 문화를 교류했다고 있다.
114) 耿鐵華, 高句麗漁獵經濟初探 (博物館硏究 1986-3); 劉景文, 古夫餘農牧 業探索 (中國考古集成(秦漢至三國2), 北京出版社).
115) 後漢書 卷85 東夷列傳 高句驪, “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
같다.
漢 중기 이후에 고구려가 중원과 전쟁 또는 무역이 빈번해지면서 철제 농구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 점에서 반농․반렵적인 생활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에는 “無良田 雖力佃 作 不足以實口腹”하여 節食했으며, 모용선비와의 잦은 전쟁으로 생산 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 같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접어들면서 집안현 부 근에서 출토된 鐵鏵를 통해 고구려의 농업발달 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鐵鏵는 초대형으로 길이가 49.5cm, 后寬이 48cm에 달하 며, 凹字형(23×10cm)과 一字형 鍤이나 반월형 鐵鎌(23×3cm)은 이 지 역 풍토의 독특한 風格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미 고구려 역시 농 업을 통한 경작방식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隋書 高麗傳에는 “人稅布五匹 穀五石”, “租戶一石 次七斗 下五斗”116) 의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兩唐書 高麗傳에 의하면 李勣이 요동성에 서 “糧十萬石”을 획득한 것을 보면 고구려의 농업생산이 장족의 발전 을 했음을 알 수 있다.117) 인접한 沃沮 역시 동북의 동쪽에 위치했지 만 “토지가 기름지고 산을 등지면서 바다로 향해 있어 五穀재배에 적 합하고 농사도 잘 지었다.”118)는 것을 보면 비슷한 시기 주변지역의 농업 발달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상 몇몇 동북의 토착민족의 상황으로 볼 때, 先秦시대부터 유목민 족 중 일부 민족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원시 농경생활을 시작했지만 한 대까지는 補助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秦末漢初와 魏晉시대에 민족간 의 이동이 활발해짐과 더불어 동북에도 內地에서 농업인구의 유입과
與沃沮 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 多大山深谷 人隨而為居 少田業 力作不足以自 資 故其俗節於飲食 而好修宮室. 東夷相傳以為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跪 拜曳一腳 行步皆走. 凡有五族 有消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116) 隋書 卷81 高麗傳.
117) 馬大正 外4인, 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黑龍江敎育出版社, 2001), pp.66- 68.
118) 後漢書 卷85 東夷傳 東沃沮, “東沃沮……土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種 有 邑落長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