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한중관계는 완전히 중일 양국 관계의 일부 분이 되었다. 1912년 청정부가 멸망하긴 했지만 사실상 중국의 대외 관계에 급격한 변화는 없었다. 다만 각국이 중화민국정부를 정식 승인 할 때까지 국가 간의 ‘공식적’인 국제외교교섭은 불가능했다. 중국 외 교관계가 복잡 미묘하게 변화하던 시기에 일본식민지 조선에서 조계철 폐문제가 대두되었다.
조계철폐로 인한 영향이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중국이었다.
인천, 원산, 부산에 중국전관조계가 있고, 그 외에 진남포, 목포, 군산, 성진, 마산 등지의 각국공공조계에도 많은 중국인이 있었다. 한일병합 이후 중국측에서 일본의 움직임을 최초로 인지한 것은 경성주재 독일 총영사로부터 전해들은 총독부 제안의 ‘비공식’ 회의 계획이었다. 이후 일본 외무성이 1912년 8월 28일 일본주재 7개국 대표를 통해 조계철 폐문제를 ‘공식화’했고, 10월 29일에는 대체적인 <정리안> 원안이 각 국대표에게 전달되었다. 중국은 국제적 미승인 문제를 이유로 일본과 의 정식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중국측은 조계철폐교섭과 관련해서 비
70) <電函知永代及所有權(鎭字제57호, 진남포 부영사 張國威→富士英, 1914.04.27)>, 「주한사관당-민국3년:외국정정03」, 118-125면; <覆詢永代所 有權兩權之能各商選擇(부사영→진남포영사, 1914.05.01)>, 「주한사관당-민국3 년:외국정정04」, p.2. 결국 진남포 화상이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 확인할 만 한 자료가 없어 불명확하다.
공식적이든, 공식적이든 일본으로부터 어떠한 통지도 받지 못했다.
일본측에서는 이번 회의가 각국조계에 관한 것이며, 본국정부의 훈 령에 따른 공식 협의가 되어 중국의 참여가 불가함에 유감을 표명했 다. 중국전관조계는 다른 적당한 시기 일본전관조계 처리에 준할 예정 이며, 각국조계내 중국인의 모든 이해관계는 사전협의 결과 ‘각국인과 동일한 처리를 받게 될 것’임을 통보하였다. 결국 예정된 각국조계철 폐에 관한 ‘사전협의회’에 중국의 총영사는 참석할 수 없었다. 이로부 터 중국측에서는 중국의 회의 참여를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참여가 불가하다면 회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 였다.
한편 조계철폐문제가 대두된 이래 중국과 일본 모두가 협정조건으 로 삼았던 것은 ‘각국과의 대등한 대우’에 있었다. 그 조건의 근거는
<청국조계장정(1913.03.11)> 체결 당일 함께 교환했던 ‘照會’였다. 그 런데 각국조계에는 인정하고 있는 영대권과 소유권에 대한 임의선택권 을 전관조계에는 허락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조회’내 문구의 적용 과 해석을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했다. 중국측에서는 조회 내용 중 “중 국을 각국과 다른 지위에 두지 않는다”는 문구와 저촉된다고 지적한 반면, 일본측은 마찬가지로 “영원차지권을 토지소유권으로 변경한다”
는 문구가 있으므로 합당하며, 또 ‘각국’에는 일본도 포함된다고 주장 했다.
중국정부의 입장은 특별히 각국에 비해 우세할 필요는 없지만 차이 가 없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겼고 ‘각국과 동등한 방법’으로 처 리하길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기존 각국조계규정에 따른 차지료 증가를 전제로 중국전관조계내에서 영대권과 소유권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 문제는 설령 영대권을 다투어 회수한다고 해도 세금이 과거에 비해 크다면 누가 영대권을 선택할 것인가에 있었다.
