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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지 개황 1. 심원마을 개황

제1장

Ⅰ. 대상지 개황 1. 심원마을 개황

1) 유래와 역사 (1) 이름 유래

마을주변이 깊은 산속에 있다 하여 심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구례군지).

그림 3-1. 1918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지도에서의 심원마을

(2) 설촌

심원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심원마을은 아주 오래 전부 터 산 속 독립가옥들이 집단화되면서 형성되었다. 설촌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약 300년 정도로 예상되고 있으며 약 4km 아래쪽에 달궁이라는 옛날 궁터가 있는 곳으로 미루어 보아 짐작컨 대 삼국시대에 설촌된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구례군지).

조선조 고종 때인 1800년대 후반 약초를 캐고 토종 꿀벌을 키우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면

서 형성되었다고 한다(이종길 <지리영봉> 1985). 심원계곡 주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일제 때였으며 한때는 1백 가구로 불어나기도 하였다(최화수 <지리산 365> 1990). 1918년 조 선총독부가 발간한 지도를 보면 당시 심원은 남원 산내에 속하였다.

(3) 마을의 주요역사

일제 강점기에 일제치하를 벗어나기 위해 심원에 모여든 사람들이 72가구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1980년 1월7일 동아일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사람들이 오며 살아 한 때는 100여 가구 에 이르렀으며(이종길 <지리영봉> 1985), 여순사건 전에는 약 80여 호의 많은 사람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였다(구례군지).

한국전쟁에 휩쓸려 이곳은 무인지대로 변하였으며(최화수 <지리산 365> 1990), 한국전쟁 때 소개하였다(1980년 1월7일 동아일보). 1958년부터 다시 사람들이 들어가 살았다고 하였으 며(1980년 1월7일 동아일보), 1958년 박종율씨가 처음으로 정착했다고 하였다(최화수 <지리산 365> 1990). 1988년 마을 앞을 지나는 지방도가 놓인 이후로, 청정 오지를 찾아온 외지인들이 묵고 갈 민박촌을 형성하면서 관광지로 변화하였다.

- 김태곤님 (1940년생) 인터뷰 (2016년 6월 26일 (일) 11시/ 2016년 7월1일 (금) 13시) 정리 심원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동학혁명에 가담하여서 심원으로 피난 왔다고 들었다. 아버지 성 함은 김귀열이다. 동생(김수곤)이 달궁에 살고 있다. 지금 심원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외할아버지는 하동에서 주사를 했다고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심원으로 피난을 왔다. 아 버지는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 말았고, 어머니는 도계암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형제는 3남 3녀 육남매였다. 심원에서 태어난 형제는 2남 1녀이고, 나머지는 달궁에서 태어났다.

막내는 유복자다. 할머니, 외할머니 두 분 다 나를 예뻐하셔서 어디 가실 때 나를 데리고 다녔다. 할 머니 따라 걸어서 구례장에도 가봤다.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세어보니 주막이 성삼재 몬당에서 심원까지 11집, 달궁에서 내령까지 10집이 나 있었다. 함양, 거창, 마천 등에서 전남 구례로 가려면 가장 빠른 길이 성삼재를 넘어가는 길이었 다. 성삼재 아래에서 하루 저녁 자고 가기도 했으니 주막이 500m마다 하나씩 있었던 것 같다.

심원에 살던 집은 고지집 형태에 부엌과 방 2개가 전부였다. 나무 틀 위에 새를 덮고, 새를 돌려 쌓았다. 드나드는 문만 빼꼼히 낸 집이었다. 지붕에 얹은 억새는 땅까지 내려오게 했다. 그렇게 해야 겨울에 덜 춥고 짐승도 피할 수 있다.

밤에는 호롱불을 켰는데 산수유와 비슷한 때 피는 아구사리(생강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접시에 따르고 실을 꽈서 위로 나온 실에 불을 붙여 사용했다. 아구사리 잎은 생으로 먹어도 맛있다. 여자들 은 아구사리 열매기름을 동백기름이나 마찬가지로 머리에다 발랐다.

