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연구는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메논의 유엔한국위원단 활동.
둘째는 1945년 이후 인도 정부의 한국에 대한 입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인도의 입장 변화이다.
유엔한국위원단은 한국에서 선거를 요구하는 결의안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1948년 1월 말까지만 해도 위원단 활동은 미국 정부에게 눈엣가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호주와 캐나다의 대표들이 남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관철하 자는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2월 초에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유엔한국위원단이 임시 위원회가 아닌 총회에서 승인되었기 때문에 이 결의안이 인도 정부가 메논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유엔한국위원단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위원회의 결정을 마지막 실천 단어로 삼지 말아야 한다. 선관위가 선거운동을 결정하자 그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거절했다. 일단 그는 위원회에서 나온 후 한국 문제의 해결점을 찾으려는 많은 정치인들을 만났다. 메논과, 잭슨(주 도쿄 호주 의원단 고문관)장관, 시리아의 짜비 등도 그 정치인들이 참석하는 남북회담에 합의하고 38선을 넘어 회의에 참가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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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구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회의는 한국에 도착한 이래 본인이 관여한 일 중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말했다.
인도는 한국전쟁에서 무력과 무기의 사용을 최소화하려고 애썼던 국가들 중 하나이다.
38선을 넘어서 계속 무력을 사용해 움직이려는 유엔을 경고한 것도 인도이다. 유엔의 인도 대표자 B.N Rau 에게 인도의 중국 대사 파니카가 만약 미국이 계속 무력을 사용한다면 중국이 군대를 개입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렸다. B.N Rau는 “우리 정부는 결과적으로 북한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고 갈등 지역이 더욱 확장 될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우리의 두려움은 쓸데 없었던 것으로 밝혀질 지도 모르지만, 각 정부는
재량 하에서 한국의 정보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123고 말했다. 네루는 또한 “다른 국가들이 중국이 전보다 더 강력한 아시아 국가로써 부상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게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인도가 중국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전쟁과 군사 개입을 확대시킬 가능성을 최소화 하기 위해 이 자세를 취한 것이다.
1950년대에 중국은 유엔군을 한반도로부터 철수시키는 일에 치중했고, 이 시국에 인도도 또한 중립 강대국(대부분 비동맹 국가들) 그룹의 중재를 통해 전쟁을 막으려고 애썼다. 1950년 12월 5일에 북경(북한편에 있는 국가들)과 북한에게 38선을 넘어 갈등을 강화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안보리에서 소련이 모든 군대를 한국에서 철수하자고 제안한 것은 인도의 노력의 결과였다.
B.N Rau는 1950년 12월 12일 이 제안과 함께 총회로 자리를 옮겼다. 공산주의
세력은 인도에게 실망하여 그 제안을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러한 인도의 움직임을 한국에서 심각한 곤경에 처한 유엔군을 구하기 위한 시도로 보았다. 하지만 문제를 중재하려는 노력에 대해 서양의 몇
123 Chan Wahn, Kim, 『The Role of India in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Area Review, Vol 13(2),2010), Page no: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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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들은 인도를 감사히 여겼다. 제안은 총회의 첫 위원회에 의해 52표의 찬성과 5표의 반대로 통과되었다. 정전 위원회는 인도, 중국, 이란으로 구성되었다. 그 목적은 한국의 유엔 사령부가 38선에서 휴전 협정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한국에 대한 인도 국가의 정책은 한반도 내의 평화 정책이었고 한국 통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선거가 한국의 이미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남북의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선거가 치러진 후에도, 인도가 남한정부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 것은 더 나중의 일이었다. 인도 국가와 K.P.S 메논 사이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이것의 한 가지 이유는 있었다. 인도는 인도 자체의 배경 정책 124과 외교 정책의 이익 때문에 그러한 입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런 상황 속에서 파니카는 중국에 왔다. 중국의 대부분 입장은 인도를 통해 유엔에 갔다. 중국과 유엔 사이에서 인도는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우한 평화적 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 하였으며,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인도는 매번 한국에서 군사 행동 발생의 가능성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인도는 중국이 군사적으로 전쟁에 가입하지 않게 하기 위해 중국과 계속 논의하려 시도 했지만, 중국, 소련, 영국 사이의 복잡한 국제 관계 문제는 인도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인도는 기본적으로 한국통일, 세계평화를 위한 제안들에 동조하는 입장을 지녔다. 메논도 유엔한국위원단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위원회의 모든 절차를 한국통일, 평화 정착의 길로 일을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결국 인도의 입장과 메논의 입장에 변화가 생겼다. 메논은 그런 생각과 방향 하에 미국의 결의안을 수락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첫 번째 이유로 그의 개인적 삶과 직업적 삶의 연관성을 들었다. 메논의 결정과 입장이 직간접적으로 그가 마주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그의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에 꽤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시인 모윤숙은 그의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모윤숙뿐 만 아니라, 그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이 메논이 유엔한국위원단 위원장의 능력으로써 그가 내려야
124 Panchsheel (인도의 외교 정책): (Coexistence, respect for the territorial and integral sovereignty of others, non-aggression, non-interference with the internal affairs of others and recognition of the equality of others):
Neh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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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몇 중대한 사안들에 영향을 끼쳤다. 메논은 남한 지역의 선거를 개최하는데 타협한 것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국 통일운동의 지도자들은 통일의 가능성을 영원히 축소시킨 것에 대해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연설에서 그는 그의 모든 행동과 결정들이 한국의 민주 정부와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며 그의 입장을 정당화했다. 선거의 분위기가 북한에서 아직 무르익지 않았고 북한 쪽에서의 협력적인 없었기 때문에 유일한 해결책은 최소한 가능한 곳에서라도 선거를 하는 것이 그들의 최선의 결정이 였다고 했다.
