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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차지료 조정과 권리의 선택

小松이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 <각서> 제3조를 修改한 草案을 가지 고 9월 15일 총독부의 本多 통역관이 總領事署에 와서 면담을 요청했 다.(5차) 本多 통역관은 이번 회합이 정식이 아니지만 <修改覺書 草 案>에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별도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이 현안이 조속히 해결되길 기대한다고 표현했다. 뒤의 <표2>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9월 15일 회견시 총독부가 제출한 <修改覺書초안>

제3조내에 여전히 永代借地權 선택 조건이 없었다. 이에 부사영은 중 국이 받아들이기 곤란하므로 재차 ‘각국과 동등한 방법’으로 처리하길 요구했다. 이때 本多는 영대차지의 稅 항목도 각국조계규정에 따른다 면 영대차지권리를 추가해도 무방하다고 제안해 왔다. 즉 기존의 각국 조계규정에 따른 차지료 증가를 전제로, 중국전관조계내에서 영대권과 소유권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53) 9월 24일 부

52) <池邊서기관과의 문답(1913.08.26)>,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01」, pp.102-103.

53) <本多통역관과의 면담기록(1913.09.15)>,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01

」, p.104.

사영은 전관조계각서중 제3조와 제5조를 修改하여 外事局에 제출하였 다.(표2 참조) 총독부와의 수차례 협의를 거쳐 이 초안을 총독부에서 대략 찬성함으로써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 11월 4일 총독부가 本 多 통역관을 총영사서로 파견하여 각서를 재차 修改하였다.(6차) 이 때 전관조계의 영대차지 지조액은 지주가 영대차지를 원한다면 각국과 동일하게 처리하고, 해당지역 공공조계의 지조 납부에 따라 통일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설령 영대권을 다투어 회수한다고 해도 세금이 과거 에 비해 크다면 누가 영대권을 선택할 것인가에 있었다. 중국외교부에 서도 소유권을 인정하는 방법이 僑民에게 여전히 약간 부담이 적을 수 있는 것 같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54) 영대권을 선택한 후 화 교들이 불이익이 있어 정부를 원망할까 염려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공 공조계 영대권 지조방법에 따른다면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

중국전관조계장정의 地租는 공공조계와 차이가 매우 컸다. 종래 중 국전관조계는 2평방미터당 매년 1등지는 1錢 6厘, 2등지 1錢 2厘, 3 등지 8厘만 내면 되었다.55) 그런데 종전에 정한 공공조계 각 지역은 세율장정이 다르며, 영대차지료도 각지마다 동일하지 않다. 예를 들어 인천 각국공공조계지는 4등급으로 나누어 1등지는 1백평방미터당 매 년 地租 20元, 2등지는 6元, 3등지는 2元, 4등지는 6元을 내도록 정 했다. 또 진남포, 마산포, 성진 등은 3등급으로 나누어 1등지 6원, 2등 지 2원, 3등지 6원을 냈다.56) 이상 규정을 보면 인천의 2등지, 4등지

54) <朝鮮租界事(외교부→駐日馬代辦, 1913.09.23)>, 「조선중국조계안02-012(관 장호03-33-039-02-012)」

55) <仁川釜山元山淸國租界章程(1910.03.11)>, 「주한사관당-마정량:조계01」, pp.26-27.

56) 本多 통역관과의 문답기록에는 “인천각국공공조계의 1등지는 1백평방미터당 매년 地租 20元, 2등지는 6원, 3등지는 2원, 4등지는 6원을 낸다”고 언급했지 만(<本多 통역관과의 문답기록(1913.11.04)>,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 01」, pp.117-118; 「조선중국조계안02-014(관장호03-33-039-02-014)」, p.120), <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 제5조에 의하면 “1등지는 20원, 2등지 및 3등지 6원, 4등지는 2원을 납부”한다고 되어 있어 사실 관계는 추후 확인이

는 6원을 내고, 진남포·마산포·성진의 1등지와 3등지가 6원을 내도록 되어 있다. 이상한 듯 보이지만 실제 토지의 위치가 각각 다름을 염두 에 둔 것이었다. 참고로 인천 각국조계의 토지 등급을 보면 1등지는 평탄한 지역에 위치하여 건물을 건축할 수 있기 때문에 20원을 내고, 2등지는 중앙에 위치하여 6원을, 3등지는 산비탈에 위치하여 사람이 평지작업을 한 후라야 건축가능하기 때문에 2원을, 4등지는 海攤이지 만 매립비용이 들지 않고 건축 후에는 실제 1등지와 같기 때문에 6원 을 받았다. 기타 나머지 지역의 토지등급도 이에 따라 추론이 가능하 다. 결국 이것을 어떻게 전관조계에 적용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는다.