심원에서는 삼베 짜는 일은 안했다. 달궁 밑에서는 했다. 빨래는 비누가 없으니 짚 태워서 양잿물 내서 두들겨서 했다. 신발은 전부 짚신을 신었다. 슬리퍼도 짚으로 만들었다.

노고단에서 심원으로 날등을 타고 내려오면 첫 번째 집이 우리집이었다.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마

을회의를 하는 날에는 마을일을 보던 외숙이 높은 곳에서 소리치면 가까이 있는 집은 들리고 멀리 있는 집에서 못 들으니까 멀리 있는 집들은 입에서 입으로 회의를 전달했다. 몬당 너머 집이 있고 또 몬당 너머 집 있고 하니 그렇게 연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심원 본동네는 20집이었는데 골골마다 집이 하나씩 있었고 키 크고 건강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 았다. 왜정 때 일본군대 안 가려고 숨어든 사람들이었다. 당시 갑자생(1924년생)들은 일본놈들이 물 어보지도 않고 데려간다고 했다. 갑자생이 건강하고 젊다는 의미이다. 일본놈들을 피해 산으로 들어 온 사람들은 부잣집 아들들이라서 돈이 많았다. 이 사람들의 일을 봐주면 돈이 생겼다.

그들은 주로 대소골, 대파니골, 방아골(노고단밑). 무냉기, 도장골 등에 살았는데 양지쪽이어서 추 위를 피해 살기 좋았던 것 같다. 심원 본동네를 포함해서 거의 80집이 살았고 정령치 밑으로 20집이 살았다.

심원에는 논은 없었지만 다 먹고 살만 했다. 쌀밥을 먹고 살았다. 산에서 약초 캐서 말려서 한약방 에 팔았다. 세동재 넘어 운봉 가서 팔았다. 또 사람들이 심원으로 고로쇠, 거제수 물 마시러 왔다. 고 로쇠 물은 남자에게 좋고, 거제수 물은 여자들에게 좋다고 했다. 여수에서 고기 다발을 이고 구례역 까지 와서 성삼재 넘어서 심원에 들어와서 고기도 팔고 물과 바꿔먹기도 했다. 당시 여수 사람들은 잘 살았다.

당시 지리산에는 곰이 아주 많았다. 멧돼지보다 더 많다고들 했다. 호랑이는 3마리쯤 있었다고 한 다. 지리산 순래봉이란 호랑이는 만복대에서 죽었는데 그 호랑이가 걸어가면 왕억새 위로 등걸이가 보였다고 했다.

우리 할머니가 장에 갔다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호랑이가 집까지 바래다줬다고 한다. 호랑이가 졸래졸래 따라오는데 다른 짐승은 가까이 오면 찬바람이 불면서 소름이 돋는데 호랑이는 훈김이 난 다고 하셨다. 무섭지 않았다고 들었다. 구례장을 다녀오려면 시암재, 성삼재 넘어야하니 당일치기로 다녀오면 밤늦게나 집에 도착했다. 한번은 호랑이가 바래다줘서 고마워서 키우던 개를 던져줘도 안 가져갔다. 그 개가 커서 멧돼지를 잡았다.

덕동 사는 최포수가 반야봉 밑에서 호랑이를 잡아가지고 마을에 가마니로 덮어놓았었다. 아내는 그걸 봤다. 아내 나이 15살 때였다. 호랑이는 안 무서운데 곰이 새끼를 낳아 데리고 다니는 5월에는 사람을 해친다. 곰은 새끼를 데리고 가다가 피할 정도면 모르는데, 못 피할 정도에서 사람과 마주치 면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

전쟁 전에 심원에서 살았던 사람 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나하고 내 동생 김수곤, 광의에 산다는 사 람, 산내에 사는 사람 이렇게 밖에 없다. 산내 사는 사람은 죽었는지도 모른다. 심원 살 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힘들고 그런 기억은 없다.

