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1월 1일에 中華民國이 성립된 후에 일본 외무성 및 간도 영사관의 사이에서 雜居地 거주 조선인에 대한 재판에서 일본이 立會 權 등의 권리를 어떻게 행사할 수 있는지가 문제로 부상되었다.
1912년 3월 25일부로 內田康哉 外相(제1기 재직기간: 1911.08-1912.
12)은 速水一孔 間島總領事代理 (재직 기간: 1911.12-1912.06)에게 여전 히 日員聽審章程 은 성립되지 않고, 일본은 아직 중화민국 정부를 승 인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人命犯 재판 사건을 끝없이 미결 상태로 보류할 수 없기에 일시적인 처리로 速水 총영사대리가 중국 관 헌과 협의하여 심리에 입회하여 중국의 법규를 정당하게 적용한 경우
에는 판결을 내리는 것에 동의하라고 回訓하였다.53)
速水 총영사대리는 內田 외상의 회훈대로 陶彬 東南路兵備道道台와 협의하려 했지만 陶 道台가 奉天과 吉林에 출장 중이었기에 道台의 대 리인 關雲從 延吉知府와 교섭을 하려고 하였지만 關 知府만의 생각으 로는 결정하기가 어려웠으므로 1912년 7월 상순에 陶 道台가 귀임한 후에 速水가 미결 재판에 입회하여 동의할 수 있는 안건에는 판결을 내리기로 결정되었다.54) 이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이 일본 영사 관에게 조회했던 안건은 雜居地 거주 조선인의 「人命犯」 재판에 한 정되었다는 일이다.
1911년 羅子溝 거주 조선인이 다음과 같은 사건을 일으켰다. 汪清県 소재 羅子溝는 雜居地 외 지역이다. 羅子溝에 사는 3명을 포함한 6명 의 조선인이 圖們江을 왕래하며 조선에서 강도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 었다. 그들을 체포하여 재판을 할 때 중일 양국이 雜居地 외에서 거주 하는 조선인에 대한 관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羅子溝에 살면서 매년 조선에 출몰하는 조선인 강도단이 1911년 12 월 28일에서 29일에 걸쳐서 鍾城에서 강도 행위를 해서 도망치고 12월 31일 局子街에 잠입하였다. 그것을 확인한 당시의 局子街領事館分館에 소속된 速水一孔 副領事는 즉시 陶彬 道台에게 다음과 같이 체포하도 록 하였다.
ⅰ.혹시 강도단이 商埠地 이외의 지역에서 묵으면 局子街분관 소속 경찰관의 길 안내로 청국 순경이 강도단을 체포한다.
ⅱ.혹시 강도단이 商埠地 내의 조선인 가옥에 들어가면 局子街분관소 속 경찰관이 체포한다.
그러나 速水는 ⅱ의 경우에도 강도단은 오랫동안 청국의 영토 에
53) 機密第8號 雜居地居住ノ朝鮮人ニ係ル人命犯裁判事件審理ニ關スル件 , 1912년 3월25일부, 外務大臣內田康哉발신間島總領事代理速水一孔앞 (裁判關係雜件).
54) 機密19號 雜居地居住ノ朝鮮人ニ係ル人命犯裁判事件審理ニ關スル件 , 1912년 5월29일부, 間島總領事代理速水一孔발신外務大臣內田康哉앞 (裁判關係雜件).
거주해 왔으므로 전원 淸裝 을 하고 있고 청국인 일 가능성이 있었 으므로 체포한 후에는 일단 청국 순경에게 인도하여 취조한 후에 쌍방 이 상의하여 조처하기로 정했다.
12월 31일에 강도단은 商埠地 내의 조선인 여관에 들어간 것을 청국 순경의 협조를 청한 후 局子街 분관 소속 경찰관이 강도단 6명 중 5명 을 체포하여 청국 순경국에 넘겼다. 청국 순경국이 취조한 결과에 따 르면 5명 중 1명만 雜居地인 延吉府 거주자이고 3명은 雜居地 외 지역 의 羅子溝 거주자이며 1명은 역시 雜居地 외 지역의 東寧廳 三岔口 거주자였다. 체포자는 다음과 같다.
曹玉山 年三十四 原籍穩城 現住所羅子溝 光緖8[1882]年移住 土 地二晌을 가짐
崔尹彦 年二十八 原籍慶源 現住所延吉磨盤山 光緖27[1901]年移 住 土地三晌을 가짐
金明壽 年三十 原籍穩城 現住所羅子溝 光緖31[1905]年移住 土 地一晌을 有하며 二晌을 빌림
崔永山 年三十 原籍慶源 現住所東寧廳三岔口[琿春廳의 北方] 光 緒5[1879]年移住 土地三十一晌을 가짐
姜德明 年三十四 原籍穩城 現住所羅子溝 光緖11[1885]年移住 土 地三晌을 가짐
이 사건에 대하여 速水는 강도단 중 4명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雜居地 외 지역에 있다는 것, 범죄지가 중국 국외이므로 중국 형법으 로 처벌할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 후 陶彬 道台로부 터 중국 영토 바깥에 있어서 한 범죄라도 범인이 중국인이기 때문에 중국 형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言明이 있었기에 永瀧久吉 간도총영 사는 이들 강도단을 중국이 처벌하여도 지장이 없다고 여기나 가능한 한 중형을 선고할 것을 원한다고 陶 道台에게 말하였다. 이미 강도단 은 중국 순경국에서 審判廳에 송치되어 심리 중이었다.55)
여기서 중요한 것은 速水가 조선인 강도단이 모두 淸裝 을 하였기 55) 公信第10號 局子街ニ於テ鮮人强盜逮捕ノ件具報 , 1912년1월22일부, 間島總領
事代理速水一孔발신外務大臣內田康哉앞 (裁判關係雜件).
때문에 당시 청국인 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려한 것이다. 速水는 범인들이 계속해서 淸裝 을 하였기 때문에 入籍細則 혹은 取締細 則 의 시행을 인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청국에 입적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하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