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당시 청국인 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려한 것이다. 速水는 범인들이 계속해서 淸裝 을 하였기 때문에 入籍細則 혹은 取締細 則 의 시행을 인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청국에 입적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에서는, 당시 조선 헌병대는 민족독립운동가가 아닌 匪賊의 경우에 는 중국 순경에게 체포하도록 했다57).
內田 외상의 목적은 雜居地 외 지역 거주 조선인에 대한 관할권을 어떻게 할지는 간도협약 이후 중국과 일본의 간에 明文으로 된 합의가 아직 없는 상태였기에 일본이 관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도 남겨야 한다는 것이었다58).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 외교담당자 중에서도 현지와 내지의 사이 에 견해에 차이점이 있었다. 1911년 12월에 생긴 사건에 대해서 간도 의 速水는 자신의 의지로 계속 淸裝을 하는 조선인은 청국에 입적하였 다고 인정하고 민족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비적이라는 점에서 청국이 관 할권을 갖는다고 인식하였다. 즉 현지에서 실제로 중국 관헌과의 교섭 을 통하여 관습화된 기준에 따라 이들 강도단을 중국 관헌에게 인도하 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內地의 內田 외상은 어디까지나 간도조선 인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간주하여 雜居地 외 지역의 일본 관할권도 확 보해 두고 싶다는 견해였다.
57) 韓國倂合으로부터 불과 1년이 채 못 되었지만 間島총영사와 朝鮮總督府는 연 계하여 조선인 민족독립운동가를 영사관 경찰이 청국에 비밀리에 체포하여 雜 居地라도 雜居地 외 지역이라도 청국에 운동가를 넘기지 않고 조선 헌병대로 압송하였다. 혹은 청국 관헌과 영사관 경찰이 공동으로 義兵을 체포한 적도 있 었지만 商埠地 내가 아니면 청국이 체포부터 재판, 형의 집행까지 담당하는 것 을 일본이 인정하였지만 청국 관헌은 쉽게 석방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조선 총독부는 더욱 민족독립운동가에 대한 단속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독립운동가가 아닌 강도 행위 등을 하는 匪賊의 경우는 반드시 일본 헌병이 단속해야 한다는 방침이 아니라 간도의 府나 縣에 단속의 협력을 요청한 사례도 보였다. 예를 들어서 1912년 5월 29일에 汪淸縣凉水泉子에 있는 제2구警察事務處의 巡官에게 朝鮮 穩城憲兵分遣所의 헌병이 조선에서 강도 행 위를 행하였고 간도에 잠입하는 비적을 체포할 요청하였다( 移札 巡防營各區 所 爲日本憲兵報知韓民聚爲匪潛入我國境內請防範緝拏文 , 1912년6월4일부, 吉 林省汪淸縣 編, 吉林汪淸縣政治報告書第三冊, 中國吉林省延邊大學民族學硏究 院資料室所藏). 이상의 경위에 대해서는 졸고, 韓國倂合後の間島における朝 鮮民族獨立運動に對する日本の取締 (朝鮮學報 209, 2008)를 참조하기 바란 다.
58) 機密送第17號 局子街ニ於テ逮捕セラレタル强盜犯鮮人ニ關スル件 , 1912년5월 1일부, 外務大臣內田康哉발신間島總領事代理速水一孔앞 (裁判關係雜件).
1912년 5월 29일에 延吉府(延吉第1初級審判廳)는 陶 道台가 局子街 에 없어도 재판을 집행하였다. 중국은 원래 雜居地 외 지역은 雜居地 가 아니기 때문에 연길부가 스스로 간도협약 제4조에 준거해서 雜居地 외 조선인이 피고인이 된 사건에 적용하고 일본 영사에게 조회할 필요 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제2장 제2절 잡거지 외 지역 거주 조선인 의 법적 지위 에서 제시한 자료 중에서 雜居地 외 지역에 사는 조선인 에 대해서 간도협약 체결 직전 교섭에서는 이번 협의의 주제로 다루 는 것은 할 수 없다 라고 伊集院 공사가 일단 보류했지만 3년 후 淸裝 의 雜居地 외 지역에 토지를 가진 조선인의 사건을 통해서 雜居地 외 지역 거주 조선인의 법적 지위를 협의할 기회가 될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중국의 판단으로 재판을 집행한 것은 雜居地 외 지역 거주 조선인에게 중국의 재판 관할권이 미친다는 것을 공식적 으로 일본에 인정시키는 것을 의미했다59).
이에 대하여 桂太郞 외상(재직 기간:1912.12-1913.01 내각총리 대신을 겸임)은 速水 총영사대리에게, 강도 행위를 범한 雜居地 외 지 역 거주 조선인을 일본 영사관 소속 경찰관이 局子街 商埠地에서 체포 하여 중국 관헌에게 인도한 것은 일본 경찰관의 착오이고, 범인들은 淸日通商航海條約 제20조에 의거하여 일본이 재판 관할권을 보유한다 는 것을 延吉府에게 宣明하라고 回訓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중국 은 雜居地 외 지역의 조선인에 대하여 일본에 지조하지 않고 재판을 실행함으로써 중국의 재판 관할권을 확립해 갔다.