1948년, 9살 때 심원에서 달궁으로 나왔다. 625가 난다거나 그런 걸 전혀 모르던 상황에서 당장 반 란군을 피해서 나온 거다. 그날 상황은 이렇다. 여수 14연대가 구례 밤티재에서 3연대와 만나기로 했 는데,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 서로가 의견이 달랐다. 한쪽은 좌, 한쪽은 우였다. 서로의 사상이 다르다 보니 교전이 붙어 차 몇 대가 몬당에서 불탔다. 3연대는 단발총 38식 일본놈들이 쓰던 거였고, 14연 대는 제주도를 가기 위해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첫 원조를 받아서 보내준 거라 총도 좋고 군복도 멋있었다. 14연대는 반야봉 쪽으로, 3연대는 노고단 쪽으로 가면서 밤낮 하루를 싸웠다.

2) 이주 전 심원마을1) (1) 위치

행정구역상 위치는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1번지 일원이다. 지역적 위치는 지리산 국립공원의 서부 심원계곡(해발 750~800m)이다. 심원계곡은 달궁계곡, 뱀사골로 이어지며, 주변에 성삼재 휴게소, 정령치 휴게소, 덕동공원마을지구, 달궁마을 등이 있고,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등과는 3km 정도 이격되어 있다.

교통은 인근에 남원, 함양, 구례 등의 주요도시가 위치하며 19번 국도를 통해 861번 지방도 를 따라 성삼재를 거쳐 심원에 이르거나 24번 국도를 통해 60번․737번․729번 지방도를 따라 심원에 이르게 되었다(지방도에서 마을로 진입하는 4m 폭원의 도로가 연결되어 있음).

(2) 자연환경

표고는 최저표고 731.7m, 최고표고 831.2m이며, 건축물은 대부분 해발 755m 지역에 분포하 고 있다. 경사는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가 10∼15′, 건축물이 분포하지 않는 산림지역은 급경 사이다.

수문은 주수계인 심원계곡이 심원마을의 동쪽에서 남북방향으로 맞닿아 흐르며 북측으로는 용소, 남측으로는 안심소가 입지하고 있다. 심원계곡은 함양군 임천강으로 흘러 경호강을 따라 낙동강 지류인 남강을 이룬다. 마을 서북측은 울창한 산림을 이루고 동측은 계곡이 흐르는 매 우 수려한 경관을 지닌 지역으로 지리산국립공원의 명소라고 할 수 있다.

(3) 인문환경

면적은 총 73,941㎡이며 이중 공원마을지구는 51,831㎡, 공원자연환경지구(마을주변경작지 등 포함)는 22,110㎡이다. 인구는 공공시설인 오수처리시설을 제외한 총 20가구에 37명이 거주 1) 현황 중 일부자료는 심원마을 이주 사업 전의 상황을 정리한 것임

심원에서도 총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싸우다가 3연대 군인들이 노고단에서 날등을 타고 심원으로 내려왔다. 새벽이었다. 다들 배고파서 죽는다고 했다. 가을이라 곳곳에 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무를 뽑아서 먹다가 무가 매우니까 달여서 먹었다. 감자는 삶아서 멍석에나 부어놓으면 나눠먹었다. 덜 익 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껍질째 먹어 감자독이 오른 사람도 있었다.

그날 오후 3시쯤 군인들이 심원에서 나가면서 심원사람들도 뒤를 따라서 나왔다. 준비도 못하고, 그대로 있다가 철수한다고 하니까 따라 나섰는데 바로 집에 불을 댔다. 심원은 그렇게 소개됐다. 심 원 본동네. 골짜기, 정령치쪽 거의 100여호가 달궁으로 피난을 갔다.

그후 625가 나고 한동안 심원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 곤란한 사람들, 병자들이 달궁에 들어오면, 달 궁사람들이 심원으로 올려 보내면서 심원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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