이후 수차례 회의한 결과 총독부는 어느 지역의 조계인지를 불문하 고 영대차지의 租는 일률적으로 1·2등지는 1백 평방미터당 매년 6원 만 내고, 3등지는 매년 2원을 내도록 결정하였다. 각국공공조계의 지 조도 이에 따라 시행함으로써 ‘각국에 완전히 동일한 방법이 적용’되 도록 교섭하였다.57) 富士英은 11월 4일 외사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 낸 협의내용을 외교부에 보고하였고,58) 11월 15일 외교부가 <수정조 계폐지각서>대로 결의할 것을 허락하였다. 또한 총영사에게 서명 조인 권한을 위임하여 일을 마무리하고, 초안은 函으로 일본주재 馬[馬廷 亮]代辦에게 전달하고 외교부와 협의토록 지시했다.59)

11월 22일 외교부로부터 조인권을 위임받은 부사영과 총독부 외사 국장 小松이 총독부에서 회동하여 <在朝鮮中華民國居留地廢止協定書

필요하다(국회도서관입법조사국, 舊韓末條約彙纂(下卷), 1965, pp.300;

305).

57) <本多 통역관과의 문답기록(1913.11.04)>,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01

」, pp.117-118.

58) <呈送專租界修改覺書及問答各件請核示遵辦(1913.11.08)>; <조선의 중화민국 전관거류지폐지에 관한 각서>; <函送專租界修改覺書及問答(1913.11.11)>;

<請電示辦理專租界問題(1913.11.15)>,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01」, pp.111-116; 119-121.

59) 한편 일본주재 馬 代辦에게는 부사영이 거류지회와 회관 성질이 다른 부분 에 대해 총독부와 별도의 照會를 통해 처리하도록 했다(<電委廢止租界調印簽 押(1913.11.17)>,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01」, pp.127-130).

(총6조, 중국은 專管租界廢止協定條件이라 표기)>에 조인했다. 또한 같 은 날 “華商商會·會館과 居留地會를 동일하게 처리할 수 없으며, 官署 가 사용하는 토지에 대해서는 일체 조세, 공과 등을 납부하지 않는다”

는 조건으로 照會 교환을 통해 분명히 하고 외교부에 승인을 청했 다.60) 이후 1913년 12월 2일자 중국 외교부 令으로 중국전관조계폐 지협정조건의 시행을 승인하였다.61)

이상과 같이 일본측에서 9월 이후 적극적인 제안과 양보를 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 선 각국조계철폐와 관련해서 <의정서>가 이미 중국을 포함한 관계국 에 모두 공식적으로 전달되어 각국 본국정부의 승인만을 앞두고 있다 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전협의회’에서 협의된 <의정서>가 4월 24일 일찍이 ‘비공식적으로’ 총영사 부사영에게 전달되었던 것은

60) <在朝鮮中華民國居留地廢止之協定書並往復照會>; <呈送專界協定條件並示承 認日期(1913.11.25)>,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01」, pp.142-143;

146-153.

61) <外交部曹汝霖令知承認廢租界協定之條件(1913.12.2)>, 「주한사관당-민국2 년:외국정정01」, pp.154-155. 일본은 최종적으로 조선거류지폐지가 1914년 4 월 1일 시행될 것이라 선언했다. 다만 공공조계폐지에 관한 의정서는 1914년 3월 시점에도 영국, 러시아 등의 附屬議件이 있어 여전히 협의가 진행 중에 있었고, 중국정부도 각국정부가 승인을 완료하는 즉시 최혜국조관의 이익을 향수한다는 것을 전제로 함께 승인할 예정이었다. 4월 1일 시행에 임박했지만 각국공공조계폐지 의정이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중국측에서는 공공조계가 4월 1일 실행할 수 없다면 전관조계도 동일하게 처리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주일본공사 陸宗輿가 일본외무성으로부터 받은 函에 의하면 “3월 31일 귀하의 函을 받아 열어보니, ‘작년[1913년] 4월 21일 한성에서 조인한 조선각국거류지폐지에 관한 의정서 및 同年 11월 22일 小松 외사국장 및 귀 국 富[富士英] 총영사간에 조인한 조선에 있는 지나공화국거류지폐지에 관한 협정, 그리고 同日 小松 외사국장이 富 총영사에게 보낸 회답은 귀국정부[일 본정부]가 일률 승인하였습니다. 또 이번 거류지 폐지에 관해 帝國정부가 만 일 타국에 이익을 허여한 부분이 있다면 또한 균점할 수 있고, 또 前記 小松 외사국장이 富 총영사에 대한 회답은 각국거류지내 일률 적용된다’는 내용입 니다. 제국정부가 다른 의견이 없음을 특별히 답변드립니다.”고 하였다(<函譯 送日外務省答復居留地廢止案由(駐日使館 陸宗輿→외교부, 1914.04.10)>, 「중 국조계안03-034(관장호03-33-039-03-034)」).

