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內 中國 租界交涉과 中國近代外交
-駐朝鮮總領事의 租界撤廢交涉을 中心으로-
1)
金 希 信 (仁川大 中國學術院)
Ⅰ. 들어가며
Ⅱ. 한일병합과 조계문제
1. 한·중·일 외교관계변화와 조선 주재 중국총영사
2. 일본의 조선내 조계철폐교섭 의 방법
Ⅲ. 조계철폐문제의 대두와 중국의 대응 -馬廷亮 시기
Ⅳ. 중·일 조계철폐교섭과 주요 쟁점 -富士英 시기
1. 조계철폐에 관한 ‘사전협의회’
참가 요구
2. 영대차지권 문제와 ‘각국과 대 등한 대우’ 요구
3. 영대차지료 조정과 권리의 선택
Ⅴ. 나가며
Ⅰ. 들어가며
본 연구는 기존의 한·중·일 관계에 ‘租界’라는 지표를 더해서 한국내 중국조계철폐교섭 과정에서 나타난 청말로부터 민국에 이르는 중국 근 대외교의 실태를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다. 외교사적으로 보면 청말 민 초 시기는 전통 중국과 근대 중국의 외교를 매개하는 시기이며, 이 시 기를 검토하는 것이야 말로 중국이 근대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될 다양 한 가능성을 고찰하는데 관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중국 근대외교의 형성과 관련해서는 기존에 동아시아에 내재하는
* 이 논문은 2012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 된 연구임(NRF-2012S1A5A2A01020165)
국제관계 시스템과 근대적 조약시스템과의 갈등, 혹은 수용, 근대적 재편 등을 둘러싼 몇 가지 의논들이 이미 진행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중국정부와 중국외교 관료들이 행하고자 했던 근대적 외교를 문제로 해서, 거기서 근대 중국의 다양한 형태를 드러내 볼 수 있게 된다. 조 약을 체결한다거나 양무기관으로 총리아문을 설립하고, 더 나아가 재 외공관을 각지에 두는 과정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분 명 淸은 서구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던 국제관계의 ‘표준’, 예를 들어 국제공법을 수용, 적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과정은 어디 까지나 각국 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이 때 ‘대등한 주권 국가간’ 외교를 진행했는가가 문제가 된다.
기존의 청말 중국외교사 서술에서는 주로 불평등성을 강조하는 서 양 열강과의 관계사에 치중되어 있거나, 청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재편이란 측면이 강조되어 왔던 것 이 사실이다.
그런데 청말 이래 조선에는 중국의 조계가 존재해 왔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는 을사늑약의 체결 이후 1914년 4 월 1일 폐지가 공식화될 때까지 중국은 조선의 조계공간에서 일정정 도 특권을 누려왔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불평 등성을 보여주는 조선내 조계지역을 지방행정기구로 편입함으로써 통 치를 일원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선내 조계지역은 기득권익의 유지 와 국권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중일 양국의 상호 이해관계가 충돌하 는 공간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조선내 중국조계철폐문제를 둘러싼 중일 양국의 교섭과정에 주목한다. 필자는 기존에 축적된 관련 연구 성과를 충분히 염두에 두되, 조계문제를 중국외교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1)
1) 조선내 중국조계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는 주로 출간되어 있는 淸案 및 일 본외교자료 등을 토대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영사재판권과 더불어 원세개를 중심으로 한 조선에 대한 ‘적극 개입’(해석상 종주권강화론 혹은 제국주의 침 략론으로 구분)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서 개설·확장에 대해 개괄적으로 언급
우선 청말 민초시기 한중일 외교관계의 변화와 급변하는 중국의 정치 적 상황에서 외교 교섭을 담당한 중국 외교 관료들에 주목한다. 조계 철폐교섭과정은 다양한 층위에서 의견의 조정이 필요했을 것이며, 교 섭방향의 수립 및 시행에서부터 교섭에 이르기까지 외교담당자는 양국 의 상충된 이해관계를 정리하며 추진해 나가야 할 기획의 조정자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중국외교라는 관점에서 조계철폐의 구 체적인 교섭과정의 전모를 시계열적으로 전면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를 위해 기존에 공간된 각종 자료를 비롯하여 대만중앙연구원이 소장 한 광범위한 外交檔案2)과 국가기록원 소장의 朝鮮總督府資料 등 중일 외교기록을 교섭 추이의 흐름 속에서 재배열하여 기존의 편면적이고 개략적인 서술방식을 벗어나 교섭과정의 서술에서 구체성을 한층 강화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편 청일전쟁 이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한국 내 중국 조계문제에 대한 연구는 한국사적 시각에서 한국개항장연구 혹은 개항기 도시변천사라는 관점에서 1876년 개항 이래 1910년 한일병합까지 통사적으로 설명한 연구가 있다(손정목, 한국개항기 도시변화과정연구, 일지사, 1994;
李鉉淙, 한국개항장연구, 일조각, 1975). 최근 청국조계의 재설정과 철폐과 정 자체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도시공간 인식과 재편 문제, 화교의 법적지위 문제 등으로 검토 시점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 다(박준형, 「청일전쟁이후 잡거지 한성의 공간재편논의와 한청통상조약」, 서 울학연구 45, 2011; 박준형, 「청일전쟁 이후 인천 淸國租界의 법적 지위와 조계내 조선인 거주문제」, 한국학연구 22, 2010; 박준형, 「청국조계와 ‘한국 병합’-식민지 조선이라는 잡거공간의 성립」, 도시연구 6, 2011 등). 다만 이 들 연구에서의 서술은 전적으로 일본외교문서에 의존하고 있고, 조계 문제가 관련 각국에게 있어서 매우 온도차가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는 것을 염두에 둔 다면 동시기 중국 외교당안을 동시에 적극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중 국 외교당안에 근거해서 동시대적인 환경을 중시하면서 중국의 조선에 대한 외교사적 입장에 주목한 일본에서의 연구가 눈에 띤다(川島 眞, 「第1章 對朝鮮 外交-主權下の宗主」, 中國近代外交の形成, 名古屋大學出版會, 2004, pp.355-377). 필자의 문제의식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고 청말 민초의 중국 외교에 대한 종전의 논의가 줄곧 제도적 혼란, 매국외교, 弱國 無外交, 혁명외 교 등에 치중했던 것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 대만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당안관의 외교당안에 대해서는 김희신, 「근대 한중관계의 변화와 외교당안의 생성 -‘淸季駐韓使館保存檔’을 중심으로」 (중 국근현대사연구 50, 2011)을 참조.
하는 접근방식을 취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일 양국이 각각 어떠한 논 리를 갖고 조계철폐교섭에 임하고 있는지, 그리고 교섭의 진행과정에 서 주요한 논쟁점은 무엇인지를 집중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을 통해 조선주재의 중국총영사와 중국정부가 지향하고자 했던 근 대외교의 단서를 발견해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한일병합과 조계문제
1. 한중일 외교관계변화와 조선주재 중국총영사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이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함에 따 라 외교권은 박탈당했고, 11월 26일 중국주재 일본공사가 청정부에 한국의 외교권 상실을 공식 통보했다. <을사늑약> 제1·2조에 의거해 서 1906년 2월 한국주재 공사관을 철수하는 대신, 화교보호를 위해 한성에 韓國總領事署를 설치했다. 그리고 전관조계가 있던 인천, 부산, 원산, 그리고 공공조계가 있던 진남포 등 4곳에 領事署를 두었다. 조 선의 화교수는 점차 증가하였고 지역적으로도 분산적 경향을 보이면서 각 영사관의 관할 범위도 확대되었다. 인천영사관은 군산·목포의 상무 를, 부산영사관은 마산포·대구지역의 상무를, 원산은 城津 지역의 상무 를, 진남포영사관은 평양·신의주 상무를 함께 관할했다.3) 선통3년 (1911년) 7월에는 신의주 영사관을 추가로 신설했다. 기존에는 진남포 영사관에서 평양, 신의주를 포함하여 평안남북 양 道를 모두 관할했지 만, 신의주 영사관이 신설된 후에는 평안남도의 평양 등 지역은 증남 포 영사가 관할하고, 평안북도 각처는 신의주영사가 관할하도록 했 다.4)
3) <한국총영사관 마정량이 민정부에 보낸 申報(광서33년 11월 24일)>, 「駐韓使 館檔 -馬廷亮: 商務15」, pp.8-9.
