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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일찍부터 북경 지역을 드나들면서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북경 지역에 는 고구려인과 신라인들이 거주했던 기록과 지명이 보이고, 고려인들이 사찰을 세우거 나 활동한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뒤이어 조선인들도 북경 지역을 드나들면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조선 조정에서 보낸 사절단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이 다.

명청 시대에 조선 사신들이 북경 도성에서 머물렀던 관사는 어디인가? 소위 조선사 관에 관한 기록은 사행록(燕行錄)을 비롯한 각종 문헌에 자세히 남아 있다. 명 건국

爲步軍統領公廨, 舊有宣武門內瞻雲坊公廨, 卽改爲禮部會同館. 又以地安門外帽兒衚衕之會同館, 爲 步軍統領衙門, 廳舍百四十有二間.. (續修四庫全書本, 책810, 쪽545)

110) ≪欽定大淸會典事例≫ 권514 <禮部朝貢館舍>: 嘉慶五年奏准, 宣武門內瞻雲坊館及正陽門 外橫街館二處會同館房, 向爲安南琉球等國來使館舍, 自乾隆五十五年奉旨, 安南緬甸暹羅 掌等國, 俱著內務府經理. 此房遂置間曠, 應交與內務府收管. (續修四庫全書本, 책806, 쪽174)

초 이례적으로 육로로 북평(북경)을 두룬 權近 일행은 燕臺驛에서 머물렀다. 연대역은 훗날 북회동관으로 발전했고, 오늘날 王府井大街와 東單三條가 교차하는 동북쪽 자리 이다. 사행 노선이 크게 변한 1409년(영락 7) 이후 1637년(인조 15)까지 대명 조선 사 절은 줄곧 玉河館(南會同館)에 머물렀다. 옥하관은 오늘날 東城區 東交民巷 最高人民 法院 자리이다.

청초에는 조선 사절이 여전히 옥하관에 머물렀다. 옥하관은 17세기 중엽 러시아 사 절이 들어온 이후부터 조선 사절의 사용빈도수가 급감하다가, 1732년(옹정 10) 관사 뒤편에 동방정교 교당이 세워진 이후부터 러시아 사절만 전적으로 사용하는 사관으로 바뀌었다. 청나라 입관 직후에 북경에 들어온 麟坪大君 李㴭는 감시와 예우 차원에서 부사 이하 일행과 분리되어 別館에 유숙하였다. 별관은 자금성 바깥과 접해있는 동북 쪽 일대로 추정된다. ≪건륭경성전도≫에 보이는 北高麗館은 현 東城區 美術館後街 77 號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인평대군이 머물렀던 별관 또는 북경에 동시에 들어오는 조선 사절을 위해 마련한 예비용 관사인 북관일 가능성이 있으나, 앞으로 좀 더 보완 작업이 필요하다.

러시아 사절이 옥하관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조선 사절들은 智化寺, 督浦司, 法華寺, 北極寺, 十方院 등 여러 곳으로 옮겨 유숙했다. 지화사는 현 東城區 祿米倉衚 衕 5號이고, 법화사는 东城区 报房胡同 99號 일대이다. 督浦司는 천안문광장 서쪽 國 家大劇院 또는 그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 북극사는 琉璃廠西街 끝에 소재한 옛 北極 巷에 소재한다. 십방원은 前圆恩寺衚衕에 소재한 옛 廣慈寺로 추정된다.

1724년(옹정 2) 이후 조선사절은 한동안 현 王府井 東天主堂 남쪽 골목인 甘雨衚衕 에 자리한 乾魚衚衕館을 이용했다. 조선사절들은 건어호동관의 공간이 비좁고 불길하 다는 소문이 나돌자 사용하기를 꺼려했다. 1748년(건륭 13) 이후부터 1905년까지 조선 사절은 기존 옥하관에서 바로 남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玉河橋館(南高麗館, 南館)을 주로 사용하였다. 옥하교관은 ≪건륭경성전도≫에도 보이는 고려관으로 현 東城區 前 門東大街 北京市公安局 자리이다. 여러 조선 사행이 동시에 들어왔을 때 후발 사행은 西館(瞻雲坊館)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관은 현 西城區 復興門內大街 民族文化宮 후원 자리이다.

끝으로 찰기를 덧붙인다. 요사이에 동아일보에서 연재할 중국 대륙 속의 우리 문화 의 흔적을 찾아서라는 기획보도를 준비하고 있다. 본 논문도 이러한 차원에서 출발하 여 그동안 수집해두었던 북경 소재 조선사관 자료들을 찾아 정리 분석한 것이다. 북경 도성에서 조선 사신들이 머물렀던 관사를 찾는 작업은 옛 기록을 정확하게 고찰하는 학술적 성과 외에 한중 우호교류의 역사적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주제이다. 한 중 양국 사람들에게 예전에 양국 사이에 이루어졌던 교류의 역사 현장을 눈으로 확인 시켜주고 미래의 양국의 관계가 더욱 돈독하게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弓洞自然; 壬辰 初伏]

임 대 희 (경북대)

중국에 가있는 동안, 도서관에서 우연히 『찻닢의 길』이라는 책을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艾梅霞(Martha Avery),『茶葉之路』(The Tea road; China and Russia meet across the steppe)(中信出版社) 이라는 책1)이었는데, 이 책의 중국어 번역은 여러 가 지 다른 번역이 있었다. 2)

