례도 나타나고 있다. 셋째, 의사들이 부족한 의약품마저 병원에서 빼돌리면서 하 층 북한주민의 건강권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61 북한인권 실태
본질적으로 이러한 시책의 효과가 주민들의 사회권 신장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차별적 배분정책이 시정되지 않는 한 일반주민과 취약계층의 식량과 의료에 대한 차별적 접근은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다. 전반적 식량과 의료체계의 복원과 더불어 차별정책과 부패요소를 제거해야 일반주민들의 실질적 인권개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박형중. “김정은 통치연합의 출범과 특징.” Online Series Co 12-18, 2012.4.23.
김정은정권 권력재편과 위기요인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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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범
통일정책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신속한 권력승계
2012년 4월 북한의 4차 당대표자 회의 및 최고인민회의 12기 5차 회의를 기점 으로 김정은체제의 권력지형 재편이 일단락되었다. 김정일 장례식 직후인 2011년
12월 30일 최고사령관직에 취임한 김정은은 2012년 4월의 두 정치행사를 통해 당
제1비서직과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직에 올랐다. 이로써 김정은은 당·정·군이라는 북한 권력 3대기구의 최고위직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명실상부한 북한의 최고지 도자로 자리매김했다. 사망한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명명하고 김정은 자신은 다른 직함을 사용하고 있으나 사실상 김정일 위원장과 형식상 동일한 권력기반을 갖추고 있다.
김정은 권력승계 작업의 공식적 마무리가 김정일 사망 후 약 4개월 만에 신속하 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의 4년에 걸친 승계기간과 비교된 다. 김정일은 20년 이상 권력승계 준비기간을 거쳤으며, 김일성 사망 당시 이미 사실상 실질적인 최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직에 취임했음에도 불구하고 1994년 김일성사망 이후 3년이 넘는 유훈통치 기간을 설정하였으며, 공식적인 지도자 직함승계에 시간차를 두었다. 김정일이 당 총비서 에 취임한 것은 1997년 10월이었고, 국방위원장에 오른 것은 1998년 9월이었다.
김정일의 경우 장기간의 권력승계 준비단계를 통해 자력으로 인맥과 지지기반 을 형성함으로써 김일성의 지지기반인 혁명 1세대 그룹의 지원과 더불어 권력기 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반면 김정은의 경우 자력으로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번의 권력재편과정은 김정일의 급사로 일 정을 긴급히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김정은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도
163 김정은정권 권력재편과 위기요인 진단
사실상 ‘김정일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충성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김정은 권력승계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아직 ‘외형적인 차원’에 국한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권력기반의 실질적 구축이라는 본격적인 과정을 앞두 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속한 권력승계과정은 김정은의 취약한 권력기반의 다른 표현일 수 도 있다.
김정은의 권력승계가 공식화 되었으나 이 과정은 김정일 시대에 작성된 후계승 계 설계도와 김정일의 인물들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의 정치·
행정에 대한 실질적 장악력은 아직 미진한 것으로 보이며, 일천한 경력에 비추어 전반적인 국무 조정력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경제시찰에 주력했던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의 군부대 시찰 및 행사참여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은 아직 공고하지 않 은 김정은의 권력기반과 관련이 있다. 김정은은 권력의 안정적 행사를 위해 무력 기반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군에 우선적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반면 해법을 찾기 힘든 경제 분야의 경우 김정은의 뚜렷한 동선을 발견하기 어렵다. 권력기반이 확고했던 김정일이 경제문제에 주력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른 배경이라 할 수 있다.1)
장거리 로켓인 은하 3호 발사시도의 경우도 김정은의 취약한 국정장악력을 나 타내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로켓발사에 장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이미 김정일 에 의해서 발사가 계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성탑재 로켓발사의 경우 한국의 경우처럼 실패율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발사상황의 공개는 무리한 시도로 볼 수 있다. 김정은 자신의 진두지휘 하에 세계의 주목을 집중시키는 대형 행사를 공개 적으로 시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보하겠다는 다른 의도를 지녔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로켓발사 실패이후 책임자들에 대한 인책이 이루 어 지지 않은 것도 맥을 같이한다.
예정된 로켓발사에도 불구하고 돌출된 2·29 미‧북 합의는 북한 내 컨트롤 타워 부재를 의미한다. 2·29 미‧북합의와 로켓발사라는 상충된 두 사안은 북한 내의 정 책적 혼선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김정일체제의 경우에도 대남 및 대외정책에 있어
1) 올해 들어 4월초까지 이루어진 김정은의 35회에 달하는 공개활동 중에서 군 관련 활동이 22회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경제부문 시찰의 경우 1건에 그치고 있다.