<韓國總領事章程9條>에 의하면 총영사는 부임 후 중요안건의 경우 수시로 외무부에 보고하며, 일반안건의 경우도 문건으로 외무부에 보 고하여 비준을 받아 시행토록 규정했다. 한국 개항장에 있는 교민 보 호를 위해 각 통상지역에 속한 사안은 각지 영사가 일본이사청과 상의 하여 처리했다. 만일 중요사안일 경우 총영사에게 보고하여 일본 통감 부와 논의하여 처리토록 했다.5) 총영사가 각지 영사를 지휘 통솔했고, 각국과의 외교교섭 절차상 형식적으로 일본주재중국공사에게 귀속되는 지위에 있었다. 다만 중요안건의 경우는 총영사가 淸 외무부에 직접 보고한 후 지시를 받았다.
이렇듯 대한제국의 외교적 추락으로 한중 외교관계는 공사급에서 총영사급 관계로 격하되었고, 한중 양국관계가 중일관계에 종속되는 등 한중관계는 커다란 전환을 맞이했다. 더욱이 1910-1911년에는 한·
중 양국 모두 정치상 큰 변화가 있었고, 이는 한·중·일 삼국의 외교관 계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우선 1910년 8월 일본이 대한제국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정식으로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의 영토로 ‘병합’했다. 이에 대한 청정부 의 공식적 반응은 “다른 나라에서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도 마찬 가지로 처리할 것”이었다.6) 일본정부의 <한국병합에 관한 선언> 제1 조에 의해 <한청통상조약>은 폐지되었고 대한제국과 중국이 체결한 영사관계에 관한 합의도 무효화되었다. 대신 중일 <淸日通商行船條 約>(1896년 6월 11일 체결, 9월 21일 비준 교환) 제3관 규정에 의거 하여 한국주재 영사가 화상보호 등과 관련해서 활동하는 것이 가능했
4) <外務部에서 마정량에 내린 札(선통3년 7월 2일)>; <마정량이 外務部에 올린 申請(선통3년 8월 27일)>; <외무부가 마정량에게 내린 札(선통3년 9월 7일;
9월 13일 도착)>, 「주한사관당 -마정량: 人事24」, p.5; 16-19.
5) <外務部發駐韓馬廷亮總領事札[附件1:韓國總領事章程9條](광서32년 2월 29일 /1906.3.23)>, 淸季中日韓關係史料(이하 關係史料로 칭함) 9, 문서번호 4313, pp.6265-6266.
6) <發駐韓總領事馬廷亮電(선통2년 7월 25일)>, 淸宣統朝中日交涉史料 권5(文 海出版社, 1963), p.24[총p.327].
다. 그러나 대한제국과 중국과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독립국가간의 외교관계가 아니었다. 대한제국 국호는 폐지되었고 조선에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주한사관의 직함은 한일병합과 함께 ‘주한국총영사’에서
‘주조선총영사’로 바뀌었다. 또한 조선내에서 중국과의 교섭업무는 모 두 일본이 대신함으로써 한일병합과 함께 한중관계는 완전히 중일양국 관계의 일부분이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1911년 10월 신해혁명의 발발과 함께 청정부가 멸망했고,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1912년 1월 5일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대외선언서>(8조)를 발표했다.7) 혁명이전 청정부와 체결 된 각국 조약은 계속 유효하고 외채와 배상은 계속 부담할 것이며 각 국 인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각국이 갖고 있는 권리도 보호된 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1912년 2월 14일 주조선총영사가 경성주재 각 국 총영사 및 영사에게 청 황제퇴위 사실, 그리고 새로운 국가의 명칭 과 국기에 대해 통첩했다.8) 각국은 정식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민국정 부의 승인문제를 보류했지만 중국주재 각국 공사들은 각국 정부를 대 표하여 민국정부와 교섭하였고 각국도 암묵적으로 주재국의 중국공사 를 외교대표로 인정하였다. 청정부가 파견했던 조선총영사도 중화민국 수립 후 여전히 식민지 조선에서 업무를 계속했다.
사실상 청의 멸망으로 중국의 대외관계에 급격한 변화는 없었다. 다 만 각국이 중화민국정부를 정식 승인할 때까지 국가 간의 ‘공식적’인 국제외교교섭은 불가능했다. 북경정부가 중화민국헌법에 의거하여 대 총통 선거를 치르고, 1913년 10월 6일 원세개의 대총통 당선이라는 선거의 결과를 중화민국 외교부를 통해 각국공사관에 통지함으로써 비 로소 일본을 포함한 각국이 중화민국을 정식으로 인정하게 되었다.9)
뒤의 <표1>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총영사’를 비롯하여 淸정부가
7) 吳東之 主編, 中國外交史 2: 中華民國時期, 1911-1949 (河南人民出版社, 1988), pp.5-6.
8) 「淸領事의 통첩」 (每日申報 1912.02.15).
9) 「總統選擧通牒」; 「民國承認次第」; 「民國政府感謝」 (每日申報 1913.10.09).
파견한 인천, 원산, 부산, 신의주, 진남포(증남포)의 각 [正·副]영사는 민국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유임되었다. 한중일 삼국의 외교관계가 미 묘하게 변화했던 시기, 조선주재 중국총영사로 활동했던 인물이 바로 馬廷亮과 富士英이었다.
마정량(1869-?)은 字가 拱宸이며 廣東 南海人이다. 廣州同文館(제3 기)과 北京(京師)同文館 학생을 거쳐, 동문관 영문 副敎習의 신분으로 광서22년(1896년) 4월 총리아문 飜譯官에 임명되었다. 1861년 총리 아문이 세워진 후 번역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북경, 상해, 광주 세 곳 에 동문관, 즉 외국어학당을 세웠다. 상해, 광주 동문관의 졸업생은 뛰 어난 외국어실력을 가졌다면 선발되어 경사동문관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학업내용으로는 외국어 외에도 富國策, 萬國公法 등 사회과학, 자연과학, 문학, 예술 등 과정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었다. 경 사동문관 학생들은 졸업 후 대부분 駐外使領館에서 公使, 領事, 參贊 및 飜譯官 등 업무 외에도 국내 중앙 및 각 省 지방에서 외교교섭 업 무를 맡았다. 마정량도 同文館에서 배양된 인재였다. 그는 광서23년 (1897년) 2월 戶部左侍郞 總理衙門大臣 張蔭楦이 영국 빅토리아여왕 등극 60주년 경축특사로 참가할 때 함께 수행했고, 귀국 후에도 계속 총리아문 번역관직을 맡았다. 한편 광서27년(1901년) 의화단사건이 북경으로 확대되어 잠시 산동에 피신해 있을 당시 山東巡撫 원세개에 게 발탁되어 산동 교섭사무를 함께 처리했다. 마정량은 영어에 능통하 고 서양과의 교섭을 처리한 경험이 있는, 당시로서는 많지 않은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10)
광서29년(1903년) 6월에는 출사일본대신 楊樞가 外務部에 청하여
10) <同文館學生楊晟總署飜譯官馬廷亮在山東借資卽留在東省襄辦交涉請査照施行 由(山東巡撫袁世凱→總署, 1901.3.20)>, 「總理各國事務衙門-地方交涉-各省俄 人交涉-各地請派人員襄辦交涉09-004(館藏號01-16-080-09-004)」; 李文杰, 「 總理衙門的飜譯官」 (歷史檔案 2011-2), pp.93-94; 梁駒, 「淸末廣州外語學校
」 (羊城晩報 2012.03.08); 趙海亮, 「京師同文館與中國近代史」 (山西大學碩士 學位論文, 2004), pp.14-15; 敷文社 編, 最近官紳履歷彙編 第1集 (近代中國 史料叢刊450), p.104.
