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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禁碑令 이후 등장하는 石物인 墓誌의 시대적 특징을 고찰 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이를 위해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분석되었다. 여기서는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여 맺음말로 삼고자 한다.

금비령으로 지상의 기념비를 세우지 못하게 되면서 무덤 안에 사자 에 대한 정보를 담은 묘지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墓碑와 封記 (혹은 畵像石題記, 磚 등) 두 가지 기원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는 묘지 는 死者에 대한 정보를 적어 후대 발생할 陵墓에 변천에 대비하는 역 할도 담당하였지만, 사자의 功德을 찬양하는 銘辭가 적혀 後漢時期 묘 비와 같이 표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각 시대별로 묘지의 구성 요소와 내용상에 차이가 있어, 각 시기의 묘지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선 西晉 묘지의 경우 형태적인 면이나 내용적인 면에서 漢碑와 거의 흡사한 것이 많았다. 이것은 묘지의 성행의 가장 큰 원인이 금비 령임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금비령만으로 서진 묘지 의 성행을 단정할 수 없는 것은 형태적인 면에서 묘비형이 아닌 경우 도 상당히 섞여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서진 묘지의 경우 한비와 이전 무덤에 매립되었던 봉기나 제기 등이 상호 연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서진 묘지의 두드러진 특징은 墓主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기술하는 명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상실하면서 묘지는 서사성을 급속히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가족관계에 대 한 서술이 증가하여 서진 묘지는 가족과 종족을 위한 기념비로 성격이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혼인관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묘지가 집안의 번영과 가격을 드러내며 자손들에게 가문의 가계도를 인지시키 는 도구, 즉 가족법 혹은 종족법의 증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東晉의 묘지는 서진 묘지에 비해 소형비 형태를 띠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또한 재질에서도 돌이 아닌 磚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강남의 토양과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동진의 묘지가 임시 표지 석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보다 쉽게 刻石할 수 있는 전이 선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서진 묘지에 비해 현격하게 글자 수가 줄어 든 것은 무엇보다 명사의 사라짐과 관련 있다. 지난 시기 상당한 분량으 로 기록되었던 사자의 頌德을 담당했던 명사는 동진 묘지에서는 한 건 도 발견되지 않았다. 송덕을 담당한 묘비가 따로 건립되었기 때문이라 는 주장도 있지만 묘비를 세우지 못했던 서진시기에도 명사를 갖지 않 는 묘지가 상당수 제작되었고, 또한 현존하는 동진의 석비가 대부분 공적비라는 점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고찰이 필요하다. 동 진 묘지의 특징은 무엇보다 수평적 가족관계에 대한 서술이 증가한 것 과 本籍이 기술된 것이다. 기존 한비가 선조와 수직적 가족관계에 대 한 서술이 많았던 것과는 달리 일가를 중심으로 하는 門流獨立化가 본 격적으로 진행되는 동진시기의 묘지에는 조부로부터 시작되는 일가의 가족관계의 기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편 북래인들이 강남으로 내 려와 기존 토착인들에 대한 우위를 점하면서 사회적으로 이른바 郡望 이라는 본적지가 강조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며 북래인은 물론이고 토 착 강남인들의 묘지에도 본적이 기술되게 된다.

劉宋의 묘지는 출토 건수의 부족으로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동진시 기와는 달리 表題와 명사가 재등장하게 된다. 특히 명사의 재등장은 묘주에 대한 송덕이 다시 사회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송덕행위의 사회적 필요를 家傳 편찬의 감소와 연

동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다. 유송왕조가 건국한 후 武帝는 동진시기의

爵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왕조에 대한 충성과 공적만을

기준으로 작을 수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대의 先人의 행적을 칭송하

고 그의 작을 계승하는 데 필요했던 가전의 편찬이 감소하게 된다. 요

컨대, 유송시기 들어 종래 문벌사족이 가진 특권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고, 개인의 공적이 중요하게 되면서 가문의 우월함을 표현하는 기록

물보다는 개인의 공적을 드러내는 기록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것이

묘지에 다시 사자의 공덕을 찬양하는 명사를 등장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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