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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宋時期 銘辭의 재등장

劉宋時期 墓誌의 특징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漢碑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碑額, 즉 表題가 재등장하는 것, 墓主의 品行에 대한 기술과 銘辭가 재등장한 것이다. 특히 가장 주목되는 것은 명사의 등장인데, 東晉時期 묘지 중 명사를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반면 유송시기가 되 면 반 수 이상의 묘지에서 명사가 등장한다. 유송시기 묘지의 경우 그 출토 건수가 적어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이러한 현상은 이 시기 들어 본래 墓碑가 담당하였던 묘주에 대한 頌德 부분이 다시 강조되기 시작 한 것으로 파악된다.

묘주의 품행에 대한 기술이 재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요 컨대 동진 묘지에 비해 가족이 아닌 개인에 대한 서술이 증대된 것으 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劉懷民墓誌>의 경우 송덕을 담당하는 韻文 이 먼저 나오고, 그 후 묘주에 대한 정보를 담은 序부분이 나중에 나 와 송덕을 강조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표 3> 劉宋의 墓誌 일람

3 宋故散騎常侍揚州 丹楊秣陵縣謝公墓 誌(219)97)

大明 7년(463)

家系+官歷+本籍+姓+諱+字+享年+卒 日+葬日+葬地+妻의 姓·卒日·葬日·家 系

4 劉懷民墓誌(224) 대명 8

년(464) 碑額+銘辭+諱+本籍+享年+卒日+葬日

+葬地+가족관계+관력 세 로 4 9 · 가로52.5 비 액 과

銘辭 5 宋故散騎常侍護軍

將軍臨灃侯劉使君 墓誌(2101)98)

泰始 6년(470)

家系 및 가족관계+碑額+諱+字+本籍 +品行+官歷+享年+卒日+追增+葬日+

葬地+銘辭

비 액 과 품 행 , 명사 6 宋張氏墓誌(137)99) 元徽 원

년(473) 父의 官歷+父의 姓·諱+母의 姓·諱+

墓主의 諱+享年+葬日+葬地+銘辭 명사 7 明曇憘墓誌(660) 원휘 2

년(474)

碑額+家系 및 가족관계+諱+字+本籍 +品行+官歷+享年+卒日+葬日+葬地+

銘辭+가족관계

세 로 6 5 · 가로48

비 액 과 품 행 , 명사

그렇다면 어떤 사회적 변화가 유송시기 들어 송덕 부분이 강조되는 한비 형태의 묘지를 재등장시켰을까? 이와 관련하여 현재 설득력 있는 주장은 義熙 연간에 다시 반포된 禁碑令을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엄 격한 금비령에 의해 묘비가 세워지지 않으므로 해서 유송 묘지에는 명 사가 재등장하였다는 것이다.

100)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移葬이라는 동진 북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동진 묘지는 어쩔 수 없이 假葬이 라는 현실적 한계가 작용하면서 이후 이장을 위한 표지의 역할을 담당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송이 건국된 후 北伐이 사실상 포기되고 강남에서의 생활이 고정되면서 사실상 이장의 가능성은 사라지게 된 다. 따라서 묘지는 더 이상 임시적인 조처가 아니었으며, 단순한 표지 의 역할만을 담당하지만은 않게 된다. 대표적으로 <宋乞墓誌>에는 묘 주의 貫籍과 관련하여 ‘楊州丹楊建康都鄕中黃里, 領豫州陳郡陽夏縣都鄕 扶樂里’라고 하여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강남의 戶籍과 북쪽의 本籍을 모두 기술하고 있다.

동진시기 묘지를 보면 북래인의 경우 자신들의 관적을 기술할 때는

97) [明]陶宗儀, 知不足斋本 古刻叢鈔 (臺北: 藝文印書館, 1966), pp.29左-30右.

98) 위의 책, pp.51우-55左.

99) 위의 책, pp.30右-30左.

100) 中村圭爾, 앞의 글(2006), pp.400.