앞서 언급한 바이다. 그런데 8월 27일에 이르러서는 일본외무성 前政 務局長 阿部가 일본주재 代辦 마정량에게 <의정서>를 ‘정식으로’ 제출 하여 중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있다.62)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식 민지조선에서의 불평등조약 철폐가 마지막 교섭단계에 있었고, 전관조 계문제는 총독부와 총영사가 협의를 진행 중이지만 전관조계문제가 각 국조계 <의정서> 승인에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었다.63) 이에

62) <報告與日本外務省晤談情形並送議定書及抄件請察核由(1913.09.18)>, 「조선 중국조계안02-010(관장호03-33-039-02-010)」, pp.51-67.

63) 일본은 각국조계와 전관조계문제와 완전히 분리시켜 처리하고자 했지만, 부 사영은 양자가 별도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각국조계처리가 거주화교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 라 중국이 조계철폐의 조건을 ‘각국과 동등한 대우’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사영이 8월 26일 일본측이 제출한 <각서>에 대한 중국정부의 입장을 분명 히 한 바로 다음날(27일) 공교롭게도 駐日代辦 마정량에게 일본외무성이 정식 으로 <의정서>를 제출, 중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해온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 독부와 일본정부간에 연락이 오갔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당시 마정량 駐日 代辦은 지난 5월 <공공조계의정서>에 대해 부사영이 4가지 불만조항을 제출 하며 동경 각국 駐使를 초청해서 협의하고 修改한다는 주도면밀한 계획에 대 해 감복을 표현했다. 다만 이 <의정서>가 이미 각국영사가 수차례 토론을 거 쳐 의결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특히 조계밖에 거주하는 각국 교민도 적지 않고, 교민의 부담이 가중되는 稅課 부분에 대해서는 각 영사가 좀 더 고려했어야 할 부분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각국이 공동으로 서명한 바에야 총영사 부사영이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부사영이 주도해서 이상 각 부분에 대 해 영사단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서명했는지 그 명백한 이유를 밝히고, 가능 하면 부사영이 경성의 각국 領事를 움직여 修改하는 방향이 좋을 듯하다는 것 이다. 만일 각국 영사가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면 본국 駐使에게 스스로 修 改토록 요청할 것이고, 동경주재의 각국 駐使에게 修改를 제의하는데 비교적 희망이 있을 것이라 제언하였다(<駐日代辦馬函租界事(1913.9.15)>, 「주한사관 당-민국2년:외국정정01」, pp.81-85). 이에 부사영은 공공조계의정서내 제6조 와 제7조 加稅 조항의 修改와 관련해서는 아직 주일사관과 정부가 승인하지 않았던 것을 계기로 총영사가 총독부와 재차 상의하여 얼마간 만회할 수 있도 록 주일 馬대표가 답변을 늦춰줄 것을 외교부에 요청하였다(<呈送租界事與本 多問答及修改覺書(1913.9.17)>; <函送本多送來覺書及問答各件(1913.9.18)>, 주한사관당-민국2년:외국정정01」, pp.95-101). 반면 9월 24일 외교부에서는 전관조계문제가 의논에 진전이 있고, 모든 공공조계의 방법을 주일 각 大使가 모두 승인했다면 중국만 특별하기 곤란하므로 馬 대판에게 상황을 잘 고려하 여 적절히 처리하도록 신신당부했고, 전관조계의 소유권 부분은 각 商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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