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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까지 동독의 교통망은 매우 낙후된 상태였다. 유지·보수가 되 지 않았으며, 서독에 비해 적어도 20년 이상이나 차이가 났다. 열차들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해 동독의 중요도시인 Dresden과 Leipzig간 120Km 를 평균 시속 60Km 이상을 낼 수 없었다. 신호 및 안전시스템은 물론, 역사 또한 긴급 복구를 요하는 상태였다. 8,000개 교량 중 3,500개 정도 가 85년이 넘은 노후 상태로 교량 건설 후 단 한 번도 보수되지 않았다.

신호박스의 70% 이상이 수동으로 작동되었다. 이상과 같은 교통 인프 라의 개선을 위해 서독 정부는 1965년 이래 다양한 지원을 했다.

우선 Hirschberg 부근의 Saale교의 교량복구를 위해 서독 정부는

총 55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Helmsteht~Berlin간 고속도로 보수를 위해서는 총 2억 5,950만 마르크를 지원했다. Berlin~Hamburg간 고 속도로 보수를 위해서는 총 12억 마르크가 지급되었다.51 그 밖에도

Wartha~Eisenach간 고속도로 신설 및 확장을 위해 2억 6,800만 마르 크 지급했다. 서독과 서베를린 왕복 여객운송철도 개선을 위해 1976년 2,600만 마르크, 1977년 1,860만 마르크를 지급하였으며, 1980년에도

총 8,90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동‧서독은 기본조약을 통해 교통 분야의 협력을 확대하고 강화할 것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75년 12월 19일 동‧서독은 수차례 회담을 거친 후 통과로 확충 및 개선에 관한 합의에 도달했다. 동독 정부는

Marienborn과 Berliner Ring 간의 고속도로를 보수(노면보수, 일부구간

6차선화)하며, 프로젝트의 총 경비 4억 500만 마르크 중 서독정부가 2억

5,950만 마르크를 부담할 것에 합의했다.52 이러한 공동 프로젝트에 대해

서독정부는 베를린과 서독 간의 연계성에 의의를 두었던 반면, 동독은 전 략적 의의가 큰 도로의 일부가 서독으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을 수 있는 점에 큰 의미를 두었다.

위와 비슷하게 Berlin~Hamburg 간의 제2차 교통프로젝트를 위해 동독은 1978년 서독과 회담을 개시하고 1980년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1978년 11월 16일 5개월에 걸친 회담 후 ① 북부 고속도로의 건설,

51 _ 분할지급내역은 1979년 3월 1일: 1억 2,000만 마르크, 1979년 12월 15일: 2억 7,000

만 마르크, 1980년 6월 30일: 2억 7,000만 마르크, 1981년 6월 30일: 2억 7,000만 마르크, 1982년(준공시): 2억 7,000만 마르크였다.

52 _ 이러한 합의에 대해서 서독 내에서는 찬반양론이 있었는데, 비판의 요지는 도로공사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동독은 기술적으로 15년이나 낙후되어 고속도로의 건 설경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동독에게 건설을 위임한다는 점과, 서독측 재료가격과 임금에 기준한 서독수준의 건설비용의 계산이 너무 높아 재정지출이 과다하다는 주장을 폈다. 찬성하는 측은 동독이 애당초 회담제안과는 달리 프로젝트 비용의 35% 참여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서독측으로서도 비교적 생산성이 있는 거래이자,

km당 예정가격이 서독의 국내가격보다 저렴하다는 점을 들었다. 즉 전장 150km의

Helmsteht-Berlin 간에 합의된 1km당 합의비용은 267만 마르크나 서독의 경우

약 400만 마르크가 소요된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동독 정부측의 부담 을 제한 매 km당 170만 마르크만 지불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② 베를린 남부 Teltow 운하의 재개, ③ 1980년부터 1989년까지 통과 일괄금을 기존 4억 마르크에서 5억 2,500만 마르크로 인상, ④ 동독의 서독제 현대식 건설장비 구입을 위해 1억 마르크 지원과 같은 공동 프로젝트에 대한 합의했다.53 이와 같은 서독 정부의 호의에 동독은

① 서독인들의 동독방문시 산재연금수령자에 대한 최소환전 면제,

② 더 많은 정치범 석방, ③ 유로수표와 크레디트 카드의 동독 도입 등의 반대급부를 제공했다.

그 외에도 서독의 대 동독 교통 분야의 지원은 통과여객 및 승용차 도로사용료의 일괄 지급, 차량세 면제, 화물운송료 보상 등으로 나타났다.

1971년 12월 17일자 통과협정에 근거하여 서독지역과 서베를린지역 간 통과시 징수되던 도로 사용료와 사증비용은 1972년 1월 1일부터 더 이상 개인 징수하지 않고 서독 정부가 예산에 일괄금을 계산하여 매년 3월 31일까지 “동독이 지정한 서독은행의 구좌를 이용하여 동베를린 소 재 동독의 독일 대외무역은행 주식회사(Deutsch Aussenhandelsbank:

AG)에게 송금하였다.54 이와 같은 조치는 여행교통의 안정화에 기여하

였으며, 특히 베를린과 국경 부근의 여행교통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 했다.

한편, 1979년 10월 31일 서독은 동독과 차량세 면제협정을 체결하였 는데, 그 내용은 ① 동독트럭과 버스운영에 대한 세금면제, ② 서독의

53 _ 서독 정부는 향후 10년에 걸쳐 비용을 부담하되 그중 12억 마르크는 고속도로 건설

에, 1억 9,000만 마르크는 Teltow 운하 및 통과로의 운하개선용으로 부담하기로 했다.

54 _ 내독관계성은 동독이 이용하고 있는 서독내 은행의 자유구좌에 관한 내용을 발표하

지 않았는데, 공동경제은행(Bank für Gemeinwirtschaft)을 통해 일괄금이 송금되 는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통과일괄금은 연간 2억 2,490만 마르크로 확정되었으나, 동독측의 요청에 따라 1976년 3월 31일부터 4억 마르크(1975년 12월 19일 결정), 1980년 3월 31일부터 5억 2,500만 마르크(1978년 11월 16일 결정)로 인상되었으며 이 금액은 실제 교통량과 관계없이 일괄적으로 1989년 말까지 지불되었다.

트럭과 버스에 대한 동독의 도로사용료 징수 철폐 등이었다. 차량세 면 제협정에 서독측 승용차는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동독행 서 독승용차가 베를린 통과교통을 제외하고는 200만 대에 이르렀던 반면, 극소수의 동독승용차만이 서독이나 서베를린으로 왔기 때문에, 수적인 균형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베를린은 차량세 면 제협정에 포함되었었다. 도로 사용료 철폐와 함께 서독의 영업용 화물 교통은 연간 1,200만 내지 1,500만 마르크의 재정적 부담을 덜게 되었 으며, 이로 인해 서독 화물업계는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