일본주재 중국공사관의 2等 參贊官이 되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중 외교관계가 중일관계에 종속되었던 광서32년(1906년) 1월 10일 2品 頂戴分省前先補用道의 신분으로 駐韓總領事에 임명되었다.11) 1906년 4월 24일 주한총영사로 부임한 후, 1912년 12월 10일 橫濱주재 총영 사로 임명되어 1913년 2월 26일 조선을 떠날 때까지 7년 가까운 시 기를 조선에 머물렀다.12) 주조선총영사 재임 시절, 1910년 3월 일본 과 <仁川釜山元山淸國租界章程(총14조)>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정부와 청정부간의 차관 안건 및 중국인 관련 문제들을 원만하게 처리하였다.
특히 경성주재 영사단 주석으로 京城 외교계에서 명성이 있었다.13) 이 후 마정량은 1913년 일본주재공사 汪大燮이 한국으로 귀국한 후 橫濱 총영사를 거쳐 일본주재 대리공사의 신분으로 조계폐지와 관련해서 일 본에서의 교섭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마정량의 후임으로 온 富士英(1880-1926년)은 字가 意誠으로 浙江 海鹽人(武原鎭 楊家弄)이며, 14세에 고향을 떠나 上海南洋小學과 上海方言館에서 공부했다. 광서24년(1898년) 淸 南洋大臣 劉坤一이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할 때, 부사영은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여 4년 뒤인 1902년 法學士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총리 아문 및 北洋大臣公署에서 外務 관련 직무를 맡았다. 광서29년(1903 년) 2월 淸 大學士, 戶部尙書 那桐이 일본의 재정을 고찰하러 갈 때 함께 동행하였고, 4월에는 북양대신 원세개가 洋務 隨員으로 임명하여 新政 사무를 겸하여 처리했다. 9월에는 다시 일본에 파견되어 工藝, 監獄 등에 대한 조사를 맡았다. 광서30년(1904년) 6월 關外로 파견되
11) <奏准撤退駐韓使臣派馬廷亮充總領事希轉達日外部(광서32년 정월 10일 /1906.02.03)>; <擬撤回駐韓使臣派馬廷亮威總領事駐札韓國京城(광서32년 정월 초10일/1906.02.03)> (關係史料 문서번호 4280 및 4281), pp.6243 -6244; <馬廷亮堪保使才由(出使日本大臣楊樞→外務部右侍郞唐紹義, 1906.10.
03)>, 「外務部-出使設領-楊樞使日-楊樞使日本01-26(관장호02-12-042-01 -026)」.
12) <呈報抵韓日期暫用漢城總領事關防(광서32년 3월 16일/1906.04.25)> (關係 史料 문서번호 4316), p.6268; 「馬總領事의 出發」 (每日申報 1913.02.26).
13) 「支那總領事轉任」 (每日申報 1912.12.19).
어 山海關道와 함께 러일전쟁 중립 사무를 처리하였고, 광서31년 (1905년) 2월에는 다시 奉天에 가서 警察局會辦, 高等學生監督 等을 맡았다가 11월 북양으로 돌아왔다. 32년(1906년) 3월에는 學部 검증 을 통과하여 法政科擧人을 받았다. 外務部 儲才館 學員으로 3개월 기 간을 만료한 후 主事의 신분으로 외무부에 남아 榷箕司에서 幇主稿 行 走로 임명되었다가, 선통 원년(1909년) 幇主稿로 승진하였다. 선통2년 (1910년) 8월 중·러조약 사무조사를 위해 신강 이리 등지로 파견되었 다. 선통3년(1911년) 5월 북경으로 돌아와 7월에 員外郞으로, 10월에 는 參事로 승진하였다. 1912년 4월에는 외교부 司長에 임명되었으며 7월 대리 비서장을 맡아 總務廳 사무를 관장했다. 11월 代理朝鮮總領 事로 임명되어 1913년 2월 24일 부임하였고 1914년 5월 조선총영사 가 되었다. 1913-1919년 조선주재 중국총영사로 7년 반을 재임한 후, 귀국하여 外交部 參事와 俄文專修館 館長 등을 역임했다.14)
조선에 파견될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고, 전임 총영사 마정량에 비해 한국과 일본의 상황을 잘 알지는 못했다. 다만 일찍이 일본에서 유학하여 일본어와 정치학에 능통하고, 중국내 중앙 및 변강 각지에서 외무 교섭을 처리한 경험이 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청말 新政시 기 外務部의 儲才館을 통해 확보된 인재로 外務部 主事, 參事 및 外交 部 (대리)秘書 등을 역임한 후 ‘주조선총영사’가 된 외교 실무관료였다 는 점이다.
이상 이력을 통해 볼 때 주조선총영사를 역임한 마정량과 부사영은 청 정부가 서양과의 교섭사무를 담당할 양무기관으로서 총리아문을 설 립한 이후 양성된 번역인재이며, 다른 한편으로 청말 각지 대외교섭의 최전선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재외공관을 각지에 두는 과정에서 교섭 사무를 담당했던 외교인재였다. 즉 청말 ‘洋務’ 지식과 경험의 축적과 정, 그리고 新政개혁 과정에서 양성된 외교기관의 인재였다.
일반적으로 영사는 교섭을 진행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다만 중국
14) 「주한사관당-민국4년: 인사01」, p.63; 「주한사관당-민국5년: 인사01」, pp.32-33.
년도 駐日 使館
駐朝鮮領館 비고
漢城 인천 원산 부산 신의주 증남포
1910 汪大燮 馬廷亮 賈文燕 馬永發 王邦藩 王克均 張國威 *汪大燮 5.26 任命, 8.6 到任.
1911 汪大燮 馬廷亮 賈文燕 馬永發 王邦藩 王克均 張國威
1912 汪大燮 馬廷亮 賈文燕 馬永發 王邦藩 王克均 張國威 *馬廷亮 12.10 橫濱 調署 領事; 富士英12.10 署
1913 汪大燮 ( -馬 廷 亮 駐 日 代 辦)
馬 廷 亮 - 富 士 英
賈 文 燕 -張鴻 馬永發
王邦藩 - 賈 文 燕- 柯 鴻烈
王克 均 -稽鏡 張國威
*汪大燮 09.11 歸國, 敎 育部長官 任; 馬廷亮 8.16 駐日代辦; 陸宗輿 12.09 任
*富士英 2.24任
*賈文燕 3.14 調署釜山;
張鴻.3.14署
*王邦藩 3.14開缺; 賈文 燕 3.14署, 8.17免; 柯鴻 烈 8.17署.
*王克均 4.4 開缺; 稽鏡 4.4 署.
