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근대적 연애 담론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엘 렌 케이의 연애론은 ① 靈肉一致의 연애관, ② 연애와 결혼의 일치론,
③ 자유이혼론, ④ 우생학적 연애관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주 요 목표는 연애를 통한 평등한 양성관계의 회복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의 개선이라는 여성해방적 측면을 포함하고 있지만, 기존의 사회 질서 를 대신할 新性道德과 인류의 진보를 이끌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연애의 행복이 일종의 사회적 가치를 구 성한다’고 말하며, 연애에 있어서 ‘생식의 신성’, ‘종족 개량’의 책임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즉 연애=결혼=생식으로 연결되는 그녀의 연애관 은 기독교적 성도덕 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가족제도의 확립과 국민 144) 安德根, 戀愛觀 批判, 毛允淑ㆍ羅蕙錫씨의 (三千里 10-5, 1938.5.1),
p.162.
국가의 수립에 필요한 ‘성’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 다고 할 수 있다.
엘렌 케이의 연애관은 문화적ㆍ국가적 경계를 뛰어 넘어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ㆍ중국ㆍ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에 수용된다. 일본 의 지식인은 대부분 영문 번역본을 통해 엘렌 케이의 사상에 접근하였 다. 平塚雷鳥ㆍ本間久雄ㆍ廚川白村은 엘렌 케이의 영육일치의 사랑, 연 애와 결혼의 일치, 자유이혼론에 공감하지만, 平塚雷鳥는 결혼이 아닌 동거의 형태로 연애를 실천함으로써 연애와 제도적 결혼의 분리라는 여성해방적 연애론의 실천자가 된다. 本間久雄ㆍ廚川白村은 남성 중심 적 시각에서 연애를 통한 근대적 일부일처제의 수립을 지향하면서도, 전자는 민족의 개량이라는 우생학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고, 후자는 개 인의 인격적 완성이라는 개인주의적 자아의 실현에 더 큰 가치를 부여 한다. 이 가운데 주로 本間久雄ㆍ廚川白村의 연애 관련 논설이 한국과 중국에 번역되었으며, 平塚雷鳥의 실천적 여성해방을 위한 연애 담론 은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이는 한국과 중국에서 근대적 여성 주체의 등장이 상대적으로 지연되었음을 의미하며, 연애 담론 또한 여성에 대 한 계몽서사로 일관하거나 여성의 자유연애를 통제 혹은 억압하려는 남성중심적 시각으로 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중국의 경우에 일 부 여성들이 연애와 결혼의 분리를 주장하고, 실천적 연애를 통해 여 성해방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들의 계몽 담론 속에서 학습을 통하여 연애를 체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러나 本間久雄ㆍ廚川白村의 연애 담론을 수용하였다 할지라도, 이들의 텍스트에 대한 의도적인 첨삭이 가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즉 이들의 연애 담론 또한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의 지식인이 동일한 텍스트를 번역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상이한 내용을 구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연애를 통한 남녀평등의 실현을 추구하는 한편, 연애와 근대적 가부장제의 결합, 개인의 행복과 민족적 요구 사이의 갈등 없는 조화라는 판타지를 창출하였다. 그러나 5ㆍ4의 연애론이 전
통적 대가족 제도와 유교적 가족 질서라는 父權으로의 이탈을 통해 夫 權 중심의 소가족제도를 창출함에 따라 여성의 가정으로 부터의 해방 이라는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중국 지식인들은 ‘연애가 여성해방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주장했지만, 근대적 夫權중심의 소가족제도 속에서 고정된 남녀의 역할분리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는 중국에서 부 분적으로 연애가 실현되었지만 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변하지 않았 는가라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답변이며, 남성 지식인들의 연애 담론을 분석할 때 그 ‘여성해방’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중국에서는 本間久雄의 우생학적 연애 론이 받아들여져 우생과 연애를 둘러싼 광범위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생식의 신성’과 ‘민족의 개량’을 강조하는 우생학적 연애 담론이 형성되었다. 