2011년 김정일의 공개활동 145회 중 경제목적 시찰이 61회로 군 관련 행사 39회보다 월등 히 많았다는 점과 비교된다. 김정일이 생전에 8차례나 건설현장을 시찰할 정도로 북한이 강 성대국의 상징으로 여겨오던 희천발전소 준공식날 김정은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대신 해군 제 155군부대를 방문했다. 이 부대는 1968년 미군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ꡔ조선일보ꡕ, 2012년 4월 9일.
강온을 오가는 갈지자 형태의 추세가 나타났으나 김정일이라는 확실한 컨트롤 타 워가 존재했다는 차이를 보인다.
장성택계의 군·공안권력 장악
최고지도자의 교체는 필연적으로 권력엘리트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김정은 이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직계로 이루어진 지지기반을 형성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기존 권력엘리트 구성의 변화를 야기할 수 밖에 없 다. 2012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두 정치행사는 김정은체제의 권력지형변화를 보 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핵심은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 원장계의 인사들이 실세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김정은의 실세 후견인인 장성택은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당 정 치국 위원에 이름을 올리는 것에 그쳤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면에서는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금년 4월을 계기로 장성택계의 인사들이 군과 공안권력의 수 장 지위에 올랐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군정치라는 군 중심 통제 체제인 북한에서 군에 대한 확고한 장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권력승계과정이라는 유동적 정치상황에서 공안권력은 권력엘리트 및 대중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 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장성택계가 군과 공안권력의 핵심적 요직을 장악했다는 점 에서 4월 북한 권부의 변화는 김정은정권 강화를 명분으로 한 ‘장성택에 의한 장 성택을 위한 권력재편’으로 볼 소지가 충분하다.
우선 최룡해의 급속한 부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차 남이자 장성택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최룡해는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과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으며 당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도 올랐다. 장성택의 재기 과정과 동선을 함께 해온 최룡해는 황해북도 당 책임비서를 거쳐 2010년 3 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정치국 후보위원, 당 근로단체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 원에 임명됐고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았다. 2012년 4월 7일 인민군 차수 승진과 아울러 군부 내 최고직책으로 꼽히는 인민군 총정치국장직을 차지했다. 최룡해는 김정일시대 군부 실세인 리영호 총참모장이 가지지 못한 국방위원회 위원이라는 직책도 가지고 있다. 최근 북한 매체에 의해 두 차례 보도2)된 최룡해의 군 건설현
2) ꡔ조선중앙통신ꡕ, 2012년 4월 25일.
165 김정은정권 권력재편과 위기요인 진단
장 ‘현지요해’(현지시찰)는 그의 위상을 상징하고 있다. 그동안 북한에서 현지지도 관련 보도는 최고지도자 외에 최영림 내각 총리에 국한되어 왔다는 점에서 최룡 해 관련 보도는 매우 이례적이다.
4차 당대표자회 직전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된 김원홍 전 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부국장도 장성택계로 알려지고 있다. 김원홍이 장성택의 측근인 리명수 인민 보안부장을 능가하는 공안책임자로 부상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김원 홍과 리명수는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노동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며, 리명수는 당 중앙군사위 위원에도 올랐다. 군과 민간에 대한 감시 기능을 가진 두 기관의 수장 이 모두 장성택계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점에서 12·12 쿠데타 당 시 전두환 소장이 군부내 고위 실력자들을 배제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의 하나 가 보안사령부라는 군 공안권력을 확실히 장악하는 한편, 합동수사본부장의 직책 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최룡해를 정점으로 김원홍과 리명수의 부상은 장성택계가 군과 공안권력을 확 고하게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권력재편과정에서 장 성택은 자신의 노출을 최소화하면서 측근들을 통해 실권을 장악하는데 주력했다 고 할 수 있다. 장성택 자신의 급부상은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권력 재편과정의 막후 조정자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의 고모이자 장성택 의 부인인 김경희가 당중앙위 비서로 승격된 것도 장성택계의 권력기반 강화과정 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원로그룹의 쇠퇴
장성택계의 부상과 달리 김정일 시대의 원로들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고 있 다. 4차 당대표자회와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원로인사들에 대한 부분적 상향 인사 조치가 있었으나 대부분 실권이 없는 예우차원으로 보인다. 정치국 상무위원 5인 의 경우, 서열상 김정은, 김영남, 최영림, 최룡해, 그리고 리영호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영남과 최영림이 각각 1925년생, 1930년생으로 매우 고령이고 실권이 없 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 부상한 최룡해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김원홍이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과 아울러 그동안 국가안전보위부의 실세였 던 우동측 보위부 1부부장은 최근 주요 행사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김정일 이 공석인 국가안전보위부장을 임명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적으로 관리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