1914 陸宗輿 富士英 張鴻 馬永發 柯鴻烈稽 鏡 - 許同范 張國威
*富士英 5.4任; 張鴻 5.4 任;馬永發 5.4署; 柯鴻烈 5.4任; 稽鏡 5.4調神戶, 許同范 5.4任
1915 陸宗輿 富士英 張鴻 馬永發 柯鴻烈 許同范張 國 威 -胡襄
*장국위 9.26免; 胡襄 9.29署
의 조계가 있었던 조선에서는 영사가 영사재판권을 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섭권을 가진 지방관리와 교섭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마정량과 부사영이 조선총영 사로 재임했던 1910년 전후시기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고, 중국에서는 청 왕조가 멸망하고 신생의 중화민국정부가 들 어섰다. 이처럼 중국 외교관계가 복잡 미묘하게 변화하던 청말 민초시 기, 일본식민지 조선에서의 조계처리문제는 현실 교섭과정에서 중국총 영사나 중국정부가 지향했던 근대외교의 단서를 추적해볼 수 있는 유 효한 통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표1> 중국 駐일본외교대표 및 駐조선(총)영사(1910년-1916년)15)
15) 「주한사관당:마정량」, 「주한사관당:민국」의 각종 卷宗 문건내 수발자 확인 및 관련 문건을 기초로 작성.
1916 陸 宗 輿 - 代 辦 劉 崇 杰 - 章 宗 祥
富士英 張 鴻 -
張國威 馬永發 柯鴻烈 許同范 胡襄
*육종여 6.30免; 章宗祥 6.30任
*장홍 5.28免; 장국위 9.8 署
2. 일본의 조선내 조계철폐 교섭의 방법
1910년 한일병합에 따라 일본은 조선내 개항장제도를 취소한다고 선언했다. 개항장제도의 취소는 영사재판제도 그리고 조계제도의 폐지 를 의미했다. 그렇다 해도 조계마다 독자적인 행정권과 재산권을 소유 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곳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권익과 직결되어 있 었기 때문에 조계의 기능을 바로 중단해 버릴 수는 없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한일병합 당일 <制令 제2호>를 내고 “인천 제물포, 진남포, 목 포, 군산, 마산포 및 성진에 있는 각국거류지 그리고 인천, 부산 및 원 산의 청국거류지의 행정은 경찰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당분간 종 전의 예에 따른다.”고 규정했다.
결국 <制令 제2호>에 따라 조계내 경찰권은 이미 회수되었고, 조계 철폐에서 남은 문제는 ‘조계행정권의 이관과 영대차지권의 해결’에 있 었다. 일본정부의 <制令 제2호>는 원래 일시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조계철폐는 예견된 것이었다. 한일병합 이후 조계철폐교섭의 방향을 처음 구체적으로 제기한 것은 1912년 2월 3일 총독부 小松 外事局長 의 기안 문건에서였다. 小松은 ‘각국거류지 및 청국거류지 정리에 관 한 涉外協議案’에서 외국조계정리의 필요성과 교섭의 방법, 협정의 요 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16) 치외법권이 철폐된 상황에서 일 본으로서는 국권상 늦어도 1913년 거류지의 행정사무를 지방행정사무
16) <各國居留地及淸國居留地ノ整理ニ關スル涉外協議案(명치45년 2월 3일 기 안)>, 「조선총독부 기록물철: 외국거류지정리에 관한 건(1912년 3월-1912년 12월/ 이하 조선총독부 자료)」, pp.1137-1145.
로 편입시킬 필요가 있었다. 철폐교섭의 방법은 외무성이 동경주재 각 국대표자와 상의를 시작하는 것이 순서라고 인정되지만 밀접한 이해관 계가 있는 조선에서의 실상과 의향을 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원활 한 섭외협의를 위해 먼저 총독부에서 경성주재 영사관과 내부적으로 대강 결정한 뒤에 외무성이 동경주재 각국대표자와 교섭하는 방법을 쓰면 국제협의는 단순한 협의에 그치고 절충을 거듭해서 관계각국정부 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제언하고 있다. 특히 1)조계 행정사무 의 인계, 2)조계 재산의 처분, 3)영사관 등기의 승인, 4)영대차지의 처 분, 5)地租의 부과, 6)외국인에 대한 과세 등을 협정해야 할 요점으로 언급하고 있다.
小松의 기안은 3월 5일 총독명의의 <機密 11호> ‘외국거류지정리에 관한 건’으로 본국[일본] 외무대신에게 전달되었다. 한 달 뒤인 4월 1 일에는 위의 내용을 더욱 구체화하여 <官秘 제3호> ‘甲號:조선의 각국 거류지정리 要項(8조)’ 및 ‘乙號:조선의 청국거류지 정리요항(3조)’을 첨부하여 외무대신에게 조회하였다.17) <制令 제2호>로 유지되었던 외 국조계는 늦어도 1913년 4월 1일 지방행정의 정리를 완료할 것이 예 견되니 당일부터 각국조계와 중국조계는 별지 甲號와 乙號의 整理要項 에 따라 처분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다만 경성주재 각국영사관 의 의향을 확인하기에 앞서 각 본국정부의 명령을 받은 다음에 협의를 시작할 예정이므로 이 뜻을 외무대신이 관계 각국정부에 통지해 줄 것 을 요청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조회에 대해 일본외무성은 1912년 5월 31일 외무차 관, 정무국장 이하 주관직원이 회동하여 ‘외국거류지정리’에 관한 회의 를 개최하였다. 6월초 육군성에서는 조선총독부의 결정에 대해 일본 외무성에서 대체로 이의제기 없이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왔다. 원 칙상 외국거류지정리의 사무가 외무성의 주관에 속하지만, 실제로 외
17) <居留地整理ニ關スル件(명치45년 4월 1일 기안)>, [附件: <甲號 조선의 각 국거류지정리 要項(8조)>; <乙號 조선의 청국거류지 정리요항(3조)>], 앞의 조 선총독부 자료, pp.1123-1132.
무성과 동경주재 각국 대표간의 협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선현지에 서의 사전협의 방법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또 외무성에서는 총독부가 보내온 협정 요점, 정리요항 등을 바탕으로 京城주재영사관에 제출할 英文 <外國居留地整理案(6조)>을 만들어 보내왔다.18)
그렇다면 일본이 조선에서 사전교섭을 진행할 대상은 어느 국가인 가. 이와 관련해서 일본측의 입장을 확인할 두 개의 문서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우선 1912년 6월 13일 외무대신이 총독에게 보낸 <機密 제19호>
에서 “본 대신이 일본주재 관계각국 대사·공사에게 조선내 각국거류지 정리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지명한 주임관과 회동하여 협의할 京城주재 해당국 영사관(영사관이 없을 경우 영사사무 취급자)을 至急으로 지명 해 달라는 요지로 조회할 것”이라 했다. 다만 “<甲號> 각국거류지정리 의 경우 관계각국 가운데 청국은 현재 일본과 정식의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로써 이런 조회를 보내는 것을 보류한다. ··· <乙號> 청국거류지정 리에 관해서도 <甲號> 각국거류지정리 진행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법 으로 처분하기로 한다”고 하였다.19) 이 조회를 통해 일본 외무성에서 는 이미 6월 시점에 조선내 ‘외국인거류지정리’에 관한 교섭 대상국가 에서 중국을 제외키로 했음을 조선총독에게 통지하고 있다.
한편 8월 6일 일본 외무대신은 寺內 총독에게 보낸 <암호電文 제55 호>에서 각국거류지정리에 관한 교섭을 개시할 대상 국가는 영국, 미 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등 거류지 약정관계국에 그칠지, 아니면 舊한국과의 조약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덴마크도 포함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 있다.20) 이때 총독부는 오스트리 아 공국 및 덴마크의 대표가 거류지 約定에 참여한 사실이 없어 정식
18) <陸軍省→京城 電>, 앞의 조선총독부 자료, pp.1119-1122.