이는 국민국가를 건설할 개인의 양성이 절실하게 요구되 면서 연애가 우생학적 생식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개인적 행복’과 ‘민족적 요구’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 던 엘렌 케이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 채, 국민혁명의 정치적 요구 속 에 개인의 행복이 희생당하는 국면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즉 연애는 개인의 행복보다는 건강한 국민과 민족의 생산이라는 국가적ㆍ민족적 차원으로 승화되었으며, 남녀간의 성적 결합도 오로지 출산에 한정되 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어갔다. 결국 연애가 우생학에 종속된 국 면은 국가에 의한 개인의 통제라는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확장시켜 주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1910년대를 전후하여 연애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 작했는데, 여기에는 근대 소설과 신문 매체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했 다. 특히 1910년대 중ㆍ후반 일본에서 유학하였던 이광수는 당시 일본 에서 유행하던 연애관의 영향을 받아서 혼인개량에 관한 다수의 글을 잡지에 발표했다. 그의 혼인론에 엿보이는 연애 담론은 일본의 本間久 雄의 우생학적 연애관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이는 그가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早稻田文學 잡지와 本間久雄의 강의를 통해 엘렌 케이를 접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이광수는 정신-육체, 문명-야만,
인간-동물의 이항대립항을 구축하여 연애에 문명과 진화의 가치를 부 여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연애=혼인=생식의 연애 담론을 형성하고, 건강하고 양질의 유전을 가진자의 생식을 권장하여 ‘종족의 번영’을 추 구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그의 연애 담론은 문명개화를 위한 계몽 기 획, 민족의 개량을 통한 근대적 국민국가의 건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9년 3ㆍ1운동 이후 국민국가 건설의 기획이 좌절되 면서 우생ㆍ계몽과 함께 논의되던 연애 담론은 점차 사라진다. 예를 들어 本間久雄의 텍스트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연애의 ‘인류(Race)의 창조’의 의미는 탈각된 채 이것이 ‘인생의 창조’라는 개인주의적 인격 의 완성이라는 가치로 전환되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또한 이후 廚川白村의 近代の戀愛觀의 수용과 함께 낭만적ㆍ예술적 연애지상주 의가 강조되는 가운데, 자유연애는 점차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제 속으 로 편입된다. 당시 일부 신여성들은 정조해방과 시험결혼 등을 주장하 며 여성해방적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하나, 신여성이 근대적 가족제도 를 확립하는데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배제되면서 ‘연애’의 현실 적 실천에 좌절을 맛보게 된다.
(中文提要)
近代韓ㆍ中戀愛話語的形成
-以愛倫凱(Ellen Key)戀愛觀的接受爲中心考察-
兪 蓮 實
本論文以愛倫凱的戀愛自由思想爲中心主要探討了以下三個內容: 第一, 一位瑞典女思想家的思想如何超越歷史、文化的境界傳播到東方的國家?
第二, 韓、中、日知識界形成的戀愛話語的主要內容是什麼、三國之間有 什麼差異, 這與各國所處的社會情況和歷史處境有何關系?第三, 作爲一種 近代新的男女關系的“戀愛”在各國的近代家庭制度的建設和民族國家的成 立當中做出什麼樣的作用?通過這些問題的探討, 本文就闡明了戀愛並不 是在私領域上發生的男女間的特殊感情, 而是作爲一種建構民族國家的社 會改良和新性道德的意識形態. 無論主張什麼男女平權、婦女解放、戀愛 至上、民族改良都充分顯示出中、韓的近代知識分子對家庭、建構民族國 家的文化想象.
韓國和中國的知識分子提倡戀愛基本上是一種道德運動, 希望由個人的 覺悟或民族的改良而建構新的民族國家. 在20世紀20年代戀愛熱的風起雲 湧之際, 由女性解放論述產生的新性道德風潮, 可說是社會改良的一章變 奏. 由批判男女的‘二重道德’標准到建立新性道德, 有青年男女的性的自主 權轉到建構民族國家的主導權, 個人性行爲的最總目的就變成生育優良的 子女以強種強國. 所以愛倫凱所提出的“優生學和戀愛-民族的要求和個人 的要求並非相反正是相成的”戀愛理想並沒有實現. 實際上,個人的幸福和民 族的要求之間經常發生沖突和矛盾, 總是優生戰勝戀愛、國家戰勝個人.