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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황권의 시행과 환관 활동의 역할

Dalam dokumen 唐代 宦官 문제의 재인식 (Halaman 30-36)

당 황제들이 별도의 권력 시행 방식을 모색하고 추진하는 모습은

145) 이는 황권의 상징화과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王瑞來는 정치제도의 완비를 중국사에서 황권의 상징화 현상을 초래하는 결정적 요소로 강조하고 이 결과 로 황제의 실제적인 권력행사가 정부 권력에 의해 흡수, 대체되었다고 설명했 다. 王瑞來,宰相故事: 士大夫政治下的權力場(北京: 中華書局, 2010), pp.371-377.

146) 劉澤華,專制權力與中國社會(長春: 吉林文史出版社, 1988), pp.1-24.

147) 吳宗國主編,盛唐政治制度硏究(上海: 上海辭書出版社, 2003), pp.1-7.

148) 이와 관련해 당대 황제들의 ‘批答’에 의한 정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기 존 문서 행정 중 비답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의례적 목적에서 확대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 점도 황제의 직접적인 권력행사를 위한 노력으 로 확인된다. 葉煒, 唐代‘批答’述論 (北京大學學報2010-2), pp.87-95 참조.

149) 邢義田,天下一家: 皇帝, 官僚與社會(北京: 中華書局, 2011), pp.14-18.

전통시대의 황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近官’이라 지칭되는 존재 를 통해서도 일부 확인된다.150) 이들은 기존 국가제도의 유지 상황에 서 황제와의 개인적인 밀착관계(恩倖)를 기초로 형성된 개별적 부류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데151) 外朝의 제도에 속해 있기도 했지만 외조의 제도로 규정되는 직무와는 별개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집단이 구성되고 유지되는 목적은 전적으로 황제의 직접 적인 권력 발휘를 실현하기 위한 것에 있다. 이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당대 황제는 환관이라는 존재를 적극 활용했다.152)

여기서 당대 환관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 다.153) 당대 환관은 황제와의 관계에서 私奴的 성격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국가 통치 기구의 일부인 內侍省의 직무를 수행하는154) 국가관료적 성격 또한 함께 가지고 있다. 물론 외조 관료와 비교해 모 든 제도와 형식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지만,155) 적어도 구조상으로는 일치된 형태였다.156) 이는 漢代 환관과 비교해 확연한 차이가 나타나 150) 史雲貴,外朝化, 邊緣化與平民化 -帝制中國‘近官’嬗變硏究(上海: 上海人民

出版社, 2009), pp.19-30.

151) 이들은 ‘近幸集團’이라 명명하기도 했는데 주로 사회 하층 출신들로 구성되 었다고 분석된다. 黃樓,中晩唐宦官政治硏究(武漢大學博士學位論文, 2009), pp.189-194.

152) 환관이 갖고 있는 閹人이라는 특징은 다른 近官 혹은 恩倖의 존재와는 큰 차이를 갖는다. 閹人의 신체적 조건으로 발생된 신분상의 卑賤性은 환관과 외 조 관료의 연합을 방지할 수 있는 일종의 제어장치 역할을 하기도 했다. Keith Hopkins, Conquerors and Slav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참조.

153) 환관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은 외조관료들과의 관계 설정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吳麗娛, 試析劉晏理財的宮廷背後 —兼論唐後期財政使職與宦 官關係 (中國史研究2000-1), pp.68-81.

154) [唐]李林甫,唐六典卷12, 內侍省 (北京: 中華書局, 1992), pp.355-361.

155) 관복의 경우, 散品을 기준으로 한 외조 관료와는 차이가 있었으며 환관은 일반적으로 황색의 옷을 입었지만 황제의 ‘賜綠’, ‘賜緋’, ‘賜紫’ 등을 거치면 자 신의 산관품에 맞는 관복을 입게 됨이 최근에 지적되었다. 陳文龍,北宋本官 形成述論 -唐後期至北宋前期官僚品位結構硏究(北京大學博士學位論文, 2011), p.75.