19) <조선의 각국거류지 및 청국거류지정리에 관한 건 회답(외무대신 內田康哉
→조선총독 寺內正毅, 명치45년 6월 13일)>, 앞의 조선총독부 자료, pp.1112-1113.
20) <內田 외무대신→寺內 총독(대정원년 8월 6일)>, 앞의 조선총독부 자료, p.1035.
교섭에는 이들 국가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21) 반면 중국이 각 국조계 약정국임에도 불구하고 언급조차 없었던 것은 위의 <기밀제19 호>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총독부 의견을 바탕으로 하여 內田 외무대신은 1912년 8월 28일 <機密 제1호>를 통해 미, 러, 영, 이, 독, 프, 벨 등 일본주재 7 개국 大使·公使에게 외국거류지정리에 관한 건으로 조회를 보냈음을 조선총독에게 통보하였다.22)
앞서 총독부 小松 외사국장이 기안했던 것처럼 조선거류지정리에 관한 협의를 관계 각국정부와 개시하는 것이 마땅하고, 해당 지방의 행정사무 이관 및 거류지 재산 처분문제는 주로 지방적인 것이므로 먼 저 조선에서 사전 협의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 사전협의 회의에 서 整理案이 협정되면 이를 기초로 일본정부가 각국정부와 상의하여 확정하도록 하는데, 이 협의 취지에 동의하면 각국정부에서 京城주재 영사관에 승인의 훈령을 내리고 그 요지를 당국자에게도 통지해 달라 고 요청하였다. 만일 경성주재 영사관에 훈령이 내려지면 총독부에서 도 본 件 협의에 관한 議案과 참고서류를 제출하여 필요한 모든 설명 을 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10월 8일에 이르기까지 일본측에서 는 이상 照會에 대해 관계 각국으로부터 회답을 받지 못했고, 프랑스 대사가 대체적인 정리안의 내용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10월 29일 일본 외무성에서 ‘조선의 외국거류지를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입하 는 정리안 및 영대차지권을 소유권으로 변경하는 제안’(이하 <정리 안>)을 첨부하여 일본주재 각국 대·공사에게 공식적으로 제출하였 다.23)
21) 특히 마산에 오스트리아인 2명의 借地가 있긴 하지만 이 또한 독일의 보호 를 받고 있고, 덴마크인 1명은 借地權이 없으므로 교섭대상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寺內 총독→외무대신, 대정원년 8월 10일)>, 앞의 조선총독부 자료, p.0983).
22) <內田 외무대신→寺內 총독(대정원년 8월 31일, 機密送第10號)>; <內田 외 무대신→在日本미국·러시아·영국·이탈리아·독일·프랑스 大使, 벨기에 公使(대정 원년 8월 28일, 機密第1號)>, 앞의 조선총독부 자료, pp.0979-0982.
위와 같이 일본 외무성은 1912년 8월 28일과 10월 29일 일본주재 각국대표에게 보낸 두 차례의 조회를 통해 관계 각국에 조계철폐협의 를 공식화하였다. 11월 18일 총독부에 보낸 프랑스 영사의 회신을 시 작으로, 11-12월간에 미국, 러시아, 영국,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고 1913년 1월 독일 영사의 회신을 끝으로 7개국 정부의 사전협의 승인 이 완료되었다.24) 이로써 총독부와 경성주재의 각국대표가 직접 만나 사전협의를 이루어 최종안을 확정시키는 과정만이 남게 되었다. 중국 은 각국조계 관계국이며 조계 약정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의 미승인 문제를 이유로 ‘각국조계정리’에 관한 사전교섭 협의회의 대상국에서 제외되었다.
Ⅲ. 조계철폐문제의 대두와 중국의 대응
- 馬廷亮 시기
조선내 조계철폐로 인해 영향이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서 양인도, 일본인도 아니고, 바로 중국인이었다. 인천, 원산, 부산에 중국 전관조계가 있고, 그 외에 진남포, 목포, 군산, 성진, 마산 등지의 각국 공공조계에도 많은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숫자상으로 말하면 1913 년 1만 5천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출신지로 말하면 산동이 80%이상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중국측에서는 조계철폐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 는가.
한일병합이후 중국측에서 조계철폐와 관련된 일본측의 움직임을 최 초로 인지하게 된 것은 京城주재 영사대표였던 독일총영사가 마정량에
23) <各國居留地整理方針(8조-日文·英文)>; <府制要綱(5조-日文)>, 앞의 조선총 독부 자료, pp.0964-0973. <각국거류지정리방침>은 중국측 자료에서는 <各國 廢止條件 草案>이라 기록하고 있다.
24) <총독부 池邊 書記官→동경 外事局長(대정원년 11월 19일)> 등, 앞의 조선 총독부 자료, pp.0916-0937.
게 보내온 1912년 3월 24일 편지를 통해서였다. 독일총영사 편지의 핵심은 “3월 15일 조선총독부가 函을 보내 조선외국조계내 행정사무 의 지방관 이교방법 및 영원조차권 문제의 원만한 합의를 위해 총독부 외사국장과 경성주재 영사대표, 그리고 특별히 租借 지주대표와의 ‘비 공식’ 만남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니, 이 회의에 참석할지 여부를 결정 하여 답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25)
독일총영사에게 보낸 총독부의 편지 원문에는 조계철폐대상으로 인 천 등지의 각국조계와 함께 중국의 인천·부산·원산의 전관조계를 분명 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중국과 직접 교섭하는 것이 마 땅했지만 중국에는 어떠한 통지도 하지 않았다. 조계철폐건으로 총독 부가 ‘비공식’ 만남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은 중국정부(외교부), 주일 중국대표, 혹은 조선총독부도 아니고, 경성주재 독일총영사를 통해 전 해 들었을 뿐이었다. 조계철폐의 문제가 각국과 관련된 일이고, 마정 량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기 곤란했기 때문에 우선 영·독·미 3국 총영사 를 직접 만나 의향을 탐색해 보니 본국外部나 일본주재 본국大使에게 지시를 청할 예정이라 했다. 마정량도 다음날 3월 25일 중국 외교부 와 일본주재 중국대표에게 총독부 편지의 초록을 상신하고 회의에 참 석해야 할지, 또 논의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지시를 청했다. 외교부 에서는 당연히 회의에 참석해서 이익 보호에 각국과 모두 다름이 없도 록 하라고 지시하였다.26)
여기서 총독부가 ‘비공식’ 회의를 계획하고 있음을 독일총영사에게 알린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월은 총독부가 일본 외무성에 ‘각 국거류지폐지에 관한 涉外協議案’을 보내 놓았을 뿐, 외무성과도 관련 논의가 진전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경성주재 영사단대표에게 조계철폐
25) 「抄呈朝鮮總督府擬辦移交租界曁解決租借權底稿請裁示(주조선총영사 마정량
→외무부, 1912.03.25)」, 「北京政府外交部-中日關係-朝鮮中國租界-朝鮮中國租 界案01-001(館藏號03-33-39-01-001/이하 조선중국조계안○○-○○○으로 표기)」.
26) 「函復朝鮮租界事妥籌因應並隨時將商議情形達知(외교부→마정량, 1912.04)」,
「조선중국조계안01-002(관장호03-33-39-01-002)」.
문제를 우선 ‘비공식’적으로 논의할 계획임을 각국에 알리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중국측에도 알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총독부가 경성주재 독일총영사에게 보낸 문건에서 이 일은 ‘사적’ 의견교환이며 비밀로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직무와도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이 각국조계 협정관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에서 왜 중국 측에는 통지를 하지 않았을까. 총독부가 애당초 계획한 것이 ‘비공식’,
‘사적’ 의견교환이었다면, 각국이 중국을 미승인한 상태였음을 이유로 중국에 통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다.