예외 없이 모두 북쪽의 본적을 기술하였고, 현재의 거주지와 관련해서 는 별도로 기술하지 않고 葬地로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王企之墓 誌>에는 본적인 ‘琅邪臨浙都鄕南仁里’가 기술되고, 장지로 ‘丹楊建康’이 기록되어 있다. 즉 지금의 거주지는 임시 장지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 러나 유송시기에 들어서면 지금의 거주지가 묘주에게 본적만큼 중요한 정보사항이 된 것이다.

101)

이러한 변화가 더 이상 묘지를 표식만이 아 닌, 임시의 조처만이 아닌 것으로 재규정했을 것이다.

자연히 묘지문의 길이가 늘어났다. 동진의 묘지의 경우 가장 긴 묘 지문은 王建之의 묘지로 275자에 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묘지는 100 자가 안 되는 짧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송의 묘지들은 비교적 짧 다고 하는 <송걸묘지>도 100자를 넘기고 <謝珫墓誌>의 묘지는 681 자, <明曇憘墓誌>는 660자에 달한다. 글자 수에서 서진 묘지만큼 늘어 난 것이다.

102)

즉, 유송의 묘지는 이장이 포기되면서 墓表로서의 역할 에서 더 나아가 개인의 공덕에 대한 表彰이라는 역할을 다시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명사 등장의 하나의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절대적 인 원인이 될 순 없을 것이다. 문제는 개인의 공덕이 새삼스럽게 필요 해진 사회의 변화가 무엇인지에 답하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를 살펴 보자. 이와 관련하여  南齊書  다음의 기사가 주목된다.

101) 이것을 일찍이 모리야 미쯔오가 말한 ‘北人의 南人化’로 설명할 수 있을 것 이다. 모리야 미쯔오는 이주 초기 강렬했던 北土 회복이 동진의 무능으로 사실 상 불가능했고, 그 와중에 강남에서의 僑城人이 吳姓人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등은 북인의 중원으로의 회기 감정을 상실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북인이 남인화의 길을 걸었다고 분석하였다. 守屋美都雄, 南人と北人 (中國古代の家族と國家, 京都: 東洋史硏究會, 1968, pp.428-431;

原載: 東亞論叢 6, 1948). 한편 야노 지카라는 이러한 이유 외에도 이주지에 선조의 墓地가 조성되게 된 것도 북인의 남인화를 촉진하였다고 보았다. 矢野 主稅, 東晉における南北人對立問題 -その社會的考察 (史學雜誌 77-10, 1968), pp.42-52.

102) 구보죠 요시후미에 따르면 서진 경우 소형비의 형태를 띠고 있는 묘지는 긴 것은 1630자에 이르는 것도 있고, 짧아도 152자나 된다. 窪添慶文, 앞의 글, p3 의 <표 1>참조.

담당관원이 상주하여 말하였다. “대명 연간의 고사에는 태자비의 무덤 안에 묘지[石誌]를 넣었다고 합니다. 參議에 따르면 묘지명은 禮典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근래 송 元嘉 연간에 顔延之가 王球의 묘지명을 썼다고 합니다. 寒門들은 墓碑와 哀策이 없기에 묘지명으로써 공덕을 기 린 것입니다. 그 이후로 왕공 이하 모두가 따라 사용하였습니다. 황태자 비의 신분이 중하니 常例와는 달라야 하지만, 이미 애책이 있으므로 묘지 는 불필요합니다.” 그 의견을 따랐다.103)

南齊 武帝 建元 2년(480) 당시 황태자비였던 穆后 裴氏가 사망하자 장례절차를 의논하면서 묘실 안에 묘지를 매립할지의 여부에 대해 논 의가 진행된다. 이 때 논의를 주도했던 王儉은 묘지가 禮典에 규정된 의례가 아니라는 이유로 매립을 반대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공의 경우 생전의 공적을 韻文으로 적은 哀策이라는 문체가 있어 공 덕을 기릴 수 있었음에도 모두 민간에서 사용되었던 묘지가 왕공 이하 에까지 유행했다는 기사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묘지명이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공개되었는가 하는 점이 궁금하다. 매립되어 있는 묘지의 글이 어떤 경로로 대중에 게 알려져 하나의 유행이 되었을까. 이 문제의 해답은  文選  에서 찾 을 수 있을 것 같다.  문선  에는 문체의 하나로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 다.