156) 당대 환관들은 品, 階, 勛, 爵의 측면에서 외조 관료와 다름이 없었고 관료 가 누리는 休沐, 丁憂, 致仕, 追贈官 등의 권리를 향유했다. 또한 관직임명과

는 당대 환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157)

당대 환관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은 황제가 직접적인 권력 발 휘의 방식을 구축하는데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私奴的 성격은 환관 이 황제의 근거리에서 처신하며 증대된 접촉 기회를 활용해 황제의 의 사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수월하게 했다.158) 이러한 특징은 외 조 사인들에 의해 황제가 경계해야할 상황으로 지적되었지만,159) 황제 의 의지와 반하는 형태로 억제되지는 못했다.160) 황제에게 있어 이들 이 가지고 있는 장점161)이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환관이 가지 고 있는 사노적 성격을 근거로 이들에 대해 얼마든지 임의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62)

관련해 入仕, 解褐 등의 용어를 외조 관료와 통일하게 사용했다. 余華青,中國 宦官制度史(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85), pp.279-280.

157) 渡邊義浩는 漢代 환관을 ‘家內奴隸’的 존재로만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 교관료들의 환관에 대한 부정이 곧 황제권력에 대한 부정이라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후한 유교관료들이 환관을 반대한 것은 이후 귀족제 형성에 중요한 역 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渡邊義浩,後漢國家の支配と儒敎(雄山閣出版, 1995), pp.327-357.

158) 이러한 특징은 魏徵이 태종의 환관중용에 대한 반대 의견에서도 구체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魏征進曰: ‘閹豎雖微, 狎近左右, 時有言語, 輕而易信, 浸潤之讒, 為患特深, 今日之明, 必無此慮, 為子孫教, 不可不杜絕其源’”([唐]吳兢撰, 謝保成 集校,貞觀政要集校卷5, 論誠信 , 北京: 中華書局, 2003, p.291).

159) 司馬光은 “甘言卑辭之請有時而從, 浸潤膚受之愬有時而聽. 於是黜陟刑賞之政, 潛移于近習而不自知, 如飲醇酒, 嗜其味而忘其醉也”라 하여 비유적으로 비판했 다.資治通鑑卷263, 臣光曰條, p.8596.

160) 노예는 인격과 명예가 박탈된 대상이기 때문에, 노예성격을 갖는 환관에 대 한 비판은 곧 그 주인, 즉 황제에 대한 저항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환관을 외 연으로 하는 주체에 대한 부정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Orlando Patterson, “On Slavery and Slave Formations” (New Left Review, No.117, 1979, pp.31-67 참조. 본 논문은 김경현 역, 노예제와 노예제적 구성체들 (사학지18, 1984), pp.201-253에 번역 게재됨.

161) 황제에게 있어 환관은 붕당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황제의 令을 시행 하는 효과적이어서 황제 통치에 도움을 주는 장점을 가진 존재이다. “中人無外 黨, 精專可信任”(漢書卷93, 石顯傳 , p.3726); “受命則無違迕之患, 使令則有 稱愜之效”(資治通鑑卷263, 昭宗三年臣光曰條, p.8595); 蓋所以將我腹心之命, 達於爪牙之土也([唐]元稹,元稹集卷49, 宋常春等內僕局令 , 北京: 中華書局, p.532).

이로 인해 환관들의 일상적인 활동은 외조 관료들로부터의 직접적 인 제약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이들이 황제의 개인적 侍奉과 관련 된 繁瑣하고 하찮은 직무만을 처리한다면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환관의 활동은 황제의 직접적인 권력 발휘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측면 으로 인해, 궁궐 내 황제 시봉의 직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외조 기관의 관할 직무범위에 抵觸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 와 확대과정에서 환관의 사노적 성격은 효용의 한계를 드러냈다. 환언 하면, 환관이 확장된 직무의 수행을 통해 황제의 직접적인 권력 시행 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의미의 제도적인 보장이 필요했던 것이 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환관이 가지고 있는 관료적 성격이 유의미 해진다.