이후 조선총독부와 일본 외무성간에는 긴밀한 연락이 오갔고, 얼마 후 총독부 외사국장 小松이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귀국했다. 일본 외무성 내부 사정으로 5월 31일에서야 주관인원의 참여하에 조선조계 철폐 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이 후 논의과정에서는 교섭의 방법, 각국에 전달하여 협상할 <整理案> 原 案의 확정 문제 그리고 교섭의 대상 국가를 선정하는 것이 포함되었 다. 그 결과 일본 외무성이 8월 28일 일본주재 7개국 대표를 통해 조 계철폐문제를 ‘공식화’했고, 10월 29일에는 대체적인 <정리안> 원안이 각국대표에게 전달되었다. 조계철폐문제를 ‘공식화’하는 과정에서도 중 국은 국제적 미승인 문제를 이유로 일본과의 정식 교섭에서 제외되었 다. 결국 중국측은 조계철폐교섭과 관련해서 비공식적이든, 공식적이 든 일본으로부터 어떠한 통지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1912년 11월 24일 주조선 독일총영사가 函을 통해 “동경정 부가 조선각국조계철폐조건의 稿를 이미 각국의 使署로 보냈으므로, 11월 27일에 領事團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왔다. 마정량은 즉각 일본주재 汪대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25일 “조계철폐문건을 아직 받지 못했다 해도 의논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답변을 받 았다. 일본 汪대표가 각국 영사단과의 회의에 당연히 중국이 참여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대목이다. 다만 회의의 구체적인 내 용을 알 수 없었던 마정량이 미국총영사를 방문하여 탐색한 결과, 일 본주재 미국대사가 8월 28일과 10월 29일에 각각 일본 외무성의 照
會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 照會에서는 앞서 독일총영사에게 제출한 문건[3월 15일 총독부의 函]과 달리 모두 ‘비밀문건’으로 유의 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어서 일본이 제시한 <조건초안>의 原案을 확 인할 수 없었다.27)
이에 마정량은 총독부로 가서 寺內 총독을 만나 조선조계철폐에 대 해 동경주재 각국대표가 일본정부로부터 公函과 관련 草案을 받았는 데, 중국대표에게는 통지하지 않은 연유를 물었다.
<寺內>: “이 案을 일본정부에서 처리할 거라 예상할 필요는 없고, 그 수속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생각건대 이번 방법은 먼저 각국조계로부터 시작하고 난후 중국전관조계를 처리할거라 예상됩니다. 알 수는 없으나 어쩌면 각국이 아직 중국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여겨서 잠시 따라서 빼도 록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피차 국가간에 교제가 본디 있으므로 귀 국[중국]이 각국과 다름이 있다고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28)
총영사는 처리순서상의 문제라 해도 중국은 각국조계장정에 서명한 협정관계국이며, 또 華商 조계는 왜 논하지 않는지를 물었다. 만일 민 국을 인정하지 않아 공문으로 보내기 불편하다면 <조건초안(총8조)>
을 필사해서 일본주재 汪大燮 대표에게 넘겨줘도 무방하다는 뜻을 밝 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은 외무대신이 寺內총독에게 보낸 <機密 제19호(6월 13일자)>에서 조계 관련 각국 중, 중국에는 각국조계정리 에 관해 照會하는 것을 보류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寺內 총독은 그 의도가 드러나지 않도록 완곡하고 애매하게 표현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과 각국이 다름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여 더 이상 논쟁이 확
27) <日政府將廢撤朝鮮各國租界事祈酌奪或請汪代表往詢(마정량→외교부, 1912.
12.01)>; <秘密事件: 照譯總督府擬訂廢徹各國租界條件稿>, 「조선중국조계안 01-003(관장호 03-33-039-01-003)」.
28) <日本廢撤朝鮮各國租界事面詢寺內總督各情形(1912.12.17)>, 「조선중국조계 안01-007(관장호 03-33-039-01-007)」. 외교부 당안에서도 마정량이 寺內 총독을 방문한 시점이 명확하지 않지만, 정황상 독일총영사로부터 연락을 받 았던 11월 24일 이후, 11월 27일 영사단 회의가 열리기 전에 이루어진 것으 로 짐작된다.
대되지 않도록 유의하고 있다.
한편 독일총영사가 제안한 영사단 회의는 11월 27일과 30일 두 차 례 독일영사관에서 열렸다. 독일총영사는 조계문제로 총독부와 협의를 앞두고 있고, 협의사항에 대해 미리 영사관이 상호의견을 교환할 예비 논의가 필요하다고 인식하여 각국영사관 및 마정량에게 그 뜻을 통지 했던 것이다. 마정량은 이와 관련해서 총독부와 협의된 바가 없어 어 떠한 훈령도 받지 않았으나 총독과의 회견에서 이번 영사단 회합은
‘정식’의 성격이 아니므로 출석해도 문제없다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에 영사단 회의에 참석하였다.29) 독일총영사도 영사단 회의가 오로지 의 견교환을 위한 것이며, 모든 언론은 개인 의견에 불과하며 영사단과 각 본국정부는 책임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회의에서는 각기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여 <조건초안> 가운데 제5조를 제외한 나머지 7개조는 각각 반박이 있었고, 가감한 부분은 별도로 정서하여 회람하였다. 영 사단 회의가 열릴 당시 프, 미 총영사만이 본국정부로부터 조계정리에 관한 사전교섭을 승인받은 상태였다. 마정량은 일본정부가 여전히 이 문제로 일본주재 중국대표와 교섭을 시도하지 않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30)
마정량은 이번 영사단 회의를 통해 일본이 제안한 <조건초안>의 내 용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당시 마정량의 우선적인 관심은 <조건초안>
의 내용보다는 일본측과의 사전협의에 중국이 참여할 수 있을지 여부 에 있었다. 중국이 사전협의에 참가할 수 없다면 의견을 제출하여 수 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각국과 다름이 있다면 중국의 체 면이 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영사단 회의가 끝난 후 마정량은 외교 부 보고에서 “일본이 각국 大使에게는 통지하고 우리나라에 통지하지 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으며, 혹자는 각국공공조계의 성질이 전관조계
29) <居留地整理ニ關スル馬廷亮申出ノ件(총독부供覽, 대정원년 12월 9일)>, 앞의 조선총독부자료, pp.0926-0928.
30) <譯錄朝鮮京城領事團議案>, 「조선중국조계안01-007(관장호03-33-039-01 -007)」.
와 약간 다르다고 하지만 총영사의 상황이 입을 다물고 있기 어렵다”
며 격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汪大燮 역시 일본에서 阿部로부터 “현재 상의중인 것은 각국공공조 계이며, 전관조계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통보하지 않았다”고 할뿐 속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알려왔다.31) 중국외교부에서는 阿部 의 답변이 1910년 3월 11일 <仁川釜山元山淸國租界章程(총14조, 이 하 청국조계장정)> 체결 당시 왕래한 照會에서 조계철폐 시 ”각국과 다름이 있을 수 없다”32)고 했던 원래 의논에 부합하지 않으니 일본정 부가 다른 의도를 갖고 있는지, 어떻게 사전 준비를 해야 “조선 화교 가 이익을 얻을 기회를 잃지 않을지 적절히 준비”할 것을 지시하였 다.33)
외교부 지시에 따라 마정량은 우선 총독부가 작성한 <조건(朝鮮京 城領事團議案) 8조>의 번역본을 인천, 부산, 원산의 각 영사에게 보내 제3조내 “각 조계에 만일 公款, 公産이 있다면 해당 관할 官에 이교해 야 한다”는 내용을 잘 인지하고 각 개항장에 설립된 중국인의 會館, 公會 등과 租界公産이 한데 섞이지 않도록 미리 대책을 강구하도록 지 시하였다.34)
다른 한편으로 일본측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1912년 12월 26일 총독부로 가서 外事局의 池邊 書記官과 회견하였
31) <電駐日本汪代表朝鮮租界事(1912.12.11)>, 「조선중국조계안01-004(관장호 03-33-039-01-004)」; <呈明阿部所稱商辦租界及日閣員迄未決定(1912.12.