104)

즉, 당시 묘지의 명사는 石刻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기 보다는 하나의 문학 장르로 정착하여 書物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읽혀 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렇듯 漢末과는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묘지명이 대중에게 공개 되게 되면서 사자에 대한 송덕이 묘지문 안에서 다시 강조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쨌든 명 사의 등장이 가문이 아닌 개인에 대한 송덕 행위가 사회적으로 필요해

103) “有司奏: 大明故事, 太子妃玄宮中有石誌. 參議墓銘不出禮典. 近宋元嘉中, 顔 延作王球石誌. 素族無碑策, 故以紀德. 自爾以來, 王公以下, 咸共遵用. 儲妃之重, 禮殊恆列, 旣有哀策, 謂不須石誌. 從之”(南齊書 卷10, 禮志.下 ), pp.158-159.

104) 현재 文選에 수록되어 있는 哀悼文로는 文誄文, 哀策文, 碑文, 墓誌, 行狀 등이 있다.

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유송시기 들어 개인에 대한 송덕 행위가 사회적 필요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유송시기 묘주의 품행에 대한 기술과 명사, 즉 송덕의 기능 을 담당하는 요소가 재등장한 것과 동진시기를 끝으로 家傳類 저작 편 찬이 감소하는 현상을 연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를 위해 가전의 편찬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후한 말부터 편찬 되기 시작한 가전은 동진시기까지 집중적으로 편찬된다. 이에 대하여 일찍이 미야카와 나오시[宮川尙志]는 “가문의 명예와 榮貴함을 선전하 고 과시하고 선전하기 위해 譜學·家傳類 저작이 많이 찬술되었다”

105)

고 분석하였고, 야노 지카라 역시 ‘가전·世譜의 성행은 문벌 형성의 진 전 과정에 동반된 것’

106)

이라고 하였다. 또한 逯耀東도 구품중정제 하 에서 발전한 문벌·귀족사회가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사회적 풍조를 만 들어냈고, 그것이 위진남북조 史學에 영향을 미쳐 家史·家傳·世錄 등의 別傳을 만들어 냈다고 보았다.

107)

대체로 지금까지의 연구는 가전의 성행을 문벌사회 발전의 결과로 본 것이다.

108)

그런데 문벌사회의 발전과 연동하여 성행하였던 가전이 동진 말을 기점으로 편찬이 감소하게 된다

109)

. 이에 대해 인물평과 가전을 연관

105) 宮川尙志, 六朝時代の史學 (東洋史硏究 5-6, 1940), p.12.

106) 矢野主稅, 앞의 글(1961), p.16.

107) 逯耀東, 魏晉別傳的時代性格 (魏晉史學的思想與社會基礎, 臺北: 東大, 2000), p122.

108) 그러나 최근 家傳의 편찬이 후한 말에 이미 편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가전의 성행을 문벌사회의 발전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견해가 등장하였다.

胡寶國은 후한 말 가전의 편찬과 당시 유행하고 있던 인물평을 연관시켜, 가전 이 大族을 많이 배출한 지역에서 대족을 紐帶로 한 자기주장의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胡寶國, 雜傳與人物品評 (漢唐間史學的發展, 北京: 商務, 2003), p.145.

109) 三國志, 世說新語, 太平御覽, 北堂書鈔, 藝文類聚, 初學記 등에 인용된 가전을 분석한 逯耀東의 분석에 따른다면, 총 211종의 가전은 전국시기 인물의 가전이 1종, 전한시기의 그것이 5종, 후한시기의 것이 12종, 삼국시기의 것이 52종, 서진시기의 것이 46종, 동진시기의 것이 95종이다. 그의 분석에 따 른다면 동진 이후 가전의 편찬은 확인되지 않는다. 逯耀東, 위의 글, pp.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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