국가 관료로서의 성격은 국정의 직무를 공식적으로 담당할 수 있다 는 논리적 근거를 구성했다. 관료체제 하에서 황제가 부여한 직무를 황제의 대리정치를 담당하는 관료가 수행하게 된다는 데에 무리가 없 기 때문이다. 다만, 직무의 내용이 기존의 제도규정과 어떠한 차이를 보이고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는 문제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당대 환관이 가지고 있는 관료적 성격은 궁궐의 伶官163) 등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며 환관의 활동을 확대, 유지시키는 요건이 되었다. 이 를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당대 외조 관료들의 환관에 대한 비판정도가 漢代와 다소 차이를 보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내 조 환관들과 연합관계164)를 맺어 당쟁의 근거로 삼은 사실165)이 일정 수준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162) 이와 관련해 憲宗의 언설은 황제의 환관에 대한 태도의 일면을 잘 보여준 다. “故假以恩私, 若有違犯, 朕去之輕如一毛耳!”(資治通鑑卷238, 元和六年十 日月條, p.7686).

163) 潘光旦,中國伶人血緣之硏究(上海: 上海書店, 1991), pp.18-21 참조.

164) 894년(乾寧元), 李磎가 환관과 유대관계를 유지한다는 이유로 재상 임명에 탈락되는데 이는 당시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환관과의 긴밀한 연대관계는 여전 히 부도덕 혹은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역으로 실제는 이들의 밀착관계 가 상존했음을 보여준다(舊唐書권20상, 昭宗紀 , p.752).

165) 陳寅恪,唐代政治史述論稿(北京: 三聯書店, 2001), pp.236-320 참조.

그런데 환관이 비록 내시성 조직 및 그와 관련된 관료적 제도의 완 비로 인해 관료적 성격이 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내시성의 직임이 기 본적으로 궁궐 내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황제의 의지에 따른 환관의 활동에 있어 沮礙的인 요소였다. 환관의 활동이 황제 권력의 시행에 적극적으로 이용되는 과정에서 기존 환관제도의 직무 규정 범위를 벗 어나는 직무를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 범위를 넘어서는 활동은 필연적으로 외조 관료들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게 되고, 기존 제도를 고수하려는 움직임을 촉발시킨다. 이러한 문제상황의 해소 여 부는 황제의 직접적 권력행사의 可否를 결정짓는 관건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혁신과 변화의 시기로 언급되는166) 당 중후기 국가제 도의 변화양상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 초기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중후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가제도는 각종 원인에 근거한 문제점 을 노출했다.167) 이는 제도의 效用이 감소된 상황으로 표출되었고 이 에 대한 극복 노력으로 使職差遣의 방식이 주요하게 채택, 이용되었 다.168) 당 초기부터 활용되었던 사직차견은 무측천 시기에 이미 상당 한 수량을 이루며 작용했고169) 현종 시기 이후에는 國政의 거의 전분

166) 吳宗國, 唐朝的特性 (中國唐史學會編,中國唐史學會論文集, 西安: 三秦出 版社, 2004), pp.4-7.

167) 사회경제적 발전은 당 국가제도 변화원인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생산력과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한 토지, 조세, 군사 및 관료제도의 변화뿐만 아니라 국 가 경제 중심의 이동 또한 기존제도의 변화를 촉구하는 원인이 되었다. 唐長 孺,魏晋南北朝隋唐史三論(武漢: 武漢大學出版社, 1992), pp.333-369 참조.

168) 기존제도의 효용성 감소는 당 중후기 직무 중심의 제도변화를 초래했고 이 과정에서 사직제도는 그 발전 근거를 획득했다. 孫國棟,唐宋史論叢(香港:

商務印書館, 1980), pp.187-191 참조. 한편, 여기서 使職이라는 제도의 출현과 국가 제도의 최고 운영자인 황제와의 관계를 설정해 분석해볼 필요도 있다. 그 배경으로써 제도의 연구는 반드시 제도 배후의 사상과 논리의 존재를 이해해 야 한다고 지적한 錢穆의 논설을 상기해볼 만하다. 錢穆,中國歷史硏究法(北京: 三聯書店, 2005), p.28.

169) 何如泉, 武則天時期的使職與唐代官制的變化 (中國唐史學會 編,中國唐史 學會論文集, 西安: 三秦出版社, 1989), pp.237-248. 何氏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 르면, 무측천시기에 출현한 사직의 名目이 당 전체 사직의 8.4%에 달한다. 비 록 사직명의 출현이 사직의 설치 상황(빈도)을 완벽하게 대변하는 것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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