1914년 6월 19일에 雜居地 외 지역에 있는 汪淸縣 凉水泉子 부근에 서 복통 때문에 스스로 모르핀을 오른팔에 주사한 농민 安樂興이 중국 순경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이 농민은 조선 穩城郡에 살고 있으면 서도 借地한 경작지가 凉水泉子에 있어서 圖們江을 왕래하면서 농사를
59) 機密第43號 局子街ニ於テ逮捕セラレタル强盜犯鮮人取戾ニ關シ交涉ノ件具申 , 1912년11월27일부, 間島總領事代理速水一孔발신外務大臣內田康哉앞 (裁判關係 雜件). 陶彬 道台는 귀임한 후에 수범이 징역 9년에 처해진 것을 문지했다고 速水 총영사대리에게 대답했다.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淸日通商航海條約 제6조 의 후반의 혹시 여행자가 법률을 어겼을 때에는 중국 내의 가장 가까 운 일본 영사관에게 인도해야 한다 고 기술된 부분을 근거로 百草溝出 張所主任은 중국에, 安樂興을 일본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60). 그러나 汪淸縣知事61)는 체포 후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재판을 집행하였다62).
중국이 雜居地 외 지역에서 거주하는 조선인에 대하여 일본 영사관 에 통보하지 않고 재판을 실행하는 상황에 대하여 加藤高明 외상(제4 기 재직 기간:1914.04-1915.08)은, 鈴木要太郞 간도총영사대리(제1 기 재직 기간:1914.08-1918.05)가 중국을 너무 엄격하게 비난하 면, 雜居地 외 지역 거주 조선인이나 조선에서 雜居地 외 지역에서 경 작하려고 왕래하는 조선인 농민의 거주권 및 경작권 등의 기득 권익을 빼앗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加藤 외상은 이는 간도 내 에서의 일본 세력의 쇠퇴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사회 불안을 조성하 고, 혹은 圖們江 연안 지역의 치안 악화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 한 것이다.
이로 인해 加藤 외상은 중국이 일본 영사관에게 조회를 하지 않고 雜居地 외 지역에서의 사건에 관해서 조선인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을 묵과하더라도 그 재판 관할권을 공공연하게 승인해서는 안 된다고 回 訓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63). 이리하여 간도협약 하에서 日員聽審 60) 百發第51號 越耕鮮民裁判管轄ニ關スル件 , 1914년6월23일부, 百草溝出張所主
任橫尾勇太郞발신間島總領事代理堺與三吉앞(裁判関係雑件).
61) 1914년 4월 30일에 大總統令에 의거하여 審判檢察廳 제도의 개정이 있었다.
延吉府에 3, 和龍縣에 2, 汪淸縣에 1, 琿春縣에 1 각각 배치한 初級審判廳을 철 폐해서 延吉第1分庭(龍井村)과 延吉第2分庭(琿春)에 통합하고 延吉地方審判廳 (延吉)에 속하게 되었다. 이 결과 和龍縣과 汪淸縣에 審判廳에 상당하는 기관 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 2縣의 縣知事는 承審員 1명씩 두고 사소한 사건의 사 법 사무를 겸장하게 되었다. 承審員은 사법 사무에 관한 知事의 보조관이고 심 리 안건에 대해서는 知事와 함께 책임을 지게 되었다. 知事의 사법 사무는 吉 林高等審判檢察廳長의 감독을 받고 承審員은 知事의 감독을 받았다(東洋拓殖 株式會社, 間島事情, 1918년, pp.975-976 ).
62) 第23號 , 1914년7월11일發, 間島總領事代理堺與三吉발신外務大臣加藤高明앞 (裁判關係雜件).
章程 이 타결하지 않고 雜居地 외 지역 거주 조선인에 대한 청국의 귀 화 정책이 감행되고 雜居地 및 雜居地 외 지역에서 사실상 중국 경찰 의 체포권이 유효한 상황에서 일본의 간도 거주 조선인의 재판에 관한 권리 행사의 기회는 축소되었다. 그 에 반해 중국은 雜居地 외 지역 거주 조선인에 대한 재판 관할권을 확립해 가고 있었다.
Ⅴ.결 론
1909년 9월 4일에 청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間島協約은 청국과 조선 간에 귀속 문제를 안고 있던 간도를 청국의 영토라고 인정하고, 간도 에 개설된 4개의 商埠地에 사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영사재판권 및 간도 내에서도 특히 조선인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구획하여 설정한 雜居地 에서 사는 조선인에 대한 청국의 統治權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재판에 대한 일본의 立會權, 覆審請求權 및 재판에 관한 정보의 知照權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雜居地 외의 지역에 사는 조선인 에 대한 관할권에 대해서는 明文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즉 간도협약에 의하면, 간도는 청국령이 되었지만 거주 조선인에게 미치는 관할권을 행사하는 대상에 따라 1. 商埠地 거주 조선인, 2. 雜居地 거주 조선인, 3. 雜居地 외 지역 거주 조선인의 3가지로 구분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국 영토에 사는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이는 간도가 민족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단속하거나 또는 만주권익의 일부로서 간도에 거점을 구 축하기 위하여, 확보할 수 있는 권리는 유지하여 두고 싶은 일본에 대 하여 중국이 대항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본고에서는 간도협약을 체결한 후부터 양국이 표면적이라도 간도협 63) 機密第48號 圖們江左岸雜居地外越墾鮮人ノ裁判管轄權ニ關スル件 , 1914년8월
18일부, 外務大臣加藤高明발신間島總領事鈴木要太郞앞 (裁判關係雜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