1) 그 이후에 이 책의 번역이 한국어로 된 것이 없는지 찾아보는 과정에서, 한국내에도 중국차에 관련된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이 분야에 여러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박홍관,『박홍관의 중국차 견문록 - 중국 대륙의 차 문화를 찾아 떠난 현장의 기록들』, 이른아침, 2010년 2월. 누노메 초후,『중국 끽다 문화사』,정순일 (옮긴 이), 동국대학교출판부, 2012년 3월. 박홍관,『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차』, 형설출판사, 2011년 6 월(2008년 1월). 강판권, 『차 한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 지호, 2006년 5월. 박정도,『중국차의 향기』, 박이정, 2001년 3월. 김진숙,『중국 차 문화 茶經』, 국학자료원, 2009년 8월. 오금선,『한 입 쏙 중국차』, 와서, 2008년 9월. 박명애,『중국 차 문화 기행 - 향기의 원천』, 푸른사상, 2002 년 1월. 박희성,『원림 - 중국정원에서 만난 선과 차, 사대부와 의경』,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년 1월. 엄영욱, 염숙, 『중국역사 속에 꽃피운 차문화』, 전남대학교출판부, 2009년 9월. 이 진수, 『한권으로 이해하는 중국 차문화』, 지영사, 2007년 4월. 리우통,『차』, 홍혜율 (옮긴이), 대가, 2008년 7월. 김경우,『중국차의 세계』, 다도사, 2008년 6월. 김경우,『중국차의 이해』, 다 도사, 2005년 12월. 리우이링, 『차의 향기』, 이은미 (옮긴이), 산지니, 2006년 7월. 김영숙,『중 국의 차와 예』, 차의세계, 2006년 6월. 다나하시 고오호오, 『중국 차문화』, 석도윤 (옮긴이),

중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금길”, “비단길”, “도자기의 길”이라는 널리 알려진 경로와 마찬가지로 “찻닢의 길”이라는 경로가 있다. 이 책에서는 중국의 차가 러시아에까지 이르는 과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을 주로 다루고 있다.3)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찻닢의 길”은 러시아와의 찻닢의 무역에 따라서 개통이 된 셈인데, 북경에서 몽골을 거쳐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상로(商路)이었다.

1638년에 중국의 찻닢은 처음으로 러시아에 소개되었다. 1689년에 “찻닢의 길”이 정식 으로 개통된 셈이다. 이와 더불어 동서 양대 제국 사이에 직접적인 무역과 정치적인 접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동서간의 “찻닢” 무역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러 최고 점에 이르렀다. 19세기 중엽에는 청정이 통상구안(通商口岸)을 개설하고 수에즈(Suez) 운하가 개통되게 되자 해상운수가 보다 신속해졌으며, 해상무역이 늘어나게 되자 육상 으로의 “찻닢의 길”이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이후에 점차 쇠미하게 되었다.

무역과 정치는 크게 볼 때에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효과는 결국 지 리적인 요인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항이 “찻닢의 길”에도 대 표적인 사례가 되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 책에서는 낙타(駱駝)대상(隊商)들이 어떻게 사막을 건넜으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벽돌차(茶磚)는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도 검토하였다. 그리고, 벽돌차(茶磚)가 어떻게 지폐(紙幣)와 통용되었는지도 밝혔다.

또한, 원대(元代) 쿠빌라이 카안 시기 재무대신이었던 사라센 사람인 아흐마드 (Ahmad Fanākatī)가 매우 호화로운 사치생활을 하였으며 결국은 비참하게 최후를 맞 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적혀있고, 러시아의 수도사(修道士)가 빈손으로 노새를 타고 북 경의 큰거리 작은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사항은 이 책의 저자가 중국쪽에 대해서나 시간적 공간적인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우 선 이 책에서 쓰여지고 있는 러시아와의 “찻닢” 무역은 1638년 이후의 사안이므로 원 대(元代)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리고, 이 교역 노정에는 북경이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러시아나 몽골은 눈이 몹시 쌓이는 추운 지역이어서 그곳의 사람들은 주로 짙은 차를 마시는데, 중국에서 짙은 차는 복건지역에서 생산된다.

하늘북, 2006년 4월. 김정연,『중국차 이야기 - 같은 잎 다른 맛』, 안그라픽스, 2005년 12월. 중 국차엽유통협회, 『중국 차예사』, 이른아침, 2005년 8월. 조은아, 『중국차 이야기』, 살림, 2012 년 8월(2012년 10월)등의 서적이 있었다.

2) 이 책의 목차는, 自序, 茶叶之路大事年表, 前言 中国俄国大草原:三点透视茶叶之路, 第一章 茶叶之路:从起始到终结, 第二章 摘山煮海:中国茶叶贸易的起源, 第三章 跨大陆的贸易工具:商业 的润滑剂, 第四章 长城之侧的明代马市:张家口, 第五章 王相卿和大草原上的茶叶贸易, 第六章 通 往库伦的骆驼商队:戈壁上的喇嘛和喇嘛庙, 第七章 从库伦跨过土拉河, 第八章 满洲征服蒙古, 第九 章 从两端侵蚀左翼汗国, 第十章 萨瓦全爵与恰克图的建立, 第十一章 北京俄罗斯馆的间谍站, 注释, 词汇表, 索引으로 되어있다.

3) “찻닢의 길”을 제목으로 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와의 이 상도(商道)를 다룬 전저(專著)로서는 이밖 에도 内蒙古의 鄧九剛, 『茶葉之路:歐亞商道興衰三百年』(内蒙古人民出版社,2000年;2008年)이 있 는데, 이 책은 『茶葉之路:康熙大帝與彼得大帝的商貿往事』라는 제목으로 新华出版社에서 再版되 었다. 또한, 이 드라마에서 애초에는 산서성에서 소비되는 찻닢 유통에서 시작하면서 경험을 축 적하였는데 그 부분은 호북지방에서 구입하고 있다. 杜七紅, 「淸代兩湖地區茶葉的種植與分佈」

《중국사연구》 60집, (2009년) 참조.

Dalam dokumen 中國 社會文化의 歷史的 照明 (Halaman 3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