14)>, 「조선중국조계안01-006(관장호 03-33-039-01-006)」.
32) <日本帝國統監府 小松錄→한국주재 청국총영사 마정량 照會(명치34년 3월 11일)>; <마정량→小松錄 照覆(宣統2년 2월 1일)>, 「주조선사관당-마정량:조 계01(新定仁川釜山元山租界謄本)」, pp.19-20.
33) <朝鮮租界事(중국 외교부→마정량, 1912.12)>, 「조선중국조계안01-008(관 장호 03-33-039-01-008)」.
34) <函知朝鮮廢止租界(마정량→各口領事, 1913.01.18)>, 「주조선사관당-민국2 년:外國政情01(朝鮮廢止租界會議各件)」, pp.3-4; <廢撤租界事與小松外事局長會 晤情形由(주조선총영사→외교부, 1913.02.14)>, 「조선중국조계안 01-009(관장 호 03-33-039-01-009)」.
다. 池邊은 조계철폐의 건에 대해 일본정부가 중국에 통지하지 않은 것은 민국이 미승인상태이며, 우선 각국조계로부터 착수하는데 각국의 조계설정시 조계철폐의 사후 처리에 관해 명확히 하지 않았던 반면, 중국조계의 사후처리는 이미 ‘照會’로 성명한 것이 있어 처리하기 어 렵지 않을 것이니 小松국장이 돌아오면 그때 방법을 정하자고 답변하 였다.35) 池邊이 개인사견이라고 못 박고 있지만, 실제 일본의 입장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한 것이었다. 마정량은 결정권이 없었던 池邊과 논 쟁하는 것이 불필요했기 때문에, 小松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913년 2월 3일에서야 小松국장이 조선으로 돌아왔고, 곧 각국조계 철폐교섭이 시작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2월 10일 마정량과 小松 국장 의 회견이 성사되었고, 이날 오후 마정량은 중국통역관 陳秉焜과 함께 총독부에서 소송 국장과 회견했다. 회견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 3가지 였다.
첫째 각국조계철폐의 건으로 조만간 회의를 연다는 소문이 사실인 지 여부와 중국에 조회하지 않은 원인 문제였다. 小松은 2월 17일 회 의가 예정되어 있으며 중국이 미승인 상태이기 때문에 통지하지 못했 지만 각국과의 논의 중 중국이 각국의 승인을 받는다면 논의에 참여할 수 있음을 전제하였다. 둘째 각국인과 중국인의 이익 보전에 다름이 있는지 여부의 문제였다. 중국측은 통지를 받지 못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각국조계가 철폐된다 해도 중국이 조계를 철폐할 이유가 없 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小松은 각국조계와 중국조계가 약간 다름이 있지만 각국인의 기득권 보전이라는 측면에서 각국과 다름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장래 각국과 의정한 후 동시 철폐할 수 있는 적절한 방 법을 강구하여 별도로 총영사 마정량에게 函으로 통지할 것이라고 답 변했다. 셋째 각국조계철폐 시 중국조계내 會館, 公會에 대한 처리 문
35) 당시 외사국장 小松은 동경에 체류중이었기 때문에 池邊이 그 업무를 대리 했다. 池邊이 언급한 ‘照會’는 후술할 <청국조계장정(1910.03.11)> 체결 당일 상호 교환했던 照會를 의미한다.
제이다. 중국의 會館과 公會 등은 일본의 民團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 에 조계와 동시에 철폐하는 것이 불가함을 양측이 확인하였다.
이상 회견을 통해 마정량은 총독부가 ‘중국이 각국과 다름이 있을 수 없음’을 재차 분명히 하였고, 이번 조계철폐 관련 논의에는 참여하 지 못한다고 해도 중국의 기득권을 보호하는데 그다지 지장이 없을 것 으로 판단했다. 小松이 장차 의정할 부분을 函으로 알려준다고 했고 만일 화교 이익에 손해가 있다면 이치를 따져 논쟁할 수 있다는 점, 논의에 참여할 각국도 분명 자신의 기득권을 양보하려 하지 않을 것이 라는 점, 그리고 각국 영사가 議定한 이후라도 본국정부의 비준을 기 다리려면 수개월이 걸릴 것이니 그 때 중국이 정식정부로 승인되면 논 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등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36) 결 국 2월 17일로 예정된 각국조계철폐에 관한 사전협의회(1차)에 총영 사 마정량은 참석할 수 없었다.37) 더욱이 2월 26일 마정량은 橫濱주 재 총영사로 부임해 갔고, 직접적인 조계철폐교섭의 책임은 후임인 富 士英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Ⅳ. 중·일 조계철폐교섭과 주요 쟁점
- 富士英 시기
1913년 2월 24일 업무를 시작한 富士英 총영사가 부임 후 가장 먼 저 관심을 쏟은 사안은 바로 조계철폐의 문제였다. 중화민국 정부는 여전히 각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부사영은 이 미묘하고도 복잡한
36) <廢撤租界事與小松外事局長會晤情形由(주조선총영사→외교부, 1913.02.
14)>, 「조선중국조계안01-009(관장호 03-33-039-01-009)」.
37) 조선 신문기사에서도 小松 및 某 소식자의 말을 인용하여 각국거류지 중국 인거류지의 철폐를 위한 사전교섭이 진행 중이며, 또 아직 각국이 공히 중화 민국을 승인치 못하였기 때문에 금일 공식 교섭을 할 방법이 없음에 따라 중 국거류지 철폐교섭은 잠시 留案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居留地撤廢交涉會 議」, 每日申報 1913.02.13; 「居留地撤廢問題」, 같은 자료, 1913.02.17).
조계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1. 조계철폐에 관한 “사전협의회” 참가 요구
조선내 조계철폐문제로 총독부와 경성주재 각국 영사의 1차 사전협 의회가 예정대로 2월 17일 총독부에서 열렸고, 2월 27일과 3월 3일 2차, 3차 사전협의회가 연이어 열렸다. 부임 직후 富士英은 신문을 통 해 이미 3차 회의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3월 6일 小松국장과 의 첫 만남이 성사되었다.