당초 영대권을 통해 토지를 소유한 화교들은 향후 지가가 상승하면 매 각하여 이익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법리와 현실상 영대차지권이 소유권보다 좋은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영대권을 획득하면 장래
영원히 매각할 수 없을까 염려하고, 영대권 세액이 소유권의 세액에 비해 과중할까 꺼려했다. 이 문제는 조계내 거주하는 화교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중국 측은 영대권의 차지료에 대한 조정이 필요 했다. 그리고 각국조계를 포함하여 ‘각국에 완전히 동일한 방법이 적 용’되도록 교섭했다.
교섭의 결과 실제 차지료 조정과 함께 화교 스스로가 이해관계를 따져서 선택할 기회를 보장받았다. 화교들이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각 권리의 성질을 상세히 알고 자유롭게 선택해야 했다. 특히 永代借地의 차지료 교섭은 조계폐지시 화교가 영대권과 소유권 가운데 하나를 선 택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상 중국의 조선내 조계철폐교섭은 기득권유지를 통한 자국민보호 를 위한 교섭과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권국가간의 대등관계를 전 제로 하는 근대 국제관계속에서 중국의 위상을 자리매김하는 과정이었 다. 그렇다면 조계철폐교섭과정의 실태 분석이 중국근대외교의 형성 또는 중국근대(외교)사를 이해하는데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우선 청말 민초시기 중국외교상 정책기조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중국정부가 교섭과정에서 ‘중국이 이미 각국의 하나가 된’ 즉, 일본에
‘각국과 대등한 대우’를 강력하게 요구했던 사실은 근대적 주권의식과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인 외교교섭에 대한 지향성을 명확 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해서 중화민국 북경정부가 국제사회에 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교섭상대국으로서 인정되는 것을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스스로 지위향상을 도모하여, 특히 열강의 대열에 동참하려 는 중화민국의 정책기조가 형성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중국정부의 정책수행자로서 교섭 담당자가 바로 근대적 인 외교 실무관료였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주재 중국총영사는 청정부 가 서양과의 교섭사무를 담당할 양무기관으로서 총리아문을 설립한 이 후 양성된 번역인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말 각지 대외교섭의 최전 선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재외공관을 각지에 두는 과정에서 교섭사무
를 담당했던 외교인재였다. 즉 청말 ‘洋務’ 지식과 경험의 축적과정, 그리고 新政 개혁의 과정에서 양성된 외교기관의 인재였다. 그들은 현 실의 교섭 현장에서 서양에서 들어온 국제공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富士英은 ‘각국이 참여하는 회의에 중국이 동참’하여 논쟁한다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어떠한 의미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국제공법상 영대권과 소유권 등 두 권리의 성 질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의정서>나 <각서> 등 일본이 제출한 議案 이 그 해석과 적용에서 公法에 부합하는지를 논쟁함으로써 교섭을 성 공으로 이끌어냈다.
마지막으로 기존에 강조해 왔던 중국근대사의 서술과는 또 다른 중 국근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편전쟁 이래로 현실상 중국은 약체 로 평가되었고, 대외교섭은 늘상 굴욕적인 굴복이라는 결과로 끝이 났 다. 청말 이래 중국은 국제사회 속에서 ‘대등한 주권국가’로의 위상 획 득을 목표로 해서, 대내적으로는 각 부분에서 제도·정책적 개혁을, 대 외적으로는 각국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을 위해 노력해 왔던 것이 사실 이다. 반면 조선내 조계철폐문제는 역으로 조선에서 특권을 누려왔던 중국을 상대로 일본이 주도했던 불평등조약 개정교섭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소위 약소국에게 외교는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적어 도 조계철폐문제를 둘러싼 조선에서의 對日 중국외교에서는 근대적인 인식하에서 철저히 중국 본국의 권위와 조선에 거주하는 화교의 이익 을 최대한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교섭의 결과 중국은 조선에서 각국과 대등한 대우를 받는, 즉 최혜국민대우를 받는 각국의 일원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일본을 상대로 외교교섭에 성공한 후 마정량 대리공 사가 부사영 총영사의 외교활동에 대해 감탄하면서 중화민국의 앞날에 희망이 있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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