메논은 인도의 이 프로포즐(proposal)을 거부하지 않고 자기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인도가 그 결정에 반대표를 던져 눈에 띄게 된다면, 그녀는 큰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125
두번째 이유로는 인도의 유엔 대표 P. P. Pillai의 견해였다. 메논은 결의안 투표에 대한 인도의 입장은 그것이 둘러싸여있는 특유의 상황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P. P.
Pilla 박사는 유엔의 영구 대표자였다. 그의 신용을 위해 그는 국가 리그와 같은
국제기구에 참여한 경험이 많았다. 메논은 “유엔의 의견 수렴은 미국의 견해에 강하게 달려 있으며 인도에선 쓸모 없으며, 심지어 인도가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해롭다”고 썼다. 126
메논은 P. P. Pillai 의 입장에서 동의하지 않는다고 자서전에서 썼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P. P. Pillai는 메논 보다 외교관에서 경험이
125 K.P.S. Menon, 『Many Worlds: An Autobiography』.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Bombay,1965), Page no:259.
126K.P.S. Menon, 『Many Worlds: An Autobiography』.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Bombay,1965), Page no: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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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한반도 문제와 얽힌 담론들, 특히 메논의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인 사건들을 자세히 밝히면서, 한반도 문제에 인도가 어떤 역할을 했고, 메논의 역할과 영향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사하였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초대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메논의 역할과 결정은 한국의 운명에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 문제를 조사하고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처음에 남한만에서의 선거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메논은 이에 반대했다. 이런 결정이 결국 한반도 내의 통일을 영구히 날려 버리는 조치라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나중에 메논은 그의 입장을 바꿔 그 결정을 따랐다. 북한 지역은 아직 선거를 치를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도 한 이유 이었고, 남한만의 민주 정부를 세우는 것이 나중에 한반도의 안정과 통일의 가능성에 기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각각의 사안들에 대해 많은 국가들이 인도의 자세와 입장을 비판했다. 아마도 그 비판은 인도가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고 새로 획득한 통치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댓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평화적 해결책과
안정을 향하던 데서 입장을 바꾼 것 때문에 인도는 많은 원한을 샀다. 인도는 제3세계의 관여의 결과가 영토 분쟁, 국민 분열, 문화와 사회의 분열, 유혈사태였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인도는 1947년에 이 모든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인도라는 나라는 몸에서 영혼이 분리된 것처럼 분리되어 나뉘었다. 영혼이 다시 돌아와 하나가 되는 것은 다시는 이뤄질 수 없는 머나먼 꿈이자 소망이다. 왜냐하면 이미 권력을 잡은 자들이 절대로 그들의 권좌가 전복되게 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 나라의 국민들이 다시 뭉쳐 ‘하나’가 되게 하는 꿈을 꾸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수백만 명에게 두려움과 슬픔을 안기면서, 한국은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재결합의 가능성은 0(제로)에 가까웠고 지금도 그렇다. 냉전체제는 이처럼 세계를 여러 형태로 파괴했다.
이데올로기(사상) 싸움과 권력유지를 위해 하나의 영토를 둘로 갈라놓는 이런 행위는 인류의 역사에서 결코 용서될 수도, 잊혀질 수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