1913년 3월 6일 小松국장과의 문답기록은 “馬[馬廷亮] 前총영사가 橫濱으로 서둘러 가느라 업무 인계가 명확하지 않지만, 관련 卷宗내 조계내 행정권 회수에 관한 문건이 있다”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시작된 다. 부사영은 소송과의 첫 만남에서 1912년 3월 15일 독일총영사가 초록해 보낸 총독부 각서에 의하면 조계문제 회의는 개인자격으로 의 견을 교환하는 것이라 했으니 다음 회의에 총영사가 개인자격으로 참 석할 수 있도록 통지해 줄 것과 3차 회의의 議案 초록을 요구했다. 小 松은 이번 회의는 각국 영사가 모두 ‘공식적으로’ 본국정부로부터 훈 령을 받았고, 개인자격으로 의견을 교환하려 했던 원래 의도와는 그 성질이 이미 변화되었다고 답변했다. 이에 개인자격으로 의논에 참여 하겠다는 요청을 받아들이기 곤란하며, 議案은 ‘비밀유지’를 약속했기 때문에 통과되어야 공개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또 이번 회의는 각국공 공조계에 관한 것이고, 전관조계에 관한 방법은 議案을 기초 중에 있 으므로 완성되면 곧 보낼 것이며, 장래 중국전관조계의 처리는 일본전 관조계 처리와 일률적으로 처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부사영은 전임 총영사 마정량도 일찍이 중국정부로부터 회의에 참 석하라는 訓令을 받았지만 小松이 통지하지 않아 회의에 참석하지 못 한 것이고, 또 이번 회의가 공공조계에 대한 것이라면 진남포에도 중 국공공조계가 있고, 군산, 목포에도 중국의 商家가 많기 때문에 각국 조계철폐 문제는 화상과 이해관계가 매우 크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다
음 개회시 개인자격으로라도 회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통지할 것을 거 듭 요청하였다. 小松은 총독부가 외국인의 기득권 보호를 목적으로 이 일을 처리하므로 각국조계나 전관조계를 불문하고 모두 일률 대우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부사영의 회의 참여 요구를 완곡하게 거절하였 다.38)
이에 부사영은 바로 다음날인 7일 정식으로 小松에게 函을 보내 다 음 3가지 사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1)각국공공조계문제로 이번 사적회의 개최를 제의한 것이라면 각국조계내에 중국조계부분이 포함 되어 있는데 小松 국장이 중국총영사관에 통지하지 않은 것은 각국조 계내 중국조계 부분만을 구분하여 장래 중국전관조계와 함께 의논을 제기하려는 것인지 여부, 2)이번 사적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장래 양국 정부가 정식 교섭을 진행할 때 총영사관이 중국정부에 외사국과 처음부터 새로 의논을 시작하도록 훈령을 청하고, 이번 사적회의 결과 는 중국과 어떤 관계도 없다고 할 수 있는지 여부, 3)중화민국을 승인 하기 전이라 중일 양국정부가 정식교섭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각국조 계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각국공공조계내 중국조계의 부분은 조선총독부 制令에 따라 여전히 종전의 예로 기득권을 행사하는 것이 중국전관조 계와 다름이 없는지 여부 등이다.
부사영의 뜻은 총독부가 애초 영사단에 제시했던 대로 부사영도 장 래 교섭에 원만한 결과를 이룰 수 있도록 개인자격으로 사전협의회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39) 더욱이 부사영은 각국조계내 중국의 교민이 각국에 비해 많기 때문에 그 이해관계가 각국과 다른 점이 분명히 있고, 만일 장래 각국과 다름이 없다 해도 각국의 손실은 경미해도 중국의 손실이 유독 크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인식했다. 따라 서 전임 총영사 마정량이 총독과의 면담에서 단지 “장래 중국이 각국
38) <小松 外事局長과의 문답기록(1913.03.06)>,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 01」, pp.13-15.
39) <函致總督府小松外事局長租界事(1913.03.07)>,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 정01」, pp.5-7.
과 다름이 없도록 보장한다”는 애매한 구두 확인을 받았다면, 부사영 은 만일 회의에 참여할 수 없다면 화교의 기득권도 온전히 보장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언급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각국이 참여하는’ 회의 에 대한 참가는 곧 국제사회에서 강국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 하며, 이로써 국권을 유지 보호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小松과의 회견에서 회의 참여를 거절당했기 때문에 총독부 에 정식 문서로 재차 요구함으로써 향후 교섭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이 기도 했다.
이에 대한 총독부 외사국장 소송의 답변은 일관적이다. 이번 회의는 각국 영사단이 본국정부의 훈령에 따른 공식 협의가 되어 중국측의 참 여가 불가하며, 중국전관조계 문제는 다른 적당한 시기 제국[일본] 전 관조계 처리에 준하여 처리할 예정이며, 각국조계 중 중국인의 모든 이해관계는 이번 협의결과 “타국인과 동일한 처리를 받게 될 것”임을 통보하였다.40) 이로써 중국측의 회의 참여요구는 면담과 문건상 모두 거절되었다.
각국조계폐지 사전협회의는 중국이 참여하지 못한 상황에서 총8차 에 걸쳐 진행되었고, 4월 21일 최종적으로 체약관계국의 영사가 <각 국조계폐지의정서(이하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정식 교섭의 기초가 될 사전협의가 마무리되었다.41) 한편 최종 사전협회가 마무리된 직후 부사영은 4월 17일 총독부 외사국장에게 函을 보내, 장래 일본과 중 국정부가 정식으로 교섭할 때 앞서 제기한 3가지 질문에 의거해서 항 의하고 논쟁할 뜻이 있음을 아래와 같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다.
富士英 총영사: “앞서 질문한 3가지 항목에 대해 小松이 답변한 것처
40) <函覆租界事(1913.03.15)>,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01」, pp.16-17.
41) 각국거류지폐지에 관한 사전협의회는 1913년 2월 17일, 2월 26일, 3월 3 일, 3월 10일 3월 16일, 3월 24일, 3월 31일, 4월 14일 모두 8차에 걸쳐 진 행되었다(「各國居留地制度廢止ニ關スル朝鮮總督府外事局長及當該締約國領事官 協議會議事錄(日文飜譯)」, 「주한사관당-민국3년:외국정정03(廢止租界協定條件 案1)」, pp.130-182).
럼 중국전관조계를 일본전관조계에 준하여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번에 外事局이 협의한 각국공공조계의 중국조계부분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점이 있고, 더욱이 중국의 참여를 승인하지 않아 해당 議案의 내용 을 알 수 없으니 이번 회의에서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중국과는 하등관 계가 없습니다.”42)
이에 4월 24일 小松 외사국장은 부사영이 참조하도록 ‘사전협의회’
에서 협의된 <의정서> 번역본 1통을 보내고 면담을 요청해 왔다.43) 곧바로 이어진 4월 26일 小松과의 회견에서도 부사영은 중국조계와 각국조계상황의 다른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총독부가 애초 조계 행정권 폐지를 선언할 때 외국인의 기득권 보호를 선언하였고, 화교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총영사가 누차 회의 참여를 요구했지만 허락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재차 강조하였다. 특히 중국정부가 해외 화교에 관심을 갖고 있고 총영사가 보호의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총영사가 의논에 참여하지도 않은 채 <의정서>대로 처리한다면 정부 와 화교 모두의 비난을 받을 것이라 언급했다.44) 이로써 부사영은 ‘사 전협의회’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회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영대차지권 문제와 ‘각국과 대등한 대우’ 요구
42) <致總督府外事局長函租界會議事(1913.04.17)>,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 정01」, pp.22-23.
43) 極秘문건으로 보내진 <조선각국거류지제도 폐지에 관한 조선총독부 외사국 장 및 해당 체약국 영사관 협의회 의정서(1913.04.21 조선경성에서 작성)>는 총10조로 구성되었다(<函送租界會議定書(1913.04.24)>, 「주한사관당-민국2년:
외국정정01」, pp.29-37).
44) 小松이 중국조계와 각국조계상황이 어떻게 다른지 질문했고, 부사영은 ①중 국인이 한국에 온 것이 비교적 빠르고, 사람 수도 많은 점, ②중국만 전관조계 가 존재하는 점, ③중국의 조계면적이 각국에 비해 큰 점, ④중국이 내는 地稅 가 각국에 비해 저렴하며, 한성의 화상은 地稅가 없다는 점, ⑤조선 각지에서 화상이 租地, 耕種한다는 점 등을 언급하였다(<小松외사국장과의 문답기록 (1913.04.26)>,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01」, pp.4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